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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교회 청년회 출신 오광현의 제주 사랑노인대학 특강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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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24  17:4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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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사카교회 청년회 출신 오광현의 제주 사랑
   
                                     * '한국대판교회' 라는 간판의 오사카교회
일본 오사카 동쪽 JR 모모다니(桃谷駅)과 쯔루하시역(鶴橋) 을 지나면서 수로를 중심으로 나카가와(中川) 이쿠노(生野)라고 불리우는 코리아타운 이라는 조선인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예전엔 수로를 파던 한인들과 일본 하층민인 이카이노(돼지 도축장)일을 하는 이들이 살던 곳이다. 이곳에 大阪長老敎會(오사카교회, 정연원 목사)가 큰 간판을 달고 우뚝 서 있다. 이 교회는 1921년 세워진 재일대한기독교회 관서지방의 모교회다. 당시 일본에 징병과 징용으로 일본에 온 한국인들중 난파방적에 재직중인 한인여공인 김의생과 그의 친구들이 믿음의 돌을 놓은 곳이다.
   
                  * 코리아 타운 조선시장 입구
당시 관서지방(고베, 오사카, 나라, 교토)인근에는 약 4만명의 한인들이 살았다고 전한다. 이들의 기도모임이 알려져 당시 고베중앙신학교에 유학중인 김우현 신학생과 어린 여공들의 기숙사에서 기도모임이 시작해 이듬해 히가시나리구 오바세쵸에 처소를 얻어서 교회를 시작할 때는 오사카동부교회였다. 그후 교단 총회(현 총회장 김종현 목사)가 조직되고 5개의 지방회의 중요한 부분으로 오늘에 이른다(관동,관서, 중부, 서부,서남)

당시 고베의 중앙신학교에는 한인 유학생들이 많이 왔던 곳이다. 고베는 첫 개항지로 선교사들의 근거지였고 이후 선교사들의 묘지가 있다. 당시 유학생인 김이곤, 전필순등과 순회목사들이 순회 목회를 하다가  1970년 김덕성 목사 부임하고 성장을 하다가 1981년 현 교회당을 건축하고 인근의 KCC회관 부지를 매임하는 등 교회와 KCC도 건축을 하는 등 재일동포들의 교육과 인권사업등을 활발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후 김덕성 목사의 자녀들은 모두 오사카 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딸들도 출가하여 교단 여성회의 지도자들이 된다.
   
                          49회(2005년) 교단 총회장을 지낸 정연원 목사
8대 목회자 정연원 목사(18년차)
1992년 김덕성 목사는 은퇴를 하게 되는 데 1949년에 한국서 파송된 첫 선교사라고 부른다. 후임으로는 한국감리교단 파송 노정일 목사(당시 나고야 교회 부목사)가 제 7대 목사로 부임을 한다. 그러나 이내 사임하여 인근에 신오사카교회 개척하여 목회하다가 지금은 은퇴후 본국에 귀환했다. 그리고 2001년 3월 동경중앙교회 담임이던 정연원 목사가 부임하여 현재 목회하고 있으며 2021년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중이다.

정연원 목사는 부산 수안교회 출신으로 부산장신대와 장신대를 졸업하고 동경신학대학으로 유학을 왔다. 학교에서 양애경 양을 만나 결혼도 하고 졸업후 동경중앙교회를 목회하다가 18년전에 오사카교회로 청빙을 받았다. 이후 2005년 재일대한기독교회 창립 100주년을 맞는 중요한 해의 총회장을 지냈다. 정목사와 함께 일본 선교사로 온 김병호 목사는 동기생으로 현재 재일대한기독교회 총간가로 사역중이다.

이번 방문에서 감사한 것은 재일대한기독교회 교토교회에서 목회를 하시다가 미국장로교회로 이명하여 이민 목회를 마치고 은퇴후 미국서 사시다가 오사카로 오신 양형춘 목사 부부를 뵌일이다. 정목사의 장인 어른이기도 하신데 연동교회 파송을 받아 일본에 선교사로 오셔서 교단 총회장도 지내셨다 아들 양상진 목사는 교토남부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현재는 아오모리의 미션스쿨의 교목을 하고 있다. 우리가 돌아오는 날에 친히 나오셔서 일본교의 오래된 우동가게에서 점심을 사주셨다. 

1년후면 교회 창립 100년을 앞둔 오사카교회는 재일대한기독교회와 YMCA등에 많은 인물들을 길러냈고 관서지방내 청년과 목회자들을 배출했다. 여성지도자들로 나왔고 지금 까지 이 지역의 한인들에게 자긍심과 애국심을 고취하는 교회다. 한편 이 교회에 자라 재일대한기독교회 청년연합회 회장을 지낸 오광현 집사(성공회 복지관) 도 부친이 서귀포 출신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후 지역의 성공회복지관에서 근무를 하면서 지역사회운동에 참여한다.
   
                         * 오사카 제주 4.3 위령비 제막식에서 인사하는 오광현 회장
오사카 4.3 유족회 오광현 회장
재일동포 2세인 오광현은 오사카교회서 자랐다. 그리고 제주4·3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우연히 한인 소설가 김석범의 <까마귀의 죽음>을 읽으면서다. 그는 이게 소설이 아니라 실제처럼 느껴져 그래서 제주도 출신인 아버지에게 4.3 에 대하여 묻자 아버지는 놀라면서 “누구한테 4·3 이야기를 들었느냐” 며 호통을 치고 함구하게 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끝내 4·3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 체 세상을 떴는 데 오광현의 부친은 네형제 중 셋째로 4·3 때 일본에 있어서 화를 면피할 수 있었으나 둘째형의 제사를 지낸 것도 부친 사후 1982년 처음으로 부모의 고향 제주도를 방문해서야 알게 됐다. 이러헌 선대의 아픔을 마음에 간직한 청년 오광현의 탐구와 제주사랑은 변치 않았고 마침내 역사의 큰 흐름에 동참하게 된다.

오사카에서 태어나 오사카시립대학 시절부터 학생운동을 했던 오 회장에게 4.3 의 아픔을 간직한 작은 아버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광현아, 한국에서 종교는 무엇을 믿든지 자유다. 하지만 4·3은 자유가 아니야.” 그때만 해도 제주에서는 4·3을 입 밖에 꺼내지 못했던 때였다. 서슬 퍼런 전두환 정권 시절이었다. 오 회장은 “작은아버지의 말에 충격을 받아 4·3을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는 일 말고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고 했다.
   
                           *오사카시립대학 시절의 오광현 
그후 성장한 오광현은 제주 4. 3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애정을 갖고 연구와 활동을 하였다. 1년에도 몇 번씩 제주를 오가며 제주 4.3 유족들에 대한 깊은 사랑을 키워냈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제주4·3으로 돌아가신 모든 분을 ‘희생자’로 생각하고 제사를 지내면서 그동안 감추고 살아왔던 제주도 출신들의 눈물과 아픔을 발굴해 낸다. 유난히 제주도민이 많은 오사카이기에 제주 4.3은 이들을 결속시켰고 마침내 추념의 결실을 맺게 된 것이다.

오사카에 세워진 4.3 위령비
2018년 4월 28일 일본 오사카 텐노지구의  통국사에서는 ‘재일본 제주4·3희생자위령제’가 실시되었다. 이 희생탑은 바로 제주 4.3 영령들과 가족들의 고향을 잊지 못하는 상징이었다. 오광현은 그 탑의 돌들중 규정에 엄격한 절차를 다 통관하여 반출하여 세운 것이다. 이 탑을 위한 모금에 많은 분들이 동참을 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자리를 허락한 통국사의 아량과 관심에 대하여 감사한다. 오광현은 현재 오사카 제주 희생자 유족회 회장이다. 일정 관계로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예전 청년시절부터 관계를 해온 청년 오광현의 집념과 제주 사랑을 기억하고 싶었다.

재일동포 2세인 오광현은 오사카교회 집사이고 어릴 때 친구들이 모두 오사카교회에 있다. 특히 고 김덕성 목사의 딸과는 친구였다. 그의 부인도 재일대한기독교회 요코스카교회 설립자중의 한분의 자녀로 청년운동을 통하여 만났다. 고 김덕성목사의 딸인 김00는 한국에서 있었던 EYC 한일청년협의회에 참석차 왔다가 민주화청년운동 출신 양관수 씨와 연애후 결혼하여 양관수 씨는 오사카대학에 유학하고 교수를 지낸다.

그 외에도 청연연합회 활동을 하던 김성원 장로(KCC 전관장)와 간사 이근수 목사등도 관서청년회의 청년운동 출신들이다. 청년들은 1980년대 한국교회로 유학을 오기도 하여 본국과 교류를 갖었다. 한편 오광현이 본격적으로 4·3운동에 나선 것은 지난 1988년 일본 도쿄에서 제주4·3 40주년 추도식에 참석할 때부터였다고 한다. 그때 그는 오사카에서 혼자 참석하러 갔다고 한다. 그로부터 10년 뒤 그는 제주 출신 재일동포들과 함께 1998년 50주년 위령제를 처음으로 오사카에서 열었다.

그리고 “제주도서 김윤수 심방(무당)을 초청해서 위령제를 지낸다. 당시는 4·3을 몸소 경험한 재일동포 1세 세대들의 감성으로 문화적으로 익숙한 굿이 제격이었다고 한다. 이 분들의 한을 풀어드려야 한다고 생각해서 굿을 하게 됐는 데 많은 어르신들이 위령굿 현장에서 절하고 우는 모습을 지켜봤다.” 고 고백하고 있다, 감춰졌던 슬픔과 한들이 터져나온 것이다. 그런 감격으로 제주 4. 3은 승화되었고 오늘 까지 이어져 오는 것이다.
   
                                                * 오광현 회장 가족(좌로 부터 부인과 3딸)
제주 4·3 전후로 일본으로 건너간 제주도민은 1만여명 이상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당시 여권이나 절차없이 주로 밀항을 하다가 체포된 제주도민만 해도 1만2천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는 가해자와 피해자들이 뒤섞여 있기도 한하다고 한다. 따라서 일본에서 4·3을 언급하는 것은 제주보다 더 조심스러운 일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오사카에 재일본제주4·3유족회가 정식으로 만들어진 것은 지난 2000년 10월이다. 그 뒤 4·3 활동도 다양해졌다. 지난해 11월에는 제주 출신 재일동포와 일본의 지식인들이 뜻을 모아 오사카시 텐노지구 통국사에 재일동포 사회에서는 처음으로 ‘제주4·3희생자 위령비’를 세운 것이다. 오광현은 이 “위령비는 일본에서 4·3 기억의 이정표가 되고, 민단·총련·일본의 화합의 상징이 될 것이라고 했다. 위령비를 통해 조국의 하나됨을 기원하고, 세계에 평화의 메지를 전할 것이다”고 말했다. 이에 지난 2019년 4.3 71 주년에 오사카에서 조문단을 이끌고 제주를 방문하기도 하였다.

오 회장은 “최근 몇 년 사이 4·3을 경험한 재일동포 어르신들이 많이 돌아가셨다”며 일본사회의 4·3 기억의 전승 대책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지난달 30일부터 3일까지 재일동포 3, 4세대와 일본 청년 등 20여명이 제주도를 방문해 4·3 관련 유적지를 찾아 희생자를 추모하고, 4·3의 의미를 되새기는 ‘재일 제주인 후손 4·3평화기행’도 그런 고민에서 나왔다.

재일동포 사회에서는 일본에서의 4·3운동을 남북 화해와 통일 운동 차원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강하다. “4·3 시기 많은 제주인들이 살기 위해 찾아온 오사카는 4·3과 일본의 관계에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오사카에서 4·3의 기억과 전승이 필요한 이유입니다. 제주4·3은 남도에서 발신된 한반도 전체의 화해와 협동의 상징이 돼야 합니다.” 라고 강조했다.
   
 
오사카교회 노인대학 특강
나는  오랜만에 선교사로 있던 오사카를 방문한 지난  5월 21일(화) 오사카교회의 노인대학에서 특강을 했다. 15년이 된 이 노인대학에는 약 100명이 참가를 하는 데 재일동포들의 한인교회지만 지금은 일본인 장로와 스탭들이 있고 노인대학에도 일본인이 50%가 된다고 한다. 재일한국인 교회지만 지역의 노인들을 돌보는 사역에는 차별이 없단 말이다. 동포들이 주체이지만 인종의 국경을 넘어선 화해와 통합의 중요한 장이다.  오랜만에 갔지만 시간이 없어  지인들에게 연락과 인사를 할 시간이 없었음을 알린다. 

사회학에서 100세 이상을 사는 사람들을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라고 한다. 일본에선 ‘센테나리안(Centenarian·100세인)’이라고 부른다. 세계에서 인구 대비 ‘100세인’이 가장 많은 장수국 일본에서 이들의 육체·정신적 건강 상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노력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고 아사히나 닛케이 신문 등이 최근 보도했다. 
   
                          * 오사카교회 노인대학에서 정연원 목사가 조춘익 목사 부부와 함께 소개 
일본의 100세 이상 노인의 수는 7만 여 명에 이른다. 일본에서 100세인의 증가세는 통계를 내기 시작한 1963년엔 153명이더니 25년 후인 1998년 1만 명을 넘어섰다. 2018년에는 6만 9785명이 됐다.(한국은 2018년 기준 100세 이상 인구 1만 8738명) 100세인이 급증하자 2017년 일본 정부는 ‘인생 100년 시대 구상회의’를 꾸렸다. 그러나 장수 자체가 축복은 아니다. 얼마나 건강하게 사회적으로 필요한 존재로 오래사는 가가 관건이다.

장수인은  '성격적 특성으로는 외향적, 개방적인 성격, 성실성 등이 꼽혔다. 호기심이 많아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고, 다양한 사람들과 사귀는 이들이 오래 산다는 것이다. 또 건강에 좋다고 알려진 식습관과 운동을 꾸준히 이어가는 성실성을 지닌 이들이 많았다. 일본에서도 110세 이상까지 사는 ‘수퍼 센테나리안’은 150여 명 정도로 극히 적다.

전문가들은 장수를 위해 무엇보다 ‘신체 활동을 늘리라’고 제안한다. 게이오대와 일본 가나가와(神奈川)현 가와사키(川崎)시가 이 지역 후기 고령자(만 75세 이상)들을 대상으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1시간에 1회 일어나 돌아다니는 등 움직임을 늘릴 것’, ‘지역 이벤트 등 자신이 즐길 수 있는 취미 모임에 참석할 것’ 등이 100세인이 되기 위한 생활습관으로 꼽혔다.

슈카즈/생전 장례식를 통한 자기성찰
2017년 고마쯔의 회사의 '안자키 사토루' 가 니켓이에 광고를 낸다 그히고 당일에 천명이 모여 그의 생전 영상을 보고 고향 도쿠시마의 전통춤을 보여준다, 죽음은 먼것이 아니라 우리삶의 일부이고 맞이할 미래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이를 통하여 자신의 남은 생에 대한 연민과 책임감을 높혀준다. 아런 전통은 에도 시대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일본의 유명한 영화감독인 '고레이다 히로가즈' 의  "만비키 기족" 도 그런 노년의 생을 그린 영화다. 

"메멘토 모리" 도 고대 전쟁승리의 개선행열 뒤에서 노예를 시켜서 불렀다는 구호인데 '오늘 이겼다고 우쭐대지 마라 오늘은 개선장군이지만 너도 한다 언젠가는 죽는다' 는 의미라고 한다.  중세 수도원은 노동과 기도 침묵과 명상이 덕목인데 유일하게 허락된 단어가 바로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였다고 한다.  

꽁태(꼰대)는 프랑스어 백작이라는 의미인데 한국에서 일제하 친일 댓가로 받은 작위을 조롱과 비아냥으로 일본발음으로는 꼰데라고 부른다. 미운 선생이나 뻔뻔스럽고 볼썽사나운 어른들을 지칭한다. 반대어는 어르신이다. 60을 이순이라고 하는 데 남의 말을 듣고 이치를 깨닳고 이해한다는 의미다. 노인 그 자체가 존경대상이고 특권은 아니다.  따라서 노인이 될 수록 그 만큼 성장하고 처신을 잘해야 대접을 받는 다. .

따라서 오래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건강하게 즐겁게 의미있게 장수하는 것이 중요한다. 따라서 일본의 한인교회도 점차 줄고 있는 한인인구로 교회도 급속하게 노령화를 겪고 있다. 따라서 선교적 과제도 변화를 해야 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국적을 초월하여 지역의 과제들을 않고 돌보고 함께하는 목회적 돌봄은 귀한 것이다.
   
       * 한일청년 출신인 허춘중 태국 선교사와 함께한 이근수 목사(KCC(재일한국기독교회관 관장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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