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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의 모태 도시산업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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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1.29  10:2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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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현장 선교 ‘공장의 등불’ 밝히다

참고 자료/ 몸학 연구소 (freeview.org)(장숙경의 논문 한겨레신문 기사)

도시산업선교회(이하 산선)가 우리사회와 언론에 크게 등장한 것은 1979년 YH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를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다. 당시 YH점거농성사건의 전말을 발표하면서 정부는 ‘산업체들에 대한 외부세력 침투실태 특별조사반’을 구성, 종교를 빙자한 불순 세력이 침투하여 노동자들을 선동, 회사를 문닫게 하고 있다고 산선을 규정한다. 이후 산선은 권력과 언론이 일체가 되어 만들어낸 좌익 용공세력이란 누명을 쓰고 80년대를 지난다.

YH는 중곡동에 있던 수출업체였고 여기 노조(위원장:최순영, 전 부천시 민주당 의원)노사분규로 회사와 노동부 경찰력에 의하여 사면초가가 된다. 이에 당시 EYC, KSCF에서 활동한 한신대 출신 황주석목사(YMCA활동가, 훗날 노조 위원장 최순영과 결혼)과 역시 기독학생 출신 서경석목사와 회사 인근의 동일교회에 있던 조성기전도사를 통하여 사회문제화된다. 이들은 마침 유신의 대표적 정치적 탄압을 받는 마포신민당사로 들어가 노동문제의 사회화를 원했던 것이다. 

150여명의 노동자들이 무사히 당사에 안착을 하고 김영삼 총재도 동병상련으로 이들의 사정을 듣고 보호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야당과 노동운동이 일치를 이룬다. 그러나 정부로써는 야당도 짐인에 노동자들과 합세를 하니 안절부절하여 이를 분리하려는 방안으로 점거 노동자들을 드려내기에 이른다. 이른 새벽 경찰력이 투입되고 해산 과정에서 김경숙양이 죽게 되여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된다.

이때 까지는 유신에 대한 개인적 저항이 이 사건을 계기로 민주화에 대한 열기로 점화되고 확산된다. 숨죽이고 있었던 노동운동자 혹은 노조와 학생들과 지식인등 시민단체자들의 참여를 촉발한다. 영등포산선의 인명진목사도 이 사건을 설교에서 언급하여 투옥되여 실형도 살게 되는 데 YH사건은 한국사회 정치나 노동운동사에서 군사독재와 박정희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가장 강력한 최초의 투쟁이 된 것이다.

   
 

산업선교란
산업선교는 57년 예수교 장로회(통합) 총회 전도부 안에 산업전도위원회를 조직하면서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이후 감리교, 성공회, 기장, 구세군 등이 교단 결정에 따라 산업전도를 시작하게 된다. 초기 산선의 활동은 각 교파들이 교세확장과 산업화시대에 늘어나는 세대에 대한 전도전력차원이었다. 당시 산업전도를 시작한 대부분의 성직자는 신학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교역자로서 “노동자들을 어떻게 교회에 인도할 것인가” 하는 단순한 열정에서 출발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의 활동은 공장예배, 봉사활동, 상담, 평신도 그룹활동 등이 주류를 이뤘다. 경영주들도 당시 이 산업전도를 환영했다. 그들이 산업전도를 환영한 이유는 “많은 노동자들이 순종적인 기독교인으로 변하는 것은 기업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60년대 후반에 들어가면서 10여년간에 걸쳐 산업전도를 한 실무자들은 예배 및 전도지 배부와 같은 단순한 전도활동은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키며, 진정으로 그들의 삶의 문제를 포용키 어렵다는 자각이 고조되면서 ‘개인구원’차원을 넘어서는 ‘사회구원’이라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교회는 건물중심에서 벗어나 일하는 세계와 근로자를 교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늘을 나는 말씀이 아니라, 과도노동, 임금인상, 노사분쟁, 부당노동행위, 산재보험, 해고문제 등을 기독교적인 면에서 이해하고 해석해 피부에 닿는 설교를 통해 메시지가 전달돼야겠다.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적으로 섬겨야 할 그리스도가 근로대중임을 명심하고 십자가의 경험을 근로대중을 위한 행위를 통해서 경험하는, 마음의 자세가 성숙되어질 수 있는 데까지 교회는 나아가야겠다”(조승혁 목사, 1969년 9월 기독교사상)

산산의 활동은 한국신학의 변화를 가져왔다.  

당시 기독교문화에 비춰 이런 선언은 혁명적이었다. 그러나 이미 구미에서는 활발히 논의되어 오던 ‘세속화 신학’과 ‘하나님의 선교신학’ 등 새로운 신학적 조류가 있었고 이를 한국에 소개하는 선각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신학의 이론이 단순히 강단이나 학자들의 논문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적 의미와 힘을 가지고 70년대에 이르러 ‘민중신학’의 형성으로까지 발전된 것은 이러한 선교 현장과 만났기 때문이었다. 산업전도를 향한 적극적 노력은 1968년 ‘도시산업선교’라는 말을 쓰게 되면서 구체화된다. 

우선 각 교단의 산업전도기관도 산업선교로 명칭을 바꾸게 되고, 기구들도 현장과 지역 중심의 위원회가 조직됐으며, 실무자의 자격도 현장경험의 엄격한 훈련을 거쳐서만 인정받게 됐다. 이런 외형적 변화 외에도 내용적으로는 노동자들의 외로운 권리투쟁에 참여하여 노동자들의 호소를 대변하는 행동이 바로 산선의 활동이라는 생각이 전반적으로 퍼져가기 시작한다. 이는 교회적 입장에서 산업사회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산업사회와 그 조직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선교적 과제와 사명을 찾는 방식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산업사회를 중심으로 노동자와 그들의 조직, 그리고 도시사회의 빈민들 문제에 역점을 두고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체의식, 권익옹호를 구체적인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산선의 활동은 노동법, 노동조합, 노동운동 지도자 교육, 노동자 조직 활동, 노동조합 지도자 육성 문제 등에 역점을 두면서 종교활동으로써 노동자를 위한 예배와 성서연구, 그리고 노동자복지활동을 조직적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지역운동과 민중선교로 확산

주로 공장지역을 중심으로 한 산업전도가 이와 같은 변화 과정을 겪는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도시빈민을 대상으로 한 도시선교운동도 탄생하게 된다. 도시선교운동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알린스키의 지역주민조직 운동이론을 토대로 하여 낙산아파트, 연희아파트, 금화아파트, 창신동 등 슬럼지역에서 실무자를 훈련시켰다. 이러한 훈련과 실천 과정에서 실무자들은 민중의 주체적 운동역량을 발견하게 되고, 이와 더불어 민중들을 소외시켜왔던 기존 교회의 갱신을 부르짖게 되는 과정을 밟아나가게 된다. 

이처럼 한국기독교는 산업화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60년대 후반을 경계로 하여 민중의 삶의 현장에 깊게 뿌리박는 ‘도시산업선교’라는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산선의 또 다른 특징중 하나는 연합조직적 성격이다. 이것은 산업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의 결과 노동, 빈민 문제가 고립된 문제가 아니라 사회전체의 구조와 관련된 것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광범위한 조직이 필요하게 됨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후 산선은 많은 대기업에서 노조를 새롭게 조직하고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는 활동을 활발히 진행한다. 동일방직, 태양공업, 진로주조, 대일화학, 원풍모방, 남영 나이론, 경성방직, 방림방직 등에서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을 모으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유신정권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산선의 성장과정은 곧 고난의 여정이 된다. 1972년 정부로 부터 불온사상의 진원지로 지목된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사무실이 서울시경의 수색을 받은 데서 시작했다. 

이는 산선이 앞으로 걸어갈 골고다 가시밭길의 첫걸음이었다. 1974년 산선 실무자들이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되자 이에 때맞추어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때의 노총은 정부산하 기구같은 성격이었다)은 산하 최고 간부회의를 열어 “한국도시산업선교위원회를 비롯한 일부 종교인의 불순한 조직침해를 배격하고…”라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여기서 비롯된 시비는 1974년과 197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노총과 산선 단체간에 성명전으로 계속됐다(홍지영 저 '산업선교는 무엇을 노리나', '도산이 들어가면 도산한다') 

산선에 대한 이념공세와 분열공작 

당국은 또 기독교 내부에 권력과 야합한 일부 보수 세력을 내세워 산선을 공산주의자로 몰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시경 제2부국장으로 있던 김재국, 홍지영 등은 산선이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전략과 흡사한’ 신학논리를 가지고 있다면서 ‘정치신학의 논리와 행태’ ‘산업선교는 무엇을 노리나’ 등의 책자와 관제 반공 강연회에서 공개적으로 산선을 ‘자생적 공산주의’로서 국제공산당 전략에 이용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공격을 가했다. 

이런 모략과 공격은 1979년 YH사건이 터지면서 정부 여당이 그대로 받아들여 경제정책 실패를 은폐하고 산선에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는 데 이용됐다. 정부 여당은 YH사건의 배후에 산선이 있으며, 이들은 “외세의 지원하에 첫단계로 유신체제 전복, 다음 단계로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시도하고 있으므로 종교단체의 노동문제 개입을 정책적으로 저지해야 한다”고 선전했다. 

완벽한 호흡을 맞춘 관제언론은 산선이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을 교육, 훈련시키며 대중조직운동을 통해 폭력적 수단을 선동하고 있다는 악의에 찬 왜곡 날조기사를 집중적으로 게재했다. 명색이 노동자 조직인 한국노총은 ‘노조의 자주성 옹호’라는 명분으로 노동운동에 제3자 개입을 막는 입법을 요청함으로써 ‘제3자 개입금지’라는 세계 입법사상 유례없는 노동관계법 개악이 시행됐다. 

신군부의 80년대로 접어들면서도 언론은 산선에 대한 매도에 앞장선다. 82년 콘트롤데이타사의 폐업과 원풍모방 사건을 계기로 산선은 권언일체의 외부적 압력과 인적·재정적인 내부적 문제로 위축돼 갔다. 몇가지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산선이 노동자와 도시빈민들의 요구와 희망을 외면하지 않고 민중 편에 서서, 그들의 아픔을 교회적 아픔으로 삼고자 했던 노력은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다.

또 가난하고 소외받는 민중의 현장에서 기독교 복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는 21세기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주제이다. 70년대 산업화의 뒤안길에 내몰려 있던 민중들에게 신은 너무 멀리 있고, 황제는 너무 높이 있었다. 거룩하게 하늘에만 계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척박한 땅에 함께 계신 그리스도가 필요한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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