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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철의 새민족 강단새 사람으로 새 민족으로(오순절 후 여덟 번째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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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8.25  18:2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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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사람으로 새 민족으로

삼하 7:1-14a; 엡 2:11-22; 막 6:30-34, 53-56

김영철 목사(새 민족교회)

우리가 가장 곤혹스럽고 당황할 때가 언제입니까? 삶에 있어서 가장 곤혹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믿는 우리들은 어떤 일이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도 기뻐하실 일이고, 나에게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가장 힘을 얻고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그러한 일을 추진하다가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요사이 유행하는 말로 맨붕(맨탈붕괴)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어, 뭐가 잘못 된 것이지? 생각해 보아도 참 그 이유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도 오늘 구약성서의 다윗이 그러한 상태에 있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사방의 다윗의 원수들이 잠잠해지자 이제 다윗은 하나님의 축복에 응답할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신앙이란 억울함과 슬픔과 답답함으로 보냈던 시절에만 하나님을 알아본 것이 아니라 왕궁에서도 하나님을 알아봅니다. 왕궁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주신 은혜를 어떻게 갚을까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그가 내린 결론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것이었습니다. 기뻐 춤을 추며 모신 언약궤를 둘 수 있고, 마음껏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하며 성전을 짓기를 소망하여 선지자이자 맨토인 나단을 불러 자문을 구합니다.

물론 나단도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하나님께서 나단을 통해 주신 말씀은 다윗의 생각과 기대와는 전혀 딴밖이었습니다. 누구라도 하나님도 성전건축을 기뻐하시리라고 예상했을 터인데 사실은 그렇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참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서는 그래도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위하여 집을 세우겠느냐? 그럴 필요 없다.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고 있다. 내가 여기에 형성하고 있는 왕궁은 네가 나를 위하여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를 통해서 내가 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여기에 건축하고 있는 것이지 네가 아니다. 네가 진정으로 세울 것은 나의 주권, 즉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의 주권을 세우는 것이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한 도전을 던져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이 무엇인가? 교회란 무엇인가? 참된 신앙적 삶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을 동시에 던져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예베소서의 본문에서 바울이 참된 교회에 대해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베소 본문은 ‘너희’ ‘우리’ 그리고 ‘너희’라는 인칭의 변화를 통해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너희’ 부분(11-13절)에서는 “그때에-이제는”이라는 선명한 구조를 통하여 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으로 구성된 수신자들의 믿음 이전과 이후의 사오항이 유대인 관점에서 서술되고 있습니다. 이어서 중간의 ‘우리’부분(14-18절)에서는 그리스도의 화해사역이 어떻게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들과의 관계를 화목하게 하였는지 설명합니다. 마지막으로 두 번재 ‘너희’부분(19-22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 형성된 교회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성전의 이미지로 묘사합니다.

성전보다는 하나님의 주권을 세우라는 신앙적 명령은 오늘 우리에게 그대로 적용한다면, 교회들은 건물을 짓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지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로 세워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들이 예수의 신앙을, 십자가의 신앙을 세우지 않고 교회를 세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잘못된 예수신앙 즉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신앙”을 말하고만 있지 정작 “예수의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못합니다. 욥기에서 보면 욥과 그의 친구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곳에 진정한 신학자는 욥 뿐이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친구들은 “하나님에 관해서” 말했지만 욥만이 직접 “하나님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신앙을 회복해애 합니다. 십자가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죄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졌던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은혜를 받은 것은 우리의 무수한 노력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냥 선물입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또한 무슨 일을 하더라도 많은 노력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이러한 은혜와 선물로서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이해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절대로 이해를 못합니다. 이것은 당시에 국제적 도시였던 에베소의 교인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도 세계의 불가사의로 남아있는 거대한 아르테미스신전이 있는 당시 지중해 연안의 큰 도시였던 이곳에는 돈과 권력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들은 “하나님 없이” 살았고 살 수 있었습니다.

마침 이번 주 올림픽이 열리는 런던과 같은 대도시에서 각자의 노력으로 금메달을 따는 경쟁처럼 말입니다. 그러니 그리스도 없이 약속의 언약에서 제외된 낯선 이들로서, 세상에서 경쟁에 시달리면서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없이 우리의 영혼에 지속적인 평화와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노력으로 경쟁으로 이룰 수 있는 하나님나라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새로운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새 사람’들은 그저 받았기에 그저 줄 수 있고, 마음껏 나눌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진정한 나눔과 섬김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중요한 포인트는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역입니다. 화해란 나와 너, 우리와 너희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참된 신앙은 바로 “서로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신학자들은 이렇게 주장합니다. 구원은 개인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진정한 구원은 바로 ‘사이’에서 일어납니다. 관계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면에서 바울이 강조하는 것이 그리스도가 자신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일은 단지 개개인의 구원만이 아니라, 적대적 관계에 있던 유대인과 이방인 간의 평화이며, 이 평화는 하나님의 평화로 이어집니다.

그러기에 교회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차별을 극복하고 차이를 인정하는 참된 평화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진정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교회 내에 존재하는 모든 차별과 적대감을 부수고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교회는 본질상 모든 차별을 극복한 생명의 공동체요, 샬롬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도 기억해야 할 것은 교회가 샬롬의 공동체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차원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몸인 공동체는 이미 평화의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노력해야 할 것은 본연의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더 나아가 교회공동체를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선언합니다. 우리 공동체가 정말 가족같은 관계에 있는지 한번 돌아보아야 합니다.

지난 금요일 은혜공동체교회를 선출직들과 은혜공동체를 방문하여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이 왜 교회 이름 앞에 공동체라는 말을 붙였는지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들이 주는 해답은 한 사람 한 사람의 고통과 고민을 서로 깊이 나누어 하나되는 역사를 진정으로 이룬다는 것입니다. 피상적인 관계가 아니라 깊은 관계를 형성합니다. 이러한 영적인 일치감은 물질적인 공동체로 자연히 진화합니다. 십일조와 복지헌금 사회헌금으로 바져진 물질을 통하여 유무상통하는 현대적 초대교회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게는 한 가지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울이 오늘 말씀에서 언급하듯이 교회는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함께 연합하여 성장하고 있는 건물과도 같습니다. 그 궁극적인 목표는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는 것”이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시는 처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 같은 것은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고, 공동체의 각 구성원들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하나의 벽돌로서 서로 연합하여 거룩한 목적을 향해 성장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직 완성된 건물은 아니지만, 목표를 향해 계속 성장해야 할 존재입니다. 이러한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는 단지 사랑으로 하나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세상과 소통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과의 소통이 없으면 교회공동체는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할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과의 소통을 강조하는 전통은 우리가 가진 개신교의 종교개혁 전통에 엄연히 살아 있습니다. 지난번 공부한 <21세를 위한 평신도신학>이라는 책에서는 마틴 루터가 기독교신앙의 가장 위험한 형태를 “수도원적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을 보고 저는 참 놀랐습니다.

자신이 수도사였던 그가 수도원적 기도와 명상생활이 중요하지 않다고 얘기한 것은 분명히 아니었을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도 세속화 된 카톨릭교회를 구해 낸 것이 수도원운동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루터가 수도원 신앙을 비판한 요점은 세상과 소통을 거부하고 자신 혼자만의 성결과 영성을 추구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도리어 비기독교적 반기독교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세상과 소통하면 살아가야 합니다. 개인적으로 힘들다면 공동체적으로 새민족으로서 이 일을 감당해 가야 합니다.

은혜공동체는 한 달에 한 번씩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모임을 다양하게 가짐을 보았습니다. 우리가 목요촛불기도회나 교회의 날 또는 정의평화기독인연대모임 참여 등으로 하는 일들을 아예 교회공동체 모두가 함께하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어쨌든 진정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에베소서의 본문은 우리 새민족의 궁극적인 표어와도 같은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에게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에 새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이 무엇일까?” “이 시대에 새민족으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새 사람으로 변화되고, 새 민족으로 역사하려고 한다면 오늘 우리도 다시 한번 새민족신앙으로 새민족공동체를 이루는 역사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수련회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잘 짜여진 프로그램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들이 몸과 마음이 치유받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아가 세상과의 진정한 소통을 이루고 연대성을 회복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새 사람으로 새민족으로 평화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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