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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무원과 원경선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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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3.30  20: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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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풀무원'의 사회운동가-원경선』

이 글을 1998년 6월호 신동아에 ' 이사람의 삶' 이라는 코너에 이상락 작가가 기고한 것을 고 원경선 선생 사후 9년을 기념하여 딸인 원혜덕 선생이 아버지의 자취를 정리하고자 찾는 것을 알고 이상락 작가가 페이스 북에 공개한 글이다. 원경선이 생전의 활동하신 원선생의 풀무원 정신이나 한국 정농회 활동이 모두 공익적이었다. 특히 기독교 신앙인으로 믿는 자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원선생의 노후는 포천 중리의 평화나무농장에서 100세 마치셨는 데 사위인 김중권 선생과 그 자녀들을 통하여 이어지고 있다.   

   
 * 100년된 족자로 함석헌 선생이 원선생에게 준 것을 물려받음(애제일야)그중에 사랑이 제일이라)  

                           원경선 선생을 기억함

이상락(소설가)
그는 이기심으로 두 눈이 충혈된 세인들에게 나눔의 정신을 설파하는 도덕운동가다. 그는 유기농법만이 땅도 살리고 사람도 살리는 정농(正農)의 도(道)임을 몸소 실천해 보이는 선구적인 농사꾼이다. 그는 28년 동안 거창고등학교의 이사장을 맡아 참교육을 실천해온 교육운동가이며, 무엇보다 그는 종교마저 집단이기주의와 기복신앙으로 돼가는 세태에서 ‘일용할 양식’을 빼놓고는 쌓아두지 말고 베풀도록 권하는 바른 기독교 운동의 전도자다. 그는 국제적인 환경운동가이며, 기아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빈민 운동가이며, 반전 운동가이고…

원경선 씨(84)를 일컬어 ‘어떤 사람 원경선’ 이라 규정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경실련 사무총장을 지낸 유재현 씨(49)씨는 최근 원씨의 일대기를 담은 책을 펴내면서 ‘생명을 풀무질하는 농부 원경선’(한길사 刊)이라 했다. 생명을 풀무질하는…. 그의 삶의 철학을 ‘풀무정신’에서 찾고자 했던 것이다. 취재 계획을 밝히기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나는 우선 도저히 우리 나이로 여든 다섯 할아버지로 여겨지지 않는 그의 차분하면서도 생기 넘치는 목소리에 놀랐다. 두 번째는 젊은이도 따라가지 못할 기억력이다.
“의정부에서 동두천 방향 큰길로 들어서서 4킬로미터를 가면 주내역이 나와요. 주내역 2백미터 앞에 고가도로가 있는데, 그 고가도로를 끼고 오른 쪽으로 주욱 가면 덕현초등학교가 나와요. 초등학교를 지나 3킬로미터 가면 삼가대 주유소가 있고, 주유소를 지나 1백50 미터 지점에 이르면 삼거리가 있는데 포천 방향으로 가지 말고 왼편으로 7백 미터 가면…” 

그 나이가 되면 더러 밥상을 물리고 막 돌아앉아서도 내가 점심을 먹었던가 안 먹었던가, 할 정도로 총기가 흐려지기 마련인데 원 씨는 경기도 양주의 풀무원 농장 찾아가는 길을 자로 잰 듯 막힘없이 미터법 단위로 설명을 했다. 그는 또한 자신이 거처하는 풀무원 농장을 중심으로 해서 몇 백 미터를 ‘오면…’이라 하지 않고, 찾아가는 사람을 중심으로 얼마를 ‘가면…’이라 했다. 그의 언어습관에서 이타적(利他的) 삶으로 일관해온 인생관의 일단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그가 가르쳐준 대로 어렵사리 풀무원 농장에 도착했을 때에는 해가 서산너머로 떨어진 직후였다. 4만 8천여 평의 널따란 터전위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위해 공동체를 차리고, 함께 일할 농장을 차린 것이 지난 1976년이라 했다. 군데군데 농사에 필요한 시설물들이 산재하고, 군대의 소대 내무반 크기로 지어진 슬레이트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동네’가 나타났는데, 그 곳이 공동체 식구들인 ‘한삶회’ 가족들의 거처다. 단단하고 건강하게 생긴 공동체의 아이들이 아카시아 가지에 매달린 그네를 타며 떠들어댔다. 

“서울에 나가셨는데 차가 막혀서 좀 늦어진다고 연락이 왔어요. 조금 기다렸다가 공동체 식구들 저녁 식사 시간이 되면 함께 가서 먹읍시다.” 나를 맞은 사람은 원 씨와 58년째 결혼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지명희 여사였다. 허리가 좀 굽은 걸 빼면 아직 윤기 있는 얼굴색을 가진 소녀 같은 모습이었다. 이윽고 원경선 씨가 탄 차가 나타나고 성성한 백발에도 불구하고 아직 정정한 걸음걸이로 그가 내려섰다. 기다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양쪽에 구릿빛 살결의 공동체 식구들이 한창 식사 중이었다. 제 가끔의 식판 하나씩을 들고 현미밥과 부식을 각자 챙겨 담아 먹는 식이었는데, 원 씨 내외는 그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느 성인 몫의 한 사람 분을 거뜬히 비워냈다. “건강이 망가졌을 때 나를 살린 놈이 바로 이 현미밥이었어. 이 현미의 씨눈은 85 퍼센트가 비타민이에요. 일반 백미는 비타민이 기껏 5.5 퍼센트뿐인데 말이야.” 원 씨의 현미 예찬에 지 여사는 소쿠리에 담긴 쑥개떡을 권하면서 “쑥이야말로 비타민 덩어리”라고 맞장구를 친다. 노부부는 식사 중에도 끊임없이 음식물의 영양분이며, 조미료를 일체 쓰지 않는 유기농산물의 이로움을 반찬보다 걸게 식탁에 올려놓았다.

먼저 와서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가려는 청년 한 사람을 붙잡았다. 올해 서른두 살 난 노총각 김호근 씨였다.  경남 통영이 고향인 김 씨는 서울대 인류학과를 졸업하고 94년에 (주)대우에 입사, 금년 2월까지만 해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의 사원이었다.  “오래 전부터 농사와 공동체 활동에 매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큰 맘 먹고 사직서를 내고는 귀농운동본부에서 운영하는 귀농학교에 들어갔지요. 그 곳에서 강의를 맡은 강사들 상당수가 이 곳 풀무원에서 교육을 받고 유기농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어요. 농사짓는 법뿐만 아니라 원경선 선생님의 나눔의 철학을 배우기 위해 이 곳 풀무원 농장에서 일하면서 주2회 강의가 있는 귀농학교에 나다니고 있습니다.”  이미 전라도 무주 쪽에 농사지으며 살 터전도 알아보고 왔다고 했다. 그 곳에 먼저 내려가 농사를 지으며 공동체 생활을 하고 있는 선배들이 든든한 우군이 될 거라고 했다.
“장차 시골에서 자급자족 생활을 하면서 이웃과 서로 나누며 더불어 사는 게 소망입니다. 물론 여기서 이웃이라 함은 사람만이 아니고 자연과, 환경을 망라한 의미지요.” 

김 씨가 원경선 스승에게서 배우고 있는 것은 귀농에 임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세다. 그 중 세속에서 이미 채워가지고 들어온 마음속의 ‘욕심 뽑아내기’가 노역보다 훨씬 어려운 작업이라고 실토한다. 풀무원 농장에서 원경선씨의 유기농법과 공동체적 삶의 철학을 배우고 있는 사람 중에는 일본인 학생도 있고, 멀리 연변에서 연수차 나와 있는 조선족도 있었다. 조선족 동포 두 사람과 땅거미가 밀려오는 마당 한 쪽의 의자에 마주 앉았다. 먼저 길림성 용정에서 농업대학을 졸업하고 용정시 농업국 남새(채소) 사무소에 근무하다 연수를 받으러 온 이성식 씨(45)의 얘기. “이태 전에 원 경선 선생께서 용정시에 오셔서 환경과 유기농에 관련된 강연도 하고, 보조금품도 제공하신 적이 있는데 그 연분으로 알게 되어서 당국에 2년간 휴직을 허용 받아 이번에 공부를 하러 온 것입니다. 처음 이 곳에 와서는 농약과 화학 비료를 쓰지 않고 어떻게 농사가 될 수 있을까 궁금했는데, 여기 와서 미생물을 이용한 퇴비 만드는 법도 배우고, 무엇보다 왜 유기농이 필요한 것인가를 공부하고부터는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지금 연변 쪽에서도 유기농을 열심히 제창은 하는데, 보급은 거의 안 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선 소출이 적기 때문이지요.”

이 씨는 내년 7월에 연수를 마치면 돌아가서 열심히 보급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또 한 사람 이송산 씨(35)는 길림성 용정시 농업생산재료공사 공무원으로 있다가 시당국의 권유로 연수를 온 경우다. 농업생산재료공사란 주로 농민들에게 화학비료나 농약을 공급하는 국책회사이다. “중국에도 비료공장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을 미국에서 수입해다 씁니다. 그래서 비료를 덜 쓰는 것은 외화를 아끼는 것입니다. 게다가 지금 중국 전답은 화학비료와 농약 살포로 아주 ‘세게’ 망가져 있어요. 고심 끝에 회사에서 저를 여기 풀무원 농장의 원 선생께 보내서 비료를 좀 덜 쓰는 방법을 학습해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러나 이송산 씨에게는 고민이 있다. 그 곳 풀무원 농장에서 원경선 씨의 가르침을 받고 지내는 동안 순수 유기농만이 자연과 사람을 살리는 농법이라는 걸 깨달았는데, 중국에 돌아가 봤자 화학비료를 전연 안 쓸 수는 없어 스승의 이념을 배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회가 온다면 개인적으로 독립해서 유기농을 실천해볼 계획이다.

“우리 두 사람은 가끔 이런 담화를 합니다. 북한 사람이 모두 여기에서 두어 달씩 생활하고 갔으면 좋겠다고요. 그렇게 하면 비교적 충격을 덜 받고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특징을 학습할 수 있을 테니까요.”
두 조선족 동포가 입을 모아 그렇게 말한다.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이념이나 생활방식이 배여 있는 그들에게, 일체의 사유(私有)가 인정되지 않고 모든 생산수단이나 재산이 철저히 공산(共産) 체제인 풀무원 농장의 생활방식이 덜 낯설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두 조선족과의 ‘담화’를 마치고 소박한 원장 사택의 거실로 안내되었다. -여기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일정한 자격제한이 있을 것 같은데요? “누구나, 언제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구분은 있지요. 우선 농사만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있고, 공동체 생활을 배우거나 연구하러 오는 사람도 있고, 공동체(한삶회)의 일원으로 살기 위해 오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선 어느 경우든 돈은 없어도 됩니다. 그러나 누구나 일을 하고 밥을 먹어야 합니다. 특별한 자격요건은 없지만 특히 ‘한삶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려는 사람은 몇 가지 성분검사를 합니다. 괜히 들어와서 빈둥거리면서 시간만 낭비하는 사람은 사절입니다. 일할 자세가 돼 있느냐가 무엇보다 중요한 자격조건이지요. 두 번째는 여기서 아무리 일해도 먹고 쓰는 것 외에는 재산을 축적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개인적인 소유욕을 버려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좀 거칠기는 하지만, ‘일 년 간 앓아누워 있는 한 사람을 성한 사람이 일 년 간 일 해서 먹여 살린다’는 게 한삶회의 정신이라 보면 된다. 곳간에 쌓아두면 썩기 마련이라는, 그래서 먹고 남는 것은 철저히 나누고 베푼다는 게 원경선 씨가 이끄는 한삶회의 생활철학이다. 원장인 원 씨부터 무소유를 실천했다. 그는 자신이 마련한 땅을 비롯해서 농장내의 모든 재산을 공익재단으로 등록된 한삶회에 내놓았다.  -생활상의 규칙이나 금기 같은 것도 있을 텐데요? “있지요. 우선 술, 담배는 마시고 피우지 말도록 하고 있습니다. 쓸 데 없는 소비는 절제해서 굶주린 사람 돕는 데에 써야 합니다.” 하지만 말이 쉽지 그렇게 마음을 비워내기가 쉽지만은 아닌 모양이다. “배워서 남 주나?” 혹은 “일해서 남 주나?”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는데, 풀무원 농장의 한삶회 식구들이야말로 일해서 남 주는 정신으로 살아간다. 언젠가 풀무원 농장을 다녀간 한 여학교의 교사가 원 씨의 교육에 감화되어 학교에 돌아가서는 급훈을 ‘배워서 남 주자’ 로 내걸어 화제가 된 적이 있다고 했다.

현재 한삶회 식구들은 23명이다. 더불어 살고 나누며 사는 생활방식을 자신들의 종교로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혼잣몸으로 한삶회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사람은 일주일간, 그리고 부부가 함께 들어오려는 경우는 한 달쯤 일단 살아본 뒤에 가입여부를 결정한다. 매주 금요일은 가족회의가 열리는 날이다. 공동체 가족끼리 일주일간 생활하는 사이에 생긴 앙금도 털어놓고, 농장의 크고 작은 일들을 의논도 하는 시간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재산을 훌훌 털어 스스로 무산자(無産者)임을 선언하고, 인류공동체를 제창하며 생명 가진 모든 것들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철학을 가진 사람, 원경선 씨는 어떤 사람인가?

   
                    * 마지막 까지 거처하신 방의 전경(원선생 부인과 아들 원혜영 의원) 

원경선 씨는 일제 강점기이던 1914년 평안남도 중화군의 한 빈농가에서 태어났다. 상당수 가난한 집안이 으레 그렇듯이 부친은 가장으로서의 할 노릇을 팽개친 채 술타령으로 세월을 보냈고, 더구나 그의 모친은 정실이 아닌 후취였으니 소년 원경선을 둘러싼 환경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열한 살 때 황해도 수안 땅으로 이사를 했어요. 가장 신나고 좋은 게 뭐였냐면, 가까운 거리에 당시 신학문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던 교회와 간이학교가 있었다는 겁니다. 학교라야 예닐곱 어린 아이들과 더꺼머리 총각들이 한 데 어울려 공부하는 그런 곳이었고, 교회라야 어쩌다 한 번씩 순회목사가 찾아오는 형편이었지만, 어린 나이에도 공부하는 게 어찌 그렇게 좋았던지 몰라. 그런데 내가 4학년에 올라갔을 때, 사설학교를 혼자 끌어가시던 선생님이 아이들을 놔둔 채 동경 유학길을 떠나버린 겁니다. 그래서 공립학교로 편입을 하게 됐는데, 학비 감당을 할 수가 있어야지.”

중도 포기를 결심한 그에게 담임선생이 10원이라는, 당시로서는 거액의 장학금을 주선해 주었고 그는 어렵사리 보통학교를 마치게 된다. 그가 보통학교를 막 졸업하던 해에 아버지는 당시 소 두 마리 값에 해당하는 40원의 빚만 유산으로 남긴 채 세상을 떠났다.  “빚쟁이한테 찾아가서 사정을 했지. 2년 안에 누에치기를 해서 돈을 벌어 갚을 테니 믿고 기다려 달라고.” 그런 곤란지경에도 그는 장학금 중 아껴 쓰고 남은 1원 50전을 자신의 모교에 되돌려 주었다. 쓰고 남은 장학금을 반납한 사건은 두고두고 학교에서 화제가 되었다. 일본인 교장은 조회 때마다 원경선 졸업생의 분명하고도 정직한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는 훈화를 했다.
“일본 총독부에서 이른바 농촌자력갱생운동이라는 걸 대대적으로 펼치던 무렵이었어요. 그 운동의 일환으로 학교에서 농촌지역 졸업생에게 영농자금과 토지구입자금을 보조해 주는 혜택이 있었는데, 바로 그 일본인 교장의 추천으로 내가 뽑힌 겁니다. 보상을 바랐던 건 아니지만, 그 때부터 내 안에 ‘정직’이 철칙으로 자리 잡은 거지요.” 원경선은 연이자 6퍼센트에 24개월 분할상환이라는 좋은 조건으로 영농자금을 대부받아서, 1만여 평의 땅을 구입하여 땀을 쏟아 개간했다. 가난에 찌든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보다 더욱 절실한 욕구는 돈을 벌어 공부를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스무 살 때였어요. 농사도 어지간히 자리를 잡아서 아버지 빚도 갚을 수 있었고, 이제 열심히만 하면 먹고 살 걱정은 안 해도 되었지요. 그런데 그 무렵에 나는 기독교 신앙의 길에 접어들고 있었단 말예요. 군청에서 연락이 왔는데, 하필 일요일 날 군에서 농원 시찰을 나오겠다는 겁니다. 예배 보러 교회에 나가야 되니까 그 날은 안 된다고 했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이 설마 하고 농원에 온 거야. 주인이 없으니 화가 났겠지요. 다음 날 군청 산업과에 들어갔더니 조센징의 정신상태가 틀려먹었다느니 천황폐하 은덕을 뭘로 아느냐느니 하며 모욕을 주는 겁니다. 두 말 없이 땅 문서하고 도장하고 책상에 놓고 나와 버렸어요.”  땀 흘려 일군 농원이었지만 조금도 아깝단 생각이 들지 않더라 했다.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무작정 서울로 향한다. 

“당시에 홍제동에 목장이 있었어요. 거기서 목부 일을 하면서 밤이면 YMCA의 야간 영어학교에 영어를 배우러 다니기도 하고…하루 3시간 자면 많이 자는 날이었지요. 한 번은 반쯤 장이 든 상태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전차에 부딪쳐 죽을 뻔 한 적이 있었어요. 그 길로 목부 노릇도 영어 공부도 그만두고 아예 우유장사로 나섰지만…좀처럼 형편이 나아지지 않더라고요.” 원경선은 서울에서 새로이 사귄 사진사 선배의 권유로 사진 기술을 배운다. 사진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그 일이 밥벌이에 그 중 나을 것 같아서였다. 당시는 잔칫집이나 공원 등지로 출사(出寫)를 나가는 게 유행이었다. 그 무렵 원경선은 같은 교회에 다니던 지금의 지명희 여사와 약혼을 해둔 터였다. “어느 날 파고다공원에서 사진 찍을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젊은 남자 두 사람이 나타나더니 자신들을 동경 유학생이라고 소개한 다음에, 다음 날 친구들 여럿이서 북한산으로 소풍을 가기로 했으니 출사를 나와 달라는 거야. 그러마고 했지요. 그 다음 날 만나서 정릉 골짜기를 거쳐서 북한산엘 오르는데, 그날따라 안개가 자욱하고 비까지 내리는 거요.”

원경선은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그런 궂은 날에는 사진을 찍어도 잘 안 나온다며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그런 일이 있고나서 석 달 뒤, 바로 그 정릉 계곡에서 어느 사진관 주인의 시체가 부패한 상태로 발견되었다. 값비싼 사진기가 탐이 나서 사진사를 유인한 다음 살해한 것이었다.  원경선은 그 길로 경찰서에 가서 자신이 당할 뻔했던 경험을 이야기했고, 결국 예전에 동경 유학생이라고 속였던 그 범인들과 대질신문을 벌였다. “생각해 보면 사진관 주인이 나를 대신해서 죽은 겁니다. 그런 일을 겪고 나서는…보복이 두렵기도 하고, 또 광활한 세계도 접해보고 싶어서 아내와 함께 중국으로 갔습니다.” 원 씨의 부인 지 여사는 배화여고 전신인 배화여중을 나와 명동의 한 회사에서 타이피스트로 일한 경험이 있었다. 북경으로 건너간 그들은 지 여사의 타이핑 실력을 밑천 삼아서 공문서를 타이핑해 주는 인서사(印書社)를 차려 돈을 번다. 원 씨는 모르긴 해도 아마 자신들이 최초의 맞벌이 부부였을 것이라고 했다. 해방이 되자 서울로 돌아온 원 씨는 짧은 영어 실력으로 군정시대의 미군 당국과 그들로부터 공사를 하청 받은 건설업자들 사이에서 통역을 해주는 일을 하기도 했다. 

1947년, 원 씨는 부천 도당리의 땅 2만5천 평을 구입하게 되는데, 후에 적산(敵産)으로 분리되어 우여곡절을 겪지만, 결국 그 땅이 풀무원 공동체의 출발을 가능하게 해준 터전이 되었다.  “충청남도 홍성에 가면 풀무골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어요. 그 곳에다 풀무학교라는 작은 학교를 세운 분들이 바로 이찬갑 선생님과 주옹노 선생님인데, 어느 날 내가 부탁을 드렸지요. 내가 하고자 하는 공동체 이름을 ‘풀무’로 짓고 싶은데 그 이름을 좀 빌려다 써도 되겠느냐고. 그래서 붙인 이름이에요. 구부러지고 무뎌져서 못 쓰게 된 쇠붙이를 열심히 풀무질해서 쓰임새 있는 연장으로 거듭나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지요.”


전쟁이 끝나자 폐허가 된 거리는 온통 전쟁고아들과 걸인들로 넘쳐났고, 원 씨는 그들을 풀무원 농장으로 받아들였다. 경찰의 눈을 피해 도망쳐온 범죄자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수용소를 탈출해온 나환자들도 있었다. 그들과 함께 뒹굴고 일하고 부대끼는 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한 나절은 성경공부를 하고 한나절은 농사일을 하게 했지요. 나는 기독교를 전도하되, 목회자가 되지는 않는다는 결심을 열여덟 살에 이미 해두었어요. 세상엔 ‘쭉정이 교인들’이 천지거든. 나는 생활로서 실천하지 않는 신앙은 거짓 신앙이라고 생각해요.”  

원 씨가 ‘풀무’라는 이름의 동산(園)을 차리면서 내건 슬로건은 ‘같이 일해서 같이 먹고 살자’였다. 그는 없는 것을 있게 한다는, 즉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한다는 것을 교육 목표로 삼았다. 일할 수 ‘없는’ 사람을 ‘있게’ 하고, 생각이 ‘없는’ 사람을 ‘있게’ 하고, 능력이 ‘없는’ 사람을 ‘있게’ 하고, 지식이 ‘없는’ 사람을 ‘있게’ 한다는 것이었다.   풀무원을 거쳐 간 사람 중에 그 결코 잊지 못하는 사람이 하나 있다. 5.16 직후에 대대적인 폭력배 소탕이 있었는데, 왕년의 주먹대장 이정재의 부하였던 사내가 자신을 연행해가려는 경찰을 때려눕히고 풀무원으로 찾아들었던 것.  “당시 내가 서울중앙교회에 관계하고 있었는데, 그 교회의 주일학교를 담당하는 여대생이 그 청년을 전도하기 위해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 좌로 부터 원혜영 의원 동생 원혜덕, 부친 원경선 선생

그런데 어느 날 도망 다니던 청년이 나타나서는 묵호항에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밀항하러 가는 길이라고 작별인사를 하러 왔더라는 겁니다. 밀항하려면 돈이 많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겠지요. 그랬더니 그 청년 한다는 소리가, 일단 선주에게 착수금조로 몇 푼 주고 나서 배가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면 선주를 때려 죽여서 수장시키면 된다고 하더랍니다. 내가 그 길로 부랴부랴 달려가서 그 청년을 설득해 주저 앉혔지요.” 

경기도 부천에서의 풀무원 공동체가 개개인의 노력에 의해 자신들의 먹을거리를 해결하고 바른 생활을 정립하자는 목적을 두었다면, 이웃에게 눈을 돌려 나눔의 공동체로 전화(轉化)하게 된 것은 경기도 양주에 있는 지금의 터로 옮겨온 뒤였다. ‘같이 일해서 같이 먹고 살자’에서 한 걸음 나아가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함께 나누자’로 발전한 것이다. 공동체의 의식의 지평이 확대된 것이다. 함께 일하고 함께 나누어 먹되, 결코 공동체 식구들의 몫으로 사사로이 분배하고 소유하지 않는다는 것이 고전적인 공산주의보다 우월한 철학이다. 다음 해 수학할 때까지의 최소한의 먹을거리만 남겨두고는 그 나머지는 그들보다 갖지 못한 사람에게 고루 분배한다는 것이다. 그 바탕에는 원경선 씨의 신앙관이 깔려 있다. 우선 그의 십자가에 대한 규정부터 들어보자. 

“십자가는 종(縱)과 횡(橫), 즉 수직과 수평이 만나고 있습니다. 수직은 하느님과 나의 관계입니다. 절대자를 받들어 올바로 살아가라는 의미지요. 그것만으로 됩니까? 자기 한 몸 불의와 타협 않고 올바로 살아간다 해도, 굶어 죽는 다른 사람을 나 몰라라 하면 안 되지요. 십자가의 가로 축은 횡적인 인간관계지요. 곧 이웃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이에요.”  여기에다 그의 독특한 주기도문 해석을 곁들이면, 원경선의 신앙과 사상체계가 얼추 완성된다.  “주기도문 중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여기서 ‘우리’를 이기적으로 곧 ‘나’라고 해석해서는 큰일 납니다. 우리가 누굽니까. 나와 너이고, 나와 이웃이고, 나와 민족이고 국가고 인류입니다. 그러니까 인류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기도해야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일용할 양식이란 무엇일까?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은 글자 그대로 ‘일용(日用) 양식’뿐이다. 쌓아두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쌓아두면 좀이 먹고 급기야 썩는다. 즉, 땅에다 쌓아두면 도적이 생긴다. 땅에 쌓아둔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나라마다 군대가 필요하다. 석기시대에는 군대가 없었다. 농사를 지어 비축하면서부터 그걸 지키기 위해 군대가 생겨나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면 어디에 쌓아두어야 하느냐, 하늘에다 쌓아야 한다. 하늘은 곧 이웃이고 인류다. 땅에 쌓지 않으면 곳간도 필요 없고 군대도 필요 없다. 따라서 전쟁도 필요 없게 된다.  


원경선 씨는 이 심오한 진리를 최근에야 발견하고 정립했다고 한다. 원 씨는 아직 자신이 살고 있는 방의 문을 잠가본 적이 없다. 어느 날 그는 왜 자신이 문을 잠그지 않아도 불안하지 않은지를 생각하게 되었고, 결국 사사로이 쌓아둔 게 없기 때문이라는 깨달음에 이른다. 그러나 일용양식만을 남겨두고 모든 것을 ‘하늘에 쌓으려면’ 먹고 사는 데 대한 자신감이 있어야 한다.   그런 신념을 바탕으로 원 씨는 국경을 넘나들며 환경운동과 생명보호운동을 꾸준히 펼쳐왔고, 국제기아대책기구의 이사로 있으면서 기아문제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구호활동에 힘을 쏟아왔다. 그러한 공로로 녹색인상, 글로벌500상, 국민훈장 동백장 등을 받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그저 ‘운동가’일 뿐이 아니라 철저한 실천가라는 점이다.
-사실 아드님을 몇 번 만나서 알고 있습니다. 화제를 돌릴 겸 그렇게 말했더니 원 씨의 표정이 밝아졌다. 누군들 자식 얘기에 그만한 반가움이 없겠는가. 그의 장남은 전 야당 국회의원 원혜영 씨다.

혜영 씨에게는 어린 시절부터 ‘내 아버지’ ‘내 어머니’가 없었다. 공동체 식구들 모두의 아버지이고 모두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혜영 씨가 중학을 다닐 때 서울에서 자신의 누나와 자취를 했는데, 강원도 산골에 가서 매일 감자밥만 먹어도 좋으니까 식구끼리 한 번만 살아봤으면 좋겠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원 씨는 부모의 생활방식에 일방적으로 따라오게 강요한 데 대한 일말의 자책이 없지 않았지만 ‘못 들은 체’ 넘기고 말았다고 한다.

“혜영이가 경복고 시절은 물론 서울대 학생회장 시절 줄곧 민주화 투쟁을 해왔는데, 그 애가 옳은 길이라고 선택한 일이었으니까 간섭을 하지 않았어요. 수배되어서 도망 다니고 하다가 감옥에 딱 갇히니까 안심이 되더라고요. 도망 다니느라 어디서 한뎃잠을 자는지, 제대로 뭘 먹는지 몰라 속을 태우다가 거주지가 분명한 곳에 들어가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됐으니, 허허허.”   -정치에 뛰어들겠다고 했을 때 뭐라고 하셨나요?  “딱 두 가지만 묻겠다고 했지. 양심대로 할 자신 있느냐? 돈에 움직이지 않을 자신 있느냐? 그 점은 걱정 말라더군. 그래서 되든 안 되든 실력껏 정직하게 한 번 해보라고 했지. 그런데 첫 번째 한겨레당으로 나왔던 선거에서는 떨어져버렸어. 아주 무참하게. 그래도 그게 어디예요? 껌 한 통 돌리지 않았는데도 6천표나 얻었으니. 기분이 좋더라구, 허허허….“  이제 원경선 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거창고등학교 얘기를 해볼 차례다.

근년에 매스컴을 통해서 알려진 바 있는 대로, 거창고는 여느 고등학교와 교육 방식이 판이하게 다르다. 여느 고등학교 학생들이 정규 수업에다, 자율이라는 이름의 타율학습에다, 학원이니, 고액과외니 해가면서 대학진학을 위해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거창고 학생들은 교직원과 한 덩어리가 되어 농사도 짓고 가축도 기르고 토끼몰이도 하고 눈싸움도 하고 예술제도 하는 등 그야말로 파격적인 교육을 받고 있다. 이제 교육에 대한 세인들의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하면서 거창고등학교는 전인교육의 성공적인 모델로 알려지게 되었고, 심지어는 외국에 살고 있는 교민들까지 자식을 유학 보내겠다고 나서는 상황이다.

거창고는 한국전쟁 직후 한 목사가 인가를 받아 시작했으나 재정난을 겪어 어려움을 겪다가, 1956년도에 전영창 선생이 인수하여 교장을 맡았다. 그 때 고(故) 장기려 박사와 원경선 씨가 이사를 맡았던 것이다. 이후 1961년도에 원 씨가 이사장을 맡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빛과 소금이 되라는 것, 정의롭고 정직해야 한다는 것, 바르게 행한다는 것 등이 창학 정신입니다. 다른 건 만족스럽게 지켜졌다고 자신할 수 없지만 정의(正義) 하나는 거창고의 양보할 수 없는 전통이지요.” 특히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는 불같은 성격의 전영창 교장이 초기 거창고의 전통을 확실하게 심어놓았다. 돈 봉투니 뇌물이니 하는 것들하고는 철저히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걸핏하면 서류함이며 캐비닛을 온통 뒤집어 놓는 감사를 수시로 받아야만 했다. 

“1969년 3선 개헌 파동 때였어요. 우리 거창고 학생들이 들고 일어난 겁니다. 기관에서 주모자를 처벌하라고 야단이었지. 그 때 전 교장이 뭐란 줄 알아요? 학생들의 주장이 옳다. 데모할 때 인도로 안 가고 차도로 갔으니까 도로교통법을 어긴 셈인데, 그거야 훈방이나 벌금 감 아니냐. 학교가 간여할 일은 아니다. 그렇게 나오니까 5.16 주체세력의 한 명인 거창출신 국회의원이 내려왔어요. 교장을 다방으로 불러내서는 학교 문 닫을 줄 알라고 엄포를 놓는 겁니다. 전 교장이 이렇게 맞받아쳤어요. 거창고등학교 문 닫기 전에 공화당이 먼저 문 닫을 줄 아시오.”  그 일 말고도 거창고는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80년대 초 신군부가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사회정화’라는 이름으로 마구잡이로 잡아다가 삼청교육대에 입소시키던 때였다. 평소 품행에 문제가 있는 학생, 주먹 잘 쓰는 학생, 데모를 할 만한 학생이 있으면 몇 명을 찍어서 보내라는 명령이었다. 실제로 당시에 울며 겨자 먹기로 제자를 삼청 교육대에 보낸 학교들이 많았다. “허허허, 우리 거창고 선생들이 놈들의 그런 말 들을 사람들인가 뭐.” 원 씨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교감 선생이 불려가는 등 갖은 협박을 당했으나, 그들은 끝내 교사들을 굴복시키지 못했다.


거창고의 이러한 전통은 멀리 4.19 의거에까지 맞닿아 있다. 이 때문에 당국에서는 문제학교로 낙인을 찍기도 했고, 일부 학부모들이 공산당 학교에 자식 못 보내겠다고 학생들을 빼내가기도 했다. 그러니까 오늘날 가장 제대로 된 교육을 하고 있는 학교로 부러움을 사고 있는 이면에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다는 초기의 건학 정신이 안받침 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야 유기농이 상당이 보급돼 있는 편이지만, 원 씨가 처음 유기농에 눈을 뜬 것은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이었다. 1976년 일본의 애농회(愛農會)라는 단체에서 발행한 유기농에 관한 책 한 권을 읽은 원 씨가, 다짜고짜 일본으로 달려가서 필자인 고다니 주니치(小谷純一)를 만나고부터였다. 원 씨는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정농회(正農會)를 결성하여 함께 유기농법에 의한 농사를 시작하였는데, 처음 2년 동안 2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손실을 기록했다. “주변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지요. 이러다간 거지꼴 되겠다고 정농회를 탈퇴하는 회원들도 생겨났고. 하지만 오기로 다시 시도했지. 삼년 째 되니까 요령도 생기고 땅심도 좋아져서 점점 소출이 늘어나는 겁니다. 무엇보다 화학비료하고 제초제 같은 걸 쓰지 않는 농작물을 먹으니까 내 자신의 건강이 몰라보게 좋아져요. 당시 나는 영양실조에다 간디스토마까지 앓고 있었는데 그 이후로 씻은 듯이 나은 겁니다.” 


원 씨는 부인인 지 여사가 평생 거친 농사일에다 화장 한 번 한 적 없는데도 고운 피부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모두 무공해 작물 때문이라 했다.  유기농이 자리를 잡아가자 주요 매스컴에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당시 붐이 일기 시작한 건강식품 바람을 타고 찾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 무렵 큰애 헤영이한테 판매와 공급을 맡겼는데, 얼마 동안 해보더니 장사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손을 들어버리는 거야. 그래서 혜영이의 고등학교 때 단짝 친구인 남승우 사장이 본격적으로 경영을 맡게 됐어요.” 그것이 오늘날의 풀무원 식품의 효시가 된 셈이다. 밤도 깊어 이제 그만 양해를 구하고 일어설까 하다가 ‘마지막으로’라는 단서를 붙이고 한 가지 질문을 건넸다.  -어차피 이만큼 진행된 산업화 사회를 농경문화로 온전히 되돌릴 수 없을 바엔, 이곳의 공동체 정신을 도회지 마을이나 산업 현장에도 전파해 나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안 했어야 할 그 질문 때문에 야단만 맞고 말았다.  “오늘날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은 공업문화 때문입니다. 폐해로 가득 찬 공업문화를 생명문화로, 도시문화를 전원문화로 바꾸는 일이 내가 추구하는 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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