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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Bob Dylan)의 생애와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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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1.14  20: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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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 딜런(Bob Dylan)의  생애와 음악

밥 딜런은 인류가 이룩한 음악()의 역사를 이야기 하는 데 있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미국의 음악 전성기 1960년대에 생겨난 많은 그룹들과 매우 다른 길을 걸은 2명의 음악가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격변의 시기에 팝과 록 음악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바로 밥 딜런과 지미 헨드릭스라고 할 수 있다. 

밥 딜런의 음악세계는 포크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노래는 상당히 사회 참여적인 저항 가요풍이었다. 당시 월남전 참전 반대와 젊은이들의 자유분망한 히피문화와 자유와 평화을 갈망하는 시대에 그의 음악은 상상력이 풍부하여, 반항적이고 실천적인 1960년대 젊은 청소년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딜런은 이후로도 핵전쟁의 위협과 시민권, 인종주의에 대해, 나아가서는 군산복합체의 파워에 대해서 노래하였다. 그리고 가스펠과과도 관계가 있는 데 하나님이나 예수 구원 영혼 교회라는 단어는 없지만 '트레인' 등 다른 언어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는 노래에는사랑과 섹스 말고도 이 세상에는 중요한 다른 것들이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대중가수로는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이렇게 자신을 춤추고 노래하는 사람이라 지칭했던 밥 딜런이 201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다. 스웨덴 한림원은 위대한 미국의 노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 표현을 창조해냈다며 노벨 문학상 선정 이유를 밝혔다.   소설가나 시인과 같은 문인이 아닌 대중음악인이 노벨 문학상을 받는 일은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밥 딜런의 수상이 발표된 뒤 주요 언론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에서 밥 딜런의 수상이 적절하다’,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미국 <시엔엔>(CNN) 방송은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을 둘러싼 논란이라는 제목을 통해 밥 딜런 노벨상 수상에 대한 찬반 양론을 소개하면서 “‘페이지’(page, 책을 지칭)가 아닌 무대(stage)에서 더 잘 알려진 사람에게 노벨상이 돌아갔다고 전했다. 
   
 
젊은 시절의 밥 딜런  

밥 딜런의 저항가요는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미국의 노예들은 저항의 노래를 발라드와 자장가로 가장해서 부르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저항가요의 전통은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 1912~1967), 피터 시거(Peter Seeger, 1919년생)로 계속 이어졌는데, 그들은 기타 하나 둘러메고 작곡하고 노래하고 반주했다. 거스리와 시거는 미국 전통에서 가장 잘 알려진 몇몇 노래들을 만들었고 노동 조건과 시민권을 향한 투쟁과 평화와 반전 운동을 둘러싼 투쟁에서 선봉에 섰다.  

특히 그가 통키타 연주(Unplugged)에서 전기 기타를 도입한 것은 당시에는 관객들로부터 야유를 받을 정도로 충격적인 것이었다. 또한 1960년대 반전 운동에 있어서도 그의 포크 음악은 주도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심지어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어서도 그의 음악적 영향력은 전혀 사그러들줄 모르고 있으며 월플라워스의 아들 제이콥 딜런을 통해서도 그 핏줄은 이어지고 있다.  

밥 딜런은 1941524, 미국 미네소타주의 둘루스에서 로버트 알렌 짐머맨(Robert Allen Zimmerman)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대한 열정을 보인 열 살 때부터 기타를 배우기 시작하여 고등학교 시절에는 골든 코즈(Golden Chords)라는 로큰롤 그룹을 포함한 여러 밴드를 결성하여 활동했다.  

1960, 연주와 노래를 위해 대학을 떠난 그는 바비 비(Bobby Vee)의  연주 그룹인 섀도우스(Shadows)에서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했는데, 당시 그가 좋아했던 시인 딜런 토마스(Dylan Thomas)의 이름을 차용한  밥 딜런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이후 '628월에 법적으로 개명하게 된다).  

19612, 뉴욕에서 친구들의 스튜디오 장비로 ‘San Francisco Bay Blues'를 비롯한 여러 곡들로 녹음 데뷔를 이룬 그는 4월에 그리니치 빌리지의 거즈 포크 시티(Gerde‘s Folk City)에서 존 리 후커(John Lee Hooker)의 오프닝으로 첫 무대를 장식한다.   이 곳은 그가 처음으로 조운 바에즈를 만난 곳이기도 하다. 그는 곧 프로듀서인 존  해먼드(John Hammond)의 눈에 띄어 <콜럼비아(Columbia)> 레코드와 계약을 이루었고 이듬해인 '623, 전통 곡들을 자신의 스타일로 독특하게 해석한 데뷔작 [Bob Dylan]을 발표한다.  

'60년대 미국 청년들의 저항문화를 상징하는 걸작 [The Freewheelin' Bob Dylan]('63)으로 확고한 위상을 확립한 밥 딜런은 이후 미국과 영국에서 차트 20위에 오른 또 하나의 탁월한 프로테스트 포크 앨범 [The Times They Are A-Changin']('64)과 개인적인 주제를 담은 [Another Side Of Bob Dylan]('64)을 이어 발표하며 높은 평가를 얻었다.    

19654월에 가졌던 영국 투어 뒤돌아보지 마라(Don't Look Back)'는 재능 있는 다큐멘터리 감독 디에이 펜베이커(D.A. Pennebaker)에 의해 영화로 기록되어 지금까지도 손에 꼽히는 다큐멘터리 필름으로 남아 있다.   [Bringing It All Back Home]('65)[Highway 61 Revisited]('65)는   본격적인 포크 록의 시대를 열어줌으로써 대중음악의 역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작품들이다. 1965625,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Newport Folk Festival)에서 밥 딜런이 키보디스트 알 쿠퍼(Al Kooper)와 폴 버터필드 블루스 밴드(Paul Butterfield Blues Band)의 멤버들과 함께 출연하여 완전한일렉트릭 사운드를 연주한 사건은 유명하다. 

당시 순수한 포크 신봉자들이었던 대다수의 관객들은 심한 야유를 퍼부었지만 결과적으로 밥 딜런의 새로운 시도는 대중음악의 흐름을 바꾸어버리게 된 것이다.    버즈(Byrds)가 부른 딜런의 ’Mr. Tambourine Man'이 미국과 영국에서 차트 1위에 오르는 등 대히트를 기록한 이후 터틀스(Turtles), 셰어(Cher), 조엔 바에즈, 맨프레드 맨(Manfred Mann) 등 여러 아티스트들이 딜런의 작품으로 인기를 얻었다.

19667, 밥 딜런은 뉴욕 근교의 우드스탁에 위치한 자신의 집 근처에서 오토바이 사고로 중상을 입어 이후 18개월간의 은둔 생활에 들어간다. 그리고 곧바로 완전한 음악적 성숙을 이룬 더블 앨범 [Blonde On Blonde]가 발매되었다.  

'681월 카네기 홀에서 행해진 우디 거스리(Woody Guthrie) 추모 공연을 통해 사고 이후 처음으로 대중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는 컨트리적인 성향이 강조된 [John Wesley Harding]('68)과 히트 싱글 ‘Lay Lady Lay'가 수록된 [Nashville Skyline]('69)을 발표했고 '698월에는 영국의 와이트 섬에서 개최된 와이트 섬 페스티벌(Isle Of Wight Festival)’에 참가한다.    

19717월에는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이 주최가 된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Concert For Bangla Desh)’ 에 출연하여 멋진 연주와 노래를 들려줬다.    이어 1973, 샘 페킨파(Sam Peckinpah) 감독이 연출을 맡은 서부영화 [팻 개럿과 빌리 더 키드(Pat Garrett And The Billy The Kid)]의 출연과 히트 싱글 'Knockin' On Heaven's Door'가 수록된 사운드트랙의 발매가 이어졌고 같은 해 말에는 [Self Portrait]의 미 수록곡들을 모은 [Dylan]이 발매된다.  

이듬해 1월에는 밴드와 39일간의 미국 투어에 들어갔고, 새로이 계약한 데이빗 게펜(David Geffen)의 레이블 [어사일럼(Asylum)]을 통해 [Planet Waves]('74)가 발매되어 (최초로) 미국 차트 1위에 올랐다.   미국 투어의 하이라이트를 담은 더블 라이브 앨범 [Before The Flood]('74)의 발표 이후 다시 <콜럼비아>와 계약을 이룬 딜런의 새 앨범 [Blood On The Tracks]('75)는 다시 한 번 미국 차트 1위를 기록한다 

'67년에 그룹 밴드와 함께 녹음한 작품들을 담은 더블 편집 앨범 [The Basement Tapes]('75)가 발표되었고, '7510월에는 조엔 바에즈,   조니 미첼(Joni Mitchell), 알로 거스리(Arlo Guthrie), 잭 엘리엇(Jack Elliott), 믹 론슨(Mick Ronson), 시인 알렌 긴스버그(Allen Ginsberg) 등이 참여한 롤링 선더 리뷰(Rolling Thunder Revue)’ 투어가 시작되었다.  

이 기간 동안에도 역시 여러 공연을 비롯한 주목할만한 활동을 해왔는데, '86년에는 영화 하츠 오브 파이어(Hearts Of Fire)'의 출연이 있었고 '8810월에는 조지 해리슨, 제프 린(Jeff Lynne), 로이 오비슨(Roy Orbison), 탐 페티(Tom Petty)와 함께 프로젝트 그룹 트래블링 윌베리스(Travelling Wilburys)를 결성하여 화제를 모았으며 '891월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정 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90년대의 포문을 연 작품은 [Under The Red Sky]('90)이다. 이듬해인 ‘91년 개최된 33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평생공로상을수상한 그의 영향력은 19921016,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수많은 록 스타들이 참가한 가운데 펼쳐진 데뷔 30주년 기념 공연을 통해 다시금 확인되었다.  

이공연은 더블 앨범 [A 30th Anniversary Celebration Concert]('93)에 담겨진다. [Good As I Been To You]('92)[World Gone Wrong]('93), [Unplugged]('95)가 이어졌고, 참된 거장의 면모를 보여준 [Time Out Of Mind]('97)[Love And Theft](2001]로 위대한 전설을 이어오고 있다. 

흔히들 딜런의 음악은 크게 세 시기로 구별될 수 있다고 한다. 첫째로 61년부터 64년까지의 순수포크음악으로서의 시기이고, 둘째로 64년부터 75년까지의 포크락으로서의 시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후 81년까지의 크리스찬 가스펠로서의 포크시기로 구별될 수 있겠다.    

이러한 개괄적인 구별은 다시 두 번째 시기에서 73년 이후의 어사일럼으로 이적한 이후 발표한 앨범들의 시기와 75년부터 79년까지의 창작활동의 중단 시기, 그리고 79년부터 81년까지의 몰락시기로 세부적으로 구별될 수 있다.    

최초의 딜런의 음악은 당시의 지배적인 카운터 컬처로서 서서히 그 위세를 발휘하고 있던 프로테스트 히피 컬처의 또 하나의 뛰어난 작품들로서는 손색이 없었지만, 이 시기의 딜런처럼 스스로가 하나의 문화를 창조하고 그 문화의 범형으로서 끊임없이 역동하던 '거인의 완전한 현전'에 미치는 정도는 아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남들이 정치적인 만큼 정치적인 노래를 만들었고, 남들이 독창적인 그만큼만 독창적이었다. 그러나 65년을 기점으로 발표되기 시작한 그의 노래들은 이전의 그의 노래들과는 완연히 그 형식에서나 내용에 있어서 다른 것이었다.    

아직 맹아적인 형태로만 있었던 다양한 시도들이 완전히 성숙한 형태로 승화되었고, 노래의 골간을 이루는 시들의 내용은 단지 교훈적이거나 현실비판적인 정치적 저항의 경계를 넘어서서 자유롭고도 다양한 삶의 진정성에 대한 경의와 탐험을 거침없이 보여 주고 있다. 

심장 질환으로 쓰러져 생명이 위독하기도 했던 밥 딜런은 한 마디로 미국 대중 음악계의 살아있는 신화로 '반전, 저항'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존재이다.    1990년대 들어서도 꾸준히 앨범을 발표했고 아들 제이콥 딜런과 함께 나란히 그래미 시상식 무대에 오르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던 그는 살아 있는 전설이라고 할 수 있다.    
   
 
딜런의 수상경력  

데뷔 후 2016년까지 그래미상을 총 11번 수상했다. 1963년 이후 노미네이트 된 것만 40여 차례다. 1988년에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으며 2000년에는 스웨덴 왕립음악원에서 주관하는 폴라음악상을 받았다. 같은 해 영화 원더 보이스OSTThings Have Changed로 아카데미상(주제가상)을 수상했다. 1999년 미국의 시사 주간지 타임은 밥 딜런을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에 선정했다. 2008년에는 팝 음악과 미국 문화에 깊은 영향을 준 공로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한때 연인이기도 했던 가수 존 바에즈가 밥 딜런의 노벨문학상 수상에 대해 축하의 말을 전하기도했다.
   
 
딜런과 바에즈의 열애사 권태호 기자 ho@hani.co.kr  

바에즈는 14일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노벨문학상 수상은 밥 딜런의 불멸을 알려주는 또 한 걸음이라며 저항적이고, 세상을 등진 듯도 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이 예술가/작곡가는 노벨문학상에 딱 맞다고 말했다. 바에즈는 밥의 노래는 깊이, 어두움, 분노, 미스테리, 아름다움, 유머로 가득찼다. 지난 60년간 내가 그의 노래를 부를 때보다 기뻤던 적이 없었다. 앞으로도 그런 노래는 다시 나오기 힘들 것이라고 소감을 밝히면서 젊은 시절 딜런과 함께 있던 자신의 사진을 올렸다.

1941년생 동갑인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60년대의 아이콘으로, ‘광장의 노래로 함께 했고, 사랑했다. 그러나 둘은 1965년을 기점으로 서로 다른 길을 걸었다. 

19614,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음악활동을 시작하던 무렵 처음 만난 두 사람은 금새 연인이 되어 뉴욕의 한 호텔에서 함께 지냈다. 딜런이 무명작곡가에 불과했던 시절, 이미 신비한 미성으로 포크음악의 신예로 떠올랐던 바에즈는 딜런을 자신의 무대에 내세웠고, 딜런은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g in the wind), ‘하우스 오브 라이징 선’(House of rising sun) 등 자신의 곡을 바에즈가 부르게 했고, 둘은 어느 세 민권·반전 운동의 기수가 되었다.

19638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내겐 꿈이 있습니다라는 연설 이후, 이어진 워싱턴 대행진 뒤 20대 초반이었던 둘은 수많은 시민들 앞에서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라는 노래를 부르며 공연했다. 1965년 미국의 베트남전 참전이 시작된 직후 열린 7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서도 딜런과 바에즈는 선배 피트 시거와 함께 반전 공연을 펼쳤다.  

그러나 1965년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헤어진다. 딜런은 그해 어쿠스틱 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 기타를 들고 나타나 포크록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어나간다. 그러나 당시 관객들은 그를 향해 (예수를 배신한) “유다라고 소리치며 항의했다. 그리고 그의 노랫말에는 점점 우리보다 가 많아졌다.

이후 발표한 미스터 탬버린맨등 그의 걸작들도 대부분 개인의 고독을 노래한 곡들이 많았다. 그는 자서전에서 당시를 사람들은 내게 이 시대의 양심으로서 의무를 회피하지 말고,밖으로 나와 그들을 어디론가 인도하라고 요구했다. 나는 내가 대변하고 있다는 세대와 공통적인 게 별로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존 바에즈는 밥 딜런과 헤어진 뒤에도 민권·반전 운동의 선봉에 섰고, 그 지평을 국제적으로 더 넓혀나갔다. 1971년 그리스 저항운동을 돕기 위한 콘서트를 그리스에서 연 것을 비롯해 프랑크 독재 치하의 스페인, 베트남, 북아일랜드, 아르헨티나, 레바논 등 전쟁과 독재에 시름하는 사람들을 찾아갔다. 

이처럼 존 바에즈가 전인생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민중과 민권을 벗어나지 않은데 반해, 밥 딜런은 늘 움직였다. 포크록으로 넘어갔던 그는 이후 내슈빌 컨트리록으로 건너가기도 했고, 1980년대에는 기독교에 귀의해 가스펠록을 부르기도 했으나 이후 변신을 거듭한다.  

밥 딜런은 존 바에즈와 헤어진 직후, 사라 라운즈 클레어와 결혼하는 등 결혼과 이혼을 반복했고, 동시에 여러 여자들을 사귀다 늘 불화로 끝맺었다. 존 바에즈는 운동권 지도자였던 데이비드 해리스와 1968년 결혼했으나, 그도 이혼했다. 존 바에즈가 무료공연과 공연기금 전액기부 등을 할 때, 밥 딜런은 엄청난 금액의 위자료, 소송비용 등으로 재산을 탕진하고 또 순회공연에 나서 이를 메우기를 반복했다. 

존 바에즈는 1993년 사라예보 내전 당시 자신의 공연을 보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오는 관객들을 위해 방탄조끼를 입고 나서 눈물을 흘리며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불렀고, 201111월 뉴욕 리버티 파크에 통기타를 들고 나타나 우리 승리하리라를 부르며 오큐파이 월스트리트 운동에 대한 지지를 나타냈다. 존 바에즈는 그가 부른 노래 흔들리지 않게’(노 노스 모베란·No Nos Moveran)처럼 (물가 심어진 나무처럼) 늘 그 자리를 떠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밥 딜런은 자신이 작곡한 노래이자, 종종 입버릇처럼 내뱉는 말, ‘아임 낫 데어’(I am not there)처럼 늘 한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존 바에즈는 나는 음악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아요. 전쟁터에서도 생명의 편을 들지 않는다면 그 소리가 아무리 아름답다 해도 소용이 없다고 말했다. 밥 딜런은 나는 집단적 인물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존 바에즈는 밥 딜런과 헤어진 지 10년이 지난 1975년 본인이 작사·작곡한 다이어먼드 앤 러스트’(Diamonds and rust)에서 딜런과의 시절을 회상하는 듯한 노랫말을 쓰기도 했다. ‘다이어먼드 앤 러스트숯은 다이어먼드가 되고, 철은 녹이 된다는 뜻으로 지난 일을 회상하는 뜻으로 자주 쓰인다. 1975~76년 밥 딜런과 존 바에즈는 전미투어 공연을 함께 했다. 
   
 
밥 딜런, 복음을 노래하다.  

2017년  마이클 길모어가 대중음악속에 숨어있는 밥딜런의 신앙코드라는 부제의 책을 출판했다. 그는 카나다 메니토바 주립대학에서 성경과 영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로 댜중문화에 나타난 종교와 성경에 대하여 연구하고 글을 쓰는 학자로 켓 스티븐스(영국의 싱어 송 라이터)신학적 관점에서 본 동물윤리에 대해서도 글을 썼다.

이 책을 이설아(성신여대졸업, 영어와 일어 번역가)가 번역을 하여 기독교연합신문사(대표: 장종현)에서 출판한바 있다. 백석대 설립자이고 총회장이기도 한 장종현 목사가 속한 백석교단은 보수 복음주의 교단으로 복음성가 작곡가 하덕규씨가 백석대학교 음악학부 교수로도 있는 곳인 데 이 책의 추천사를 쓰기도 했다. 

이 책은 밥 딜런의 음악사 속에서 가스펠에 집중할 때(1979-1981)에 관심 갖고 있다. 이는 딜런 음악의 영감을 준 미국의 대중음악가 우디 거리가 가스펠에 기초하고 있기 떄문이다. 우디 거스리는 존 바에즈가 불러서 유명한 운동권 노래, ‘우리 승리하리라흔들리지 않게등의 노래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이미 미국에서는 딜런학(Dylan Scholarship) 이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언어는 다르지만 음악에서 느끼는 음률과 흥은 인간에게 많은 감명을 준다. 지금 우리는 그것을 현실로 보고 다. 바로 한국의 방탄소년단(BTS)이 미국의 빌보드 챠트에 오르고 세계의 젊은이들이 열광한다 

방탄소년단(BTS)과 아미(Army) 학회 

나아가 그의 펜클럽인 아미(Army)가 단순히 국제적인 인기로만 그치지 않고 학회가 열린다는 소식이다. 세계 대중문화 주변부에 가까웠던 한국에서 나타나 음악과 메시지 호소력으로 '월드스타'가 된 방탄소년단(BTS). 그리고 이들을 매개로 만들어진 전 지구적 '아미'(방탄소년단 팬클럽) 에 대한 연구자들의 모임이다.  

2018년 이미 한국에서 방탄소년단을 연구하는 학술행사가 열린 데 이어 영국 런던 외곽 킹스턴대학교에서는 지난 2020년 난 45'방탄소년단 : 글로벌 학제 간 콘퍼런스 프로젝트'(BTS: A Global Interdisciplinary Conference Project)라는 이름으로 학회가 열렸다. 

그 규모도 대단한데 30여개국서 발표자만 140명이다. 이 행사를 주관하는 콜레트 발메인 킹스턴대 영화·미디어학부 교수와 연합뉴스와의 이메일 인터뷰에서 "우리는 글로벌 사회에 살고 있고, 고정됐던 경계를 상품과 사람들이 어떻게 넘나드는지 관심이 있었다""방탄소년단은 지역적 요소, 즉 한국적인 것(Koreanness)을 유지하면서도 세계를 향해, 그리고 세계를 대변해 말한다는 점에서 최적의 사례"라고 주최 동기를 설명했다. 

여기 참석한 세종대 이지영 교수는 세계 30여개국에서 자발적으로 모인 참가자들은 "없는 분야가 없었다" 고 할 정도로 문화연구·심리학·인류학·예술이론·미디어학·철학·문학·언어학·정치학·국제관계학·교육학 등 각종 영역을 망라했다. 연령대도 학부생부터 대학교수까지 다양했다고 한다.  

방탄소년단 현상을 종교학적으로 조명한 성공회 사제, 노장사상을 통한 방탄소년단 메시지 해석, 무슬림 아미들에 방탄소년단이 어떤 의미인지 등 독창적인 발표가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고 한다. 

이지영 교수는 여기 기조연설에서 "방탄소년단과 아미는 사람들의 갈망과 변화하는 세계의 미묘한 진동을 감지할 수 있게 해주는 지진계 같다""방탄소년단의 여러 가지 성공 요인은 전 세계 사람들이 열망하는 변화의 방향과 어쩌면 우연히 일치했다고 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발메인 교수는 "영어로 노래하지 않는 그룹의 글로벌 영향력이라는 면에서 볼 때 방탄소년단 현상은 전례가 없다"고 짚었다고도 한다. 딜런은 세대를 넘어 방탄소년단은 세계를 넘어 우상이 된 것은 사실이다. 종교가 사람에 대하여 관심 갖는 다면 사람들이 무엇에 열광하고 관심을 갖는 지에 대하여 외면하면 안된다. 이제 신학이 전통적인 신학에 대해서도 연구해야 하지만 인접학문 신학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에 대하여 연구해야 하는 이유다.

설교도 마찮가지다. 우리가 회중들의 체질과 그들에게 맞는 영적인 음식을 주는 것이라면 주 재료는 성경이지만 레시피는 다양할 것이다. 나라와 문화 역사와 현실의 조화가 필요하다.  유명 전문 쉐이프가 어떤 그릇에다가 어떻게 디스프레이를 하느 냐에 따라서 그 음식의 값과 격조가 달라진다. 설교자들도 청중들에게 다가 가기 위하여  끊임없는 노력을 해야 하는 이유다.   
   
 
한국에서 유명한 그의 대표곡 

70년대는 미국도 월남전 인권문제 등으로 학생운동이 심했는데 한국에 양희은 김민기가 있다면 미국은 밥 딜란과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을 부른 존 바에즈가 있다 그의 대표작 3곡인데 특히 마지막 곡 Like A Rolling Stone2004년 발표된 롤링스톤 지가 선정한 The 500 Greatest Songs of All Time No.1 으로 뽑힌 바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JpB_AEZf6U&version=3(Blowin in the Wind)

https://www.youtube.com/watch?v=l19MJbo7a3Y(Knocking on Heaven Door)

https://www.youtube.com/watch?v=B_QzH-H7JVA(Like Rolling stone) 
   
 
2010. 3.15() 김창식(자유칼럼, www.freecolumn.co.kr) 

무엇을 보았니 내 아들아/늑대에 둘러싸인 갓난아이를 보았소/죽은 말 곁에 서있는 아이를 보았소/몸이 불타는 여자 아이를 보았소/검은 개와 함께 걷는 한 남자를 보았소/처형자의 얼굴이 감추어진 곳을 보았소/온통 검은색으로 둘러싸인 사람 없는 곳을 보았소/험한 비가 내리려 해요/험한 비가*  

오는 2010331일 내한 공연을 갖는 전설적인 아티스트 밥 딜런의 1962년 발표곡 '험한 비가 내리려 해(Hard Rain's A-Gonna Fall)'의 가사 일부입니다. 묵시론적인 이 노래는 쿠바 핵 위기와 맞물려 전쟁으로 인한 삶의 초토화를 경고한 것입니다. '험한 비'는 미사일, 낙진, 폭탄을 뜻하는데 우리 포크 가수 이연실은 '소낙비'로 번안해 불렀습니다.  

밥 딜런은 큰 상업적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지만(그 흔한 빌보드 차트 1위곡이 한 곡도 없음) 포크와 록 음악, 나아가 대중음악 전반에 끼친 영향은 실로 지대하여 비틀스와 역대 첫째 둘째를 다투는 슈퍼스타입니다. 그의 공적과 영향력은 아인슈타인이나 셰익스피어에 비교되기도 합니다. 그가 이처럼 평가되는 이유는 무엇인지 대략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봅니다.  

우선 그의 음악이 시대적 현실을 증언하거나 예언자적 성찰을 보여줌으로써 시대정신을 견인한 때문입니다. 1960년대는 세계사적 전환기의 시대였죠. 2차 대전 후 세계는 거대한 두 개의 체제로 개편되었고 자유세계의 중심축으로 부상한 미국 사회는 쿠바 미사일 위기, 케네디 대통령 암살, 베트남전 참전, 히피문화의 창궐 등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였습니다.  

밥 딜런은 노래로써 반핵, 반전, 반 인종차별을 일깨웠고 주류 사회의 위선적인 풍조에 저항하여 젊은이와 지식인층의 추앙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기득권을 가진 주류 보수층은 그를 외면할 수밖에. 그는 아웃사이더의 삶을 살되 시대를 감시하는 파수꾼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마을을 지키는 망루는 중심이 아닌 외곽에 자리하는 법이니까요.  

밥 딜런을 평가하는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수많은 포크의 명곡을 직접 작사작곡하였다는 것입니다. 포크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바람이 전하는 말(Blowin' in the Wind)'을 비롯, '천국의 문을 두드리며(Knockin' on Heaven's Door)', '괜찮아, 두 번 생각하지 마(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 '미스터 탬버린 맨(Mr. Tambourine Man)' 등은 포크 음악 역사상 길이 빛나는 명곡입니다. 밥 딜런의 역할에 힘입어 포크음악은 대중성을 획득, 세계 전역에 전파되어 전성기를 맞이하죠. 포크 음악에 록을 도입하는 새로운 시도도 하였습니다.

그가 어쿠스틱 기타를 버리고 일렉트릭 기타를 들었을 때 사람들은 배반자라고 비난하였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음악적 혜안을 찬탄하게 되었지요. 오랜 동반자인 포크의 여제(女帝) 존 바에즈가 포크의 순혈주의를 주창하였다면 그는 일탈을 꿈꾸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밥 딜런만의 특화된 음악적 성공은 초현실주의적이면서도 시적인 가사와 독특한 창법에 힘입은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위에 소개한 '험한 비가 오려고 해'에서도 그 편린을 엿볼 수 있지만 상징과 은유가 가득한 노랫말은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수차 거론되었을 정도입니다. 창법도 새로웠지요. 미성이 아니고 가창력도 뛰어나지 않습니다만 읊조리는 듯 우울한 톤의 노래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메마르고 거친 질감의 크로키 화 같은 창법이 역설적으로 듣는 이의 가슴속에 감추어진 현()을 둔중하게 건드린 것이지요. 어찌 보면 그는 표현의 본질에 충실한 것입니다. 암울하고 참담한 현실은 거리를 두고 담담하게 표현할수록 미감(美感)이 배가되는 것이어서요.  

우리나라 포크가수 중 한대수('행복의 나라로'), 서유석('타박네') 등 여러 가수가 그의 영향권에 있지만 밥 딜런의 정통 DNA를 이어받은 사람은 김민기입니다. 김민기가 직접 부른 '아침 이슬', '친구', '내 나라 내 겨레'를 들어보면 창법이나 가사가 전하는 메시지에서 동질성을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김민기 자신은 부인하지만, 1970년대 젊은이들에게 김민기는 우울한 시대의 초상이었어요. 그들은 금지곡이었던 김민기의 노래를 알음알음으로 들으며 먹먹한 감정에 빠져드는 한편 위안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나저나 왜 밥 딜런일까요? 밥 딜런이 표출하였거나 예언한 여러 문제들은 진행 중이며 주변에 드리운 어두운 구름은 아직 걷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추구한 반전과 평화의 정신, 아웃사이더로서의 각성, 자유에의 갈구, 삶의 순환에 대한 성찰은 지금도 유효한 가치입니다. 밥 딜런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밥 딜런이 아니었더라도 누군가 밥 딜런적인 것을 노래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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