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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나무 교회 설교(이필로 목사)눅 9:51~56 2019.6.30(창립 16주년 기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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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04  13:1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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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수의 결심 Jesus' determination

눅9:51~56 2019.6.30(창립 16주년 기념)

오늘도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 말씀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 번째는 지난 24일 서울 잠실 롯데콘서트홀. 연주를 위해 무대에 걸어 나오는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BFO)’ 단원들의 손엔 한 장의 악보가 쥐어져 있었습니다. 뒤이어 헝가리 출신인 세계적 마에스트로 이반 피셔가 지휘봉과 함께 마이크를 들고 등장했습니다.

BFO paying tribute to the victims of the tragedy on Danube River in Seoul

“우리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왔습니다. 최근 참담한 사고가 있었던 곳입니다. 이 사고로 많은 한국인이 희생됐습니다. 헝가리 국민과 부다페스트 시민들, 단원들과 저는 마음을 다해 유족의 슬픔에 공감하고 작은 위로라도 전하고 싶습니다.”

피셔가 준비한 애도곡은 한국 가곡 ‘기다리는 마음’. 모두 서서 바이올린과 첼로 일부 주자가 연주를 시작했습니다. 나머지 단원들은 피셔의 지휘 아래 직접 노래를 불렀습니다. 단원들에겐 발음조차 어려울 수 있는 한국어 가사로 비교적 정확하게 2절까지 부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간절하게 기다리는 마음을 담은 노래를 진중하게 부르는 이들의 목소리는 전석 매진으로 가득 찬 객석을 먹먹한 감동으로 울렸습니다.https://youtu.be/ZDe3cVmzOXU(약 2분 40초)

요즘 우리는 왜 이렇게 각박해졌을까요? 이웃의 아픔과 고통에 대해 너무나 가혹하리만큼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기쁨을 나누면 두배가 되고 슬픔을 나무면 반이 된다는 속담은 옛날 이야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 살기도 힘든 세상이다” “지인에게 나의 비밀을 털어 놓는 순간 약점이 된다” “기쁨은 나누면 질투가 되고 슬픔은 나누면 약점이 된다” 하면서 한국 사회가 붕괴되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는 때, 부다페스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단원과 이반 피셔가 보여준 사랑, 위로, 그리고 한국인에 대한 존경은 정말 큰 감동과 무엇이 진정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인가를 보여준듯 합니다.

두 번째는 한나 아렌트 라고 하는 분 이야기입니다.

옆의 분이 바로 한나 아렌트라고 하는 분으로 독일 출신의 정치 이론가입니다. 칼 야스퍼스, 하이데거 등의 독일 철학자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받은 분으로 이 분은 이력은 독특하게 유대인으로 히틀러의 최측근 아이히만을 비롯한 전범자들의 변호를 담당한 분이기도 합니다.

평범한 사람이 저지를 수 있는 끔찍한 죄악, 그녀는 그것을 '악의 평범성 the banality evil'이라 부른다. 원인은 '생각의 체력', '생각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종종 정치 철학자로 평가되지만, 아렌트 자신은 항상 철학은 "단독자인 인간"에 관심을 갖는다는 이유로 그러한 호칭을 거절했습니다. 그는 대신에 자신을 정치 이론가로 묘사했는데, 그 이유는 그의 업적이 “‘한 인간’이 아닌 ‘인류’가 지구에 살며 세계에 거주한다.”는 사실에 중심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이히만이 유태인들을 그렇게 많이 죽였던 이유는 단지 한 가지 “나는 시키는대로만 했다” “내가 죽인 것은 인간을 죽인 것이다” “유태인을 죽인 것은 그들이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https://youtu.be/k7GUB_df6l8 5분 59초부터 ~7분25초

아이히만이 인성을 버리고 완전히 포기한 건 가장 인간적인 특성인 생각하는 능력 ! 결국 그는 도덕적인 능력을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유명한 이야기를 하면서 바로 생각의 체력, 생각의 힘이 부족한 것이라고 설파합니다. 생각이란 조용히 자신과의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다“ dialogue between me myself”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의 이런 개념은 21세기 한국에 세 가지 중요한 지적을 합니다. 특별히 아렌트가 중요한 이유는, 그가 정치에 대한 서구의 전통적 생각에 여러 면에서 근본적 반성을 제기하고 새로운 사유의 길을 열었기 때문입니다.

'Thinking' '사색'....많은 범죄자들이 악한 행동을 하게 되는 이유는 그의 본래적인 악함 의 원인이 있기보다는 애매함과 우유부단함에 기인한다고 말했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착함과 진실함과 선함이 있지만 그러나 그들이 이 선함을 좇지 못하고 악한 욕망, 악한 어떤 요구 앞에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거나 또 우유부단함으로 해서 악에 끌려서 악을 거절하지 못하고 어느 사이에 자유를 빼앗기게 되고 악한 사람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앙인 조차도 그렇습니다.

어느 스승이 제자들에게 “급하다고 지름길을 가지 말라.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고 충고해 주었다고 합니다. 역설이지만 돌아가는 길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예수님은 33년의 짧은 인생을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3년의 짧은 공생애를 지냈습니다. 그야말로 금방 지나갈 시간입니다. 그 짧은 시간 동안에도 예수님은 아주 규모 있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시간을 운영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동네를 지나갑니다. 그곳에서 하루 저녁을 유숙하려고 했지만 가는 곳 마다 거부하였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 있었던 오랜 원한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 제자들은 체면도 자존심도 상했을 것입니다. 내심으로는 “우리가 누군데 감히“ 라는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형제가 “불을 내려 이 마을을 쓸어버리자“고 제안했습니다.

아합 때에 엘리야가 불을 내리게 해서 사람들을 죽인 사건을 염두에 둔 발언일 것입니다. 있을 수도 없는 발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크게 꾸짖고 다른 마을로 발길을 옮기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설익은 제자들을 남겨둔 채 이제는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왔습니다. 여물지 않은 그런 제자들을 남겨놓고 떠나셔야 합니다만 그럼에도 예수님은 “다 이루었다” 고 고백하셨습니다. 그 말은 예수님께서 성공적으로 사역을 끝내셨다는 고백입니다. 예수께서 성공적인 사역을 마치기까지 몇 가지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I. “함께 더불어“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시 [순수의 전조前兆](Auguries of Innocence)의 첫 구절입니다.

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 To see a World in a grain of sand,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본다. And a Heaven in a wild flower,
그대 손바닥 안에 무한無限을 쥐고 Hold Infinity in the palm of your hand,
한 순간 속에 영원을 보라. And Eternity in an hour.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우리들은 온 우주가 시간· 공간 안에서상즉相卽·상입相入하는 화엄華嚴의 세계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우리는 한 떨기 들꽃을 통해서 온 우주를 바라보고, 온 우주의 향기를 맡으며, 온 우주의 율동을 느낍니다.

계명대학교 홍승표 교수는 “깨달음의 사회학을 위한 시론(試論)”에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성서 말씀처럼....

믿음의 세계란 낡은 세계관의 틀을 벗겨내고 학문의 자기회복을 이루어내고, 역사 속에서 맡겨진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는, 새 술은 새 부대에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이 근원적 반성과 새로운 세계관에 바탕한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해 '나와 너, 우주만물이 하나임' 우리 모두는 하나...라는 것을 자각한다는 뜻입니다.

지난 수 천 년 간 한국철학이나 동양철학, 유가儒家, 도가道家, 불가佛家를 위시한 동아시아 학學의 목표는 “내가 네가, 작은 모래 속에 세계를 , 한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고 한 순간 안에서 영원을 보는 ”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주님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통합적 사고를 갖고 사는 삶이 바로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신앙하는 삶 속에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 말씀을 깊이 새기고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할수록 나와 너, 그리고 삼라만상 위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다르지 않음을 알아서 사랑하며 살자는 것을 당부하고 계십니다.

오늘 핵심 구절은 주님이 제자들을 충동적이지 말고 생각없는 인생으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 말씀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혼자 일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선지자들과 예언자들과 사사들과 사역자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일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모두 불완전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불완전한 그 인간을 통해서 일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불러 훈련하셨는데 그 제자들도 실수투성이였고 아주 불완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성학에서는 ‘관상’(contemplation)이란 말과 참선(參禪, meditation)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선에 들어가 참여하다’는 의미로서, 자기의 본래면목을 참구하는 깨달음의 수행법을 일반적으로 참선이라고 합니다.

(1)혼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한다는 선정(禪定)의 의미를 지칭한다.
(2) 일상에서의 활발한 지혜를 끌어내 드러낸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3) ‘무엇이 나인가?’와 같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참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zen(선禪) meditation, contemplation 우리 말로 관상이든지 묵상, 명상 혼란스러울지 모르지만 기도, 침묵기도 , 금식기도, 철야기도 모두 궁극적인 하나님의 뜻에 맞춘 것으로 삶을 의미 마음자리[心地]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지난 수요일 예배를 드리며 관상이라는 말에 대해 생각했었습니다. ‘관상’이란 말은 성소(temple)에 함께(con)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되시려고 하나님께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드렸지만 아무것도 잃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가 되셔서 우리 모두를 얻으신 것입니다.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우리의 주님,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신 예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에게 의지하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믿음으로 사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일은..... 부족한 사람들이 모여 함께 더불어 힘과 지혜를 모아 하는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함께 더불어 지혜를 모아 일하는 것을 원하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전도 보낼 때 둘씩 짝 지워 보내셨습니다. 가서 함께 지혜와 힘을 모아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연합에는 놀라운 신비함이 들어있습니다. 신앙생활은 혼자 하는 생활이 아닙니다. 함께 더불어 하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에 내가 함께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창조의 섭리이고 원리입니다. 그래서 연합은 사람만이 아니고 동물들도 식물도 오히려 인간보다 더 잘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게도 협력자가 필요했고 함께 사역할 사람들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혼자 일하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을 불러 훈련하여 그들로 사역하게 하신 것입니다.

II. 준비된 사역

본문은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주시려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기회를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불가불 다른 마을로 가고 있습니다. 가던 길에서 한 젊은이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 젊은이에게 복음의 긴박성을 설명합니다. 그래서 그를 믿게 하고 따르게 해서 제자를 삼으십니다.

57~62에 보시면 주님을 따르고자 했던 이들에게 말씀하시는 구절이 나옵니다.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장사 지내고자 하는 자에게 그러라고 작별하려고 하는 이들에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아름다운 선물] 이라는 책에서 한평생 인도에서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생을 바친 이 수녀 테레사는 말합니다.

그녀는 이 책을 통해 그녀를 닮고자 하고 만나려 하고 캘커타에 와서 어떻게 하든 그녀와 같은 사역의 길을 가려고 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통해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사명(使命mission) 말하자면 나를 만나는 사람이 주님을 만나야 하고...우리의 삶에서 부활의 증거를 찾아야 합니다. 기도 참선, 묵상, 명상 Meditation contemplation 이라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기 위한 것,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참으로 소박한 삶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마더 데레사 수녀는 아름다운 선물 미루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구체적으로 3 가지를 말합니다.

(1). 선교적으로 사는 삶.
선교적으로, 선교사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명을 지니고 사는 것입니다. 부활의 증인으로, 내 얼굴을 보는 사람들이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고, 나와 만나는 사람들이 영생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도록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2). Meditation하는 삶
한 가지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 주님을 사랑하는 거기다가 사랑과 정열을 쏟는 것입니다. 그 외에는 전혀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이게 명상이고 기도입니다.

(3). 보편적으로 사는 삶.
의인이면서도 죄인 속에 사는 것입니다. 선하면서도 악한 사람들 속에 보편적으로 삽니다. 그리스도인이지마는 죄악 세상에 아무 불평 없이 그대로 흡수되어 살아갑니다. 철저한 보편성, 여기는 높고 낮고가 없습니다. 부하건 가난하건 아무상관이 없습니다. 철저한 보편성을 지니고 평범하게 사는 것입니다.

(4). 마지막으로 단순하게 사는 것입니다.
Simplicity. 병이 왜 생기느냐고요? 복잡성한 삶 때문입니다. 단순성, 사랑에 대하여 단순하고 믿음에 대하여 단순하고 생의 목적에 대해서 단순하고 사명감에 대해 철저하게 Simple mind, Simplicity, 집중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생애이며 그것을 닮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지금 살아가는 것이 너무 계획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무계획적으로 무질서 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렇게 살아가다가 어느 날 그 날이 오면 모두 겁나고 두려워서 이게 아닌데 하고 후회하며 종말의 시간을 맞이합니다. 모두 준비가 없고 계획 없이 살아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중입니다. 그런 중에도 예수님은 자신의 죽을 시간 계획을 자신이 계획을 세우고 그 짧은 시간을 아주 효과 있게 계획을 가지고 사용하여 결국 다 이루었다는 고백을 남기게 됩니다.

III. 현명한 가르침

설교자가 옆에 앉아있는 할머니에게 졸고 있는 옆 사람을 좀 깨우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노인이 “잠은 자기가 재워놓고 날보고 깨우라”고 한다고 투덜거렸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치는 방법은 특이했습니다. 가르침 중 하이라이트는 산상수훈입니다. 간단명료하면서도 함축적입니다. 또 복음서를 보면 가르침의 내용이 아주 간단명료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서너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1) 유대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데리고 와서 “이 여인을 돌로 칠까요? 말까요?” 입에 거품 을 물고 모두 손에 돌을 들고 여차하면 죽일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누구든 지 죄 없는 자가 치라”고 했습니다. 그 대답은 누구도 상상 못한 대답이었습니다. 그래 서 사람들 스스로 돌을 놓고 물러갔습니다.

(2)사람들이 세금문제를 들고 나왔습니다. “세금을 바치는 것 옳습니 까? 틀립니까?” 세금을 바치라 하면 유대인들을 모욕하는 것이 되 고 거역하라 하면 로마에 반란을 충동하는 것이 됩니다. 그때 예 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 것은 하나님께”라는 판결을 내리셨습니다. 그 대답은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완벽한 대답이었습니다.

(3) 예수님은 사마리아의 우물가에 앉았습니다. 그때 한 여인이 물을 길으려 왔습니다. “물 좀 달라”고 하자 주었습니다. 그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으리라” 그때 예수님은 “네 남편을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남편이 없다는 그 여인의 말에 “네 말이 맞다, 지금 남편이 다섯이나 되지만 지금 남편도 네 남편이 아니라” 그녀가 목마른 이유를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4) 삭개오는 정에 굶주린 사람이었습니다. 친구가 없고 이웃이 없어 외롭게 살았습니다. 어느 날 동네에 예수님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보고 싶었습니다. 만나고 싶었습니다. 위로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길로 나갔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습니다. 키가 작은 삭개오는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걸어오시던 주님은 삭개오를 올려다보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내려오라, 오늘 밤 네 집에 갈꺼야.” 그 말 한마디에 삭개오의 문제는 순간적으로 완전 해소 되었습니다.

그 짤막한 말 한마디가 삭개오의 모든 굶주림과 피곤한 영혼과 외로움 그리고 갈증을 한꺼번에 풀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삭개오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무에서 내려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떼먹은 것은 4배를 갚겠습니다, 그리고 전 재산의 절반을 이웃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고 회개하였습니다. 그 돈은 수사기관에 발각되어서 1조원을 내 놓겠다는 돈과 차원이 다릅니다. 삭개오는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내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기쁨으로 내 놓은 회개의 열매입니다.

주님의 가르침은 짧지만 폐부를 찌르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신적 권위와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실력을 남용하지 않고 한 단계씩 올라 실현해 나갔습니다.

본문을 보면 야고보 형제가 사마리아 마을에서 영접하지 않는다고 분노하였습니다. 영접하지 않으면 다른 곳으로 가면 될 것을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기를 원하십니까?”하고 제안하였습니다.

그 말은 “이 마을을 불을 내려 태워버리자”는 말입니다. 이제 여러 말보다는 두 가지 이야기로 마무리를 드리고자 합니다.

사람은 힘이 생기면 과용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부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특별한 능력이 없는 것이 축복입니다. 예수님 얼마든지 불을 내려 태워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제자들을 꾸짖으시고 다른 마을로 발길을 옮기셨습니다.

옆의 책은 김관욱 선생이 썼습니다.

가정의학과를 전공한 의사이며 의료 인류학을 전공한 젊은 학자인데 최근에 책을 냈습니다. 2018년 10월이니까 최근입니다.[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서 부제로 “무감각한 사회의 공감인류학”

저자 김관욱은 영국 더럼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후 귀국해 1년 동안 아픔의 현장을 거닐며 목격한 아픔들을 담아냈습니다. 베이비박스에 버려지는 영아들, OECD 국가 중 유일하게 아기들을 해외로 입양보내는 현실, 가혹한 우리의 '정상가족'담론, 장애인들을 보는 비열한 시선,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아픔, 피로와 어깨 결림 등 통증을 강요하기만 하는 우리 사회, 이주노동자들의 고통, 흡연자들의 슬픔 등입니다. 이 모두 개인적 아픔이지만 동시에 사회적인 아픔들입니다.

이 책에서 "미국 인류학자인 세스 홈스는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지 말자고 강조한다. 의미 부여가 오히려 고통을 받아들이고 당연시할 수 있다며 고통이 존재하는 것 자체를 문제시해야 한다고 보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김관욱 선생도 아픔에 대해 "아픔은 증명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과 힘, 도덕과 윤리의 문제이기에 기본적으로 정치의 영역"이라며 "이 책은 그 목격담"이라고 밝힙니다. 여기서 아픔은 단지 질병 고통 만을 지칭하지 않습니다. 가족과 친구가 다정히 건네는 "아프지 말고"라는 말에 무한한 뜻이 포함되어 있듯이 저자의 아픔에는 신체적 정신적 정서적 건강·안녕이 담겨 있고 관심과 배려, 나눔 섬김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관상 침묵 선... 이야기를 드렸지만

관상기도(Contemplation Prayer컴 템플레이션 프레어, 觀想祈禱)에 대한 논문을 읽다가 토마스 머튼(Thomas Merton 1915-1968)의 이야기와 함께 쓰인

'거룩한 무관심'(Holy Apathy)‘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홀리 애퍼티 Apathy 는① 냉담 ② 무관심 ③ 무감각으로 번역됩니다. '침묵하시는 하나님’과는 다른 것입니다. 오히려 거룩하게 살려면 세상의 요란한 풍조에 좀 무관심할 줄 알아야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거룩한 무관심'... 당연한 신앙의 기본 자세이죠.

우리의 마음을 흐트러놓기 쉬운 모든 세상적 풍조로부터 무관심해야한다는 뜻이겠습니다.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기도하려고 하는 때 떠오르는 수많은 생각들입니다. 그것을 흔히 분심(分心)이라고 합니다. 세상에 대한 지나친 관심으로부터 생기는 생각의 흩어짐입니다. 분노하는 분심(憤心)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이 분산되었다는 의미의 분심(分心 Divided Mind)- 입니다. 분심의 반대말은‘잠심(潛心)이라고 합니다. 잠잠해진 마음이라는 것이죠... 잡념(雜念)이 사라진 상태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무관심' 은 분심(Divied Mind)을 떨쳐버리고 잠심으로 더 그리스도의 마음을 담아내어

함께 더불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활 신앙의 삶을 살아내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 당연한 말은 세월이 갈수록 사실은 쉽지 않은 문제가 되어갑니다. 무엇에 대해 '거룩하게 무관심해야하는 지' 판단이 쉽지 않습니다. 죠셉 플레처의 상황 윤리적 다양성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저도 그래서 관심해야할 대상과 무관심해야할 대상이 생각이 깊어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처럼 늘 말씀을 따라 가지만 불 질러 버려할 것 같은 세상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주님의 뜻을 말씀하며 두루 함께 , 더불어 함께 하나님의 사람으로 우리 삶에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때로는 거룩한 무관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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