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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소망교회 엘피스포럼(1)배덕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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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10.24  22:4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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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한 공동체로서 교회: 한국적 개신교 영성을 추구하며
   
 
배덕만(기독교연구원 느헤미야)

그소망교회(이택한 목사) 가 운영하는 '엘피스포럼' 에서 지난 10월 20일(주) 종교개혁 기념하여  배덕만 교수를 초청하여 열린 강연회의 원고를 소개한다. 서울서노회 소속으로 창립된지 12년이 되는 이 교회는 여러공간을 이동하다가 최근 홍대 앞 새장소로 이전을 했다.

이번 강연은 자매교회인 깊섶교회(김동환 목사)와 함께 했다. 배덕만 교수는 복음주의 학자로 한국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형성하게 된 복잡한 종교적 지층의 영성을 교회사적 측면에서 비판적으로 분석한 귀한 내용으로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I. 들어가는 말
이 시대의 한국교회를 상징하는 키워드는 ‘영성’과 ‘공동체’다. 얼마 전까지, 영성과 공동체는 한국교회 안에서 매우 낯설고 어색한, 심지어 위험한 용어들이었다. 천주교에 대한 반감이 강했던 개신교 내에서 영성은 천주교적 색체가 농후하다는 이유로 기피 대상이었다. 뿐만 아니라, 공산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극단적으로 팽배한 반공사회에서 공동체는 공산주의와 동일시되었다. 따라서 그 용어들의 본래적 의미와 상관없이, 그것들은 한국교회 안에서 금지된 용어였고, 그래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이 용어들이 한국교회 안에서 뿌리를 내렸고, 지금은 목회와 신학의 영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심지어, 이 용어들에 대한 정확한 신학적 정의나 정리도 미흡한 상태에서, 무분별하게 남용되어 여러 문제들을 야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대상에 “영성”이란 수식어가 나란히 붙거나, 맹목적으로 “공동체”를 추구하는 현상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말, 영성과 공동체가 대세다.

이처럼, 영성과 공동체가 한국교회 내에 유행한다는 사실은 한국교회가 처한 난관의 근본적 원인이 무엇인지, 동시에 한국교회가 이런 현실의 극복을 위한 대안과 해법을 어디서 찾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영성의 유행은 한국교회 내에 영성의 부재 혹은 왜곡에 대한 본능적 반작용이며, 공동체에 대한 열망도 해체에 직면한 한국교회의 반사적 몸짓이다. 영성 없는 교회, 공동체성을 상실한 교회는 이미 교회가 아님을 한국교회가 절감하고 자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이 글은 내외적 모순에 직면하여 해체의 위기에 처한 한국교회의 생존과 갱신을 위한 ‘생명줄’로 ‘영성과 공동체’에 주목하고, 그것의 구체적 전거로서 한국교회의 영성전통을 살펴보고자 한다. 지난 130년간 한국개신교 안에 출현했던 영성의 다양한 흐름들을 시기별·항목별로 분류하여 설명하고, 그런 영성의 형성과 발전에 영향을 미친 요인들을 지적하며, 그것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들을 서술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시대의 교회가 거룩한 공동체로 재구성 혹은 재활성화 되기 위해 이런 영성전통을 적절히 이해하고 적용하기 위해 몇 가지 지침을 제안을 할 것이다.

II. 영성이란?
창세기에는 인간창조에 대한 두 가지 이야기가 나온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1:27)와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2:7)가 바로 그것들이다. 이 두 구절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간창조를 묘사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한다. 앞의 “하나님의 형상”과 뒤의 “생기”는 인간이 단지 흙덩이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 즉 ‘신적인 무엇’을 소유한 존재라고 천명한다. 즉, 인간은 흙으로 대표되는 물질적인 것과 하나님의 형상/생기로 대표되는 영적인 것이 결합된 특별한 존재라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일반적으로 종교, 구체적으로는 영성에 대한 성경적 토대를 발견할 수 있다.

결국, 인간을 종교적 존재, 혹은 영적 존재로 규정하는 것이 가능한 이유는 본질적으로 인간 안에 하나님(신)과 접촉·소통할 수 있는 신비로운 요소가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며, 그런 맥락에서, 인간 안에 존재하는 그런 신비로운 요소를 ‘영성’(spirituality)라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지적 활동을 위해 ‘이성’(reason)이 존재하고, 정서적 반응을 위해 ‘감성’(emotion)이 존재하며, 의도적 실천을 위해 “의지”(will)이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적 행위를 위해 ‘영성’(emotion)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의 지적 활동이 정서적 반응 및 영적 행위와 완전히 분리·단절될 수 없고, 인간이 정서적으로 반응할 때, 이성과 영성이 완벽히 배제되거나 절개될 수 없다. 인간 자체가 유기적 존재이므로, 특정한 반응과 현상에 인간의 모든 감각과 기능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함께 작동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 그렇지만, 우리는 기술적으로 이성, 감성, 영성의 역할과 기능, 영역과 특성을 구별하여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을 종교적 존재로 정의하고, 인간의 영적 체험과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독특한 능력·영역으로서, 이성, 감성, 의지와 구별되는 ‘영성’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오랫동안 신학자들은 이 독특한 능력(faculty)에 집중하며 그 실체를 규명하려고 분투해 왔다. 중세신비주의와 긴밀히 연관된 부정신학(nagative theology)은 이성적 추론을 통해 하나님의 본질과 신비를 파악하려는 기존의 신학전통에 반대해서, 기도와 묵상, 금욕과 훈련을 통해 하나님과의 신비적 합일을 추구했다. “무지의 구름”이나 “영혼의 어두운 밤” 같은 표현들은 그런 영성에 대한 중세 신비주의적 표현이다. 한편, 17세기에 퀘이커운동을 시작했던 영국의 조지 폭스(George Fox)는 모든 인간 안에 ‘내적인 빛’(inner light)이 존재한다고 가르쳤으며, 18세기에 제1차 대각성운동을 주도했던 미국의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종교적 감성’(religious affection)을 통해, 그리고 19세기에 활동했던 독일의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는 ‘절대의존의 감정’을 통해, 인간과 신의 소통가능성을 주장했다. 이런 주장과 표현들은 인간의 생득적 능력으로서 영성의 존재를 인정하고 설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영성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하고 표현될까? 최소한 네 가지 영역을 언급할 수 있다. 첫째, 이 영성은 하나님과의 직접적 접촉을 가능하게 한다. 신비주의자들이 추구했던 일차적 목표가 이것이었다. 그 결과,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신비현상들이 나타난다. 방언, 입신, 신유 등이 대표적이다. 둘째, 영성은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가능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인격적·도덕적 변화를 초래한다. 단순한 신비체험에 만족하지 않고, 중생, 성화, 혹은 신화(theosis)를 추구함으로써, ‘기독자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을 추구했던 일체의 노력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셋째, 영성은 개인적 체험에 한정되지 않고, 동일한 목표를 추구하는 신앙공동체를 탄생시킨다. 사막에서 금욕적 삶을 추구했던 은자들이 결국 수도원공동체를 형성했고, 도시에서 회심한 사람들이 교회를 시작했던 것을 우리는 기억한다. 끝으로, 영성은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소망한다. 인간이 영성뿐 아니라, 이성과 감성, 그리고 의지를 공유하며, 인간의 삶이 종교와 정치, 경제와 문화가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하나님께서 교회뿐만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제도와 영역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개인적 영성은 신비체험과 도덕적 성장, 그리고 공동체의 울타리를 넘어, 이 땅의 모든 영역과 긴밀한 관계를 형성하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따라서 개인에게서 출발한 영성이 궁극적으로 하나님나라와 ‘지평융합’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영성은 인간의 본질을 규정하는 핵심적 요소이자, 인간의 종교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원인이다. 동시에, 개별적 존재로서 인간의 고유성과 인간적 삶의 복잡성을 고려할 때, 영성도 최소한 신비적, 윤리적, 공동체적, 그리고 하나님나라적 특성을 공유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인간의 영성을 고찰할 때, 특히 한국교회의 특성을 영성적 차원에서 분석할 때, 반드시 이런 측면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II. 무속적 영성
종교사적 측면에서, 개신교는 한국에서 가장 어린 종교다. 반만년의 역사에서 불교와 도교는 1500년 이상 이 땅에 존재했고, 유교도 10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며, 무속의 경우, 정확한 연대측정이 불가능할 정도로 그 역사가 유구하다. 반면, 기독교의 역사는 천주교가 230년, 개신교가 130년에 불과하다. 이런 전통종교들 틈에서 기독교가 힘겹게 자신의 자리를 확보해 온 역사가 한국교회사다. 지금은 전통종교를 능가하는 교세와 영향력을 지니고 있지만, 그것은 단지 외적 측면일 뿐, 한국인들의 문화, 심지어 기독교인들 의식의 심층에는 여전히 전통종교의 자취가 여전하다. 특히, 한반도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니며, 21세기에도 여전히 민간신앙으로 살아 있는 ‘무속’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지난 130여 년간, 기독교, 특히 개신교가 한국인의 삶과 의식에서 무속의 잔재를 제거하려 몸부림 쳤지만, 노력에 비해 결과는 그리 신통치 못하다. 근대과학의 경이적 발전과 계몽주의적 세계관의 압도적 영향에도, 무속은 한국인의 집단적 무의식 속에 생생히 살아 있다. 따라서 한국개신교도 무속의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고, 이런 상황은 지금도 진행형이다.

개신교적 관점에서, 무속의 영향은 긍정적 측면, 가치중립적 측면, 그리고 부정적 측면 모두를 지닌다. 먼저, 영적 세계에 대한 무속의 확고하고 생생한 믿음은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무속은 사후에 혼령의 존재를 인정하고, 영적 존재와 현세 간의 긴밀한 관계도 중시한다. 물론, 세부적인 믿음체계와 종교적 관행 면에서, 기독교와 무속 간에는 넘어설 수 없는 간격이 존재한다. 그래서 양자의 관계가 개선될 여지는 거의 없다. 하지만 개신교가 외국종교임에도, 한국에서 빠르게 대중화·토착화할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인들 안에 깊숙이 내재된 영적 존재와 내세에 관한 무속적 세계관의 강력한 영향과 무관하지 않다. 이성과 합리성에 대한 맹신 때문에, 영적 세계와 내세를 부정하는 서구에서 기독교가 냉대를 당하는 현실과 비교할 때, 한국교회의 경이적 성공과 무속의 관계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물론, 무속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개신교가 한국인들에게 열정적으로 수용될 수 있었던 문화적 배경으로서, 무속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재앙초복’이라는 무속의 기복적 성향은 모든 종교, 특히 민간신앙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종교현상이다. 즉, 이런 성향은 무속만의 고유현상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특징이며,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를 동시에 지닌다. 따라서 이것을 무속의 가치중립적 측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기복신앙이 마치 무속의 전유물인 듯 생각하지만, 이것은 세계의 모든 종교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보편적 현상이며, 어쩌면 인간을 종교적 존재로 만드는 가장 근원적인 욕구인지 모른다. 제정신이 아니고서야, 복을 혐오하고, 재앙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불가항력적인 상황 앞에서, 무능한 인간이 초자연적 존재에게 복을 구하고 악을 제거해 달라고 요청하는 과정에서 종교가 발생했고, 지금도 이것이 종교가 존재하는 가장 현실적인 이유이기 때문이다. 구원과 천국이 종교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 때, 재앙초복은 그런 목적의 원초적 표현에 불과하다. 동시에, 종교가 기복에 과도히 집착하거나, 그 이상의 고유한 것을 추구하지 못할 때, 미신이나 사교로 전락할 위험은 늘 존재한다. 한국에서 은사주의, 교회성장학, 번영신학이 크게 유행하는 것의 배경에는 이런 무속적 요소가 다양한 차원에서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무속은 도덕적 측면에서 치명적 약점이 있다. 물론, 무속에 도덕이 완전히 부재하다는 말은 아니다. 모든 무당이 사악하다는 뜻도 아니다. 대동제·대동굿처럼 공동체를 위한 공익적 측면도 무속 안에 발견되고, 개인적 아픔을 위로하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민중종교로서의 강점도 지닌다. 하지만 무속은 '단골'의 사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사역의 방향이 집중되어 있다. 개인의 무병장수와 만사형통을 위해, 점, 부적, 굿을 행하는 것이다. 지극히 이기적인 욕구 앞에서, 타자에 대한 배려, 사회적 가치, 공공선이라는 보편적 대의가 설자리는 거의 없다. 특히, 이런 무속의 개인주의적·물질주의적 특성이 자본주의의 이기적 욕망과 합성될 때, 그것이 가져오는 부정적 영향은 거의 재앙적 수준이다. 한국개신교가 "모이자, 돈내자, 집짓자"란 구호에 열광했던 것은 무속의 부정적 영향과 관계가 있음에 틀림없다.

결국, 영적 세계에 대한 강한 신앙, 그리고 타자와 공공성을 배제한 개인적 복에 대한 집착이 한국개신교에 끼친 무속의 이중적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영향의 가치와 효과에 대해서는 찬반양론이 공존하지만, 그 영향의 존재 자체는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대다수의 개신교인들은 자신의 신앙과 무속의 관련성을 강하게 부정하고 심지어 혐오하지만, 그런 부정과 혐오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한국개신교의 급성장과 더 빠른 추락 모두에 무속의 영향이 지대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III. 복음주의적 영성
현재, 한국교회의 절대다수를 장로교회가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한국교회 신학과 신앙에 개혁주의가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역사적 현실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다. 물론, 한국에 처음 복음을 전한 개신교 선교사들 중에 장로교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그들의 선교활동이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하지만, 초기에 한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 중 상당수가 교파를 초월해서,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성결운동(개혁주의적 케직운동과 웨슬리안 성결운동)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9세기 말, 미국에서는 일종의 세기말적 현상의 하나로서, 선교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강력한 종말론을 배경으로, 이 세대 내에 세계를 복음화하겠다는 당찬 비전이 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이런 열광적 분위기를 주도했던 대표적 인물이 D. L. 무디였고, 그의 배후에는 성결운동이 있었다. 성결운동은 신학적 배경에 따라, 개혁주의 진영에서 발생한 케직사경회와 감리교적 배경을 지닌 웨슬리안 성결운동으로 양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교파적 배경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양진영 모두 중생 이후의 성령세례, 도덕적 변화와 성결한 삶을 강조했고, 성서무오설과 세대주의적 전천년설을 신봉했으며, 전도와 선교활동에 헌신했다. 당시에 영국과 미국에서 선교운동에 헌신했던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런 성결운동의 세례를 깊이 받았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개신교적 복음을 전해주었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모두 성결운동의 영향을 깊이 받았던 인물들이며, 이들의 영향 하에 한국교회가 성령체험, 성경, 복음전도, 묵시적 종말론 등을 중시하는 복음주의적 전통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평양도사경회 기간 중 발생했고, 이 운동을 주도했던 길선주 목사는 묵시적 종말론의 대가였다. 또한 이 운동을 통해 성령체험과 개인적 회개가 수없이 일어났고, 많은 성도들이 전도에 헌신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통해, 우리는 한국교회의 초기부흥운동과 성결운동 간의 긴밀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이 부분을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먼저, 한국교회는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존중하게 되었다. 자유주의의 도래에 위기의식을 느꼈던 선교사들은 성경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강조했고, 한국인들에게 성경을 전해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 만주와 일본에서 한글성경이 먼저 번역·출판되었고, 이 성경은 한국인 매서인들에 의해 전국방방곡곡으로 빠르게 보급되었다. 또한 합법적 입국 이후, 선교사들이 성경번역에 힘을 기울였던 것에서 초기한국교회와 성경 간의 긴밀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선교사들은 각종 예배와 사경회를 통해 성경을 가르쳤고, 신학교육도 담당한 기관들 명칭이 성경반 혹은 성서학원이었던 것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성경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성경에 대한 비판적 분석보다 문자적 해석과 실용적 적용에 강조점을 두고 진행되었다. 이런 교육과 강조 덕택에, 한국교회는 성경읽기와 성경암송을 중시하게 되었고, 성경에 대한 절대적 존중과 신앙을 내재화할 수 있었다.

둘째, 한국교회는 성령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갖게 되었다. 1930년대 이후, 근본주의신학의 본격적 유입으로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성령에 대해 보다 소극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지만, 이런 현상과 별도로, 평양대부흥 이후, 한국교회의 영적 특징은 부흥사와 부흥회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교리적 측면에서 은사중지론을 가르쳤지만, 성도들은 그런 교리와 상관없이 부흥사들의 영향을 깊이 받으며, 다양한 영적 은사를 갈망하고 체험했다. 그래서 한국교회가 "간판은 장로교, 내용은 오순절"이라고 정의하는 흥미로운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초창기 한국교회의 부흥운동을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목사들이 함께 이끌었다는 사실, 교파를 초월해 새벽예배, 부흥회, 수련회 등을 중시했다는 사실 등이 이런 현상의 단적 증거다.

셋째, 한국교회는 성결한 삶을 추구하게 되었다. 물론, 각 교파의 고유한 신학적 강조점 때문에 성화 혹은 성결에 대한 해석의 차이가 존재하고, 믿음에 대한 오해가 신자의 윤리적 책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그럼에도, 개혁주의와 웨슬리안주의의 구별 없이, 한국교회는 신자들이 중생 이후 성결한 삶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부흥사들을 통해 중생의 체험과 회개를 동반한 삶의 변화를 강조했고, 목회자들은 성도들이 주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유지하며 성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끊임없이 설교했다. 성결에 대한 강조가 사회개혁과 타자에 대한 보편적 사랑으로 확장되지 못한 한계를 보였지만, 최소한 비신자와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인식만은 한국교회 내에 보편적으로 뿌리를 내렸다.
끝으로, 한국교회는 종말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일차적으로, 이 땅에 복음이 전래되던 때에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 같았고, 이후 혼돈과 파국의 나락으로 추락했기 때문에, 묵시적 종말론이 쉽게 대중화될 수 있는 시대적 정황이 형성되었다. 한편, 케직사경회 영향을 깊이 받은 선교사들에 의해 세대주의적 전천년설로 대표되는 묵시적 종말론이 한국교회에 소개되고, 길선주의 부흥회를 통해 전국적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이런 종말론은 당시의 시대적 정황에 힘입어,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으며, 이후 한국교회의 지배적 종말론으로 뿌리내렸다. 1994년에 다미선교회가 교회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를 뒤흔들 수 있었던 것, 지금도 여전히 종말론 관련 신흥종교들이 번성하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IV. 자본주의적 영성
해방과 함께 한국교회 안에 새로운 영적 흐름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한국사회가 분단과 전쟁, 그리고 군부독재의 과정을 거치며 냉전체제에 편입된 결과로 형성된 소위 ‘자본주의적 영성’이다. 적어도 이 시기에 한반도가 냉전체제에 편입되면서, 한국사회 내에 반공과 친미라는 새로운 이념이 봉건과 친일의 과거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험한 시절을 통과하면서, 한국교회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체가 미국에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미국의 군사적·경제적 원조 덕택에 한국사회는 분단과 전쟁의 위기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북에서 내려온 개신교인들을 중심으로 남한교회가 재편되었다. 이들은 공산당 때문에 교회와 고향, 신앙과 재산을 상실했던 뼈아픈 경험을 기억하고 있었다. 신학적 차원에서도 합의점을 찾기 어려웠던 공산주의는, ‘이런 역사적 상처를 통해,’ 그들에게 같은 하늘 아래 공존할 수 없는 악의 실체로 정죄되었다. 동시에, 분단시대에 북한출신이라는 주홍글씨는 이들을 더욱 철저한 반공친미의 기수로 만들었다. 이런 이유로, 이들은 사회주의·공산주의를 악마적 이념으로 부정했고, 미국을 통해 전수되는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열정적으로 지지·수용했다.

이런 현상은 박정희 정권을 통과하면서 더욱 견고해졌다. 박정희는 정권을 장악한 이후, 적극적으로 근대화정책을 추진했다. “잘 살아보세”는 국가적 구호가 되었고, “근면, 자조, 협동”은 시대정신이 되었다.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된 산업화로 농촌사회는 급속도로 붕괴되고, 도시화 현상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할리우드를 중심으로 한 미국문화가 한국의 대중문화를 장악했고, 영어열풍과 미국유학이 붐을 이루었다. 그렇게 한국사회는 미국화 되어갔다.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우방이요 구원자로 인식되었고, 따르고 배워야 할 표준과 목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도 철저하게 미국교회에 종속되었다. 미국교회의 선교적·경제적 지원이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으로 대표되는 미국부흥사들이 한국에서 대규모 전도집회를 연속적으로 개최했다. 우수한 학생들은 앞 다투어 미국유학을 떠났고, 미국신학과 교회를 한국에 빠르게 소개했다. 그런 과정에서 미국교회와 신학은 ‘신식’과 ‘첨단’으로 인식되면서, 거의 무비판적으로 흠모·수용되었다. 동시에, 미국교회와 미국문화가 동일시되면서, 미국식 기독교는 물질적 번영의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로 선전되었다. 미국이 경제적 대국이 된 근본적 이유가 기독교를 신앙했기 때문이며, 우리도 미국처럼 잘 살고 싶으면 미국식 기독교를 수용해야 한다는 논리가 설득력 있게 선포되었다. 이것은 신학교와 교회에서 한국인과 미국인에 의해 의심 없이 선포된 “복음”이었다.

한국사회에 경제성장의 가시적 결과들이 나타나면서, 한국교회에 소위 ‘자본주의적 영성’이 급속히 확장되기 시작했다. 이 영성을 주도한 신학적 흐름은 ‘교회성장학’ ‘적극적 사고방식’ 그리고 ‘번영신학’ 등이다. 물론, 이런 신학들에 기초한 자본주의적 영성이 한국교회에 끼친 긍정적 영향도 있다. 무엇보다 가난을 극복하는 것이 시대의 과제가 되던 때에, 이런 영성은 교회 안팎에서 신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가난, 질병, 전쟁에 시달리며 운명론과 패배의식이 만연했던 이 나라에서, 그래서 묵시적 종말론에 철저히 경도되었던 이 땅의 교회에, 처음으로 이 땅의 삶에 희망과 의미를 부여했는지 모른다. 특히, 국가주도 하에 추진된 경제개발정책이 가시적 성과를 거둘 때, 이런 영성은 그런 성장의 내적 동력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 결과, 개인적 삶의 질이 향상되고, 사회적 신분이 향상되었으며, 현실과 대면할 수 있는 자신감을 부여했다. 이것은 바로 교회성장에 결정적 영향을 끼쳤다. 신자들이 삶의 열정을 회복하고,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소유하며, 경제적 능력을 획득했을 때, 그런 발전의 일차적 수혜자가 교회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시기에,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이 절정에 달했고, 강남을 중심으로 대형교회들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정말, 한국교회가 경이적인 성장을 이룬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성장과 번영은 부정적 유산을 한국교회에 안겨주고 말았다. 이런 과정에서, 적극적 사고방식과 교회성장학이 “성장의 첨단적 비법”으로 한국교회 내에 유포되기 시작했다. 교회강단들을 통해 “교회성장학”이 목회의 교본으로 채택되고, "번영신학"이 시대적 메시지로 강력히 설파되었다. 그 결과, 한국교회 내에 물질적 번영이 축복으로 정당화되고 열정적으로 추구된 반면, “하나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성경의 진리는 외면당했다. 동시에, 교회가 성장과 전도에 몰두하면서, 교회건축과 교세확장을 위해 전력을 다했으나, 시대의 아픔에는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발전하던 자본주의체제와 정부정책이 많은 모순과 오류를 야기했음에도, 현 체제에 대해 맹목적 지지를 보냈고, 그 체제의 희생자들의 불행과 고통에는 눈을 감았다. 그 결과, 교회는 경이적인 속도로 양적·외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민족의 시대적 고통에 동참하지 못함으로써, 사회적 영향력과 명성은 실추·축소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V. 민중신학적 영성
1970년에 들어서, 한국교회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으로 양분되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신학적 입장의 차이 때문에 보수와 진보 간에 갈등이 존재했고, 이것이 교단분열의 직접적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민족과 정치 문제에 있어서 진보와 보수 간에는 근본적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박정희 정권이 집권연장을 목표로 삼선개헌을 시도하면서, 진보와 보수 간에 입장이 확연히 갈라지기 시작했고, 이후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진보진영은 독재정권에 저항하면서 탄압과 박해의 수난시대를 맞이한 반면, 보수진영은 국가정책에 적극 호응․협조함으로써, 국가의 적극적 후원과 혜택 하에 최대의 번영기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진보진영은 민중신학을 중심으로 자신의 신학적 정체성을 재구성했다. 이것은 당시 라틴아메리카에서 출현한 해방신학의 한국적 버전이었다. 1960년대에 세계는 그야말로 해방과 혁명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었다. 과거 제국주의의 희생양이었던 수많은 약소민족들이 정치적 독립을 쟁취했고, 전통사회에서 억눌렸던 다양한 영역의 사회적 약자들(특히, 소수인종과 여성)이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시절에 한국사회는 철권통치를 자행하던 군사정권 밑에서, 특히 이 정권이 ‘군대식으로’ 밀어붙이던 산업화의 병폐 속에서, 인권이 유린되고, 민주주의가 후퇴하며, 독재와 분단이 정당화되는 정치적 암흑기를 통과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수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시대적 아픔과 구조적 문제 앞에서 무책임했던 자신들의 무지, 무관심, 무책임, 그리고 비겁함을 통렬히 자각하고, 예수의 정신에 입각하여 군사정권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현장체험과 신학적 반성의 결과물로 출현한 것이 ‘민중신학’과 ‘민중교회’였다.

영성적 차원에서 이런 반성과 실천의 중요한 소득은 한국교회가 ‘민중’이라는 사회적 약자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한국교회에서 민중에 대한 관심과 이해가 완전히 부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국사회가 근대화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가장 주목해야 할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지에 대해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 산업화를 통해 “보릿고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시대적 구호 앞에, 한국교회는 소외되고 착취당하는 약자들의 눈물과 한숨에 적절히 반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전태일의 분신(1970년 11월 13일)을 계기로, 상아탑에 갇혀 있던 일부 신학자들이 현실을 직시하기 시작했고, 그들의 존재와 가치를 신학적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가려진 현실, 버림받은 이웃을 새롭게 발견한 열혈청년들이 보장된 자리,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이웃들의 곁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민중은 신학의 주제로, 목회의 주체와 대상으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에 대한 기득권세력의 비판과 억압은 무자비할 정도로 잔혹했지만, 무시하고 외면했던 가엾은 이웃을 발견한 한국교회는 더 이상 무심한 제사장과 레위인의 자리에 머물 수 없었다. 그렇게 한국교회가 어색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의 자리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둘째, 한국교회가 사회문제를 신학의 주제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사실, 한국교회는 민족이 외세의 침탈에 힘없이 무너지던 시절, 가장 강력한 저항세력으로 기능했던 역사를 갖고 있다. 독립협회, YMCA, 신민회, 3.1운동 등을 통해, 한국교회는 국권회복을 위해 투쟁했다. 골리앗 같은 일제의 거대한 폭력 앞에 다윗 같은 믿음과 용기로 한국교회가 분연히 저항했던 것이다. 하지만 해방과 건국과정에서, 한국교회는 친기독교적인 군정과 제1공화국의 특혜 속에 사회적 비판기능을 상실하고, 정교유착이란 오욕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시대적 한계를 충분히 인정함에도 불구하고, 그 유착의 농도와 행태가 지나쳤다. 예언자로서 교회의 기능은 상실되고, 체제옹호세력으로 철저히 어용화 된 것이다. 기만적 형태의 '종교분리'를 내세워, 교회는 극우세력의 대변자가 되었고, 신학은 역사변혁의 기운을 상실한 채 영지주의적 관념론으로 퇴행했다. 하지만 이때 등장한 민중신학은 정교함과 완성도 면에서 많은 과제를 안고 있었지만, 적어도 정치사회문제를 신학 안으로 수용함으로써, 보수신학의 관념론적 한계를 일정부분 극복하고, 신학의 시대적 책임과 실천적 가능성을 웅변적으로 제시할 수 있었다. 그 덕택에, 한국교회가 부분적으로나마 예언자적 기능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규모와 세력은 미약했지만, 그것이 역사에 남긴 흔적은 감동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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