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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2.09.01  12:5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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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회 분열과 근본주의

정병준(서울장신대 교회사)

이 원고는 가스펠 투데이가 기획한 "정통교회를 흔드는 실체, 근본주의를 파헤친다" 라는 주제하에 근본주가 미국에서 어떻게 생성되고 이 땅에 뿌리내렸고 그 폐해는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한 기획기사중 두번째다. 첫 원고는 장신대 안교성 교수가 세번째는 임희국 교수가 연재한 바 있다. 그중 정병준 교수의 원고가 그동안 예장뉴스에서 지속적으로 보도해온  해방후 한국교회사 발굴작업의 일환으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올린다. 

Ⅰ. 서론

이 글은 해방 이후 한국장로교 분열과 근본주의의 관계를 검토하려고 한다. 그것을 위해 한국장로교회의 근본주의 신학에 교사 역할을 했던 메이첸의 활동과 칼 매킨타이어의 신학 및 정치사상을 간단하게 검토한다. 그리고 1950년대 예장 고신, 기장, 통합과 합동으로 교단이 분열되는 과정, 1960년대 칼 매킨타이어의 국제기독교협의회(ICCC)의 한국 조직이 생성되고 소멸하는 과정을 살필 것이다. 이 글을 통해 한국장로교회 분열의 핵심 원인이 근본주의적 사고와 조직에 의해 발생했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Ⅱ. 메이첸과 칼 매킨타이어의 활동

해방 이후 한국교회 근본주의와 장로교 분열에 직간접 영향을 끼친 미국인은 메이첸((John Gresham Machen, 1881-1937)과 칼 매킨타이어(Carl McIntyre, 1906-2002)였다. 메이첸은 찰스 핫지와 워필드의 구프린스톤 전통을 계승하면서, 1906년~1929년까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신약학을 교수하며 성서비평학을 비판했다. 그는 현대주의에 대해 불관용의 원칙을 고수했고 1929년 프린스턴신학교를 떠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웠으며, 1933년 미북장로교회로부터 분리된 독립선교부를 세웠고, 1936년에 정통장로교회를 세웠다. 

메이첸에게 직접 교육을 받은 한국인 신학자는 박형룡(프린스턴신학교, 1923-1926), 김치선(웨스트민스터 신학교 1931-1933), 박윤선(웨스트민스터 신학교, 1936)이다. 메이첸은 근본주의 신학자로 알려졌으나 그는 세대주의 전천년 종말론을 지지하지 않았고, 그의 활동은 주로 신학교육의 차원에 국한되었으며 1937년 1월 1일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신학 사상이 한국 장로교회 분열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가 세운 독립선교부와 정통장로교회가 한국에 파송한 선교사들은 고려신학교와 함께 활동했고 훗날 매킨타이어의 한국진출에 교두보가 되었다.

매킨타이어는 1927년~1929년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하던 중 스승인 메이첸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가서 공부했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하지만 1936년 그는 메이첸을 비판하고 12명의 목사를 이끌고 나가 ‘성경 장로교회’를 세웠고, 1937년에 페이스 신학교를 세웠다. 한경직과 한국 선교사 보켈(Harold Voelkel, 옥호열)은 매킨타이어와 프린스턴 동기생이다. 헌트(Bruce Hunt, 한부선)와 킨슬러(Francis Kinsler, 권세열)는 그들의 한 해 선배다. 매킨타이어는 미국연방기독교연합회(FCCC)를 반대하기 위해 1941년 ‘미국기독교교회협의회’(ACCC)를 세웠고, 1948년에 세계교회협의회(WCC)를 반대하기 위해 국제기독교협의회(ICCC)를 설립했다. 1942년 ‘복음주의협의회’(NAE: 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가 결성된 후, 매킨타이어는 NAE가 WCC 회원교회의 소속 인사를 수용하고, WCC 탈퇴를 강요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빌리 그레이엄에게 “배교자들의 은신처”라고 비난했다.

한국교회의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칼 매킨타이어의 근본주의 신학과 반공주의 사상에 관심이 있었으나 그의 정치⋅경제 사상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매킨타이어가 한국에서 많은 교회분열에 개입한 이유는, 그의 종교⋅정치적 사상에 근거한 세력 확장 때문이었다. 칼 매킨타이어의 신학 사상은 칼빈주의 선택교리와 세대주의 종말론에 근거하고 있었다. 그는 1941년 ACCC를 설립하면서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1950년-1960년대 기독교 반공주의의 선봉에 섰다. 그는 백인 우월주의에 기초한 서구 문명을 방어하기 위해서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식민지의 독립에 반대했다. 그리고 인종 분리주의 철폐와 흑인선거권 운동은 미국의 전통 가치와 자유를 붕괴시키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고 보았다. 그는 또한 뉴딜 정책과 같은 정부의 개입주의에 반대했고, 자본의 완전한 자유방임주의를 지지했다. 매킨타이어는 자신의 싸움을 빛과 어둠의 싸움으로 표현하는 이분법적 수사학을 사용했다.

그는 1957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부의 인종분리정책을 지지하면서 남아공 정부로부터 경제적, 정치적 후원을 받기 시작했다. 매킨타이어는 WCC 에큐메니컬 운동을 “개신교 배교자” “스며들어온 사회주의자”로 공격했다. 그는 인권운동이 주장하는 “인류의 형제 됨”은 집단주의 사상이고 사회복음의 연장이며 중생이 일어나기 전까지 인간은 형제도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매킨타이어의 반공주의, 친자본주의, 백인우월주의, 인종 분리주의는 강력한 우파 정치 동맹 세력을 형성했다.

매킨타이어의 전투적 근본주의는 종교 신학과 정치 행동의 통합체였다. 즉 세계 복음화를 통해 예수 재림을 기대하는 영혼을 구하는 것과 제3세계 안에서 유럽식민지를 유지하는 것, 백인주류 사회에서 인종분리정책을 지키는 것, 에큐메니컬 운동과 로마가톨릭과 공산주의 확산을 방지하는 것은 다 연결된 일이었다.
매킨타이어는 1960년대 중반 단파방송(The Twenty-Century Reformation Hour)을 통해 엄청난 모금을 했고, 한국과 인도와 아프리카에서 WCC를 탈퇴한 교회들을 경제적으로 후원하며 ICCC 조직을 확대해 갔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와서 페이스 신학교의 분열, 라디오 방송국의 방송규제 이후 그의 제국은 균열 되기 시작했다.

매킨타이어의 근본주의 운동은 전 세계적으로는 극히 미미한 세력이었지만 미국, 한국, 남아공의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에게는 영향력이 컸다. 근본주의 운동이 힘을 얻을 수 있었던 곳은 반공과 인종차별주의가 강한 곳뿐이었다. 한국의 경우 인종차별정책은 없었지만 6.25 전쟁 이후 매킨타이어의 반공주의와 자금은 특별히 분열된 교회들에 큰 영향력이 있었다.

Ⅲ. 한국장로교 1차 분열과 매킨타이어 조직의 활동

매킨타이어는 1949년 중국의 공산화와 6.25 전쟁으로 인해 한국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당시 한국에는 정통장로교회 소속 홀드크로프트(J. Holdcroft), 치솜(W. H. Chisom), 말스베리(D. R. Marlsbary), 해밀톤(F.F. Hamilton), 헌트(B. Hunt) 등이 고려신학교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말스베리와 홀드크로프트는 ICCC에 소속되어 있었다. ICCC를 고려신학교에 소개한 사람은 박윤선이었다. 1949년 고려신학교는 ICCC를 지지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951년 5월 부산에서 열린 제36회 속회 총회는 경남법통노회의 대표들에게 회원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고신 측을 배제했다. 이러한 분열은 신사참배와 관련된 교회 정화 문제가 일차 원인이었으나 고신 측이 정통장로교회 선교사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음으로 북장로회 선교사들과 불편한 관계가 형성된 것도 큰 원인이다.
1951년 6월에 고신 측과 가까운 22명의 국회의원은 WCC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도 용공 집단이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국회의장인 이규갑은 이승만의 지시를 받고 「기독교와 용공정책」이라는 팸플릿을 번역하여 정계와 교계에 배포했다. 선교사 치솜은 한국 국회의원들의 WCC 비난 성명을 번역해서 매킨타이어가 발간하는 「크리스찬 비콘」에 게재했다.
1953년 7월 이승만은 세계교회가 휴전을 선호한다는 WCC 입장을 전달받았고 이것은 이승만을 불편하게 했다. 1954년 미국 에번스턴 제2차 WCC 총회를 앞두고 이승만은 매킨타이어 그룹과 긴밀하게 접촉했고 한경직의 WCC 총회 참석을 막았다.
그러나 1954년 8월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ICCC 대회에는 한상동, 박윤선, 이약신, 박손혁 등 고신의 지도자들이 참석할 수 있게 배려했다. 이때 매킨타이어는 페이스 신학교에서 한상동과 박윤선에게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이것은 한국에 ICCC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매킨타이어의 전략이었다.
또한 매킨타이어 그룹은 1953년에 창립된 한국복음주의협의회(NAE) 인물들과도 접촉했다. 이승만은 매킨타이어와 한국의 교회 세력과 연합해서 WCC를 용공으로 공격했다.
칼 매킨타이어는 1956년 9월에 방한해서 고신의 ICCC 가입을 권유했으나 고신은 ICCC의 신학적 입장에 동의했지만, 조직으로 가입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WCC에 대한 용공 논쟁은 1950년대 중반 WCC와 미국의 에큐메니컬 지도자들이 중국의 유엔 가입을 지지하면서 다시 불거져 나왔다. 프린스턴신학교 학장이며 국제선교협의회(IMC) 회장이었던 존 매케이는 1956년과 1957년 미국 NCC의 ‘삶과 봉사’(Life and Work) 및 ‘국내선교위원회’에서 중국 본토 교회와 재접촉할 것과 중국의 유엔 가입을 강조했다. 이것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을 공산권에서 분열시키려는 미국의 국제전략과도 일치했다. 매케이는 중국기독교의 미래를 위해 중국을 국제사회로 끌어내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의 반공주의 기독교회와 한국교회 안에 다시 한번 WCC 용공론에 불을 붙였다.
한편, 중국의 팅(丁光訓) 주교는 1956년 8월에 독일 투칭에서 열린 세계기독교학생연맹(WCSF) 세계대회에 참석했다. 이때 3명의 한국 YMCA 대표들은 대회에서 퇴장하였다.

Ⅲ. 한국장로교 2차 분열과 NAE 조직의 형성

해방 이후 남한에는 조선신학교가 장로교의 총회신학교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신학교와 김재준의 신학적 지도력을 제거하고 과거 평양신학교의 신학과 전통을 재건하려고 하는 세력이 성장하면서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를 중심으로 한 갈등과 분열이 지속되었다.
이 과정은 소위 보수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싸움이라는 수사학이 사용되었으나. 그 내면에는 평양신학교 신학교의 신학교육 주도권의 회복, 서북 장로교회의 패권과 지역갈등, 박형룡과 김재준으로 대표되는 신학 갈등과 감정, 월남 기독교인의 증가, 교권 투쟁과 같은 다양하고 복합적인 문제들이 얽혀있었다.
1947년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은 김재준 교수의 신학을 고발하는 진정서를 총회에 제출하면서 이 갈등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신학생들은 박형룡을 따라 남산의 장로회신학교를 마치고 강고한 목회자 조직을 구축하였다.
그들은 1953년 복음주의협의회 한국지부를 조직했다. 고문에는 박형룡, 회장에 정규오, 총무에 조동진이었다. NAE는 초교파적인 조직이었으나 그 중심은 장로교 목사들이었고 그들은 조선신학교와 김재준을 축출하면서 강력한 교권 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들의 신학적 특성은 박형룡을 지지하고 따랐다는 점에서 큰 범주에서 근본주의적으로 볼 수 있다.

Ⅳ. 한국장로교 3차 분열과 매킨타이어의 활동

1959년 한국장로교회 3차 분열은 한국장로교 NAE 세력과 에큐메니컬 세력의 교권 갈등의 결과였다. 그것이 에큐메니컬 신학에 대한 정통보수주의자들 사이의 신학적 갈등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NAE 세력이 교권을 놓칠 위기에 처하지 않았다면 굳이 교단이 분열되는 상황까지 가지 않았을 것이다.
1957년 총회신학교 박형룡 교장의 삼천만 환 사건 이후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선교 재정을 협의하는 협동사업부에서 NAE 측 지도자들을 배제했다. NAE 측은 미북장로교회가 ‘미연합장로교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해외선교부를 ‘에큐메니칼 선교와 관계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한 것에 대해 신학적 변질이라고 공격하면서 총회 헌법에서 선교협력 교단의 명칭을 변경하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또한 NAE 측은 미연합장로교회 선교회에 속한 계명대학교와 신명여학교 기숙사의 재산을 불법적으로 획득하려고 시도하면서 양측의 갈등이 폭이 깊어졌다. 훗날 3개 장로교 선교사들이 전부 통합 측을 지지하게 된 것은 신학적 문제가 아니라 NAE의 윤리적 문제 때문이었다. 그것은 지속해서 박형룡의 신학을 지지했던 남장로회 선교사들까지 돌아서게 했다.
한국장로회 NAE는 경북 NAE(박병훈), 호남 NAE(정규오), 이북 NAE(김윤찬)의 정치적 연합체였다. 이들은 박형룡을 앞세워 긴밀한 연합체를 이루었고 총회 교권과 남산 총회신학교의 주도권을 공유하고 있었다.
1959년 9월 장로교 총회가 파행된 이후 에큐메니컬 측은 연동교회에 모여 연동총회를 조직했다. 즉시 매킨타이어가 내한하여 WCC 탈퇴를 주장하는 NAE 측에게 ICCC 가입을 권하였다. 그 후 선교회들과 중립 측은 갈라진 양편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김윤찬은 11월에 매킨타이어와 일행을 한국으로 불러들여 11월 13일~20일의 일정으로 전국을 순회하면서 “용공론, 단일교회론, 신신학”이라는 주장으로 WCC를 공격하였다. 이것은 총회 분열 과정에서 더 많은 교회를 NAE 측으로 확보하고 선교사들의 지원이 끊어진 상황에서 ICCC의 재정을 지원받으려는 전략이었다. NAE 측의 승동총회는 11월 24일에 개최하였다.
김윤찬은 승동총회 직후 ICCC 매킨타이어에게 WCC 탈퇴와 ICCC 가입을 조건으로 재정지원을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매킨타이어는 홀드크로프트를 통해 크리스마스 선물로 12만 불을 지원하였다. 이 돈은 신학교 건물구매와 신문운영비, 지방교회 수습 등에 사용되었다.
승동 측은 이 사건으로 인해 ICCC 찬반 논쟁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매킨타이어의 바램과는 다르게 승동 측은 ICCC와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 결과 박병훈과 김치선은 ICCC 지원을 받아 합동 교단에서 탈퇴하여 자신들의 장로교단을 세웠다.
1960년 7월 매킨타이어는 서울에서 ICCC 극동대회를 개최했다. 그리고 1961년 11월 인도 뉴델리에서 열리는 제3차 WCC 총회를 반대하는 한국 측 인원을 조직했다. 그러나 정작 인도 뉴델리에서 매킨타이어의 ICCC는 환영받지 못했다. 매킨타이어는 WCC 총회 반대 집회를 마치고 남은 재정으로 한국에서 성결교회의 분열을 지원했다.
1960년대 교단 차원에서 ICCC에 가입된 단체와 지도자는 기독교침례교(안대벽, 1961년 3월 16일), 성경장로교회(김치선, 1961년 9월), 예수교성결교회(1961년 12월 19일), 예장 호헌총회(박병훈, 1962년 9월 12일), 예수교감리회(전덕성, 1962년)이다. 매킨타이어는 이상의 교회와 한국 ICCC 지부를 총망라해서 ‘한국예수교협의회’(KCCC, 1965년 6월)를 조직했다.
매킨타이어는 1966년 11월에 방한해서 고신의 ICCC 가입을 종용했고, 고신은 내부적 찬반 논쟁을 통해 1968년 9월 총회에서 ICCC에 가입하지 않기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한국예수교협의회’(KCCC)는 내부분열을 통해 1968년경 소멸하였다. KCCC 산하 교파들은 모두 ICCC가 직접 개입하여 분열시켰다. 1967년 봄 예수교감리회의 전덕성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교단이 분열되었다. 호헌 교단의 박병훈을 축출하는 과정에서 교단이 분열되었다.
ICCC 재정으로 대한신학교를 유지했던 김치선의 성경장로교단도 1968년에 ICCC 공작으로 분열되었다. 같은 해 기독교 침례교회도 비슷한 이유로 분열되었다.
1979년 합동 교단의 분열은 순수하게 교권 갈등의 결과였고 그 이후 주류, 비주류가 분열되었고 비주류 안에서도 수많은 핵분열이 일어났다.

Ⅴ. 결론

이 글은 1950년대와 1960년대를 중심으로 한국장로교회 분열의 역사를 고찰하였다. 1950년대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은 신사참배 문제, 신학교육의 주도권을 둘러싼 보수-진보의 갈등, 장로교 복음주의협의회(NAE) 교권의 위기로 발생한 에큐메니컬-반 에큐메니컬 싸움을 주원인으로 언급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배후에는 미국에서 근본주의 신학적 훈련을 받는 신학자들의 영향력이 작용했고, 미국정통장로교회 선교사들의 활동, 칼 매킨타이어의 한국교회 분열 전략이 있었다. 1960년대 한국장로교회 분열은 칼 매킨타이어가 ICCC 조직을 한국으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분열 전략이 크게 작용했다. 이 글은 1970년대 이후 한국장로교회의 분열의 역사를 다루지 못했지만, 절대다수가 근본주의 신학적 영향력을 가진 교단들 내부의 교권 다툼으로 분열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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