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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의 화해 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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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27  15:1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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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교회의 화해 선교

/홍성현 목사(갈릴리신학대학원 한국원장) 

서언: 분단된 한반도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화해목회로서의 선교”는 지극히 다급한 과제다. 이 시급한 화해선교를 추진하기 위하여서는 남아공에서 흑백의 화해를 위하여 세워졌던 <진실화해위원회(위원장 투투 주교)>와 같은 <한반도진실화해원회>가 속히 세워져야한다. 이 글은 화해문제를 다룬 세계교회의 공식 문서인 <YOU ARE THE LIGHT OF THE WORLD>( Statements on Mission by the WCC 1980-2005)의 90면에서 126면까지에 실린 글을 참고하여 작성하였다.  

고후 5장 18절: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우리를 자기와 화해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해의 직분을 맡겨주셨습니다.” 기독교 최초의 세계적인 선교사 사도 바울의 위의 선언이 “기독교의 선교가 곧 화해선교”임을 확인해준다.

선교와 화해의 연결고리가 깊이 있게 논의되기는 San Antonio에서의 세계 선교대회(1989)에서 시작되었고, 그후에 1991년 Canberra 총회에서 깊게 논구되었다. 그 이후 화해 선교는 선교학에서는 물론이고, 교회의 에큐메니칼 운동에서와 일반 정치윤리학에도 그 중요성이 인식되었다.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가 <폭력극복 10년>을 향한 결의를 다짐함에서 세계교회의 화해와 평화 추구 운동은 세계교회협의회의 핵심 주제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2001년에 세계선교와 전도위원회는 2005년의 세계선교 대회의 주제로 화해와 치유를 주제로 결정했는데 그 내용들 중에 “화해의 목회로서의 선교” 부분만을 여기에 소개하려고 한다. 

1. 선교와 화해

1) 선교는 시간과 장소에 따라서, 그리고 에큐메니칼운동에 참여한 자들 간에 서로 다르게 이해되었다. 1982년 세계교회협의회는 <선교와 전도에 관한 에큐메니칼 선언>에서 형평성을 지닌 선언을 한 바 있다. 복음의 요청과 그 시대의 요구에 응하여 이상의 선언문에서는 가난한자들의 해방에 관심하는 복음에 강조점을 뒀다. 이것이 세계교회협의회 선교와 전도의 핵심 내용으로 발전되다가 결국엔 화해와 치유가 없이는 진정한 해방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어 화해가 교회 안과 밖의 사람들의 생각을 사로잡았다. 이런 상황 하에서 화해가 기독교신앙의 핵심이라는 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여기서 에큐메니칼이나 복음적인 선교에 화해가 깊이 스며들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하나님의 화해의 사랑이 성서의 주제이고 또한 교회의 삶과 선교의 핵심이 되었다.

2) 오늘의 세계에서 화해가 그토록 중요하게 된 이유는 CWME의 연구 보고서 “오늘날의 선교와 전도의 일치성”(2000)에서 밝힌 것처럼, 세계화로 인한 다양한 각 공동체들의 습관과 관심의 다름과 다양성이 들어남에서 야기되는 갈등들을 해소하는 일이 긴급해졌기 때문이다. 각기 다른 공동체들 간의 종교와 문화의 차이점들에서 오는 다툼과 갈등을 풀어내는 일이 지구상에서 긴급한 일로 들어났기 때문이다. 2001년도 미국의 911사건이 보여준 대로 테러와 전쟁들이 민족들 사이에서 크게 번져가고 있기에 교회의 사명이 화해에 초점이 맞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 엄청난 갈등과 전쟁을 만드는 핵심 이유들, 저 무서운 미움과 저주와 싸움이 어째서 계속 일어나고 있는지를 묻고 그 해결을 위하여서 그들을 다시 하나로 묶어서 건실한 공동체로 지구촌을 세우는 일이야말로 예수의 교회가 이룩해야할 긴급한 과제로 떠 오른 것이다. 그 때문에 <폭력 극복 10년 프로그램>(2001-2010)도 제정했었던 것이다. 평화와 1정의가 활발하게 지구촌에 되살아나서 이 지구촌이 평화롭게 살게 되는 것이 교회의 선교 목적이기 때문이다.

3) 가진 자들의 세계시장의 경제적 장악이 문제로 떠올랐다. 소수 국가들의 경제력이 세계 시장을 좌지우지 하면서, 특히 아시아의 작은 나라들의 어려움은 넘쳐나고 있다. 크고 부한 나라들은 점점 부강하게 되는 반면에, 작고 가난한 나라들은 점점 가난하게 된다. 무역의 불균형에서 오는 경제의 불균형으로 인한 작고 약한 나라에서의 경제적 빈곤이 문제다. 여기에서 돈 많은 나라들과 가난한 나라들 간의 화해가 요청되고 있다. 더 이상 힘 있는 나라가 약한 나라들을 착취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 세계교회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도 있기에 화해선교는 긴급을 요하고 있다. “희년빚청산운동”도 선교영역의 중요 대목으로 떠올랐다. 부자들의 참회가 필요한 동시에 가난한 자들에게 정의가 요청되고 있다.

4) 우주적인 커뮤니케이션은 일부에게는 이익을 주지만 다른 소외된 사람들에게는 저주를 준다. 대화와 협력이 증대됨에서 상호 이익이 돌아가도록 해야 하는데, 그 반대가 되는 경우들이 많다. 세계화로 인하여 이산가족이 양산되고, 소외현상이 극심해진다. 소속감이 살아지면서 외롭고 고독한 개인들이 부지기수로 늘어난다. 소속감이 없어지고 공동체가 상실된다. 여기에서 화해와 치유의 사역이 필요하다.

5) 고후 13장 11절-13절에 보면 하나님과 화목하고 그리고 서로들 간에 화목하게 살라는 권면이 전해진다. 성령 안에서 서로 간에 간격이 없어지고, 서로 소통하고 서로 기뻐하는 삶이 전개됨을 알려준다. 그것이 기독교 공동체다. 사도 바울의 축도가 거기에 있다. 성령 즉 하나님의 영은 화해를 주도한다. 공동체를 평안케 한다. 모두가 주안에서 하나가 된다.

6)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운동이 없는 교회는 말라지고 싸움질하고 타락한다. 진정한 화해가 없이, 서로 갈라진 한국 교회의 현실이 성령이 떠난 증거들이다. 화해가 없는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가 될 수 없다. 장로교 교단들이 수십 개 생기고, 총회들이 수 십 개 생겨서, 서로 총회장 감투를 쓰려고 싸우고 있는 현상은 성령이 떠난 집단임을 증명한다. 화해가 없이 서로 싸우는 교회는 성령이 떠난 교회이다. 진정한 화해의 복음이 없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7) 성령이 떠난 교회들이 갈라진다. 기독론은 성령론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성령의 교회이고 거기에는 화해가 있고 하나 됨을 이룬다.

8) 눅 4: 18:“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눈먼 사람들에게 다시 보게 함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는 해방하고 자유케 하는 일을 하셨다. 지금도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면 예수가 하는 일을 우리도 한다. 성령이 오시면 다문화 안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다문화간의 충돌과 싸움을 피하게 하여 서로 화해하도록 역사하신다. 성령은 우리 주변의 다양한 문화와 대화하고 화해하도록 역사하는 영이다. 

2. 삼위일체 하나님이 화해의 내용이고 발의자다.

성서적, 신학적, 예배학적인 전망들 

9) 화해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창조와 구속의 성취를 가져온 삼위 하나님의 작업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안에 모든 충만을 머물게 하시기를 기뻐하시고, 그리스도의 피로 평화를 이루셔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다 기쁘게 자기와 화해시키셨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신성이 몸이 되어서 충만하게 머물러 있습니다(골1:19-20, 2:9).“ 예수의 인격 안에서 신적인 것과인간적인 것이 화해되어 영원히 연결되어 있다. 전혀 상반된 것들이 화해되어 하나를 이루는 곳이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그리고 “셋이 하나”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성이 우리 믿음의 공동체의 핵심내용인 화해의 본질이다. 고로 화해가 없는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될 수 없다. 화해가 없는 나라나 가정은 그리스도가 떠난 곳이다. 기독교적인 것에는 반드시 화해가 있다.

10) 성경 안에는 화해 이야기들로 가득 하다. 구약에서 보면 형제들과 가족들과 사람들 간에 갈등과 충돌과 싸움 이야기들이 많다. 어떤 경우에는 화해로 끝난 일도 있지만 어떤 것은 해결이 안 된 것들도 있다. 성경은 폭력과 갈등의 현실을 한탄하면서 화해의 필요성과 그 힘을 강조한다. 야곱과 에서(창25: 19-33:20) 그리고 요셉과 그 형제들(창37 - 45)의 이야기들이 개인들 간의 혹은 그룹들 간의 충돌의 모습이다. 이 이야기들은 동시에 갈등이나 원수진 것이나 불의 등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참회, 용서, 협상 등을 통하여 노력하는 화해자들의 강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구약에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 간의 갈라짐을 보여주기도 하고 그리고 둘 사이에 갈라짐을 다시 묶는 노력들도 보여준다. 생명과 정의의 하나님께 배역하는 못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의 모습도 있지만, 배반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화해와 자비의 손길도 보인다. 인간의 배반 속에서 하나님의 화해의 손길을 통한 자비의 모습을 본다.

11) 신약에도 비록 “화해”란 용어는 눈에 띄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전반적으로 여기 저기 분포되어있다. 요한복음은 진리와 평화에 특별한 관심을 표한다. 누가복음에는 구원이 예수의 치유사역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다. 사도행전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화해되어 새로운 공동체로 되었음을 보여준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들 간의 하나 됨과 동시에 종과 자유인, 남자와 여자가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을 선포한다(갈3:28).

12) 마태 5:24에 언급된 “화해”는 개인들 간의 화해지만, 사도 바울의 경우는 그 화해 단어를 하나님의 본질적인 요소요 따라서 기독인들의 본질적인 덕으로 썼다. 바울로 인하여 이 단어가 기독교의 본질적인 용어가 되었다. (고후 5:17-20, 롬 5:10-11, 11:15, 고전 7:11 그리고 엡 2:16과 골로새 5:10-11, 11:15, 고후 7:11 그리고 엡 2:16, 골 1:20-22). 바울이 이 화해를 강력하게 주장했기에 기독교의 중요한 개념으로 되었다. 심지어 하나님은 이 단어를 하나님의 속성의 표현으로 쓰기까지 했다. 복음이 기쁜 소식인 것은 바로 화해이기 때문이다. 이방인들과 유대인들 간의 화해, 율법자와 비율법자와의 화해, 남자와 여자,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 사이의 화해 등등 기독교 핵심 진리 표현으로 “화해”가 쓰였다.

바울의 화해 개념을 더 좀 자세하게 열거하면

13) 깨어진 공동체의 회복. 깨어지고 부러진 관계들을 복원하는 것.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를 세우는 것이다. ㄱ)깨진 것 다시 회복하는 것 ㄴ)소외를 제거하는 것, ㄷ)미움을 없애는 것, ㄹ)불의 둥등을 치유하는 작업이 화해다. 이렇게 함에서 결국엔 공동체를 다시 세우게 되는 것이다.

14) 깨어진 관계들: ㄱ)하나님과 인간, ㄴ)사람과 사람 ㄷ) 우주의 만물들 간에 관계들이 깨지면 모두가 엉망이 된다. 서로 싸우고 죽이고 하여 모두가 멸망하게 된다. 한 마디로 사람들도 자연들도 “평화”롭게 살도록 예수님이 지상에 오셨다.(롬5:1,11), 화해를 위하여 예수가 오셨다. 지구위의 깨어진 관계들을 화해시키려고 예수가 오셨다. 구원은 바로 이 깨어진 관계의 회복이다.

첫째는 하나님과 인간의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셨고 그리고 인간들 간의 관계를 회복시켜서 사람답게 그리고 보람되게 살도록 하셨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지상의 선교의 핵심이 화해임을 확신했다(엡2:14: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입니다”). 바울의 선교는 화해의 선교다. 바울은 모든 피조물들의 변화(골1:20)를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갈라지고 깨어진 잘못된 관계들이 올바로 잡혀서 화해가 되어서 서로 사랑하면서 재미있게 살도록 만드는 것이 바울의 선교 내용이었다. 고후 5:17절의 사도 바울의 선언 즉 “새로운 피조물”이 된 참 사람은 바로 화해의 사람이다. 사람들 간의 그리고 모든 창조 세계 안에서 깨어진 것들을 하나로 만드는 일 즉 “새 창조”(엡1:10)“의 사역이 바로 바울의 선교의 핵심이었다.

16) 바울에게 화해를 주도케 한 분은 하나님이다.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자기와 화해하게 하신 것입니다(고후5:19).” 하나님이 하신 일을 바울이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서 하는 것이다.

17)인간이 하나님에게서 소외된 것은 불순종 때문이다(롬 3:23, 엡2:1-3). 이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화해의 일을 하여야 한다. 예수가 어린양으로서 대속 물로 바쳐짐에서 인간의 잘못(죄)이 용서받고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다. 이것이 예수의 공로다. 예수가 대신하여 속죄하셨으니 우리가 화해되어 산다(요1:29, 벧전 2:24, 롬5:8, 갈1:4). 예수의 십자가로 우리 인간들이 용서받고, 하나님과 교제되고, 그리고 영원한 천국으로 인도받는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켜서 영생을 얻게 하신다. 이제는 예수를 따르는 자들에게 이 화해의 사역이 주어졌다. 우리도 십자가를 질 각오를 하고 화해운동에 나서야 한다.

18) 기독교 화해복음은 그래서 예수의 성육신, 고통,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과 직결된다. 나사렛 예수의 고난의 여정은 온 인류의 고난을 대신한 아픔이다. 하나님과의 깊은 결합이면서 동시에 죄악 속에 아파하는 인간, 지구와의 화해이다. 그로인하여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벧전2:24).

19)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인간의 아픔과, 인간의 보다 나은 삶에 참여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것인데 그것만 가지고는 아니 된다. 예수의 죽음이 부활을 통하여 참 의미를 갖는다. 십자가와 부활은 연결되었다. 과거 사건이 아니고 오늘의 삶속에서 반복되는 사건이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함에서 첫 열매가 되었다(고전15:20). 이것은 현재의 삶속에서의 희망이지만 동시에 미래의 종말론적 희망이다.

20) 성령이 우리들에게 역사하여 이 세상 안에서 화해의 역을 담당하게 하신다. 롬12: 9-21의 바울의 선언에서 보듯이 성령을 받은 자는 세상을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바울 자신이 화해의 선교사임을 밝혔다(고후 5:18).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는 것이야 말로 화해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21) 하나님의 화해 역사는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교회에 힘을 주어서 화해운동을 계속하신다(고후 5:18-21). 이 화해의 일은 교인들의 사명이 되었다(엡2:8). 

과 화해

22)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가 바로 화해선교다. 이미 예수를 통하여 그 일을 이루셨고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화해의 사역(고후 3:8)을 계속 하신다. 바로 이 하나님의 선교인 화해의 사역을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맡겼다(고후5:18-19). 

3. 선교의 절대성으로서의 화해

32) 오늘날의 전쟁과 불화의 세계를 돌아볼 때 중요한 것은 화해의 복음 전파다. 예수의 화해복음이 오늘의 선교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33) 먼저 우리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화해를 받아드려야 한다. 그리고 이 세상의 화해와 치유에 나서야 한다. 

34) 화해시킬 사람들과 사회를 고려하여야 한다.

35) 화해란 정의가 있는 평화로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다. 추구하려는 공동의 비전을 앞에 놓아야 한다. 즉 깨어지고 쪼개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사람들을 서로 존경하고 참을성 있게 대하도록 하는 일이다. 공포 없는 상호 교류가 있어야 화해가 가능하다. 서로 참아주고 격려하면서 차이점을 극복해가야 한다. 서로 대화를 함에서 차이점들이 극복된다.

36) 과거의 적개심, 갈등, 그리고 갈라짐을 극복하기 위하여 개인들 간의 대화가 필수다. 희생된 것들, 잘못된 것들, 뒤틀린 것들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일이다. 이렇게 하여 누가 희생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를 밝혀내야한다. 이런 잘못된 관계는 그룹들 간에, 조직들 간에도 존재한다. 그래서 사회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잘 살펴야 한다. 그룹들 간에 혹은 개인들 간에 생긴 잘못들을 확실하고 정확하게 찾아내야 한다. 개인들 간에는 먼저 존엄성을 고려하여야 한다. 

두 번째는 어떻게 하여야 같이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세 번째는 나라의 구조의 변경이 필요한 부분을 찾아내야한다.

37) 화해는 목표이자 과정이다. 개인이건 사회이건 미래의 평화롭고 잘 사는 나라를 향한 비전이 필요하다. 그리고 같이 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다. 또한 사회구조를 어떻게 거기에 알맞게 바꿔야하는지를 연구하는 일이다. 

화해 진행 과정의 역동성

38) 주의를 기울일 것은 화해의 과정을 시작하는 일과 그 일을 계속 유지하는 일이다. 여기에 참여자는 희생자와 잘못을 범한자로 나뉜다. 두 쪽은 쉽게 구별되고 확인된다. 예컨대 성폭력의 경우다. 그러나 갈등이 지연됨에서 희생자가 가해자가 되고 가해자가 희생자가 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경우에 옳은 쪽과 그른 쪽을 갈라내기가 쉽지 않다. 만약 기독교가 희생자편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화해와 회복은 희생자의 회복과 고침과 가해자의 참회와 변화를 모두 다 관심하여야 한다. 이런 일들은 항상 분명하게 결과 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이 되려면 두 쪽 모두에게 변화가 요구된다.

39) 여섯 가지의 절차에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그 절차들은 진실, 기억, 참회, 정의, 용서, 그리고 사랑이다.  과거의 진실을 밝히는 것은 어렵다. 왜냐하면 학대나 극악한 짓은 침묵 속에 가려져있기 때문이다. 회복이 되려면 침묵을 끝내게 하여 과거 범행들이 모두 들어나게 하여야 한다. 감추었던 것이 들어나서 그것들이 사실로 들어나야 한다.

40) 예를 들면 전에 포학한 정권하에서 조직적으로 사실을 왜곡시킨 경우가 있었다. 거짓이 난무했다. 사실이 들어나야 하는데 반대로 거짓이 꾸며졌다. 이런 경우 화해라는 말이 오용된다. 잘못한 자들이 화해를 요구한 경우도 있었다. 희생자들이 저들의 잘못을 잊기를 원했다. 과거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이 처리되기를 원했다. 이런 경우 화해란 말은 무서운 독이 숨은 말이 되어서 절대로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단어다. 또 다른 경우들에서는 잘못한 자들이 급하게 “화해”를 요구함에서 희생자들의 주장들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그들은 이렇게 함에서 기독인들이 급하게 용서할 수 없어서 죄책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지도 모른다. 이런 잘못된 화해 제시는 절대로 받아드리면 안 된다.

41) 국가적인 차원에서 진실과 화해위원회가 설립되어서 과거의 사실들을 찾아내야 한다. 이 진실 찾기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이고 동시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면, 이상에서 말한 진실화해위원회가 최고의 위치에 설치되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2) 기독교적인 진실 이해가 그런 상황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은 진리의 영이다(요14:17). 그리고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가(요14:6) 그의 제자들이 진리의 영에 의하여 거룩하게 되기를 위하여 기도하셨다(요17:17). 서로 싸우고 난 후에 사실을 확정하는 것은 어렵다. 하나님은 진리가 밝혀지기를 원한다. 이것이 예언자 전통이다.

43) 기억은 진실(사실)과 직결되어있다. 어떻게 과거가 기억될 것이고 어떻게 그 진실을 말해야하는가? 정직한 기억이 과거의 진실을 산출한다. 잘못되고 극악한 행동에 대한 정신착란증적 기억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 지금과 다른 미래를 열어주려면 그 병을 먼저 고쳐줘야 한다. 기억을 치료하는 것은 그들에게서 나쁜 독을 빼내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기억이 과거에 머물게 하지 않게 하여야 하고 더 나아가서 지나간 과거의 행위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것이다.

44) 기억들은 단지 과거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자기 정체성의 기초이다. 우리가 과거를 어떻게 기억하는가에 따라서 앞으로 어떻게 살며, 오늘에서 타자와 어떻게 관계를 맺을 것이고 그리고 미래에 대한 비전을 어떻게 갖게 될 것인가를 알게 된다. 하기에 기억은 화해와 치유의 과정에 핵심적인 요소이다.

45) 치유되지 않은 기억들은 화해를 막을 수 있다. 때로 치유가 한 세대 이상을 갈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피해의식이 그들의 기억 속에 깊이 숨어들어가 있어서 거기서 나오는 데는 밖의 도움이 필요하다. 고로 피해자들의 분노를 밖으로 들어내는 공간이 필요하다. 어떤 경우에는 피해자들이 치료받기를 거부하는 경우들도 있다. 화해 작업을 하는 분들은 이런 분들이 스스로 자기네들의 피해의식을 발설하도록 도와야 한다.

46) 억압되었거나 왜곡된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다른 미래를 세우는 데 있어서 종종 중요시된다. 남아공에서의 <진실과 화해위원회>의 결과물들을 출판한 일과 과테말라에서의 과거 사례들을 수집한 예가 그 중요성을 보여준다.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권력을 잡고 있는 가해자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다. 과테말라에서는 제랄디(Gerardi) 주교가 살해당했다. 우리 한반도에서의 화해를 위하여서도 지난날의 아픔의 기억들을 되살려 내야한다. 기독자들은 북에서나 남에서 공산주의자들에게 당한 아픔들을 가급적 정확하게 기억해내서 기록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미 625의 전쟁의 한 복판에서 사상의 차이와 전쟁의 참화 속에서 너무나 가혹하게 고통당하고 아픔을 겪은 세대들이 팔구십을 넘어섰기에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아픔의 기억들을 글로 써서 남겨야한다. 이것이 남과 북의 화해에 매우 필요한 부분이다. 이북에서 남으로 피난오신 분들(목사님들, 장로님들, 권사님들, 집사님들, 일반 평신도들 모두)이 미래의 화해를 위하여 지난날의 아픔의 이야기들을 글로 남겨놔야 한다. 총회나 노회가 이 일을 감당하여서 책으로 출판하여야한다.  한반도 남쪽에 사시던 교인들도 남북의 이념싸움 속에서 당한 이야기들이 있다면 그 내용을 글로 남겨놓아서 남북의 화해운동에 도움을 줘야한다.

47) 기억을 되살려서 오늘을 잘 살게 만들고 내일을 향해 올바른 방향으로 가게 만드는 것은 기독교의 중심적인 실천이요 증언이다. 우리는 성찬식을 통하여 예수께 일어났던 일 즉 그의 배반당함과 고통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기억한다. 성찬을 통하여 하나님이 예수의 삶에서 보여준 것들을 기억해내고 그리고 우리들의 화해의 사역을 통하여 힘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기억한다.

48) 서로 간에 충돌이 있었던 경우들에서는 화해 전에 참회가 선행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잘못들로 인한 미움과 갈등이 있었기에, 잘못을 범한 쪽의 참회가 선행되지 않으면 화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회개와 믿음의 요청이 동반되었다(막1:15). 예수의 회개 요구가 그가 오심에서 세워진 구원의 새로운 시대와 동반되었던 것을 주의하여 볼 필요가 있다. 참된 참회는 위협이나 두려움의 결과일 수 없고, 용서에 근거되어 새롭게 화해가 된 상호 관계의 희망의 실현에서 오는 것이다(행2:38).

49) 정의는 화해하는 일에 있어서 본질이다. 세 가지 종류의 정의가 필요하다. 첫째로 응보 적 정의인데, 그것은 잘못을 저지른 자가 거기에 해당되는 벌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첫째로 잘못을 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런 잘못은 앞으로는 다시 용서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응보 적 정의는 법적으로 세워진 나라의 사명이다. 공회에서 처벌을 하여야하기에 공회 밖의 처벌은 변칙적인 것이어서 피해야한다. 만약 정부 자체가 썩어서 생긴 경우라면 민중들의 비폭력적 항거의 방식으로 응보적인 정의를 실현할 수 있다. 이 경우에는 대단한 개인적인 희생이 따를 것이다. 고로 공권력의 개입이 필요하다.

50) 두 번째가 회복의 정의인데 여기서는 희생자들에게서 빼앗은 것들을 직접적으로나 혹은 상징적으로 회복시켜주는 경우이다. 배상이나 보상의 경우다. 삭개오가 예수를 만나서 실제로 경제적인 손해를 배상함에서 자신의 잘못을 용서받은 내용과 같다(눅19:1-10). 다른 경우, 예컨대 범인이나 희생자가 사망한 경우에는 다른 방식의 화해 성명, 즉 공개적인 추모식 등을 통하여 배상할 수 있다.

51) 끝으로 구조적인 정의가 있는데, 미래에 다시는 그런 불의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회구조를 개혁하는 일이다. 회복적인 정의나 구조적인 정의는 종종 특별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예컨대 경제적인 정의를 얻기 위하여 전 세계적인 무역법들이나 무역의 기구들의 개혁이 필수적이다. 남녀 성과 관련된 정의는 불의를 극복하고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여성들의 특별한 공헌이 요구된다. 성적 차별이나 종족차별을 극복하기 위하여서는 구조적인 개혁이 필수적이다. 최근에는 생태적인 정의의 필요성도 부각되고 있다.

52) 성령은 옛 예언자들을 통하여 불의에 대항하여 말하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기름을 부어서 억눌린 사람들에게 자유를 담대하게 선포하게 하셨다(눅4:18-19). 성령은 오늘날에도 예언과 담대함을 주셔서 기독인들이 회복적인 정의 과정에 돕도록 하셨고 그리고 사회의 개혁을 도와서 구조적인 정의가 회복되도록 돕게 하신다. 인간과 하나님간의 올바른 관계를 약속하는 구약의 성약도 이런 사회 개혁을 위한 노력들을 지지해준다. 이 내용들이 사도 바울이 받은 예루살렘 구제금에서도 나타났는데 교회들 간의 동등성이 서로를 돕도록 하였던 것이다(고후 8:14).

53) 용서는 종종 화해와 고침의 종교적인 영역으로 간주된다. 용서는 과거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의 잘못을 없는 것으로 봐주는 것도 아니다. 용서는 과거를 인정하지만 잘못을 저지른 자와 그 행위에 대하여 다른 관계를 추구하는 것이다. 용서가없이는 과거의 관계 속에 갇히게 되고 미래의 다른 관계를 가질 수 없다.

54) 전체적인 기독교적인 비전을 가지고 인간 공동체와의 화해를 추구함에 있어서는 신앙이 다른 공동체와의 상호교섭이 필요하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른 위대한 종교 전통들의 치유와 전체성에 대한 비전들과 교감할 필요가 있다. 여러 상황들이 우리들의 행동의 통일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공동의 일에 공헌 해야한다. 많은 문화들이 화해와 치유에 있어서 그 나름의 영적 자원 혹은 의식(예식)에서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가능하다면 언제든지 이런 자원들이 화해의 역사에 동원될 필요가 있다.

55) 용서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히 중요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죄를 용서하신 분으로 믿는다(막2:7-12). 예수는 죄 용서를 선언하려고 우리 가운데 오셨다(눅24:47). 그는 하나님의 용서의 은혜를 전파하면서 오늘과 다른 미래를 열어주셨다. 삭개오의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예수의 말씀을 따른 자들은 삶의 변화를 받아서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면서 사회를 변화시켰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그의 제자들에게 성령을 불어넣어주시면서 용서의 사역장으로 그들을 파송했다(요20:21-23).

56) 하나님의 용서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려는 마음과 직결되어 있다(마6:14-15). 그러하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용서하고 잊으라”라고 반드시 말해야 한다. 전혀 일어나지 않았던 것 같이 잘못된 과거를 잊을 수는 없다. 우리가 희생당한 사람에게 이렇게 말하면 그들을 다시 초라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그러나 다른 방식으로 기억할 수 있다. 그 다른 방식이란 과거와는 다른 관계를 잘못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우리들이 그리스도인들인 것이다.

57) 사랑(아가페)이란 기독교의 가장 특징적인 언어다. 셋이 하나 라는 삼위제 하나님은 서로 다른 인격들이 온전한 하나를 이룬, 모든 것을 다 품는 최상의 사랑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요3:16, 요일 4:7-21) 자신의 속성을 사랑으로 나타내셨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고 세례를 통하여 다시 거듭났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셨다”(롬5:5,갈5:22). 하기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마5:44)은 실행하기에 불가능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그가 이미 우리들에게 주시지 않은 것은 절대로 요구하지 않는다. 원수들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 즉 더 큰 은사(고전 12:31, 13:1-8)로서 우리들을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고 또한 우리의 원형이신 그리스도를 닮게 하고(갈4:19), 그리스도의 마음을 갖도록 하여(고후2:16) 그의 존재와 그의 생각을 쫓게 한다. 사랑은 화해의 모든 과정을 그 진실성의 참된 표식으로 둘러싼다.

58) 진실, 기억, 참회, 정의, 용서 그리고 사랑은 전체적이고 완전하고 참된 화해를 위하여 중요하고 그리고 기본적인 것들이다. 경험이 말하듯이 화해는 언제나 반드시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 나타난 대부분의 화해 이야기들은 완전한 화해를 이룬 이야기들이 아니다. 사라와 하갈, 야곱과 에서, 라헬과 레아 등등 잘 알려진 화해 이야기들이 정말로 화해가 이뤄졌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품게 한다. 방탕한 아들의 비유도 형제간에 화해가 이뤄졌는지에 관해서는 말이 없다. 둘 사이의 극심한 충돌이 있는 경우에는 양자 간의 완전한 화해나 받아줌이 유보되었을 것이다. 이 말은 진정한 화해가 불가능하다는 말이 아니고 오랫동안 상처받고 의심하고 화가 났던 것들을 치유하기 위하여서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59) 다른 면으로 보면 충돌을 야기한 범인은 충돌 이후에도 결코 뉘우치거나 참회를 하지 않을 수 있다. 남아공의 이야기들이나 다른 나라들의 경우들이 이를 증명해준다. 이런 경우에 희생자는 저항의 한 형식인 억압의 방법에서 벗어나서 그 현실을 다루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그때 희생자는 범인이 참회도 않고 용서도 빌지 않을지라도 용서를 베풀어 줄 수 있다고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희생자는 그 상황을 잘 견뎌내야 한다. 화를 내거나 치를 떨면 자신과 개인이나 공동체의 성장에 유해하다. 다른 경우들도 있는데 범인이 진정으로 용서를 구하지만 그것을 얻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경우에는 그 범인의 죄책을 자신이 용서하는 길도 있다. 희생자가 억압의 구조 안에서 억류된 공범이 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범법자나 희생자의 경험들이 화해의 역학 속에서 제대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60)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이고 또는 개인적인 측면에서 볼 때, 화해와 치유는 인간 존재의 양면성과 깨어짐 안에서 추구하여야 할 목표들이다. 이 목표들은 원래적인 샬롬, 즉 모두가 고침을 받아서 종말론적인 회복의 성서적 비전에 의하여 영감을 받아 온전하여 져서 하나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하나님 나라의 약속된 마지막 실현에서 이뤄지는 것이다. 지금의 인간의 역사 안에서는 화해와 치유, 혹은 정의, 평화 그리고 피조물의 생명 보전을 희망하고 있다. 모두가 화해되고 치유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전체를 포함하고 있기에 우리들의 공헌은 우리의 비전만큼 한정적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하나님의 화해 역사에 단결된 싸인을 보내도록 부름 받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함에서 희망을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실로 우리는 지구 안에서 화해와 고침을 추구하기 위하여 계속하여 인간의 삶과 사회와 창조 세계 안에서의 화해를 생각하면서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밀고 당기는 일을 해야 한다. 이 일은 실로 길고 고된 투쟁으로서 “모든 것을 덮어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고전 13:7) 사랑의 정신이 아니면 안 된다. 이런 과정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동시에 모든 피조물 즉 우주 안에서 성령의 화해하시고 고치시는 역사에 참여하는 것이다. 

4. 교회의 화해선교

61) 성령이 교회를 탈바꿈시켜서 선교하도록 힘을 주었다: “성령이 교인들을 살아있고 용기 있는 전도자로 변화시켰다”(행1:8). 고로 선교는 교회의 선택이 아니고 필수다. 선교는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중심에 있다. 이것은 선택이 아니다. 실존적인 부름이고 사명이다. 선교란 교회와 성도들 모두의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62) 성령의 능력 안에서의 교회의 선교는 깨어진 것들 안에서 화해시키고 고치는 일을 한다. 화해는 하나님의 선교의 중요한 핵심이다. 우리는 마지막 시대에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화해되어 샬롬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기대한다. 이 세상 안에서의 화해사역은 우리 인류 모두가 평화롭게 자유를 누리면서 살기 위함이다. 인간과 다른 모든 자연의 질서들이 조화롭게 함께 살면서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교회의 가장 긴급한 사명은 모두가 평화롭게 함께 사는 세계를 만들어가는 일이다.

깨어진 관계 안에서의 화해

63) 우선은 하나님과 사람간의 갈라짐의 회복이다. 화해의 복음은 첫째로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과 화해하는 것이고, 그리고 사람들 상호간의 화해이고 그런 후에 피조세계와  화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되었다(롬5:11).” 우리는 이 화해를 모든 사람들 사이로 그리고 모든 피조물 가운데로 연장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64) 오늘날의 깨어짐의 중심에는 하나님의 질서, 인간들과 모든 창조물들 간에 맺어진 관계들이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자연과 비 자연을 사람중심으로 갈라놓아서 자연을 지배하고 파괴하여 자연의 생명과 존엄이 파괴되었다. 자연의 생명과 보존을 우습게 여겨서 생태계의 위기를 가져왔다.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다 자기와 화해시키신(골1:20) 것들을 사람들이 파괴시켰다. 이제는 우리 기독인들이 갈라진 것들을 다시 화해시켜서 진정한 생명이 움터나게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오늘의 생명과 화해선교다.  

제안

현재 남북으로 갈라진 한반도의 우리 민족의 화해를 위하여 남한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세계교회가 제시한 화해의 복음을 실천에 옮기기 위하여  

1) 남북화해운동을 위한 초교파적 <기독교 남북화해기구>를 설립하자.
2) 남북화해기구를 정부차원에서와 민간차원에서 창설하도록 요청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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