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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금호중앙교회, 그리고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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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6.29  08: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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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 금호중앙교회, 그리고 청년들 

사람들은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그러나 그 성공을 계속이어가는 것은 다른 문제다. 더욱이 성공했다가 넘어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잊어 버리기 쉽다. 우리들 주변에서도 한 때 성공했다고 보여졌지만 우리의 눈과 머리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있다. 그럴만한 이유는 있겠지만 우리는 그것보다는 다시 일어서는 사람들을 주목한다.

박완서 작가의 ‘골찌에게 보내는 갈채’ 라는 소설이 있었다. 당시 산업화와 근대화 시기에 출세를 향햐여 달리던 군상들의 이갸기다. 그러나 모든 뛴다고 해서 1등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는 사람들 그래도 1등을 향하여 달리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따라서 1등은 아니지만 그 달리기에 완주한 사람들에게 보내는 격려의 이야기다.

지승룡과 이종철의 만남
한때 문화사역자로 ‘민들레영토’ 의 창업자 지승룡 대표를 모두 기억할 것이다. 신학대학을 나온 목사이기도 했지만 도형상담과 외식 산업의 신기원을 이룬다. 먹고 마시는 장소에서 개인적인 독사와 공부 세미나를 도입한 사업으로 성공을 이뤘다. 이어 휴먼 태라피라는 모임도 국제적으로 이름을 낸다. 그러나 사업처의 임대료 상승과 복합적인 어려움을 이겨내지 못한다.  

지난 5월 동기와 지 대표를 만났는 데 개인적으로는 장신 동문에 호형호제하는 사이다. 다시 일어 서기 위해 바닥 일을 다마 않는 모습에 감동하고 위로와 격려도 할 겸해서였다. 밝은 모습으로 그간의 뒷 얘기를 듣고 나는 더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겁고 의미있게 살기 위해서 일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더 이상 성공 프레임에 갇히지 말라는 고언이다.

이 글을 쓰게 된 이유는 지승룡의 친구 이종철이 둘 사이만의 옛 이야기를 공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친구들의 멘토였던 홍만조 목사(장신대 78기 동문)의 확증 때문이다. 이들의 40년전 숨겨진 5.18의 이야기다. 홍만조 목사는 당시 금호중앙교회 전도사였고 지승룡은 연대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중이었으며 이종철은 고시공부를 하던 중이었다.
   
                         * 20년만에 우연히 만나 40년 전의 일을 추억하는 이종철과 지승룡
기독청년 그 젊음의 시간
올 해는 광주 민주화 운동 40주년이 되는 해로 광주 민주화 운동은 우리 한국사에 3.1 운동과 4.19을 잇는 민주화운동사의 큰 분기점이다. 국가폭력으로 인한 광주시민의 희생도 희생이거니와 그 정신과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직도 국가적으로 명명된 민주화운동이라는 것을 부정하며 되돌리려고 하는 세력들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학살의 주범 전두환과 그 일당들은 아직도 국민적 역사적 심판은 받지 않았다. 전직 대통령으로의 예우나 직위의 박탈은 되었지만 여전히 핵심 세력들은 호위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전두환의 후임 대통령이 된 노태우 대통령과 그 자녀 노00의 처신과 비교하여 더욱 눈길을 끊다. 노00는 광주 민주화묘역에도 여러번 갔지만 광주의 어머니들이 그만 이라고 할 때 까지 사과할 것이라고 했다.

한 사건의 주역들이 보이는 태도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느낀다. 가해자이건 피해자이건 아직도 광주 학살과 관련된 증언이나 사건들이 나오는 중이다. 그중에서 금호중앙교회(1956년 설립) 청년들의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신앙적 행동에 대해서도 우리가 한번 쯤은 기억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지승용과 금호중앙교회
당시 5.18 계엄확대로 인한 광주 학살은 전국은 민주화 시위와 열기를 잠재운다. 그러나 민주화세력들은 그렇다고 두려움에 좌절하지 않았다. 지승룡은 다시 연대 신학과를 졸업하고 아신대 대학원에 재직중이었다. 금호중앙교회 장로의 아들이기도 했던 그는 광주 학살에 대하여 아파하고 분노했다.

그가 믿고 고백하는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고통을 당하는 이 민족에게 갈길을 보여달라고 간구했다. 그런데 당시 금호중앙교회에는 장로교 청년연합회 서울노회에서 활동하시던 고 최규삼 선배도 있었는 데 마침 인쇄사업을 하여 유인물을 거기 부탁한다. 최 선배도 기독청년운동을 하여 그런 취지를 이해하고 있었다.

또 하나는 당시 금호중앙교회 전도사였던 홍만조 목사도 이런 일의 진행을 지켜보면서 협력한다. 지승룡은 거사 일을 1980년 6월 27일(금)을 잡고 6월 22일(일) 오전에 이종철을 만난다. 연대 법학과로 같은 대학에 같은 교회로 마침 같은 써클에서 1학년 때부터 활동하면서 이념을 공유하고 우정을 쌓아 왔던 절친 사이였다.
   
                                               * 2017년에 완공된 금호중앙교회 입당식
이종철도 합류한 거사
당시 종철은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유신체제에 대해서는 상당한 거부감을 갖고 있어 이런 체제에서 하수인이 되는 법률가의 길로 가는 모든 법대생들의 로망인 사법고시는 일찌 감치 거부했다. 그런데 10.26을 거쳐고 유신의 종말을 보며 다시 고시 공부를 결심한 상태다.

그런데 5,17 계엄확대와 더불어 서울의 봄이 끝나 기숙사를 나와 집에서 승룡의 신앙고백같은 거사 선언을 듣고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역사의 짐을 지겠다고 한 친구 승룡을 홀로 보낼 것인가, 아니면 그의 거사에 동참을 하면서 그 짐을 나누어 질 것인가로 번민을 했다.

그로부터 번민한 종철은 새벽 기도를 나가면서 하나님께 절실히 기도했다. 사흘 밤낮을 갈구하던 그는 모종의 환상을 보면서 마침내 결심을 한다. 친구의 짐을 같이 나누어 지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이다. 26일 밤에 종철은 그때 사귀던 여성을 만나서 일기장을 맡기자 자초지종을 묻는 다.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다음 날(27일) 오전 종철은 비장한 마음으로 금호동에 사는 승룡을 만나 함께 한다는 생각을 밝힌다. 그러나 이번에는 승룡이 종철을 말린다.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한 종철이 거사 이후 받게 될 고통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판단에서다.
   
                                              * 청년들과 함께한 홍만조 전도사(맨 우측 서있다)
홍만조 전도사와 금호중앙교회
그리고 곁에서 조언을 해주던 홍만조 전도사도 말린다. 하지만 종철은 함께 역사의 짐을 지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는다. 사실 제 3자가 볼 때 둘의 거사는 위험천만한 행동일 수 있다. 광주 민주화 운동이 참혹하게 진압 당한지 40일 뿐이 되지 않은 당시에 시위로 붙잡혀 갔을 때 당할 수 있는 물리적 폭력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일단 구속이 될 경우 최소 2-3년은 감옥에서 지낼 수도 있는 비관적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뜻을 굳힌 둘은 승룡이 작성한 전단지의 내용을 다시 확인하고 결심을 다진다. 지금은 그 자료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내용에는 당시의 시대 상황의 진실을 적고, 계엄 철폐와 광주사태의 진실을 밝히고, 전두환은 물러나라는 구호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그렇게 뜻을 모은 둘은 그 날 오후 2시경 승룡이 이미 물색해 두었던 거사 장소인 명동역으로 향했다. 예나 지금이나 명동은 늘 붐비는 곳이다. 승룡과 종철은 그곳 정류장에서 내리자 마자 지하도 쪽으로 걸어가면서 '계엄 철폐하라', '광주 사태의 진실을 밝혀라', '전두환은 물러나라' 는 구호를 외친다. 이념 서클이나 운동권의 경험이 없던 승룡과 종철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구호를 외친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용기를 수반하는 일이다.

이종철 선생이 쓴 당시 상황
이 행동을 보던 많은 사람들이 놀래서 비명을 지르던 소리가 들린다. 조금 후 신고를 받은 명동 파출소의 경찰들이 달려 왔을 때 지하도로 나머지 삐라를 뿌리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나서 명동 파출소로 잡혀 갔다가 잠시 후 다시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중부경찰소로 이첩된다.

이날 거사는 아마도 광주 항쟁 이후 서울 지역에서 일어난 최초의 시위 사건일지도 모른다. 너무도 살벌한 당시였고, 민주화 운동을 끌어가던 세력들이 하루 아침에 다 구속을 당한 상태에서 시위를 조직할 수 있는 세력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에서 한 청년은 오로지 역사와 민족을 위해 분노했고, 다른 청년은 그런 친구의 짐을 덜어주겠다는 순수한 마음으로 동참했다.

6월 하순 가장 더위가 시작되 중부서 유치장은 뜨거웠다. 마침 당시 시국사건과 관련된 동국대의 학생회 간부들, 민중불교운동을 하던 여익구 선생,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김종대 선생, 김대중 선생의 연설 테이프를 만들다 구속된 고춘남 선생, 지금도 철도 노조에서 활동을 하는 서울대 체육과 학생이었던 지영근 그리고 김대중 선생의 외곽 청년 조직인 민청과 연관돼서 이미 보안사에서 고생을 하다 넘어온 전국회의장 문희상 선생 등 다수의 민주화 운동 세력들이 있었다.

아울러 계엄 치하에서 잡혀온 수 많은 잡범들로 좁은 유치장이 가득 차 있었다. ‘타인은 지옥’ 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은 여름 날 칼 잠을 잘 수 밖에 없는 경찰서 유치장에 가장 어울린다. 이곳에서 승룡과 종철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새로운 경험을 하기도 한다. 다행스러운 것인지 아니면 아이러니칼하다고 해야 할 것인지 모르겠지만 승룡과 종철은 처음 몇 년 간의 구속을 예상한 것과 달리 20여일 만에 풀려 났다.

지승룡 부친의 노력으로 석방
외아들인 승룡을 구하기 위해 그의 부친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당시 보안사 과장의 승인 하에 석방된 것이다. 승룡의 말에 의하면 중령이었던 보안사 과장이 우리들 사건이 더 위로 보고되는 것을 막고, 관련 서류를 페기처분해서 사건 자체를 지워버렸다는 것이다. 그 당시 보안사 중령은 하늘을 날던 새도 떨어뜨리던 세상이었다. 그런 군부의 계엄에 저항한 거사가 아이러니칼하게 보안사 과장의 도움으로 빠져나온 것이다.

생각보다 일찍 석방된 덕분에 그에 관한 공식적 기록들도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 사건 이후 이종철은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마음은 다 잊어 버리고 좀 더 깊은 차원에서 역사와 실존의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연세대 철학과 대학원으로 전과를 한다. 그리고 지승룡은 장로회 신학대학원을 졸업한다.

이후 이종철은 독일 근대 철학과 사회철학을 공부하면서 1980년대 중반에는 사회 변혁을 위한 철학적 이념의 정립을 위한 운동을 한다. 그는 1989년 3월에 진보적인 철학단체인 <한국철학사상 연구회>의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학교에 있으면서 J. 이폴리트의 『헤겔의 정신현상학』 1권(김상환 교수 공역)과 2권 등 수많은 책들을 번역 소개하는 작업도 했다.

이종철은 잠시 외도를 하고 다시 학교로
하지만 이후 2000년경 학교와 연구를 접고 벤처 기업 활동에 몸 담기도 하지만 다시 대학으로 복귀하여 강의를 하다가 2016년에는 몽골의 한인이 설립한 후레 정보 통신 대학에서 <한국학 연구소>를 설립해 한국학 운동을 해외에 전개하기도 했다. 현재는 저술과 평론 등을 하면서 자유롭게 사회 문제와 관련해 이곳 <브레이크 뉴스>의 컬럼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이런 얘기가 돌자 홍만조 목사도 오랫동안 그 유인물을 몇장 보관했는 데 이사과정에서 분실되었다고 하면서 이 이야기에 증언을 해주었다. 지금은 기록으로 보여줄 수 없는 아쉬움은 있지만 다소 무모한 것 같기도 한 젊은 날의 기독청년들의 우정과 신앙의 아름다운 한 페이지를 보는 것 같다.

당시 계엄하로 무슨 약속이나 모임일자 장소 사람 이름까지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친구들을 별명으로 불렀는 데 큰 일은 아니었어도 이 일로 인하여 다른 이들에게 피해가 갈까봐 그렇게 하는 게 유행이었다. 이종철은 이 글에서 이것이 자신들의 무용담을 자랑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운동사적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사건이었고, 당연히 객관적 기록으로 남길 수 있는 가치가 충분한 사건이라는 판단 때문에 기록한다고 쓰고 있다.

최규삼 선배는 별세, 홍만조 목사는 은퇴 
그러나 이러한 이들의 행적을 증언해 줄 최규삼 인쇄소 사장은 별세를 했고 홍만조 목사는 분실을 한 것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소식을 나중에 접한 친구들, 무엇보다 6월 27일 이후에 중부서 유치장에서 보름 이상을 함께 지냈던 많은 민주 인사들의 증언을 구한다면 좀 더 객관적인 기록을 남길 수 있다는 소망이라고 한다. 

홍만조 목사는 자신의 글에서 오랜동안 그 유인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목회지 이동으로 인한 이사로 분실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이 청년들의 그 모의와 거사를 모두 알고 있었다고 증언했고 당시 청년들과 함꼐 찍은 사진도 보내왔다. 

이종철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 당시의 사건에 이런 의미 부여를 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20 여년 만에 우연히 다시 연결된 지승룡과의 만남으로 40년 전의 그 장소를 방문하면서 이 거사의 역사적이고 필연적인 의미를 밝힐 필요가 있다는 데 생각을 같이 하면서 이 기록을 남기고 싶어 했다.

이종철(연세대 인문학 연구원, 철학박사)
연세대 정법대학 법학과를 졸업한 후 동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철학연구소의 선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면서 연세대 등에서 강의를 했고, 몽골의 후레 정보통신 대학의 한국어과 교수를 역임했다.(사)푸른아시아 홍보대사를 맡고 있다. 현재는 연세대 인문학 연구원 상임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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