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남 목사 24일 광주 5.18 묘역으로 - 예장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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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남 목사 24일 광주 5.18 묘역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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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0.23  09:4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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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남 목사 투병 끝에 소천

1970년대 기독학생 청년운동 1세대인 김경남 목사가 지난 22일 소천했다. 올해 초 부터 심형관질환으로 입원하여 투병을 하여 지인들을 안타깝게 했다. 고인의 장례는 인천의료원 장례식장에서 오는 24일(목) 인천에서 발인하여 광주 5.18 국립묘지에 안치할 예정인데 2005년 5.18 유공자가 되었다.

1949년 9월 전남 완도에서 출생하여 광주일고와 1970년 서울 법대을 졸업했다. 재학중 서울대 후진국사회문제연구회(후사연) 회원으로 유신에 저항 운동을 하다 감옥에 간다.
   
           * 2017년 기독청년 동지들과 함께 좌로 부터 신철영, 이상익, 신대균. 송진섭, 김경남, 황인성, 나상기
1974년 한신대로 편입하고 '전국기독교 청년연합회'를 조직하였고 이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활동에서도 활동한다. 이로 인하여 내란음모죄로 징역 12년(비상보통군법회의)을 받았고 학교도 제적당했다.

1982년으로, 한국기독교장로회총회 선교교육원을 마치고 기장에서 목사 안수를 받아 기장 제일교회 부목사로도 시무한다. 이후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 총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사회국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사료관장 및 사업본부장,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등을 역임했다.

독일에 선교사로도 파송되었으며 이후 일본 도쿄자료센터 소장으로 1986년부터 1992년 3월까지 4년 반을 해외에 한국 민주화운동을 전 세계에 알리는 일을 한다. 민주화 이후 2008년 전라북도 무주에 대안학교인 ‘푸른꿈나무고등학교’ 를 설립하여 운영한다.

그러나 2013년 지병인 심혈관질환으로 쓰러졌고 이후 여수에서 "나는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애써주신 국내외 모든 분들에게 이 '보은기(報恩記)'를 바치고 싶다"며 책 <당신들이 계셔서 행복했습니다>를 펴낸다.

또 한국 민중운동에서의 한(恨)의 역학을 담은 책 <열사의 탄생>(마나베 유코 지음, 민속원 펴냄)을 번역했다. 그 외 번역서로 <당신의 손이 아직 따뜻할 때>(에토 준 지음,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가 있다. 그리고 올해 초 지병이 악화되여 인천지역에 입원한후 의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하였다. 고 김목사의 노후에는 일본에서 활동하던 이지영 전도사의 돌봄을 받아왔다.  

다음은 고 김경남 목사가 처음 건강을 잃고 적기 시작한 내용이다(후일 책으로 출판)

나는 2013년 2월 25일 오후 2시경, 자전거를 타기 운동을 하다가 돌산읍 해변 길 위에 쓰러졌다. 아니 쓰러졌다기보다는 주저앉았다. 다행히 긴급 출동한 119 구급차로 병원으로 옮겨져 ‘심혈관 스텐트 삽입시술(施術)’을 받고 구사일생(九死一生)하였다.

1개월간의 응급실과 1개 월 간의 일반병실 등 2개월여의 병상(病床)에서 며칠 동안 발생한 일들을 생각해보니, 내가 살아 있는 것은 그야 말로 여러 우연(偶然)들이 겹쳐 이루어진 기적(奇蹟)이었다. 후일 나의 이 이야기를 들은 나상기 씨는 나와 유사한 경우를 당한 사람들을 위해 잊어버리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라고 했다. 그의 권유(勸誘)에 힘입어 다음과 같이 그때의 일을 기록한다. 조금은 장황(張皇)하다.
   
                *  전남, 광주지역의 민주인사  7순 축하연(나상기 목사 부부와 같이)
 

                     오랜 지인 최자웅 신부(성공회)의 추모 글을 소개한다.

이렇게 햇살 밝은 황금빛 가을 날에, 마음의 벗과 동지이었던, 나와 우리의 김경남 목사가 떠났습니다. 어제 점심을 같이하던 이춘섭 목사로 부터 벗의 부음을 들으면서 마음 한구석에 무엇으로도 달래기 힘든 무엇인가 무너지고 텅비어지는 그 무엇을 느꼈습니다. 아, 지난 겨울에 무주의 허병섭목사님 추도식자리에서 정신은 말짱해도 너무 걸음을 옮기기에도 힘들어하던 벗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아파오면서도, 벗의 강인한 의지와 정신력을 믿고 기대하였는데..세상 한구석이 텅 비어지고 아득해지는 이 허전함과 슬픔 속에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의 벗, 이 땅의 진정한 민중의 목자였던 김경남 목사님의 영혼을 주님께 의탁드리면서 그의 뛰어난 자질과 애석하게 짧은 삶을 깊이 애도하면서, 추념과 추억의 몇 가지를 반추하여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70년대 초반의 격렬하고 어두웠던 시대에서 함께 동지와 벗으로 만났습니다. 나는 정치학도이고 그는 법학도였습니다. 원래는 나는 서울복음교회의 이념서클에서, 그는 서울 제일교회의 대학부에서 활동하였습니다마는 당시 서울시내의 운동권공간이 대학 캠퍼스말고서는 제일교회와 복음교회와 새문안교회 정도여서, 특히 을지로 오장동 제일교회와 종로 오가의 충신동 복음교회의 멤버들은 공간적으로도, 관계로서도 아주 가깝게 만나고 서로 어울리고 함께 하였습니다. 당시에, 서울상대의 이창식 형과, 서울문리대의 지금은 좀 맛이 간듯하지만 당시로서는 짱짱하던 손학규 형과 박종렬 형들이 양 교회운동의 선배급이었고, 복음교회에는 한모임의 최의팔 형의 뒤에 나같은 세대가, 제일교회에는 법대 운동의 김경남과 문리대의 강영원등이 주축이 되어 움직이고 기독교청년운동의 간판으로 운동권의 이념적 꿈틀거림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젊은날은 암울한 박정희 군부독재의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후에는 들불같은 불꽃으로 타올랐지만 70년대 초반은 의식있는 소수의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이 암야의 등불들처럼 시대를 밝히는 상황이었습니다. 신비로운 것은 반민주적 독재에 반항하고 분단이념의 동토를 깨트리고 새로운 사회와 민족을 꿈꾸는 것 자체가 마치 당시로는 달걀로 바위를 깨뜨리는 것처럼 무모한 위험과 고난일 수 있었어도 비록 소수일지라도 깨어 꿈틀거리는 살아있는 젊은이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벗과 동지로 만났습니다.

나는 일찌기 고아출신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던 정치학도였고 벗은 온 집안의 출세와 성공의 기대를 한몸에 짊어진 법대생이었습니다. 특히 벗은 3수끝에 서울법대에 합격하였지만, 너무 아들의 합격을 고대하시던 부친께서 드디어 합격의 기쁜 소식을 접하시며 불행하게도 심장마비로 돌아셨으니 졸지에 장남과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짐을 벗이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도 우리의 벗은 현실적으로 너무도 당연하면서도 쉬운 길인 고시와 출세의 길이 아닌, 민주와 정의를 추구하는 반독재 학생운동에 자신의 청춘과 삶을 던지고 바쳤습니다. 

유난히 정의감이 강한 벗은 그러나 의외로 감성과 정도 풍부한 상남자였습니다. 후진국사회연구회의 멤버로 학생운동의 격랑 속에서 투옥과 험한 날을 보내면서도 학생운동의 또 하나의 현장이던 박형규 목사님의 오장동 제일교회 대학생회장으로, 부회장이던 사학도 여대생에게 향하던 벗의 무구하던 순정과 눈물을 지금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주인공 여대생과 나의 첫사랑이 둘도 없는 절친이기에, 벗과 나, 우리는 동지겸 내밀한 청춘의 격정과 사랑의 고동과 아픔도 누구보다도 같이 나누는 관계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 벗은 비록 법대생이었지만 일찌기 명문 광주일고에서 문학반에서 감성을 틔우던 자질이어서 소위 당시에 누구보다도 이념지향이면서도 시를 쓰며 음악을 좋아하던 체질적인 로맨티스트였던 외로운 나의 내면이나 존재성도 깊이 아끼고 인정하던 벗이었습니다. 

우리는 학생운동의 차원만이 아닌 긴 삶으로서의 실천적 삶을 위하여  신학과 성직의 삶을 결단하며 한국신학대에 학사편입학 하였습니다.

벗과는 둘이 같이서 박형규 목사님 추천장을 들고서 한신에 동기로 입학하였습니다. 원래는 소문에는 문리대 정치과 강영원이 한신에 간다고 하였는데 경기출신의 그는 김우중의 대우로 가서 돈과 세속출세로 승승장구하고 , 막상 몸으로 실천한 사람은 벗이었습니다. 그 날 한신 임마누엘 동산에 더불어 같이 입학했던 우리 동기들이 음악을 하던 김승남 목사와 철학과 출신의 박재순 목사가 함석헌 선생의 길을 오늘도 걷고 있음도 장한 일들입니다. 

벗과 내가 우리를 기대하며 잘 보신 안병무 박사님의 배려로 향린교회 정학금도 고맙게 같이 받게되었는데, 입학하지 마자 4월에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고 벗은 주동급으로 체포, 수감되고야 말았지요. 이런 상황 속에서 벗의 어머님께 미안하여 당시 천호동 댁에 맘먹고 가 뵈었을 때, 어머님께서 크게 화를 내시며 우리를 쫒아내시던 그 아픈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가던 형편이셨습니다. 나도 한신 소요사태의 배후로 지목을 받아 후배와 함께 이창식형의 수락산 부근 동네에서 피신을 하다가 진수 후배는 결국 잡혀 투옥되고, 나는 깊이 잠적의 세월을 외롭게 살다가 결국 사제가 되었습니다. 

벗은 석방 후에 선교교육원에서 신학을 마치고 목사가 되어, 일본 동경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우리 민주화센터와 네트웍의 중요한 역할을 훌륭히 감당하였습니다. 그날, 내가 유학중이던 독일 보쿰에도 찾아와 회포와 정을 나누던 추억도 잊을 수 없습니다. 벗은 후에 우리 KNCC의 인권국장과 사회선교총무,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장의 직책을 감당하며 우리의 민주화와 인권운동에서 참으로 귀한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인권국장시절에 일본여행을 함께하며 재일동포들의 차별현장인 우또르현장과 문제를 위하여 헌신 노력하던 벗의 모습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고 박형규목사님을 모시고 나병식과 함께 민주화기념사업회의 자료관장으로도 활약하였지요. 그리고 벗은 무주에서 허병섭 목사님과 함께 공동체를 일구며 대안학교인 푸른꿈학교의 교장으로도 봉직하였습니다. 

그러나 젊은 날에는 강인하게 보인 벗이었지만, 오랜 투옥과 고문과 고난으로 건강을 상하여 여수에서 우리가 상면할 때는 건강이 심각했지만 그래도 낙천적이고 강한 정신력의 벗을 믿으며 쾌유와 회복을 늘 가도하였습니다. 몇년전 이박삼일의 모처럼의 벗의 초대로 이루어진 우리의 남도길 여행이 행복한 추억의 잔치가 되었습니다. 

몸이 많이 불편한 중에도 벗이, 먼저 떠나보낸 친했던 만파 나병식형의 광주망월동묘역 이장식에도 참가해 지극한 정과 예를 표하던 모습도 인상적이었는데, 이제 사랑하는 벗이 내일이면 그곳 민주묘역에 안장되니 참으로 마음 허전하고 황망합니다. 그러나 사랑하고 존경하는 나와 우리의 소중한 벗님, 김경남 목사여, 참으로 고단하게 달려왔던 우리의 친구와 목자여. 이제는 남은 민주화와 민족통일의 짐은 우리에게 맡기시고 부듸, 빛고을 고향 민주의 성역동산에서 고히 안식하소서. 

이 깊은 신새벽 시간에도 우리의 젊은 날, 천호동 너머 베다니 수양관에서 더불어 부르던 우리들의 뜨거운 노래와 눈빛이 그립습니다. 유난히 굵고 진하던 당신의 남도 황토빛 사투리와 허스키 목소리와 바이브레이션 강하게 떨면서 노래하던 당신의 십팔번 노래...김민기의 "누가 보았을까, 저 부는 바람을..."도 생생히 들려오는 듯 합니다.

                 고 김경남 목사님 영전에 삼가 누우 최자웅 신부 올림                
   

도서출판 동연에서 나온 1970, 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의 산 증인 김경남 목사의 회고록 『당신들이 계셔서 행복했습니다: 보은기(報恩記)』를 출간했다. 치열하게 민주화 운동을 위하여 헌신했던 지난 날들을 회고하면서, 동시에 중요한 역사적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본서는 당시 함께 민주주의를 위하여 싸웠던 모든 이들을 향한 저자의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는 의미에서, 제목을 “보은기(報恩記)”으로 명명했다. 저자인 김경남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우리 민주화 운동권이 그 분들의 그 지원과 격려에 대해 알아야 하며, 그들의 지원에 대해 감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나는 2015년 1월 14일부터 보은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보은기가 1970년대의 엄혹했던 시절부터 함께 투쟁했던 우리들에게는 그 시절을 기억하며 각오를 새롭게 하며, 그 시대를 모르는 젊은이들이나 현 시국을 우려하는 모든 분들에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얻는데 조그마한 도움이 되었으면 행복하겠다....나는 한국의 민주화와 인권을 위해 애써주신 국내외 모든 분들에게 이 보은기를 바치고 싶다. 당신들이 계셔서 행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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