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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열 교수의 서광선 교수 추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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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4.19  20:5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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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의 사도, 영원한 청년’ 서광선(徐洸善) 교수 추모

이만열 교수(전 숙명여대 교수, 국사편찬위원장)

   
 

오늘 4월 8일 오후 4시부터 이화여대 채플에서 서광선 교수의 추모예배가 있었다. 서 교수는 지난 30여년간 이 학교 기독교 학과에서 재직했고 1996년 은퇴 후에도 신학자․목사․운동가로서 평화통일과 세계 YMCA 운동에 헌신하다가 지난 2월 26일에 돌아가셨다. 너무 황망하게 떠나셔서 그 동안 사귀었던 동료 제자 지인들과 제대로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귀천(歸天)길을 재촉했던 것이다. 이에 회집이 가능한 때를 맞아 먼저 가신 스승에 대한 예의를 갖추고자 오늘 이런 추모예배 자리를 마련했던 것이다.

필자는 김용복 박사의 귀천 소식을 듣고 오늘 오후 신촌 세브란스 병원 영안실에 조문하려 갔다가 오후 4시부터 이화여대에서 추모예배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참석했다. 오늘 모인 분들은 고인이 봉직했던 이화여대의 선후배 동료와 제자들, 고인이 생전에 봉사했던 여러 단체들에서도 석별의 정을 나누고자 많이들 참석하였다. 그 넓은 홀에 주최측이 표지한 안전좌석이 거의 꽉 찼던 것으로 보아 고인의 넉넉한 인품을 알 수 있었다. 원광대학교의 이재봉 교수 같은 이는 호남에서 시간을 내어 참석했던 것이다.

추모사와 회고는 국내외의 여러 분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고인께서는 연구와 교수에만 힘쓰신 것이 아니라 각종 운동에도 참여, 그 범위가 국내의 여러 기관은 물론 아시아와 세계에까지 넓었다. 때문에 오늘 추모예배에는 해외에서 영상 메시지로 추도사와 회고를 남긴 Carlos Madjri Sanbee(세계 YMCA연맹 사무총장), Angela Wai Ching Wong(아시아기독교고등교육연합재단 부의장), Philip L.Wickeri(전 샌프란시스코신학대학 교수) 같은 이도 있었고, 국내에서도 WCC 공동의장인 장상 전 총장을 비롯하여 이홍정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총무, 김영주 남북평화재단 이사장, 남부원 아시아태평양YMCA 사무총장, 박경미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교수 등이 추모사와 회고의 순서를 맡았다.

서광선 교수는 압록강변 강계 출신으로 그의 부친 서용문 목사는 만주와 평양에서 사역하다가 6.25 때에 공산군에 의해 순교했다. 그의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한 후 남하한 서교수는 해군에 입대하여 미국에 가서 훈련받을 기회가 주어졌고 그것이 기회가 되어 뒷날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몬타나 주의 로키 마운틴 대학과 일리노이 주립대학원을 거쳐 유니언신학교를 졸업하고 귀국, 1964년부터 이화여대에 봉직하였다. 현영학 서남동 안병무 김용복 교수 등과 함께 한국의 신학계를 새롭게 이끌어가면서 강문규 총무가 이끄는 전국 YMCA운동에도 관여, <목적과 사업> 위원회의 정신적 기틀을 마련하는 데도 힘썼다.

남녁의 고신파(高神派) 신앙에서 자란 필자가 서광선 교수 등 진보적인 신학자들과 접촉하게 된 것도 1970년대 전국 Y 운동과 관련되어 있다. 1957년에 서울로 올라온 필자는 김형석 교수의 신앙강좌에 꾸준히 참석, 지금까지의 신앙적 폐쇄성을 지양하는 한편 가끔 함석헌 선생의 강연에도 참석하면서 세계관을 넓혔다. 그 폐쇄성은 성수주일(聖守主日)에 지장이 있을까봐 대학재학 중 매학기마다 실시하는 고적답사에 한번도 참석하지 못하도록 했을 정도였다. 이런 자세는 1970년 대학의 전임이 되고 난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러다가 1972년 ‘10월 유신’은 필자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고, 역사학이 이런 시대적인 과제에 대답해야 하지 않느냐는 고민도 함께 안겨 주었다. 그것을 계기로 한국기독교사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73년에 발표한 <한말 기독교인의 민족의식 형성과정>이라는 논문을 계기로 소위 진보진영 기독교계와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의 그 논문을 접했던 진보 신학자들이 Y연맹의 <목적과 사업>위원회의 토론에도 불러주었고, 또 1970년대 중반에 활발하게 전개되던 민중신학 토론에도 참여, 대화의 시간을 갖도록 했다.

이럴 무렵에 필자는 서남동 안병무 현영학 서광선 김용복 박사 등과도 자주 접촉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때 서남동 교수가 한국사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여 접촉이 잦았던 편이었고, 안병무 현영학 교수께서도 필자를 ‘보수꼴통’이라고 놀려대면서도 대화할 기회를 자주 마련해 주었다.

필자가 서광선 교수와 가깝게 된 것은 1980년 전두환과 신군부에 의해 해직교수 사태가 일어난 후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광주민주화운동을 짓밟은 신군부는 자기들에게 비판적인 대학과 언론에 대해 재갈을 물리려고 했다. 대학 학생회 간부들이 학교에서 쫓겨났고 교수들도 자기들 기준에 따라 대학에서 추방시켰다. 이 때 대학에서 추방된 교수들이 약 80여명이나 되었는데 그 중 50여명은 시국관련 정치적 사건으로 해직되었다.

이화여대에서도 현영학 서광선 이효재 교수 등이 해직되었고 필자 또한 해직의 말석을 차지했다. 해직교수 중에는 한완상 이명현 김찬국 서남동 안병무 등 기독교수들이 다수 있었다. 서광선 교수님은 해직기간에 장신(長神)에서 공부하여 목회에 나섬으로 순교하신 선대의 유업을 계승하기까지 했다. 해직교수들은 가끔 모여 서로를 위로 격려했는데, 언제 복직이 될 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같은 처지에 있는 이들이 만나는 것 자체가 위로가 되었고 서로에게 힘이 되었다. 서광선 교수와 인간적인 교감까지 갖제 된 것은 이 무렵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서광선 교수는 부친의 순교에다 실향민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면서 누구보다 분단의 아픔을 깊이 느끼고 있었다. 그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해 민주화운동과, 1970년대부터는 기독교 평화통일운동에도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것이 1988년에 선언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88선언)으로 나타났다. 이는 KNCC 통일위원회 산하의 기초위원(오재식 강문규 김용복 박종화 이삼열 민영진 홍근수 노정선 서광선 김창락)이 작성, 2월 29일 연동교회에서 개최된 KNCC 총회에서 발표, 모두들 눈물을 흘리며 기립박수로 채택했던 것이다.

이 선언은 한국의 평화통일 이정표에서 가장 빛나는 금자탑으로 그 내용과 문장 또한 빼어났다. 이 선언에 자극받은 노태우 정부가 그 해 <7.7선언>을 발표하게 된 것만 봐도 이 선언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이 ‘88선언’의 초안은 서광선 교수가 직접 작성했는데 아직도 그 원본을 보관하고 있다. 오늘 추모예배에서는 이 원본이 공개되기도 했다.

필자는 최근 몇년 동안 서광선 교수님을 일산의 고양포럼이나 학회에서 가끔 만나곤 했다. 한번은 3호선 지하철 안에서 만났는데, 어디 가시느냐고 물으니 집(일산)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반대방향으로 가시면서 귀가하는 길이라고 했다. 한번은 필자가 서광선 교수와 같이 고문으로 있는 평통연대 칼럼난에 <통일, ‘헛꿈’꾸기>라는 글을 게재했는데 게재한 지 얼마 안되어 서 교수님께서 ‘헛꿈’ 잘 꾸고 있다는 격려를 즉각 주시곤 했다. 코로나가 오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일년에 몇 번은 뵈었는데 그 후에는 그마저 어려워졌고 그런 상황에서 비보를 듣게 되었다.

그를 먼저 보낸 지금, 내게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는 늘 유모어로서 좌중을 웃기고 대화를 이끌어갔는데 그 유모러스한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현영학 교수와 같이 날 보고 가끔 ‘꼴통’보수라고 놀리곤 했는데 그게 싫지 않았다. 서 교수님은 테니스를 좋아해 미국에서도 정구복에 라켓을 들고 모임에 참석한 경우도 있었다. 그래서 ‘언제 테니스 한 번 같이 칩시다’라고 했지만 이 약속을 한번도 지키지 못해 아쉬웠다.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몇년 전 서 교수님께서 당신의 여정을 정리한 『거기 너 있었는가, 그 때에』를 간행하고 제자교수님을 시켜 출판기념회 때에 행할 서평을 내게 부탁했는데 그것을 들어드리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지금도 너무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다. 바로 그 때가 임정기념사업회의 독립정신답사단을 이끌고 해외독립운동유적지를 인솔해야 할 때였기 때문에 나로서는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었다. 지금도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그 때 그 청탁을 들어드리지 못한 경위를 서 교수님께 직접 설명드리지 못했을 뿐아니라 이제는 그럴 기회마저 없어졌다는 것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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