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1912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언더우드 - 예장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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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1912년)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 언더우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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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2.17  13: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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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회장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이 자표 출처는  https://4history.tistory.com/ 로 미카엘이라는 필명을 쓰는 목사님입니다.   

언더우드는 1884년 부활절을 맞아 일본을 통하여 조선에 파송된 미국 장로교의 최초 선교사다 . 그러나 언더우드가 없는 동안에 조직되었던 예수교 장로회는 그후 제3회 노회에서 그를 노회장으로 선출한다. 평양신학교 제2회 졸업생 8인(김필수, 윤식명, 정기정, 김찬성, 이원민, 장관선, 최관홀, 최중진)에게 목사안수를 거행하였으며 그 중 최관홀 목사를 한국 최초 해외선교사로 임명하여 블라디보스톡으로 파송하는 일을 하였다.

1909년은 한국의 개신교 선교 25주년을 기념하는 해였다. 기념식은 평양에서 열렸는데, 첫 선교사인 알렌 박사의 연설로 시작되어, 마펫 박사가 선교사에 대해서, 베어드 박사가 학교에 대해서 연설을 하였고, 에비슨 박사의 병원에 대한 연설문이 대독되었으며, 베스트(Miss Best) 양은 여성 사업에 대해 연설하였다. 아담스(Dr. Adams) 박사는 고인들을 기념하는 논문을 준비하여 왔고, 클라크(Dr. Clark) 박사는 통계 보고를 하였으며, 언더우드는 회상기 연설을 하였다. [김문호 역, “언더우드 회상기”<기독교사상>, 1985.4, 76-86]

1910년 『The Religions of East Asia』를 저술/1910년에는 아시아 종교학 연구서에 속하는 『The Religions of East Asia』를 저술하였다. 그는 동아시아의 종교에서 자신의 종교론을 전개하면서 왜 하나님이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종교하강론(고대종교에는 유일신론적인 초월적 존재에 대한 신앙이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서서히 타락했다는 이론)의 입장에서 각국의 종교를 분석하고, 그러한 분석에서 특히 단일신론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도교가 중국종교를, 신도가 일본종교를, 샤머니즘이 한국종교를 대표한다는 전제 하에 각각의 종교를 상세히 소개했다.

1911년 신구약 성경 번역완수 및 출판/1912년 6월, 원한경 졸업식 참가. 뉴욕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 학위 수여. 1912년 8월, 언더우드가 안식년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고자 할 때, 주변의 친구들과 지인들은 그의 귀국을 말렸다. 또한 그가 추진하던 한국에서의 대학설립이 난관에 봉착했던 데다가, 그의 건강 역시 좋지 않은 상황에서 그에게 한국의 선교사 말고 미국에서 할 수 있는 새로운 일들이 많이 제안되기도 했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그런 이야기들을 웃어넘기거나 거절했고, 결국 한국으로 돌아왔다.

   
 

1912년 9월, 제1회 총회장에 선출되다.
1912년 9월 1~4일, 장소 : 평양신학교, 참석총대 : 목사 96명, 장로 125명, 개회예배 : 이눌서 목사가 “장자회”(히 12장)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다. 임원선거 : 회장ㆍ원두우, 부회장ㆍ길선주, 서기ㆍ한석진, 부서기ㆍ김필수, 회계ㆍ방위량, 부회계ㆍ김석창 고퇴를 새로이 만들다(7교회를 상징하는 칠색목과 삼위를 상징하는 삼대를 띠어 십자가 위에 반석같은 교회를 표현ㆍ제작하다).

국장 요배식 절차위원을 세우기로 하다. 감리회와 협조하여 일본 동경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하다(교회명 : 동경연합교회). 제주 선교 보고에서 교인 중에 권능받고 병고치는 자가 많다고 보고받다. 해삼위 전도 중단하고 최관홀 목사 시무를 중지하다. 해삼위 매서인 이재순, 신윤협 씨 전도하다가 러시아 관리에게 투옥 등 핍박당하다. 총회 산하 각 교회의 소유재산(토지, 가옥)을 관장할 사단을 조직키로 하다.

월요일을 예배 일일(一日)로 정하기로 하다. 각 노회를 총회 허락없이 총회 기간 중에 모이지 못하도록 하다. 장안인 미국의사를 경상노회에서 선교사로 장립하는 것을 허락하다. 미조직 교회는 안수 집사를 세우지 못하게 하다. 장로가 목사와 같이 강단에 앉는 것은 관계 없으나 그곳 당회에서 정하도록 하다. 예수회와 대제직회는 교회를 치리하는 회가 아니며 노회와도 관계없고, 노회권리를 대신할 수 없고, 그 지방 목사나 사찰위원이 상관할 수 있도록 하다. 조사를 사용하는 일은 노회에서 주관할 것이지만, 정사위원이나 시찰위원이나 당회에 맡길 수 있도록 하다. 

혼인의 경우 여자는 만 15세(음 16세), 남자는 만 17세(음 18세)로 하게 하다. 교회 자녀들을 권하여 교회학교에서 공부하도록 하다. 교회 내의 자녀 중에서 준수한 자를 교회가 도와주어 교회 일꾼으로 배양토록 하다. 각 학교가 폐지되지 않도록 각별히 힘쓰고 고등학교를 세울 때는 적당한 곳에 합동하여 설립하도록 하다. 각 학교는 교육을 열심히 하되 성경괴 기도를 특별히 가르치며 국어에 각별히 힘쓰도록 하다. 총회에서 사경회와 특별 부흥회를 통해 각 지교회를 지원하도록 하다. 신문(대한예수교회보) 구독 확장을 위해 각 노회에서 위원을 선출하게 하다. 에버든 총회에 대표를 천거하기로 하다. 총회 회록은 국한문으로 하되 한글 옆에 한자를 붙이기로 하다.

7개 노회 조직보고(전라노회 – 1911. 10. 15. / 경기ㆍ충청노회 – 1911. 12. 4. / 황해도노회 – 1911. 12. 8. / 경상도노회 – 1912. 1. 6. / 함경노회 – 1912. 1. 12. / 남평안노회 – 1912. 1. 28. / 북평안노회 – 1912. 2. 15.)

언더우드는 1912년 피어선기념성경학원 교장이 되는 데 본국 학창시절에 피어선 박사에게 영향을 받았던 인연으로 후에 (현 평택대학교) 교장을 1912년부터 1916년까지 역임하였다. 1914년 4월 6일, 언더우드 내한 30주년 기념식 1914년 4월 6일, 한국식 계산에 따라, 언더우드 내한 30주년 기념식이 서울(경충)노회는 서울에서 가장 큰 승동교회에서 기념예배를 드림으로써 이날을 기념하기로 하였다.

1915년 경신학교 대학부를 설립하다. 현존하는 연세대학교의 설립 경로는 두 개의 다른 축을 가지고 있다. 그 첫째는 의료 선교사 알렌이 1885년 ‘반국영 의료 기관’으로 설립한 ‘제중원’(창립 당시의 이름은 ‘광혜원’이었으나 설립 직후 ‘제중원’으로 명칭이 바뀜)과 그 의학교가 하나의 설립 기원이며, 둘째는 1915년 언더우드가 주도한 ‘조선기독교대학’(Chosen Christian College, C.C.C.)이 또 다른 한 기원이다.

1906년 건강이 악화되어 귀국하였다가 1908년 다시 귀한하였는데, 이때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서울에 대학교육기관의 설립을 계획하고 경신학교를 협조하면서 이곳에 대학증설을 꿈꾸었으나 서울의 대학설립은 주한 선교사간에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더우드는 1912년 봄에 휴가차 도미하여 모교로부터 명예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한편 대학설립을 위하여 5만 2천달러의 기부금을 확보하고 귀임, 1915년에 이르러 대학설립의 꿈은 연희학원에서 실현되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 기독교 신자의 2/3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에 집중되어 있었고 이미 1906년 평양에 숭실대학교가 설립되어 있었으며 여기에 북감리교 선교회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평양신학교가 설립되어 운영되고 있던 상황에서 언더우드가 서울에 다시 대학을 세운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되어 평양 선교부는 격렬하게 반대한 것이다.

서울을 반대하고 평양을 고수했던 다수 선교사들의 이유 : “평양은 만주지역의 인구가 매일같이 증가하는 것을 감안하면 지리적으로 중앙에 있다. 평양은 집에서 떨어져 있을 젊은이들에게 서울보다 여러 가지로 세속적인 유혹이 적다. 평양은 수도 서울의 정치적, 사회적인 문제들로부터 자유롭다. 기독교인의 수를 비교하면 서울보다 평양의 비율이 높아 기독교의 영향을 강하게 끼칠 수 있다. 소도시에 있는 대학이 상대적으로 더 돋보인다.

평양은 목회사역을 위해 최상의 상태를 유지하기 쉬운 반면에 서울에서는 일반 전문직이나 세속적인 직업이 더 매력적이다. 평양은 대학부가 이미 설치되어 잘 운영되고 있다. 평양의 생활조건은 서울 출신 외에는 학생들이 적응하기가 더 편할 것이다. 평양은 고조선의 도읍지로 고대문화의 근원이고,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도시이다. 평양에 있는 기존 시설을 버리고 서울에 새 대학을 세우는 것은 성공적인 선교의 결실을 저버리는 것으로 한국교회의 영적 재난이 되고, 선교회의 분열을 초래할 것이다.”

언더우드를 비롯한 일부 선교사들이 서울을 선호했던 이유 : “서울은 수도이고, 가장 큰 도시이며, 지리적 중심지, 교육의 중심지, 철도를 비롯한 교통의 중심지이므로 학생들이 편리하고 값싸게 접근할 수 있다. 기독교 인구가 현재로는 북쪽에 더 많으나 머지않아 전국적으로 균등하게 분포될 것이다. 서울은 대다수의 선교회가 몰려 있는 가장 편리하고 실제적인 선교회의 중심지이다. 만일 한국에 단 하나의 교파연합 기독교대학이 있어야 한다면, 거의 모든 중등학교 학생들의 관심을 끄는 서울이어야 한다.

서울에는 관립법학학교, 의학교, 산업학교, 사범학교 등이 있어 학생활동의 중심지인데, 서울에 기독교대학이 없다면 한국선교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서울에 대학을 세워야 모금도 쉽다. 평양은 서울의 1/6이고, 두 선교회 외에는 가려고 하지 않는다. 한국인들이 서울을 정치적 중심지로 인식하고 있으므로 서울에 기관을 세우는 것이 특혜를 받을 수 있다. 다른 나라 선교부의 경우 대학을 지방에 세웠다가 다시 수도로 옮긴 사례가 많은데, 대학은 절대로 나라의 중심지에 있어야 한다.”

언더우드와 긴장관계에 있던 미국 북장로교 한국선교회의 평양지부는 서울에 대학을 설립하는 것을 집요하게 반대했고, 때로는 반대를 위한 반대처럼 반대했다. 훗날 언더우드의 부인과 아들 원한경 박사는 기독교연합대학을 설립하는 과정에서 언더우드가 받은 긴장과 고통, 모진 공격이 언더우드의 사망을 재촉했다고 진술했다. 

1885년 알렌의 광혜원에서 약제사로 일하다/언더우드는 불안을 무릅쓰고 상륙하여 4월 7일 서울로 들어왔다. 그는 독신이어서 행동하기가 편하였다. 언더우드가 서울에 들어온 지 3일 뒤 ‘알렌’에 의해 병원이 설치되었다. 이 병원이 바로 광혜원(후에 제중원)이다. 언더우드는 약제사로 당장 병원에서 일을 시작하였다.
그는 비위가 약해서 외과수술 시에 피를 보고 실신한 후에는 시약소와 내과에서만 활약했다.

언더우드는 천성적으로 의사의 자질을 지니지 못했다. 급한 수술 환자를 치료하던 알렌을 도와 수술 보조자의 역할을 하던 언더우드가 과도한 출혈 상태를 보고 수차례 졸도하여 실려 나온 사례에서도 그와 같은 사실은 충분히 확인된다. 반면 입원 환자들을 위한 간호사로서의 역할에는 남다른 자질을 보였다. 목사로서 선교사로서 목회적 성정을 지닌 언더우드는 고통에 신음하는 환자의 곁을 지키며 밤을 새워 성실히 간호하고 그들을 위로하였다. 훗날 언더우드의 전기를 기록한 부인 홀튼 여사는, 언더우드에게 간호사의 직분이 그의 천직과도 같았다고 기록한 바 있다.

알렌과의 갈등, 알렌의 주장은 한국 정부의 방침에 철저히 순응하여 의사는 진료 활동, 교사는 교육 활동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초기 선교 활동의 내용을 제한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활동 자체가 넓은 의미의 선교 활동이며 그 결과 언젠가 한국에서 기독교 선교의 자유가 주어질 때, 교회의 설립과 같은 새로운 역사가 전개되리라고 믿는 사고방식이었다. 반면에 언더우드는 교육이나 의료 활동과 같은 선교사들의 사업은 모든 것이 복음의 전파, 신앙 고백자의 획득 그리고 마침내는 교회의 설립과 같은 복음 선교의 최종적 목표에 귀결되지 않으면 무의미하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교육이나 의료사업은 전적으로 수단일 뿐이고 그 목표는 신앙 공동체의 형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언더우드는 이러한 선교적 목표가 수행되는 과정에서 수반되는 위험이나 어려움은 개척 선교사로서 충분히 각오하고 감내해야 할 일이라고 믿었다.

   
 

선교사 알렌... 언더우드와 사이가 별로 안좋았다/ 1885년, 제중원 내에서는 직원들이 정식으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6월 21일부터 공식 주일예배가 시작되었으며 이곳이 남대문교회의 전신이다. 10월 11일에 첫 성찬식이 거행되었다. 1885년, 근대적 중등 교육 기관인 경신학당을 설립하다. 1886년 제중원의 학교에서 가르치며 선교하다. 1886년 3월 29일 개교한 한국 최초의 서양 의학 교육 기관인 제중원 의학교에서 언더우드는 수학, 물리, 화학 등 의예과 과정의 과목을 가르치면서 본격적으로 선교 활동을 시작한다.

1886년 고아원 개원과 함께 학교를 운영함/언더우드는 1885년 말부터 정동 자신의 집에 고아들을 모으기 시작했고, 1886년 2월 한국정부로부터 고아원 운영의 윤허를 취득했으며, 1886년 5월 11일 고아원의 개원과 함께 학교를 운영했다. 이 학교는 처음에 언더우드 학당 혹은 밀러 학당으로 불리다가 예수교학당, 구세학당, 존디우웰즈학원 등의 이름을 거친 후에 경신학원, 경신학교로 발전했다. 

언더우드 학당의 출신자로는 1918년 파리 국제강화회의의 대표로 활약하고 상해 임시정부의 부주석으로 활약했던 김규식, 신민회를 조직한 안창호, 독립선언문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이갑성,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정재용 등이 있다. 언더우드는 교회마다 학교를 설립하는 것이 유익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1895년 새문안교회의 경영하에 있는 영신학당을 설립했다.

1886년 알렌의 어학교사 ‘노도사’에게 최초의 개인세례를 베풀다/갑신정변이 일어난 12월 4일 선교사 알렌을 찾아온 이가 있었다. 노도사(盧春京)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중국 문헌에 나오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기록에 관하여 호기심을 갖게 되어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의 한문 번역본을 빌려 갔다. 알렌은 통역을 통해 만일 그 책을 읽는 것이 발각되면 목이 달아날 것이라는 주의를 주었다. 그 후 1885년 알렌을 다시 찾아와 어학 선생 노릇을 하였다. 뒤에는 좀더 배우고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로 갔다. 그는 언더우드로부터 얻은 [성당수위], [심령의 구원], [야소교 교리이지]등의 책을 통해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언더우드는 노도사에게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세례를 베풀었다(1886년 7월 11일).

노춘경은 알렌의 일을 도우면서 그의 서재에 있던 한문 성경을 읽게 되었고 그 진리에 공감하여 신앙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노춘경은 이 문제를 알렌과 상의했으나 알렌은 국법이 금하는 관계로 노춘경의 신앙 고백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히려 허락을 받지 않고 성경을 읽은 노춘경의 행위를 비판하였다. 그러나 노춘경의 고백을 들은 언더우드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이것이 한국 내에서 이루어진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세례의 첫 기록이 되었다. 이때 의료선교사 헤론(Heron)의 딸 사라 앤(Sara Anne)에게도 유아세례를 집례했는데, 이로써 동서양 양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이 되는 최초의 사건을 연출했다.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은 노춘경/ 1887년 황해도 교인들에게 세례를 집례하다. 1월 23일 황해도 솔내에서 서상륜이 데리고 상경한 그의 동생 서경조 이외에 최명오, 정공빈에게 세례를 집례했다.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다. 1887년 2월에 성서번역위원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는 국내에 들어온 다양한 교파의 선교사들과 협력하여 성경을 번역하였다. 성경번역회의 노력으로 1900년 9월에 신약전서 완역기념예배를 드릴 수 있었고, 1911년에 이르러 신구약성경 번역을 완료하여 출판하였다. 성서번역을 위해 가장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한국어 사전과 문법서 제작에 나서서 1890년 4월에 한영자전, 영한사전, 한국어문법책과 한글 소책자 2권을 출판하였다.

1887년 새문안교회를 설립하다/1887년 9월 27일 조선인 교우들의 참여로 조선 장로교 교회사에서 첫 장로교 교회인 정동교회(현재 새문안교회)를 설립하였다. 만주 선교사 존 로스를 모시고 첫 예배를 드리며 세 명에게 세례를 베풀고, 두 명의 장로를 세움으로 시작하였다. 언더우드는 서울에 돌아와 서서히, 그리고 착실히 활동을 전개하여 1887년 9월 27일 정동에 있는 자기집 사랑방에 14명의 한국인 신자들과 같이 예배를 드렸다. 언더우드가 한국에 입국한지 2년만에 교회까지 세울 수 있게 되었으니 그로서는 대견한 일이었다.

처음에는 이를 정동(貞洞)교회라고 불렀으나, 1890년 교회가 창립된지 3년 뒤에 이르러 새문안 제일 교회라고 불렀다. 조선 초에 성곽을 축조할 때 서울의 서쪽에 돈의문, 즉 서대문을 세웠으나 교통이 불편하여 뒤에 이르러 오늘의 경향 신문사 부근으로 옳겼다. 그러므로 그 문을 신문(新聞), 즉 새문이라고 하였고 교회는 새문안에 있었으므로 그렇게 불렀다.

   
 

언더우드가 설립한 교회는 20여개에 이른다 : 1887년 정동(새문안교회, 통합), 1895년 잔다리(서교동교회, 통합), 1896년 김포읍(김포제일교회, 합동), 행주교회(합동), 1897년 송마리교회(통합), 1898년 사산(사뫼, 능곡교회, 기장), 1900초 개곡(합동), 1901년 신사리(신사동교회, 기장), 죽원리(대원교회, 합동), 1903년 영등포(합동), 광명리(광명교회, 기장), 신산리(신산교회, 통합), 1904년 시흥리(시흥교회, 통합), 누산리(누산교회, 통합), 1905년 하안리(하안교회, 기장), 대동리(탄현교회, 기장), 1906년 청천교회(통합), 노량(노량진교회, 통합), 1907년 양평리(양평동교회, 통합), 갈현리(갈현교회, 통합), 금촌(통합).

1888년 봄 제2차 전도여행/아펜젤러와 동행하여 평양까지 갔다가 선교부의 소환으로 돌아왔다(아마도 5월경). 당시 가톨릭 제수이트회 선교사들이 대궐과 그 근처에 있는 종묘를 굽어볼 수 있는 높은 자리에 자신들의 성당을 지을 자리를 물색해 놓고, 은밀히 그 땅을 매입해 들였다. 이로 인해 한국의 고위층은 격노하였고, 결국 한국에서 기독교의 설교와 교육을 금지하는 칙령이 공포되기에 이르렀다(1888년 반기독교 칙령).

당시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이 칙령이 로마 가톨릭 교도를 겨냥한 것이었는데, 그 때문에 자신들의 주의 사업에까지 지장이 있게 되었다고 이 소환 명령에 몹시 불쾌하였다. 1888년 영아소동, 당시 민간에 널리 소문이 퍼지기를 서양인들이 한국의 어린아이들을 잡아다가 눈알을 뽑아 사진기를 만들고 간을 내어 약을 쓴다는 망측한 소문이 돌았다. 이 소문을 접한 무지한 민중들은 떼를 지어 정동의 서양인 주거 지역을 침범, 폭동을 일으키는 사태에 이르렀다. 당시 한국 주재 미국 공사관은 자국민 보호를 위한 외교적ㆍ군사적 조치를 취하였고 지방에서 여행 중이거나 활동 중이던 선교사들을 서울로 급거 귀경시키고 그들을 한곳에 모아 기숙케 하며 당분간 활동을 금지시켰다.

1889년 제3차 전도여행/그는 한국어 문법을 편찬하던 1889년 3월 14일에 8살 연상인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호튼(Lillias S. Horton)과 결혼하였는데 그녀는 여성의료사업에 헌신하는 한편 명성황후의 시의로 임명되어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들은 결혼기념으로 전도여행을 실행에 옮겼는데 평양ㆍ강계ㆍ의주를 여행하였고 압록강을 건너가 만주에서 33인의 신도들에게 세례를 집례하였다(김리연, 김관근 부자 등). 이른바 ‘한국의 요단강 세례’로 불리게 되었다. 

1889년 안식년으로 미국을 방문하다/ 1890년 9월 아들 원한경(1890~1951)이 태어나다. 산모 건강악화로 10월에 중국 芝罘(Chefoo)로 요양차 갔다가 11월에 귀국함. 1891년 2월, 언더우드는 새로 도착한 베어드(William M. Baird, 裵偉良) 목사와 함께 새로운 선교지부를 세울 자리를 고르기 위해 부산으로 갔다. 그곳에서 아내의 병세가 악화되어 안식년으로 미국으로 건너간다(3월에 떠나 5월에 브루클린에 도착한다).
1891년 여름(6월), 뉴욕대학은 언더우드에게 신학박사학위를 수여했다.

그의 절대적인 지원자 맏형인 존 티 언더우드는 언더우드가 한 여섯 명 정도의 선교사 지원자만 구하면 재정적 후원은 자신이 담당하겠다는 제안을 해왔다. 언더우드는 남장로회 지역이던 테네시의 내쉬빌, 버지니아와 노스캐롤라이나 등지를 여행하며 연설회를 가졌다. 당시 테네시주 내쉬빌의 밴더필트 대학에서 유학 중이던 한국인 윤치호와 ‘조인트 연설회’를 가졌다. 

맥코믹의 테이트(L. B. Tate), 버지니아 유니온의 존슨(C. Johnson), 레이놀즈(W. D. Reynolds), 존슨과 레이놀즈의 절친인 전킨(W. M. Junkin)이 한국 선교를 지원한다. 1891년 9월에 내쉬빌(Nashville)에서 열린 신학교 선교연맹대회에서 윤치호와 함께 연설하며 신학생들에게 선교현장으로 나오도록 권유하였는데, 여기서 남장로교 출신 4명의 젊은이들(Tate, Junkin, Reynolds, Johnson)이 한국선교를 지원하여 1892년 말에 조선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892년 9월에는 토론토에서 열린 장로교회연맹 총공의회에서 연설하여 토론토대학 의과대학 교수였던 에비슨(Oliver R. Avison) 박사가 크게 감명을 받아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나갈 의사를 밝혔다.

알렌이 제중원을 사임하고 미국의 외교관으로 그 활동 영역을 변경하고 헤론이 과중한 선교사로서의 업무에 기인, 일찍 타계한 후 제중원도 여러 방면에서 큰 변화를 맞았다. 특히 왕실과의 관계, 미국 선교부와의 관계 등의 불명확성으로 인하여 선교 기관으로서 정체성이 와해될 위기에까지 이르렀다. 언더우드의 연설을 듣고 큰 감명을 받고 또한 한국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지니게 된 애비슨은 그날 저녁 언더우드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저녁을 함께 하였다. 에비슨은 이 자리에서 안정된 의사로서의 삶과 대학 교수로서의 명성을 모두 버리고 한국 선교사로 자언할 것을 약속하였다. 

사실 애비슨의 내한 직후 마펫을 비롯한 평양 지역 선교사들은 평양에 새로 건립할 선교 병원의 책임자로 좋은 조건을 제시하고 애비슨을 초빙하려 하였다. 그러나 애비슨은 언더우드와의 약속, 그와의 우정을 기억하며 위기의 제중원을 바로 세우는 일에 헌신할 것을 다짐한다. 1892년 귀한하여 전도ㆍ교육ㆍ문서사업에 전력투구하였다.

의료 선교사 에비슨/ 1890년 6월 조선성교서회를 조직하다. 1889년 10월 선교 활동계획에 따라 어학참고서를 출판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다. 이때 한국인 학자이자 언더우드의 어학선생인 宋德祚(혹은 송순용)이 동행한다. 책은 1890년 4월 26일에 완성되었고, 5월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1888년 조선성교서회의 설립을 제안하고, 토론토 전도문서회, 미국 전도문서회, 런던 전도문서회 등지에 재정 지원을 호소했으며, 결국 1890년 6월 25일 조선성교서회를 설립해서 한국에 본격적인 기독교 문서운동을 전개했다.

번역된 성경 출판과 문서선교를 위해 1890년 6월에 여러 선교사들과 함께 장감연합으로 조선성교서회를 조직하였고 서기의 일을 맡았다. 초대 회장은 올링거(F. Ohlinger)였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행된 전도문서인 『성교촬리』는 언더우드가 번역한 것인데, 조선성서공회에서 첫 번째로 발간한 문서였다.
『셩교촬리』는 기독교 전도 문서인 동시에 서양의 저술을 가장 적절하게 한국어로 번역하고 재저술한 형태의 문서였는데 전도용 문서로서의 효용 이외에도 한글 강독과 복음을 위해서도 널리 읽혔다.

1892년 감리교와 협력하여 선교지 분할정책을 시행하였다/1892년 6월에 5,000명 이상의 도시에는 함께 전도하고, 그 이하는 다른 선교회가 선교하는 지역에서는 선교하지 않으며 전도책자를 유료로 팔기로 결정하였다. 물론 이 결정은 감리교의 감독 포스터의 반대에 부딪쳐 시행되지는 못했다.  1905년에는 두 선교부 사이에 맺은 ‘지역분할계획’에 따라 약 12,000명의 교환이 이루어졌다. 1909년에 귀국하여 감리교와의 선교지 분할을 위한 교계예양에도 관여하였다. 이와같이 언더우드는 장감이 협력하여 선교지를 분할하여 선교하고자 노력하였다.

1893년 프레데릭 피난처를 개소하다/12월, 언더우드는 죽은 형 프레데릭(1858~1891)을 기념해서 버려진 환자들을 위한 피난처를 개소했다. 이 피난처는 의사와 간호사들이 교파에 상관없이 환자들을 돌보는 초교파적인 기관이 되었다. 1895년 여름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는 콜레라를 치료하는 병원으로 전환했고, 웰즈(Wells) 의사, 언더우드, 언더우드의 부인, 그리고 새문안교회의 교인들이 참여해서 치료와 검역과 간호활동을 전개했다. 

언더우드는 프레데릭 피난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작은 진료소를 세워 자신의 부인이 치료와 약처방 그리고 성경반 운영을 맡도록 했는데, 그 진료소는 기부자였던 Mrs. Hugh O’Neil의 이름을 따서 ‘휴 오닐 진료소’라고 명명했다.

1894년 찬송가 출판에 관여하다/ 1893년 2월 안식년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찬송가 출판의 작업이 중지된 것을 발견하고는 스스로 찬송가 출판을 추진했다. 그는 찬송가에 사용되는 신(神)에 대한 용어를 다른 선교사들이 선호하는 ‘하나님’이란 용어로 표현하지 않고, ‘주’, ‘천부’, ‘전능하신 주’, ‘여호와 등의 용어로 대체해서 표현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되어 1894년에 출판한 그의 찬송가는 공인 찬송가가 되지는 못했다.

1894년 여름, 소래까지 지방전도여행(제5차)
서울 근교는 서상륜, 김흥경, 박태선, 유흥렬 4명의 매서인을 파송하여 복음전파와 교회 설립하는 일을 하게 하였고 고양 김포 지역은 신화순, 도정희, 이춘경 등을 파송하여 사역하게 하였다.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1928년, 차재명 발행] 이때 세운 교회는 김포읍교회, 서교동교회, 연동교회, 행주교회, 능곡교회 등이다. 

1915년 3월 5일 미국 북장로교, 감리교, 캐나다장로교 등 각 선교부와의 연합으로 서울 종로에 있는 기독교 청년회 회관에서 60여명의 학생으로 ‘경신학교 대학부’라는 이름의 대학을 세우게 되었다. 총독부에서는 신규칙을 공포하면서 성경을 가르치거나 기도회를 가져서는 안된다고 하였으나 언더우드는 이전의 방식대로 성경도 가르치고 기도회도 열었다.

경신학교 대학부는 1917년에 신촌에 신교사를 신축하면서 연희전문학교의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타자기 재벌이었던 그의 형 존 언더우드(John Thomas Underwood)가 토지 매입과 교사 건축 비용을 제공했다.
개교 당시 언더우드는 교장에 취임하였으나 아직 총독부로부터 학교 설립 허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인이 고등교육을 받고 높은 지식을 갖는 것을 바라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는 대학령을 두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전문학교령에 의해 연희 전문학교가 되었다. 연희 대학교와 지금의 연세 대학교의 전신이 된다.

연희전문학교 설립에 있어 또 하나의 쟁점은 기독교학교에서 불신자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평양의 선교사들은 받을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언더우드는 불신자들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1900년 2월 20일 엘린우드 박사에게 보낸 서한 : 1) 한국교회를 하나로 유지하고 이단에 빠지지 않도록 기여할 교회의 지도자를 교육하는 것, 2) 기독교인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까지 교육함으로써 교육기관을 전도의 기회로 활용하는 것, 3) 전도사업의 주 대상은 중하계층과 하류계층이었는데, 교육사업을 통해 중상계층과 상류계층까지도 포괄하자는 것, 4) 수도인 서울에 이러한 교육기관을 세워야 효율적일 수 있다는 것

1915년 조선총독부의 개정 사립 학교령 : 모든 종교계 학교는 공식적으로 정규 교과목을 통해 종교 교육을 실시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 기독교 교양 교육을 실시하지 못한다면 언더우드가 꿈꾸는 전체적인 교육적 이상은 좌절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연희대학을 신학대학으로 설립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이미 평양에 장로회 신학교가 설립되어 있었고, 감리교 쪽에서는 남북 감리교회가 연합한 협성 신학교가 신학 교육을 감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연희대학이 신학대학으로 설립된다면 당시의 신학교육이 각 교파의 교역자 양성에 목표가 있었던 것처럼 좁고 한정된 교육 목표를 수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언더우드의 고민을 알게 된 조선총독부 일본인 크리스천 고위 관헌이 그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해줬다. “새로 설립되는 대학 안에 신학과를 창설해라. 그렇게 되면 그 신과의 개설 과목과 프로그램을 통해 다른 전공과의 학생들에게도 자연스럽게 기독교 교육을 행할 수 있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 이에 연희대학은 신과, 문과, 상과, 수물과, 농과 등 다섯 개의 전공 영역을 확정하고 개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1916년 1월, 일본으로 건너가다. 언더우드는 일본 도쿄에 있는 일본어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떠났다. 조선총독부의 법령에 의하면 대학에서 강의를 하기 위해서는 일본어를 구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더우드는 자신이 설립한 대학에서 강의를 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기 위해서, 동시에 한국에 머무를 때 불가피하게 따라오는 여러 가지 일들로부터 조금 자유로워지기 위해 일본에 잠시 체류할 심산이었다. 

일본 체류 기간에도 그의 건강은 악화 일로를 걷고 있었다. 이에 언더우드 부인은 남편의 건강을 염려하여 일본어 공부를 중단하고 미국으로 돌아갈 것을 간청하였다. 일단 한국으로 돌아와야 미국 여행을 준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해 3월, 언더우드 가족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1916년 미국에서 별세하다. 1916년 4월 건강악화로 미국에 돌아가 10월 12일 미국 뉴저지주의 휴양 도시인 애틀랜틱시티의 병원에서 사망하였다.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져 양화진 외인묘지에 안장되었다. 사후에도 언더우드 가문은 조선에 남아 3대에 걸쳐서 의료 선교와 한남대학교의 설립으로 교육 발전에 기여하였고, 특히 4대손인 원한광(호러스 호튼 언더우드 주니어)은 1980년에 광주민중항쟁을 해외에 알려서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에 의해 강제 추방을 당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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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이은선, “언더우드 선교사의 선교사역 – 그의 에큐메니즘을 중심으로-”, 『역사신학논총』 28(2015): 47-89.
정종훈, “언더우드의 생애, 선교활동, 정신에 비추어 본 기독교대학의 학풍”, 『장신논단』 47(2015): 233-258.
『기독교대백과사전』, 기독교문사, 1985.
서정민. 『한국과 가장 깊은 인연을 맺은 서양인 가문 언더우드家 이야기』. 서울: 살림, 2005.
L. H. 언더우드/이만열 옮김. 『언더우드 – 한국에 온 첫 선교사』. 서울: 기독교문사, 1990.
한국기독교장로회. 『새역사 40주년 기념문집』.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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