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만목사 자전적 수기 출판 - 예장뉴스
예장뉴스
CultureBook
최준만목사 자전적 수기 출판
유재무 편집인  |  ds2sgt@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22.11.16  16:03:18
트위터 페이스북

              이제는 내려가라(Now get down)

'내려가라' 라는 단어는 구약성서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Let my People go" 라고 내 백성을 바로의 압제에서 놓임을 받게 산에서 네려가라는 말씀이 니온다. 또 신약성서 마 17:1-13 에도 산에서 제자들에게 '내려가라' 는 단어가 나온 다. 따라서 내려가라는 의미는 세상으로, 낮은 곳으로, 힘든 곳으로 가라는 의미로 받아드린 것으로 이해된다(필자 주)  .   

태백은 우리나라 산업화의 동력이 되었던 석탄의 도시로 이후 증산(지금은 민둥산 역)에서 정선으로 들어가는 기차를 함백산에 터널을 뚤어 황지까지 연결한 최초의 전기 철도개설구간이다. 이전에는 영주에서 강릉행을 영주 봉화 석포을 지나 철암과 통리 도계를 지나 동해와 강릉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석탄을 제일 먼저 개발한 것은 일본인으로 이후 삼척군 장성읍의 장성탄좌(현재 대한석탄공사)였는데 이 일대가 광산도시가 된다,

이렇게 해방 후 삼척군 장성읍에 가장먼져 생긴 교회는 장성중앙교회(1948년)로 고 이성찬 목사(이승열목사 부친)가 초대 목사다. 이곳에서 임영수목사, 오창학목사, 이삼열박사가 어린 시절을 보낸다. 그후 황지시내에 황지교회(1951년)가 세워지고 1981년도 이정규목사 부임 후 광산복지선교회를 조직하고 광부라는 계층을 광원으로 순화하여 그들의 사정과 요구에 응답하려는 사회선교를 시작하게 된다, 이런 이정규 목사의 구상을 돕기 위하여 윤창현 목사가 초대 총무(1984년)로 부임한다.

광원들이 중심이 된 '광원회' 를 만들고, '막장의 빛' 이라는 잡지들을 만들고, 이후 '광목회'(광산지역 목회자)도 조직한다. 그 때 황지교회에는 최준만 목사가 부목사로 시무 중이었다. 이후 최목사는 기전여고 교목을 거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최 목사 부친은 최목사 가족의 생계를 위하여 광산에 왔는 데(1958년도), 회사는 일자리와 주택과 각종 복지시설을 구비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전국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는 사람들이 광산지대로 몰려왔고 교회들도 호황을 이룬다.

최준만 목사는 금년도 10월 10일에 낸 책에 보면 가난을 벗기 위하여 열심히 공부한 것으로 보인다. 막 세워진 황지고 2회(1970년 졸업)로 비록 재수는 했지만 연대 경제학과 71학번으로 입학을 한다. 광산 도시 태백에서는 그야말로 개천에서 용이 난 격이라고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좋은 금융회사에 취직도 하여 보수도 많이 받던 잘나가는 인생을 포기하고 신학대학원에 입학한 것이다.

   
 

윤창현 목사 상장중앙교회 은퇴
금년 11월 13일(주일) 상장중앙교회 3대 목회자였던 필자의 오래지기 윤창현목사 은퇴식에 참석하여 나는 친구들을 대표하여 축사를 하였다. 한 교회에서 37년간 목회하였지만 어려운 지역의 교회에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하여 원로목사직을 사양했다. 77기 동기회 조승철 회장과 노회 임인채 목사(동해장로교회)도 축사를 했다.

나는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했다” 는 말로 시작하여 태백에 남은 최준만, 이상진, 윤창현 목사는 모두 한 교회를 20년 롱런을 하고 은퇴들을 하는데 비하여 더 낳은 곳이라고 하여 태백을 떠났던 동역자들은 모두 망했다는 우스게 소리를 했다. 나 자신도 1998년 의정부로 이임했지만 이후 일본선교사로 다녀와 목회로 정착하지 못하고 전도목사로 지내면서 은퇴식이 부럽기만 하다고 하소연을 했다.

윤창현 목사 은퇴식 행사 후 태백에서 사역 후 은퇴하고도 남다른 사역을 찾아서 하는 최준만 선배와 만나 회포를 풀던 중 최근에 나왔다는 자전적인 기록인 책자를 받았다. 최 목사는 장신대 74기로 인생으로나 학교로나 선배다. 태백을 떠났지만 방문할 때 마다 대접도 받고 차비도 주시고 늘 크게 신세를 져도 웃으면서 감당하시는 참 좋은 선배로만 인식되는 분이다.

황지와 최준만 목사

그러나 이번에 낸 책을 보면서 나는 최 목사께 좀 더 인생을 배우고 자문을 받지못한 것이 후회스럽고 죄스럽다. 여러 면에서 나보다 학문적으로나 세계적으로 가정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분으로 도와드리고 상의를 해봐야 무슨 소용이 되겠냐는 식으로 관계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는 사실 최 목사도 책임이 있는데, 한번도 자신의 속사정을 이야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광부의 아들로 연대 경제학과를 나와 미국 아틀란타 컬럼비아신학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다시 황지교회로 온 분이다. 그것부터가 밑으로 내려온 것이다. 더 높은 곳이 아닌 곳으로 자신의 사역 방향을 정한 것이다. 사모는 마취과와 정신과 의사로 겉보기에는 남부럽게 생각한다. 그러니 뭐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책을 보면 그들 나름대로 경제적으로도 그렇고 가정이나 마음으로 큰 고통과 어려움을 겪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야 이해가 되고 다시 한번 최 목사의 인격과 신앙을 이해하게 되었다. 복지선교회 총무로 와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이정규목사 은퇴 후 당연히 황지교회 후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당시 사정을 내가 바르게 아는 것은 당시 태백시찰장으로 나는 황지교회의 임시 당회장을 하는 것으로 마음의 준비를 했다. 후임 청빙과정에서 최 목사께서 담임목사가 될 수 있도록 협력할 수 있는 좋은 위치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회원들은 나를 기피하였다. 큰 교회인데 목회경험도 그렇고 시찰내 다른 선배 목사를 선호하고 있었다. 도시와 달리 지방은 시찰장이 그래도 좀 위상이 통용되던 시기다. 당회장이야 해당회가 원하고 노회가 허락하면 그만이지만 지방은 시찰회가 넓어 매월 모이는 시찰위원회를 중심으로 노회의 일이 돌아간다.

그래서 뻥을 치기를 시찰장을 청하여 당회를 하지 않으면 당회장 파송을 추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고, 그 말을 믿고 당회원들은 난감해했다. 결국 한 당회원의 중재로 첫 당회는 시찰장이 주재하고 당회원들이 원하는 분을 추인해 주는 것으로 하자고 하여 나는 첫 당회를 하고 임시 당회장으로 원하는 분을 추천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였다.

   
                                                   * 이 책은 아쉽게도 비매품입니다. 

황지교회와 이정규목사
고 이정규목사는 기장 출신으로 목포 항도교회 부설 공생원(윤치호가 설립 그의 일본인 부인이 운영)총무를 지내신 분으로 이후 경기노회 시절 남노회 남현교회로 이명 청원을 허락받고 목회하던 중 가족의 사고로 어려움을 당하자 사원 사임 후 카나다로 이민목회를 떠나는 최삼우열 목사의 후임으로 황지교회에 부임한다(1981년도).

그리고 광산지역 맟춤형 사회선교를 도입하여 황지교회의 전폭적 지지를 받아 복지선교회를 크게 키우고 전국적으로 이름을 나게 한다. 독일 등 해외에서도 목회와 지역사회 복지를 실천적으로 결합한 성과있는 기관으로 신뢰를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많은 교회가 방문하고 후원도 하는 등 복지선교회를 경영마인드로 성공시킨 분이다.

그러나 시간은 모두에게 평등하듯 이 목사께서도 은퇴를 하시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동안 조용한 성격에 이목사와 호흡을 맞춰온 최목사가 후임이 될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했던 것이다. 최 목사의 책에도 보면 이목사도 최목사가 좀 부족하지만 후임이 되기를 바라셨던 것 같다(그래야 복지회나 황지교회에 직간접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일부 장로들 중에는 그동안도 복지선교회 뒷바라지로 이 목사의 외부 활동으로 지쳤는데 복지선교회 총무를 하던 최 목사가 온다면 더하면 더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신 것 같다. 가뜩이나 교인들도 막상 교인이 늘거나 교회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 복지선교회 활동에 피로감이 있었을 때였다.

이에 후임자는 복지회와는 상관없이 오직 목양에 전념할 분을 모시자는 바람이 불어 최 목사는 후임자 군에도 들지도 못한 체 그의 인격을 아는 교인들이 원함에도 불구하고 후임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최 목사는 황지교회로 부임하는 것을 하나님께 맡겼고, 막상 부임한다면 더 이상 복지선교회 실무자가 아닌 지교회 위임목사로써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것이 분명했다.

후임자는 이정규 목사 직전 목회하다가 카나다로 이민 목회를 떠난 최삼우열 목사이시다. 서울 영락교회와 청량리중앙교회에서 목회를 하신 중진급으로 인격 또한 훌륭한 분이다. 그러나 나는 처음 뵙는 분으로 시찰회서 시민권 소지자라고 하여 위임청빙은 불가하다고 하여 임시 목사로 청빙을 받고 오신다.

그러나 은퇴할 때까지 목회를 하지 않으시고 3년 정도 하시고 다시 카나다로 떠나셨다. 그런데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것은 당시 이정규목사나 최준만목사는 흡사 부자처럼 밀월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건강하시고 아이디어가 많으신 이 목사께서 은퇴를 하시고 위치할 곳이 어디냐?를 놓고 두 분이 금이 간 것으로 보인다.

   
 

황지교회 후임은 날아가고
당시 아직 젊고 모든 기반을 놓은 최 목사는 이 목사께서 본인 스스로도 종종 말했듯이 서울로 가셔서 외부에서 복지선교회를 지원하는 역할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목사께서 태백을 떠나지 않고 복지회 회장과 안식의 집 원장으로 월급을 받는 실무자로 복귀를 하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실 최 목사는 비서실장 밖에 안되는 것으로 모든 사업을 총괄하던 입장이 아니라 이목사의 결제를 받아야 하는 지경이 된 것이다.

이런 구도 속에서 최 목사가 먼져 큰 결단을 한 것으로 이해가 된다. 사임을 한 것이고 이 목사께서는 그것을 수리한 것이다. 그런 사역의 단절은 당시 최 목사로써는 감당할 수 없는 아픔과 좌절이었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잘난 분이 일도 잘하듯이 집짓고 사모가 병원하고 대학 동기들 잘된 분이 뭐 어려운 일이 있겠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광부의 아들로 유학을 마치고도 이후 동기들의 권유나 도움으로 임지를 찾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제목처럼 “이제는 내려가라” 라는 모세가 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기도하며 묵상을 하던 중 일부 따르던 분들의 권유로 어디 갈 곳도 마땅치 않은 가운데 가정예배를 드리게 된다. 그리고 결국은 개척교회라는 모험을 한다.

당시 광산이 흥할 때 세워진 교회들이 폐쇄를 하고 합병을 하는 가운데 또 하나의 교회를 세운다는 것은 사실 큰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모교회인 황지교회로 부터도 반대와 비판의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나 최 목사의 강점은 본인이 기도하고 결심한 것은 실행에 옮기는 특기가 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작한 최 목사
이번에 그런 증거들을 봤는데 황지교회 안에 있던 인표도서관이 나오게 되자 이를 건축하여 다시 안치한 일과 복지선교회 시절 산골전도대를 통하여 오지 골짜기에 복음의 씨를 뿌려 미동교회와 신리교회라는 열매를 맺은 것이다. 또 이 과정에서 함께 동역한 태백성서신학원 출신 지호규 이주영 집사께서 목사가 되었고, 한분은 강원노회 노회장으로 되셨다는 소식이다. 당시 최 목사는 성서학원 원감을 겸임했다.

끝으로는 태백 해비타트(무주택자에게 집을 지어주는 국제 단체)에 얼킨 일화다. 결론만 말하면 대학 때 연대 UBF출신인데(지금은 개혁파인 ESF에 소속함) 진보 신학자로 유명한 박득훈목사가 같은 학과 동기이며 멘토였다고 한다. 거기서 조직에 대한 문제점을 용감하게 지적하고 나온다. 그후 50주년 홈커밍데이에도 불참하는 강단있는 분이다. 그리고 해비타트 사고 수습이나 본부과의 결별 등은 지금 와서 보면 예리하고 논리정연한 최 목사의 다른 면을 볼 수 있다. 자신이 세운 장로들과의 신앙적 갈등을 이겨내고 기록한 것도 돋보인다.
직접적으로는 한 공간에서 최 목사와 같이 일을 한 경험이 없어 업무 스타일은 알 수 없었는 데 기록을 보면 공감이 되는 것들이 많다. 그는 기독교 공동체 안의 조직이란 기본적으로 신앙적 양심에 따르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사역을 잘 이끌고 조직의 질서를 중요시 여겼다고 한다. 나는 다음에 최 목사가 소개하는 대목이 어디서나 준용되야 할 가치라고 보야 소개한다.

복지회 총무로 남긴 교훈
1.조직의 질서를 존중하다,
2.말을 줄이고 입이 아닌 몸으로 하라
3.권위(윗사람)에게 일단 순종하라
4.머리나 이론이 아닌 몸으로 하라
5.함께 간다는 의식을 가져라
6.일은 사람이 한다(돈도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7.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8.교회와는 거리를 둬라(교회가 설립한 기관이나 조직의 예)
9. 내가 먼저 마중물이 되자(앞장서고 모범이 되는 것)
10.교회(인정)을 얻고 사람(후원자)을 얻고 직원을 얻고 지역사회를 얻는 길을 연구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그리고 말은 적게 하고 친절(인사)하고 신뢰를 얻고 정직(재정)하고 절제하는 것이다.

최 목사는 늘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응답을 기다리며 내려가야 할 때 내려갔더니 더 소중한 것들을 만나는 체험을 한 것이다. 그러나 일상에서는 최 목사의 그런 고뇌와 경건성은 보이지 않는다. 모든 사람들은 최 목사는 늘 부족함이 없고 원하는 대로 되는 사람이라고 착각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다.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내공에는 최 목사의 끊임없는 탐구력이 뒷받침한다. SFTS(샌프란시스코)에서의 박사 학위, 하와이 열방대학에서의 공부, 나중에 에스라성경연구원을 사모와 함께 공부하여 늦은 나이에도 다시 석사학위까지 한다. 이런 자산으로 광산지역(태백 고한 사북 도계 삼척 등)에서 목회자 성경 강좌까지 열어 지방에서 에스라성경연구원을 통하여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있다.

테백연동교회 창립과 65세 은퇴
끝으로 태백연동교회 건축은 그야 말로 최 목사의 상상 그 이상을 뛰어 넘는 기적이었다. 복지선교회에 많은 도움을 준 고 박창빈 목사께서 연동교회가 102년 기념으로 개척교회를 세운다는 정보를 준다. 그간 연동교회는 많은 일을 했지만 초창기외에는 교회를 하나도 개척하여 세우지 않았다는 반성으로 이번에는 교회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다.

생면부지의 이성희 목사를 뵙고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후에 당회는 여러 곳을 물색한 끝이 태백연동교회를 짓기로 결정(1996년)을 한다. 그렇게 해서 최 목사는 당신의 젊음을 다 받친 복지선교회에서는 마음 아프게 나왔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 연동교회의 후원으로 창립하던 해에 건축을 한 특별한 케이스다.

그리고 목회 20년을 맞아 최 목사는 65세(2016년)에 조기 은퇴를 선언한다. 이것도 참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이 자신이 기도하고 옳은 길이면 실행에 옮긴 삶을 끝까지 완주한 분이다. 그리고 지금은 탄광지역의 카지노로 영혼과 몸 마쳐 중독으로 인하여 방황하는 이들(카지노 피해자들)을 케어하는 선교를 동역자들과 수년째 이끌고 있는 중이다.

최 목사는 이 책에서 자신은 설교원고 외에는 글을 쓰지 않았고 훈련을 받은 적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에 사모와 함께 글쓰기 모임을 하면서 목회에도 도입하여 항존직자들이 설교를 원고화하여 참여하게 하고 지도를 한다. 그렇게 시작한 글쓰기가 코로나 때에 더 집중적으로 완성도를 높혔다고 한다. 이전에 “태백연동교회 이야기” 라는 책자를 내기도 했다. 사실 460쪽이나 되는 분량을 한두 해에 쓴다는 것은 초인적인 노력없이는 안되는 게 사실이다.

따라서 최 목사는 글쓰는 일도 사역처럼 철저하게 한 것이다. 나중엔 완성도를 높이기 위하여 속초에서 열흘 간 집중하여 정리를 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끝말에 주목한다. 그것은 우선 자녀들이 이 글을 끝까지 정독하기를 바라고, 가족과 교우들에게도 그럼 바램이 있다. 그리고 그동안 사귀어 온 지인들에게도 자신을 이해해 주기를 바라고 있다. 그 이유는 과거의 것과 화해하기 위한 것이다.

   
 

최준만은 정순미를 통하여 완성된다.
나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나를 용서하기를 기대한다”는 한마디가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나도 사실 최 목사로 인하여 섭섭했던 적도 어떤 일에는 홀대를 한 적도 없지 않다, 그래도 최 목사는 대항하지 않고 겸연쩍게 웃는 정도가 전부이다. 윤창현 목사가 1983년도에 신학대학원를 졸업 후 황지에 와서 최준만 목사의 이야기를 많이 했다. 당시 사모가 병원 의사였으니 자가용도 일찍 타서 같이 운전을 하다 개천으로 날라서 죽을 뻔 했다는 등 찻값도 못물어 줬다는 등

그게 최 목사다. 무엇보다 이 책은 정직하게 썼다는 것이 기분이 좋다. 하고 싶은 말을 이제라도 하시니 좋다. 자신의 지식이나 잘한 것을 드러내고 보여주고 싶은 분들의 책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책에는 내가 강원동노회 산업선교회와 복지선교회가 공동으로 운영한 광산지역노동상담소 소장으로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윤창현 목사 은퇴식 후에 만난 날에 최 목사는 자신의 책과 아내인 정순미 사모 책을 선물했는데 최목사 보다 한달 뒤인 11월 10일에 “너 자신이 되어도 좋다” 라는 제목으로 (자신을 찾아가는 믿음의 여행) 이라는 부제의 200쪽 짜리 책을 동시에 낸 것이다. 이것도 역시 자전적 일대기로 이화여대 출신의 여의사로 메이져 대학 출신의 유학파 출신 남편의 부인이라는 부러움은 사라지는데, 사람은 누구나 나름 남모를 이야기들이 많다는 진리를 보여준다.

자세한 소개는 생략하지만, 남편인 최 목사를 돕거나 따라서 태백에서 전주로 미국으로 다시 태백으로 이사하면서 시모 등 가족들을 돌보면서 정신과 개업과 상담사역등 나름대로 자신의 전공을 살려 의미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1남 2녀 중 목사 사모도 나왔고 그에 대한 우여곡절과 아픔도 정직하게 남기고 있다.

두 분이 다 인격적이고 항상 친밀감이 높고 아무런 근심이나 걱정은 없을 법한 분들로 보이는 것은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들 부부가 겪었을 인생과 사역과정에서의 희노애락이 논에 선하다. 몇 년 전 태백에서 뵙고 은퇴식을 축하 겸 위로하면서 사모님과 식사라도 한번 하시라는 것을 드리니 겸연쩍게 받으시며 수줍어 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많이 본 기사
1
“인성검사 통과 안 되면 목사 안수 못받는다”
2
김동호 목사 이미 은퇴한 목사아닌 가?
3
이찬수 목사, 정말 아픈가?
4
대림절(Advent) 교회력의 의미
5
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 교수 시국성명서 발표
6
102회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대한 긴급 제안서
7
장신대 김철홍 교수 글에 대한 학생들 입장
8
장로교회의 당회원, 당회장의 역할(1)
9
이정훈 교수는 누구인가?
10
개혁하는 교회 탐방(거룩한 빛 광성교회)
신문사소개후원하기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명칭 : 예장뉴스 (pckgoodnews.com)   |  등록번호 : 서울,아02054   |  등록일자 : 2012년 4월 3일   |   제호 : 예장뉴스   |  대표 : 이상진
발행인겸 편집인 : 유재무   |  발행소(주소) : 서울 성동구 성덕정 17길-10, A동 202호   |   사무소 : 서울 종로구 대학로 3길 29, 100주년 610호
발행일자 : 2012년 6월 25일   |  행정메일: ds2sgt@daum.net   |  전화번호 : 02)469-4402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재왕
Copyright © 2011 예장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pck-goo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