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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를 위한 신학: 설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허호익(대전신대 교수, www.theolgogia.p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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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4.06  16:3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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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교자를 위한 신학: 설교에 대한 신학적 이해

/ 허호익(대전신대 교수, www.theolgogia.pe.kr)

1. 설교의 신학적 정의  

   
 

무엇이든지 중요한 것일수록 정확히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많은 사역자들이 설교를 하면서도 실제로 설교가 무엇인가 물어보면 정확하게 한 마디로 정의 내리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설교는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선포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저 유명한 칼 바르트가 “하나님의 말씀론”에서 정의한 설교의 정의이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이 삼중적 양태로 우리에게 전달된다고 하였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 성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설교를 통해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성서로 돌아가자는 것은 신앙과 행위의 유일한 기준(sola fidei regular)인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하라는 것이다. 지식의 전달이나 도덕적 교훈이나 권면과는 달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고 증언하고 선포하는 것을 말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라, 세상의 빛이 되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세상의 빛이다”고 선언하는 것이다.  

2. 성서 본문의 두 가지 의미  

설교는 성경의 본문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설교는 예화나 간증이나 시사 해설이나 도덕적 훈계나 교회 소식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이런 것들이 본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효과적으로 선포하기 위해 필요한 양념은 되지만 그것이 주가 된다면 이는 설교의 본말이 전도되고 만다. 설교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경 본문이 말하는 바를 선포하는 데 충실하여야 한다. 말씀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본문의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결국 해석상의 문제로 귀결된다. 따라서 모든 설교는 성서해석에서 출발한다. 성서해석은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성서의 본문 말씀이 기록될 당시 무엇을 의미했으며(What it meant?) 그리고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는 무엇을 의미하는가(What it means?)하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이 두 의미를 밝혀내는 것이 설교 이전에 설교자가 수행하여야 할 성서해석의 구체적인 과업이다.   

전자를 엑시지시스(exegesis)라고 하는데, 성서 본문으로부터(ex) 당시의 본문이 의미하였던 것을 꺼집어 내는 주석이다. 후자를 에이스지시스(eisgesis)라고 하는 데, 성서본문이 오늘날 우리에게 뜻하는 의미를 부여(eis)하는 강해이다. 따라서 이 두 과제 주석과 강해의 종합을 주해라고 할 수 있다. 전자만은 강조하면 설교가 주석적 지식을 전달하는 무미건조하고 공허한 것이 되고, 후자만을 강조하면 설교가 이현령 비현령식의 맹목적인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양자의 조화가 중요한 것이다.

1) 성서 본문이 당시에는 무엇을 의미했는가? : 많은 설교가들이 “천국은 마음 속에 있으므로, 천국은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설교하는 것을 들었다. 본문에는 바리새인들이 천국이 언제 오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 안에 있다”(눅 17:22)고 하였다. 여기서 전치사 엔토스(emtos) ‘너희 안에(with in)’가 아니라 ‘너희 가운데(among)’의 뜻이다. 이는 천국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여기 너희 가운데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를 ‘너희 마음 속에’라고 번역하면 완악한 율법주의자인 바리새의 마음에 천국이 임한 것이라는 엉뚱한 의미로 해석된다. 이처럼 전후문맥과 본문의 정확의 의미를 따지지 않고 설교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심히 왜곡되어 선포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성서 본문에 대한 주석적 연구를 소홀히 하면 설교가 본문을 곡해하여 ‘이헌령 비헌령’식의 맹목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런 왜곡을 피하기 위해서는 본문에 대한 충실한 주석적 연구가 요청된다. 본문이 당시에 무엇을 의미했는지를 주석하려면 먼저 신구약 원전을 확인하고 여러 번역서와 주석서를 반듯이 참고하여야 할 것이다.

2) 성서 본문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가? : 설교가 본문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본문에 대한 성실한 주석적 연구가 요청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설교는 본문에 대한 성서 주석적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아니다. 성서의 본문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밝히고 이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는 성서 본문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요 성서 본문을 오늘의 삶 속에 적용하는 것이다. “형님들이 나를 팔았으나, 하나님은 나를 먼저 보낸 것"(창 45:5)이라는 본문을 통해 영감어린 설교를 하는 것을 들었다. 인간적으로는 ‘팔려간 것(be sold)’이지만, 신앙의 눈으로는 ‘보냄 받은 것’(be sent)이라는 영적 통찰과 적용이 간단하다면서도 명확하고 감동적이었다. 본문의 두 단어를 대비하여 이러한 영적 의미를 부여하여 현실에 적용하여 선포하는 것이 영감어린 강해 설교인 것이다.

그래서 칼빈은 성령께서 설교자와 청중들을 다 감동하실 때만이 설교가 구속적(救贖的)인 효과를 가진다고 하였다. 객관적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설교 할 때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기록된 말씀과 같은 권위로 임하고 은혜를 베푸는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고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성서본문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묵상과 기도를 통해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한 갈급함이 요청된다. 3. 성서 분문 선택과 인용의 일방성과 극단성 성서로 돌아가자는 종교개혁은 66권의 성서 중 어디로 돌아갈 것인가에 대한 또 다른 논쟁을 일으켰다. 루터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로 돌아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의인론’의 원리로 성서의 전체를 해석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같은 성서 중에서도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한 야고보서와 요한계시록은 지푸라기 같은 책으로 경시하였다. 그러나 성서 전체로 돌아가서 볼 때 성서에는 분명히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롬 3:28)는 말씀과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약 2:7)는 상반된 말씀이 있기 때문에 둘 중에 하나를 취하는 것은 성서 전체로 돌아가 성서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아니라는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심지어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해석한(롬 4:1-3).

반면에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약 2:21)고 주장한다. 따라서 성서 전체로 돌아가려면 로마서와 야고보서를 동동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해야 하며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과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조화롭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루터는 성서 중에서도 바울의 의인론으로 돌아간 반면에 재세례파는 사도행전에 나타난 마가 다락방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재세례파도 유무상통의 사회개혁을 주장한 좌파와 성령의 직적접인 계시를 주장한 우파로 나눠지게 되었다. 한국교회의 설교도 이처럼 좌파와 우파로 갈라져 있는 것이다. 교회사를 통해 볼 때 많은 이단 사설(邪說) 역시 성서로 돌아가지 않아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성서의 일부분을 자의적으로 또는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야기된 경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다.

안식교나 여호와의 증인 같은 교파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여러 중요한 가르침,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강령 같은 것보다도 안식일만 지켜야 한다든지, “피를 먹지 말라” 했으니 수혈을 해서도 안 된다든지, “칼을 쓰면 칼로 망한다” 했으니 병역을 거부해야 한다는 등 자기들의 취향에 맞는 성서본문만 선택하고 이를 문자적으로 준수하여 여러 신앙의 왜곡과 극단으로 흐르게 된 것이다. 실제로 많은 설교자들이 성서로 돌아가긴 하지만, 자신의 신앙의 취향에 따라 성서본문 선택이 편향되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설교가들의 본문 선택 사례와 본문 인용 빈도수를 통계조사 비교해 보면, 본문 선택과 인용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편향되어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이 성서로 돌아가 성서적 설교를 한다고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성서의 절반을 왜곡하는 경우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설교의 위기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말씀의 일방성과 극단화는 신앙의 왜곡과 이단을 부추기기 때문 정말로 심각한 문제이다. 따라서 교회력에 의한 설교가 그 대안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4. 상처를 주는 설교와 변화를 주는 설교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받는다고 한다. 우리 속담에 “동냥은 못 줄망정 쪽박은 깨지 말라”는 말이 있다. 설교자가 설교를 통해 감동과 은혜를 못 줄망정 상처를 주어서는 되겠는가? 설교를 듣고 상처를 받는 것은 설교자의 탓도 있지만 설교를 듣는 신자들의 탓인 경우가  많다. 자기 변명이나 이기적인 동기를 드러내는 설교는 분명히 교인들에게 상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설교자가 사심 없이 말씀을 선포하였는데도, 상처를 받고 “저 설교 나 들으라고 일부러 찌르는 설교”라고 분개하는 신자들도 없지 않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상처 주지는 않는 설교를 하기 위해 애써야 하지만, 설교를 듣는 자도 상처 받지 않도록 미리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의 날선 검과 같아 심령과 골수를 쪼개는 것”이므로 그 말씀을 정곡으로 받으면 “찔림”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찔림”을 통해 회개를 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되지만, 어떤 사람은 그 “찔림”으로 상처를 받는 것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설교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지만, 그렇지 않으면 상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베드로가 설교를 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어찌할꼬” 하여 회개의 역사가 일어났지만, 영생을 얻겠다고 찾아와 예수의 말씀을 들은 부자 청년은 “재산을 팔아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에 상처를 입고 “근심하며 돌아 간” 것이다. 키케로는 모든 웅변가는 가르치고 만족을 주고 설득하기 위해 발언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가르침은 필요에서 오는 문제이고, 만족을 줌은 쾌감의 문제이며 설득함은 승패의 문제이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설교는 지식을 주고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주는 것이라고 하였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달하는 방식도 여러 가지이다. 성경본문의 성서에 대한 지식으로 전달할 수 있고, 도덕적 교훈으로 전달할 수 있고, 그리고 영적인 감동으로 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심령과 골수를 쪼개어 사람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으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설교를 들을 때만 은혜스러운 만족과 쾌감은 주고 삶의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면 참으로 성공한 설교일 수 없다. 한국교회에 은혜가 넘치는 설교는 풍성한 만큼 삶의 변화가 이루어지는 않는 현상이 위기라면 위기인 것이다.       

5. 청중이 원하는 설교와 청중에게 필요한 설교  

설교자가 받는 가장 큰 유혹은 청중의 호응이다. 그래서 청중이 듣고 싶어 하는 설교에 치중하면서, 청중의 아멘을 강요한다. 우리나라 교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설교는 시대마다 조금씩 달랐다. 일제시대와 전쟁직후의 혼란기에는 “예수 믿으면 천당 간다”는 종말론적인 소망과 위로 설교가 많았고, 70년대 후에는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는 구호에 발맞추어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는 기복적인 설교를 선호하였다. 80년대에 이후에는 “하면 된다”는 사고방식에 상응하는 “믿는 자에 능치 못함이 없다”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의 설교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로서 설교자는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으로서 “이 시대의 풍조를 본 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롬 12:2)”하여 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하여야 한다.'
 

허호익 교수의 책소개

   
 

 ▲예수 그리스도 1,2 = 예수는 실존인물인가, 예수는 과연 초자연적인 힘을 발휘한 신의 아들이자 스스로 신이었나, 예수는 동정녀에서 태어났는가 등 예수에 대한 무수한 의문과 논란에 대해 기독교신학자이자 예수교장로회(통합)목사인 허호익 대전신학대 교수가 견해를 제시했다. 저자는 1천쪽이 넘는 책에서 예수에 대한 숱한 논의와 학설을 훑어보면서 인성과 신성을 동시에 갖춘 예수의 모습을 변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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