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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1915년] 총회장 : 추강(秋岡) 김필수 목사(1872~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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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2.17  13:5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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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로회 제4회[1915년] 총회장 : 추강(秋岡) 김필수 목사(1872~1948)

1872년 7월, 경기도 안성에서 태어나다 경기도 안성군 삼죽면 죽산의 부유한 연안(延安) 김씨 가문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부유한 선비 가문이라 어린 시절부터 수준 높은 한학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김필수의 성장기 및 은퇴 후 생애에 대해서는 전택부가 김필수의 장자 김은석(金恩錫)에게서 아버지에 대한 성장기 및 은퇴 후 생애에 대한 구술 정보를 간략하게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1884년,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하다. 12살 무렵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상경했으나 1884년 12월 4일에 갑신정변이 터졌다. 정변이 3일만에 실패하면서 박영효ㆍ김옥균ㆍ서광범 등 주역 일부가 일본으로 망명했다. 전택부에 의하면, 이때 박영효와 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김필수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일본 고베로 함께 망명했다고 한다. 고베는 우리나라의 옛 제물포처럼, 일찍이 서구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의 대표적 개항장이기 때문에 김필수는 그곳에서 서양에서 들어온 많은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역적 혐의를 받지 않고 귀국하는 것이 가능했는데, 귀국 당시 이미 단발을 하고 기독교에 대한 지식도 갖고 있었다고 한다.

1899년, 세례를 받다. 1904년 선교사 존 페어맨 프레스턴(John Fairman Preston, 변요한, 1875-1975)이 목포 사경회의 상황을 보고하면서 김필수가 “불과 5년 전 세례를 받았다”고 언급하였기에 1899년에 세례를 받았음을 알 수 있다. 1900년 이후 이눌서 선교사의 어학선생이 되다. 그는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원두우, 1859-1916)의 추천으로 남장로회 첫 7인 개척 선교사 중 하나인 윌리엄 레널즈(William D. Reynolds, 이눌서, 1867-1951)의 어학선생이 되었다.

성서 원어에 능통한 학자형 선교사 레널즈가 남장로회 선교사로서 전주에서 사역하다가 한국어 성경번역위원으로 발탁되었을 때 김필수가 그의 어학선생이 되었고, 이 만남을 통해 기독교로 입교했다는 주장(전택부)이다. 전택부의 말이 옳다면, 김필수가 레널즈를 만나 개신교로 개종한 시기는 1896년 이후일 것이다.
김필수는 레이놀즈의 영향으로 기독교에 귀의하여 한국 장로교 선교는 물론 「기독신보」, YMCA, 장감연합협의회, 기독교서회 등 여러 방면의 교회연합운동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길 수 있었다.

그 뒤 추강 선생은 전주에 내려가 완산교회의 장로로 피택이 되었고, 다시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1909년 제2회 졸업생이 되었다. 1901년, 전주 신흥학교 한국인 교사로 활동하다. 1901년 7월 1일에 남장로회 한국선교회가 개교한 전주 신흥학교의 초기 한국인 교사 5인 중 하나. 1903년, 제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 참석하다. 1903년 9월 20일부터 24일까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모인 제3회 조선예수교장로회공의회에 김필수는 전주지역 평신도 대표(교사)로 참석했다.

장로교공의회는 1901년 9월 20일에 창립된 치리회로, 한국인 장로가 세워지고 여러 당회가 결성되면서, 이전에 선교사만 참석하던 선교공의회가 한국인 지도자도 참여하는 장로교공의회로 발전한 것이다. 이 조직은 1907년에 조선장로회 독노회가 결성될 때까지 존속했다. 이 회의에서 김필수는 총 다섯차례 발언한 것으로 나타난다. 9월 21일, “정한 예대로 혼인할 문제” / 9월 22일, “각 전도처에 가상(嘉尙)한 일을 설명할 문제” / 9월 23일, “남녀학교를 의론할 문제” / 9월 24일, “국문교정 할 일로 의론하고 가부의결” / 9월 24일, “가족이 기도하고 성경공부할 문제” (1903년 당시에는) 평신도로서 장로교 대표자들이 모인 전국구 치리회에 처음 참석했음에도 불구하고, 김필수는 혼인, 전도, 학교, 한글표기, 가정예배 등 다방면에서 목사와 교사, 문헌작성자가 각각 담당할 역할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발언한 ‘호남교회의 대변인’이었다.

1903년, 서울 YMCA 창립이사로 활동하다. 1903년 10월 28일, 정동의 서울유니언(Seoul Union)에서 정회원 28명과 준회원 9명으로 황성기독교청년회(Seoul YMCA)가 창설되었다. 이 창립총회에는 한국인이 김필수와 여병현 두 사람 뿐이었다. 1904년, 황성기독교청년회(Seoul YMCA) 12인 이사회가 선거로 구성되었는데, 이때 다시 배재학당 교사 여병현과 김필수 두 사람이 모두 이사로 추대되었다.

   
 

1904-1905년, 전도자와 설교자로 활동하다. 1904~1905년 어간에 선교사들은 보고서에 김필수를 언급할 때마다 전도자 및 설교자로서의 능력을 칭찬했다. 1904년 해리슨, 전킨의 조사로 활동하다. 1904년 당시 해리슨의 조사로, 주로 전라도 북부지방을 담당했다. 이어서 군산의 전킨이 해리슨과 자리를 바꾸자, 이번에는 전킨의 조사가 되었다. 

이때 김필수는 최중진ㆍ윤식명과 함께 전라공의회(전라대리회)가 추천하는 목회자 후보생으로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당시 평양신학교의 수업 기간은 1년 중 3개월뿐이었다. 따라서 나머지 기간은 현장 사역자로 일해야 했는데, 당시 김필수에 대한 기록은 전킨이 남겼다. 1905년 연례회의의 전주지부 보고서에는 “목회를 준비하는 한 학생이 평양의 신설학교에 3개월 동안 출석했고, 복귀한 후 아주 탁월한 설교를 하고 있다”는 보고가 나오는데, 그 한 학생이 김필수인지 최중진인지 윤식명인지 분명하지 않다(이들 모두가 전주지부에서 활동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보고서에서 북서부 순회구(Northwestern Circuit)에서 전킨과 루터 맥커첸(Luther McCutchen, 마로덕, 1875-1960) 선교사와 포사이드 의사가 심방을 하는 동안 한국인 조사 최씨와 김씨, 교사 김씨가 별개로 지역심방을 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신학생은 김필수나 최중진 중 하나일 것이다. 전주지부에서는 교회 지도자를 위한 여름수업도 열었는데, 이 수업 강사는 선교사 테이트와 전킨, 목회자 후보생 김필수와 최중진이었다.

1904년, 목포 사경회 때 간증을 하다. 남장로회 목포지부 선교사로서, 나중에 순천지부 개척의 주역이 되는 존 페어맨 프레스턴(John Fairman Preston, 변요한, 1875-1975)은 1904년 목포에서 열린 사경회 장면을 생생하게 전한다. 사경회를 연례 성경공부이자 사역자 훈련수업으로 규정하는 그는 남장로회가 진행하는 제3회 사경회가 그해 2월 25일부터 3월 9일까지 2주에 걸쳐 목포에서 열렸다고 기록한다. 

당시 참석자는 총 75명으로, 가장 헌신된 기독교인, 나머지 기독교인, 그리고 세례 전 학습자 혹은 신앙고백자, 이렇게 세 집단으로 분류되었다. 선교사들이 수업 및 경건회 강사를 맡았다. 그러나 저녁에는 한국인 지도자들이 인도하는 대중 집회 형식의 모임을 가졌는데,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5분씩 신앙 간증을 나누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여기서 프레스턴은 가장 탁월한 간증을 한 인물로 김필수를 꼽으며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겼다. “가장 탁월하게 전달된 이야기 중 하나는 해리슨의 조사인 김필수가 전한 것이었다. 주제를 ‘변명’(Excuses, “그리고 그들 모두는 한 마음으로 변명하기 시작했다”)으로 정한 그는 불신자와 믿음이 약한 형제들 모두를 완전히 휘어잡아 뒤집어 놓았다. 이 사람이 겨우 5년 전에 세례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졌을 때, 그의 철저한 기독교적 사고관이 더 돋보였다.”

1907년 4월, 세계기독학생연맹(WSCF)에 참석하다. 일본 도쿄에서 열린 세계기독학생연맹(WSCF) 세계대회에 브로크만ㆍ윤치호ㆍ김규식 등 한국 YMCA 인사들과 함께 한국대표로 참석했다. 1907년부터 전북대리회 서기를 맡다. 1907년부터 1911년까지 독노회의 하부 지역조직인 대리회가 존재한 시기에 전북대리회 서기를 맡음 1908년부터 독노회 부서기를 맡다. 1908년(제2회), 1909년(제3회), 1910년(제4회), 1911년(제5회) 독노회에서 연속으로 부서기로 활동하였다. 1908년, 전주서문교회 초대 장로로 안수를 받다. 
1908년 호남 첫 교회인 전주서문교회 초대 장로로 안수 받았다.

1905년 전주서문교회, ㄱ자형 교회 1908년, 『경세종』(警世鍾)이라는 개화기 신소설을 발표하다. 1908년 평양신학교 재학 시절, 안국선의 ‘금수회의록’과 비슷한 개화기 우화소설 『경세종』(警世鍾)을 발표하였다. 이 소설은 한국 문학 역사에서 신소설에서 근대소설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특징을 보여준 작품이라는 점에서 근래에 여러 문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1909년, 목사 안수를 받다. 1909년 장로회 제3회 독노회에서 8명이 안수를 받아 장로교 목사가 되었는데, 이중 3인이 전라대리회 출신 김필수ㆍ최중진ㆍ윤식명이었다. 이때 “김필수는 진안, 장수, 무주 등지에 마로덕과 동사목사”가 되었다. 동시에 그는 군산에 소재한 군산교회(현 개복교회)와 구암교회(궁말교회)의 위임목사로 임명되었다. 김필수 부임 후 양 교회는 교인 수가 늘었다. 그는 두 교회의 장로와 집사 안수도 노회에 청원하고 허락받아 두 교회를 당회를 가진 조직교회로 발전시켰다.

김필수 목사와 구암교회 전라북도 군산시 영명길 22에 위치한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소속의 교회.
구암교회의 설립 시기는 1) 1893년 1월 전킨(William M. Junkin, 전위렴)과 드루(Adamer D. Drew, 위대모) 선교사가 한국인 장인택을 조사로 하여 호남선교를 시작하였는데, 장인택 조사가 회계집사가 된 시점, 2) 1896년 4월 6일 전킨 선교사의 집에서 예배 드리기 시작한 시점, 3) 1899년 군산항 개항 이후 12월 21일 임피 궁말로 옮겨 전킨의 집에서 궁말교회로 예배를 드린 시점이라는 주장이 공존한다. 

1910년 4월 9일 오인묵이 장로로 장립되며 조직교회로 발전하였으며, 1913년에는 양응칠(梁應七)이 장로로 장립되었고, 개복동교회 장회장인 김필수 목사가 구암교회 당회장까지 겸임하였다. 김필수 목사 재임 시절인 1914년 구암교회 교인 수는 220명이었고, 1915년에는 499명으로 대폭 증가하였다. 이후 구암교회는 계속 부흥하였고, 군산 지방의 모교회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구암교회는 알렉산더(A. J. A. Alexander) 의사를 기념하기 위해 안락소학교를 경영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였으며, 1896년에는 군산영명학교(현 제일고교), 1902년에는 군산멜본딘여학교(현 영광여중고)를 세웠으며, 구암예수병원 등도 설립하여 교육과 의료사업을 진행하였다. 또한 구암교회는 한강 이남과 호남 최초의 군산 3ㆍ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교회로 알려져 있다. (군산의 구암동산에서 3월 5일 발원되어 총 28회에 걸쳐 30,700명이 참가하였고, 사망 53명, 실종 72명, 부상자가 195명이 발생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구암교회]

1911년, 조선장로회 전라노회 초대 노회장에 선출되다. 독노회 시대가 끝나고 1911년부터 지역별 대리회들이 노회로 승격된 1911년 10월 15일, 전수 서문밖 예배당에서 목사 20명 장로 25명으로 성찬식을 거행하고 전라노회를 조직하였을 때 초대 노회장에 선출되었다. [회장ㆍ김필수 목사, 부회장ㆍ배유지(유진 벨) 선교사ㆍ서기ㆍ이승두 장로, 회계ㆍ최의덕 목사, 최국현 장로, 공천위원ㆍ최흥서 장로] 이후 1916년까지 내내 전라노회장을 선교사들이 역임하는 상황을 볼 때, 김필수가 선교사의 영향력을 능가하는 호남 기독교 대표자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1915년, 조선장로교 제4대 총회장으로 당선되다. 

전주서문교회에서 열린 제4회 장로교 총회의 4대 총회장이자 첫 한국인 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1-3회까지 총회에는 김필수의 선배로 장로교 초대 7인 목사에 드는 유명한 길선주ㆍ한석진ㆍ양전백이 모두 부회장과 서기를 역임한 바 있었기에, 그가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첫 한국인 총회장으로 선출된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제4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을 때, 부회장은 사무엘 마펫(Samuel A. Moffett, 마포삼열, 1864-1939)이었다. 전라대리회와 독노회에서와 마찬가지로, 김필수는 제4회 총회에서 회장이 되기 전에 총회의 부서기(1회), 서기(2, 3회)를 맡으며, 거의 모든 문서 작업을 도맡아 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그가 속한 거의 모든 치리회에서 “서기에서 회장으로” 오르는 비슷한 구도였다. ‘문필’에 관한한, 그는 한국인 목사 중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존재였다.

일시 : 1915년 9월 4~8일, 장소 : 전주 서문밖교회, 참석총대 : 목사 60명, 선교사 50명, 장로 60명 (계 170명), 개회예배 : 배유지 목사가 사회로 기도하고 양전백 목사가 딤전 4:1-16을 봉독하다. 임원선거 : 회장ㆍ김필수, 부회장ㆍ마포삼열, 서기ㆍ함태영, 부서기ㆍ장덕로, 회계ㆍ피득, 부회계ㆍ김석창 씨 등을 선출하다.
총대들의 휘장을 제조하여 보내준 순천여학교 학생들과 회원의 좌석을 위하여 교의를 빌려준 김윤정 씨에게 총회가 감사의 뜻을 전하다.

중국에 파송한 선교사를 본 총회 총대로 참석할 수 있도록 하다. 전도국 회계 박치록 씨가 공금 2,500원을 유용하여 백여두락의 답토로 대신 받다. 중국 선교사 김영훈 씨가 중국선교의 장래가 밝음을 설명하고, 선교사의 거주 가옥과 자녀들의 교육방침에 대해 총회의 지원을 요청하다. 전도국 지회계를 각 노회에 두기로 하다. 총회 노회비 수집방법을 연구 보고케 하다. 예수교회보가 재정난으로 계속 발행이 어려운 데다 사무원 김종상 씨가 2,400여원을 유용하여 회보 폐지가 불가피하게 되었음을 보고받고 청산위원을 설정하다(청산위원 : 원두우, 함태영, 이석진). 연합 선교회에서 예수교 연합회보사 설립 의사를 밝히다. 재정보관을 연대명의로 저금케 하다.

서간도의 한국인이 약 10만여명인데 생활이 심히 곤란하고 괴이한 질병이 돌아 화를 당하는 자가 종종 있으며 중국인의 엄청난 핍박이 있고 왕래가 불편한 가운데 있으나 선교의 발전이 있음을 보고받다. 일본 기독교 조선 총회 대표로 스즈키 목사가 참석함으로 언권을 허락하다. 길림성 선교구역을 분계 보고받다.
북간도 선교 상황이 발전적이라고 보고받다. 조선 연합 주일학교(초교파)의 결정으로 주일학교 교사 양성법을 인쇄 배포하다. 주일학교제도의 표준을 정하다(1년 동안 매 주일 성경공과를 예비하고 장년반 - 21세 이상, 유년반 14~20세, 소아반 1~13세로 분류하며, 주일공과를 예비하기 위해 매 주일 교사회를 열 것과 성경을 빨리 찾아 읽는 법과 십계명을 가르치고 주일학교 주일을 정하여 회집할 것 등이다).

1916년 10월 일본 동경에서 열리는 노회가 시험을 치른 후에 강도사나 목사 직분을 맡기도록 하다. 시무하지 아니하는 목사는 언권위원으로만 참석하게 하다. 제7일 안식교회에 유혹 받는 교인이 없도록 하고 교인 중에 그 교리를 따르는 자는 권징하도록 하다. 장로회 정치, 권징조례, 규칙과 교회사규를 출판하기로 하다. 총독부 규칙 중에 기독교에 어긋나는 사항을 교섭위원을 정하여 알아보도록 하다. 부부가 별거하여 생활하는 일에 대하여는 각 당회가 정할일이지만 힘써 화목시키고 형편을 보아 치리하도록 하다.

임시노회 소집시에 회장은 15일 전에 회의 안건과 일시를 통보하도록 하다. 장로 피택은 투표수의 3분의 2가 되도록 하다. 자선사업은 큰 교회가 한 지체로서 해야할 일로 의남매나 수양남매의 명칭을 두어 친근한 관계를 갖는 것은 금하도록 하다. 총로회비를 성찬에 참여한 사람의 수효에 따라 받기로 하다. 총계표 중에 세례인 도합을 성찬에 참예할 만한 사람과 책벌인의 도합으로 나누도록 하다. 부모가 작고한 날에 음식을 장만하고 교우들과 나누어 먹는 것은 불합하니 교회가 권면하도록 하고 만일 죄가 되는 줄을 알면 다스리도록 하다.

예수교 연합회보사 사장을 김필수 씨로 정하다. 신병은 귀국한 이길함 목사에게 위문편지를 보내기로 하다. 재정난으로 많은 학교가 유지에 곤란함을 보고 받다. 학교에서의 예배와 성경 교수는 10년 후부터 폐지하라는 총독부의 결정에 대해 불폐해 달라고 간청하기로 하다. 요배식에 대하여 총독부에 교섭하기로 하다. 평남 수안, 상원 등지에 있었던 수재에 대해 평남노회와 각 교회 개인에게 구제금을 받아 구제하다.
감사일을 감리회와 교섭하여 같이 지키기로 하다. 

1915년, 전라도에서 서울로
1915년 서울에서 장감연합신문인 「기독신보」(The Christian Messenger) 창간 논의가 진행되면서, 선교사 외에 한국인 편집자(주필)로 김필수를 초빙하는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기독신보」 창간 이전에 이미 한국 장로교와 감리교는 각각 「예수교회보」와 「그리스도회보」를 발간하고 있었다. 장로교인 김필수는 이미 1911년부터 1913년까지 「예수교회보」에 사설 5편, 수상 1편, 설교 1편을 기고한 바 있었다. 또한 이미 1913년에 「예수교회보」 편집자로 김필수를 초청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노회와 김필수 본인의 거부로 당시 시도는 무산되었다. 

그러나 1915년에는 상황이 변했다. 그해 10월에 모인 전라노회 임시노회에서 총회 신문위원 중 하나였던 호남 원로 선교사 레널즈는 김필수 이외에 적임자가 없고 본인의 동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노회를 설득했다. 결국 노회는 김필수를 서울로 보내기로 결의하고, “본 노회가 군산ㆍ구암 양 교회 위임을 해약하여 2년만 전라노회 지경 밖에서 일하기로 허락하기를 동의 가결”했다. 이런 김필수의 서울 전임 논의에 대해 군산교회 신자들은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 표시했다. 노회에 유임신청서를 제출하여 위임목사를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레널즈의 발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목회자로서 탁월했음에도, 문필가로 인정받기를 원했던 김필수의 서울 전임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경세종』 이후 문학작품을 쓰지 않은 김필수가 얼마나 문필활동에 목말라 있었는지, 자기 재능을 발휘할 공간을 얼마나 애타게 찾고 있었는지, 당대 한국의 역사 현실을 타계할 방안을 어떻게 모색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1915년 「기독신보」 초대 주필 및 편집인이 되다. 1915년 12월, 김필수는 「기독신보」 초대 주필 및 편집인(1921년 5월까지)으로 활동한다. 당시에는 재정이 안정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경회나 여러 집회가 열리는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면서 신문을 소개하고 구독자를 확보하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기독신보」는 창립될 당시에는 정치성이 담긴 시사, 비판, 논평을 다루지 않는 순수 종교신문 역할을 감당하겠다는 것이 창간 정신이었다. 그러나 3ㆍ1 운동 이후 1920년 이후에는 시사 뉴스가 자주 게재되고, 일본에 저항하는 내용이 실리면서, 일본 당국으로부터 압수와 탄압을 받는 등, 편집 방향에 변화가 일어났다. 1920년 이후 점점 선교사보다 한국 지식인의 참여가 두드러지고, 일본 당국의 정책도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뀐 상황과 관련이 있다. 해방 후 조선예수교서회 총무를 맡은 김춘배는 김 목사를 두고 “교양이 있고 음풍영월(吟風詠月)의 시정이 풍부했으며 깨끗한 문장을 쓰던 이”라고 기록했다.

기독신보基督申報) 재한 미국 장로교선교회와 감리교선교회가 연합하여 1915년에 창간한 개신교 신문.
원래의 명칭은 『긔독신보』(The Christian Messenger)였고, 최초의 편집진은 선교사인 크램(Cram, W. G.)과 케이블(Cable, E .M.), 그리고 당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이던 김필수(金弼秀)였다. 신문의 발행권은 조선예수교서회가 가지고 있었으며, 비용은 찬송가 판매금과 원조금으로 충당하였다. 1919년에는 항일적인 논조로 인해 네 차례나 압수당하였고, 편집장 박동완(朴東完)은 33인 민족대표 중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징역을 받았다. 또한, 극심한 물가 폭등 등으로 매주 3천 부 이상을 발행하던 것이 2천부를 겨우 상회하게 되었다.

그러나 구독자 확장운동을 벌여, 1920년에는 6천 부 이상을 발행하면서 계속하여 장로교와 감리교가 6:4의 비율로 책임 부수를 정하여 신문구독운동을 펴 나갔다. 1924년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가 초교파적으로 조직되었을 때, 『기독신보』를 예수교서회에서 연합공의회로 이관시켜 일간신문으로 발전시키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1932년에는 이 계획의 실현을 위해 연합공의회에서 확대위원회를 구성했으나, 예수교서회측은 김관식(金觀植)을 이사장으로 하는 새 이사회를 구성하고 발행권의 법적 소유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주필로 임명된 전필순(全弼淳)은 예수교서회로부터 이탈하여 독자적인 경영체계를 세우고, 1933년 8월부터 새롭게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역대 사장은 크램ㆍ김필수ㆍ게일(J. S. Gale)ㆍ하디(R. A. Hardie)ㆍ로드스(H. A. Rhodes)였고, 주필은 김필수ㆍ박동완ㆍ조상옥(趙尙玉)ㆍ박연서(朴淵瑞)ㆍ전필순 등이었다. 이 신문은 한국 교회사상 최초의 초교파적인 연합신문이며, 1937년에 폐간될 때까지 가장 수명이 길었던 교회신문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기독신보(基督申報)]

   
 

1918년, 장감연합회 조직되고 초대 회장으로 임명되다. 
1918년 2월, YMCA회관에서 장감연합회가 조직되었다. 이 조직은 이전까지 선교사들만 회원이었던 1905년의 재한복음주의선교부연합공의회에 한국인도 참여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이 1916년부터 나온 후 논의 끝에 조직되었다. 당시 총 40명이 참석했는데, 북감리회 10명, 남감리회 10명, 북장로회 12명, 남장로회 4명, 캐나다장로회 3명, 호주장로회 지역 출신 1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때 초대회장이 된 인물이 남장로회 지역의 김필수였다.

이 때에 김필수 회장은 취임설교에서 「일 천부(天父)의 뭇ᄋᆞ들, 일 구주(救主)의 지톄(支體)로써 교파를 분립(分立)ᄒᆞᆷ은 다만 시긔(時期)와 쟝소(場所)에 의ᄒᆞ야 형식에 불과ᄒᆞ거늘 따라서 정신세계에 까지 영향이 혹 잇슨 즉…현금에 쟝로 감리 량교파가 이를 고념(顧念)ᄒᆞ야 일톄적(一体的) 련합긔관을 조직ᄒᆞᆫ다」라고 선언했던 것이다. 1918년 9월 25일, YMCA 부총무 천거위원회 모임에 참석하다. 육정수가 부총무로 천거되었을 때, 당시 위원으로 김필수도 참석했다.

1918년 11월, 독재저항계몽강연회에서 강연하다. 1918년 11월 세계기도주간에 1주일간 종교집회를 빙자한 독재저항계몽강연을 열었는데, 오긍선ㆍ신흥우ㆍ박희도ㆍ정춘수와 함께 연사로 나선 김필수는 12일에 “사회개량의 요소”라는 제목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종말과 무단정치의 종식을 암암리에 주장하였다.

1919년, 금강 이남지역에서 3ㆍ1 만세시위를 협의하다. 김필수는 금강 이남지역 3ㆍ1운동을 배후에서 주도한 비밀 지도자였다. 그는 1919년 2월 하순에 광주로 내려가 광주의 성자로 유명한 오방 최흥종과 김철 등을 만나 거사를 협의했다. 이후 최흥종과 김철은 3월 2일에 다시 상경하여 광주 거사를 논의했는데, 최흥종은 서울에서 3월 5일 시위에 참여했다가 투옥되었다. 광주에서는 김철 등의 주도로 3월 10일에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궁내부 합판을 지낸 인물이자, 1909년에 북촌 안동교회를 세운 박승봉(1871-1933)의 계동 135번지 집에서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이 3ㆍ1운동을 계획할 때, 그 자리에 김필수도 있었다고 한다. 현순의 『현순 자사(自史)』 2월 19일자 기록을 보면, 남문 밖 제중원 약방주임 이갑성의 집에서 이승훈,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 오기선, 박희도, 현순, 김필수가 모여 독립운동을 논의했다고 기록한다) 

1919년 2월 19일 현순 목사는 당시 〈기독신보〉 사장인 김필수 목사의 권유로 3ㆍ1운동 모의에 참여하였다. 다음날 함태영 목사 등 운동 지도부는 영어를 잘하는 현순 목사를 상해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3ㆍ1운동을 해외에 널리 알리는 임무를 부여받던 것이다. 마침내 2월 24일 현순은 가족들을 남겨둔 채 용산역을 떠나 3월 1일 상해에 도착,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번역하여 서방 세계에 타전하였다.

김필수는 전라도 광주뿐만 아니라, 충청남도 대전 3ㆍ1운동과 이후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주었다. 1919년 당시 북감리회 구역이었던 대전제일교회에서 홍성구역을 담당하는 유급 권사로 일하던 이명제는 김필수의 비밀연락을 받고 당진, 예산, 서산 등지에서 만세시위를 한 뒤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했다.
3ㆍ1운동 참여를 반대한 것으로 유명한 윤치호도 운동 직후인 1919년 4월 4일 일기에서 이상재, 김필수, 오기선(1877-1946, 감리교 목사)이 그날 아침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전한다.

1919년 11월, YMCA 강당에서 시국 강연을 하다. 1919년 11월 14일에 YMCA 강당에서 열린 강연에는 약 1,500명이 모였는데, 김필수는 “합일”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였다. 강연의 핵심은 무력주의로 세계를 재패하려 한 독일이 실패했듯, 일본 군국주의도 결국 종말을 고하리라는 경고였다. 1920년 1월, 서울 YMCA 종교강연주간에서 강연하다. 1920년 1월 17일 : 서울 YMCA종교강연주간의 마지막날 연설자는 김필수였다. 윤치호는 김필수의 연설을 훌륭하다고 칭찬하기는 했지만, 특유의 냉소로 영적인 힘이 부족하다고 비웃는다.

1920년, 대전도운동을 조직하다. 1920년 4월, 대전도운동을 조직하여 기독청년전도단을 태동시키고, 7월부터 12월까지 전국을 4개 지역으로 나누고 전도대를 파견했다. 이때 전도대장 김필수는 스스로 경기와 경북 전도대, 즉 경경대(京慶隊)를 직접 인솔하고 전도활동에 뛰어들었다. 이 활동은 때마침 그해 4월 민족대변지를 자임하며 출발한 「동아일보」가 적극적으로 보도하면서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1920년 7월 1일부터 12일까지 전국 순회 전도단을 조직하여 활동할 때에는 그 단장이었다. 추강 선생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심하여 기도하라…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라는 베드로전서 4장 7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으로 전도대 발족 설교를 한 뒤 제1대는 경기도와 경상북도, 제2대는 충청북도와 전라북도, 제3대는 함경도와 강원도로 나누어져 전도와 계몽강연을 떠났던 것이다.

1921년 5월, 「기독신보」를 떠나 YMCA로 자리를 옮겼다/경제적인 어려움, 개인적인 비전 좌절? 그밖에도 추강 선생은 물산장려운동, 절제운동에 앞장서서 YMCA 계몽사업을 주도했으며, 특히 이상재, 윤치호 등과 3거두의 지도체제를 이루어 실무담당인 신흥우 총무의 배후 인물이 되어주었다. 1921년 5월, YMCA 월간지 「청년」 책임편집을 맡다. 1921년 5월 공식 취임 후 김필수가 맡은 핵심 보직은 그해 3월에 창간된 YMCA 월간지 「청년」 책임편집이었다. 이 잡지가 창간될 때 김필수는 창간사를 쓴 바 있다.

“…시대의 변천에 추의하야 기독교주의를 민족의 문명 향상적 선도하기 위함의 소이로다. 내용의 허실에 대하여는 豫先 敢告키 惟難하되 오직 문예 학술 등 각종 문학 사상을 기독교 정신 立地에서 만천하 인사에게 唱起의 노력을 가하여 하노니 何山何水가 吾人 心思의 배경이 아니며 一柳一花인들 陽春德化의 함양이 아니랴…” 즉, 시대 변천에 따라 기독교가 민족선도와 문명향상의 길임을 인식하여, 문화ㆍ예술ㆍ문학 등 모든 영역에서 기독교 정신에 근거하여 사상을 창달하고 덕을 세운다는 것이었다. YMCA의 보편 정신이자 그 시대 기독교 지식인의 일반적인 생각인 동시에, 기독교 민주주의, 기독교 계몽주의에 근거한 김필수의 사상이기도 했다.

1921년 9월 17일 윤치호의 일기 : 서울 YMCA의 고액 월급자인 이상재와 김필수가 YMCA 이외의 다른 일에도 너무 많이 관여한다는 브로크만의 불만을 전한다. 만약 김필수가 YMCA로 옮긴 후 고액 월급자가 된 것이 사실이라면, 재정의 어려움이 김필수가 「기독신보」를 떠난 이유 중 하나일 수 있다는 추측이 타당한 근거를 얻게 된다.

1922년, 광주 YMCA 창립에 관여하다. 1922년 호남 최초로 광주에서 YMCA가 최흥종을 중심으로 창립될 때, 이를 주선한 3인(이상재, 신흥우, 김필수) 중에도 김필수가 있었다. 1923년, YMCA 연합회 종교부 간사로 이동하다. 1923년 김필수는 중앙 YMCA에서 YMCA 연합회 종교부 간사로 보직 이동했다. 김필수는 「청년」 편집자와 YMCA 간사 시기에 YMCA의 정신과 일치하는 두 가지 다른 형태의 계몽적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하나는 민립대학설립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언론집회압박탄압대회였다.

민립대학설립운동은 1920년 6월에 우리 손으로 대학을 설립하자고 외친 운동으로, 3ㆍ1운동 후 일제 문화통치 배경에서 탄생했다. 1920년 6월 한규설ㆍ이상재ㆍ윤치소 등 100인이 모이고, 1922년 1월 이상재ㆍ이승훈ㆍ윤치호ㆍ김성수ㆍ송진우 등이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열었다. 주동자 중에 YMCA관련 인사들이 많았으므로, 김필수 또한 1923년 5월 10일 경성부 발기인 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언론집회압박탄핵대회는 1924년 6월 21일에 서울 천도교당에서 총독부가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압박하는 것에 저항하기 위해 23개 사회단체가 연합해서 열기로 계획된 대회였다. 당시 결성된 실행위원 63인 중 김필수도 있었다. 이 집회는 일제의 방해로 열리지는 못했지만, 민립대학설립운동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언론인 및 운동가인 김필수가 민족 및 사회운동의 관심사에 공통으로 대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1924년, 개역성경 출판 활동하다. 개역성경 출판을 위한 개정 과정에서 1923년부터 개역자회가 구성되어 활동을 시작했는데, 김필수는 김인준ㆍ정태용 등과 함께 한국인 위원 중 하나가 되어 1924년부터 활동했다. 

1924년 12월, 예수교서회 편집자로 옮기다.
1924년 12월, 김필수는 예수교서회 편집자로 자리를 옮겼다. 예수교서회 책임자 윌리엄 클락과의 친분 때문이었다.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였던 클락은 1923년 초가을까지 전주에서 16년간 목회선교사로서 일한 후 1924년 초 예수교서회 편집부 번역책임자가 되었다. 프린스턴 대학과 신학교 출신에,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한 경력도 있는 학구적인 선교사였으므로 출판사 일을 맡기에는 적임이었다. 클락에 따르면, 김필수는 1924년 12월부터 서회 편집부에 근무하기 시작했는데, 목사 오천영은 처음에는 보조로 고용되었고, 김필수는 처음부터 직원이었다. 김필수는 성서공회에서 성경번역을 돕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를 제외하고 내재 서회에서 전임으로 일했다. 

김필수가 번역한 책은 16권이며, 각 책 평균이 200쪽이므로, 영어 인쇄서 기준으로 2,500쪽이 넘는다. 김필수는 외부 저자와 번역자가 쓰거나 번역한 책의 감수도 맡았고 서회가 출간한 잡지 The Korea Book-shelf 편집도 책임졌다. The Korea Book-shelf는 서회에서 낸 책을 광고하는 일종의 홍보용 정기간행물로, 1년에 두 차례 발행되어 전국 교회와 기독교 사역자, 서점 등으로 발송되었다. 김필수를 비롯한 편집부 내 한국인 번역자 4인은 「기독신보」에 매주 반쪽 분량의 서평을 게재했다. 김필수는 1924년부터 1937년까지 출간한 거의 모든 주요 출판물에 관여했다.

1927년 9월, 언더우드 사망 11주기 축사/1927년 9월 21일에는 언더우드 사망 11주기로 새문안교회에서 기념비 제막식 행사가 있었다. 이때 선교사와 한국인 지도자 총 9명이 행사 식순을 맡았는데, 이중 김필수는 한석진과 함께 축사를 맡았다. 1931년 6월, 예수교서회 신사옥 낙성식 식사(式辭) 1931년 6월 8일 예수교서회 신사옥 낙성식을 위해 YMCA 대강당에서 천여 명이 모인 거대 행사가 벌어졌을 때에도 김필수는 식사(式辭)를 담당했다. 1932년 이후 은둔 생활/1932년 회갑을 맞이한 김필수의 이후 생애는 은둔이라는 단어로 요약될 수 있다. 

전택부는 “일제 말기 한창 탄압이 심할 때는 완전히 은퇴하여 꿩 사냥도 다니고 친구들과 한시를 지어 읊기도 하며 지내다가 1948년 10월 30일 76세로 이 세상을 떠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1940년, 음주문제로 전북노회에서 권고사직되다. 1940년, 전북노회가 그의 음주 문제를 제기하자 경기노회로 옮기기로 하고 1940년 임시노회에 이명청원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이를 탐탁찮게 여긴 노회는 이명청원서를 반려했다.
이듬해(1941년)에 열린 전북노회 정기노회에서는 “본 노회에 속한 무임목사 김필수ㆍ박창욱 양씨는 정치 17장 4조에 의하면 권고사직함이(서면으로) 가하오며”라는 안을 통과시켰다. 이로써 김필수의 목사로서의 생애는 종결되었다. 아마도 서울에서 다양한 연합기관에서 일하며 그의 생각이 바뀌고, 음주 등 생활이 다소 자유롭게 된 것이 문제의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전 회원에게 엄격한 금주 규칙을 강제하고, 목사로서 노회의 관리를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한 한국장로회 치리회와의 어느 정도 갈등은 불가피했다.

1948년 10월 30일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김필수에 대한 평가/남장로회 소속으로 목포 정명여학교 교장을 역임했고, 초기 남장로회 한국선교회 역사서를 쓰기도 한 애너벨 니스벳(Anabel Major Nisbet, 유애나, 1869-1920)은 김필수를 “학식 있는 사람”이자, “전 교회에 힘과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로 묘사했다.
예수교서회에서 김필수와 함께 번역 및 출판사업에 종사한 학구적인 선교사 윌리엄 클락(William M. Clark, 강운림, 1881-1965)도 동역자를 소개하는 글에서 김필수를 “한국교회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즉 지위와 평판이 높고, 존경받는 인물로 묘사했다. 

1948년부터 대한기독교서회 총무를 맡은 김춘배는 일제 강점기에 목사로서는 최고인 문필가 두 사람으로 장로교의 김필수와 감리교의 최병헌을 회고하면서, 김필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기독신보는 1915년에 창간되어 1933년까지 서회가 운영하였다. 그 초대 사장 겸 편집책임자가 게일 박사였다. 초대에 그 편집을 돕던 이 중에 이름을 떨친 이가 김필수 목사이다. 그는 한학에 교양이 있고 음풍영월의 시정이 풍부하고도 깨끗한 문장을 쓰던 분이다. 최병헌 목사는 나이가 김필수 목사보다 선배이지만 당시 목사로 글 쓰는 데는 이 두 분이 최고봉이 아니었던가 한다.” 「중앙일보」 1973년 12월 6일자 기사, “일진회원 숫자풀이로 욕하는 노래 웅변가론 김필수ㆍ김일선ㆍ김창제 꼽아”를 보면, 1920년대 YMCA에는 세 사람의 웅변가가 유명했다고 하면서 “김필수는 목사이며 준학자이면서 얼큰하게 술에 취하면 더 말 잘하는 호탕한 웅변가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김필수의 『경세종』에 대하여/ 1908년 10월, 출판사 광학서포에서 간행된 『경세종』은 제목 그대로 세상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 쓴 계몽소설이었다. “이 작품은 금수ㆍ곤충 등을 내세워 인간사회의 추악상을 비판하게 함으로써 인간에게 경종을 울리려는 의도를 두고 있다. 이 작품은 거의 같은 시기에 출간된 안국선의 『금수회의록』과 더불어 개화기 우화소설 계열에 속하는 풍자적 작룸이다”라는 평가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지식인으로서 우화라는 수단으로 민중을 계몽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특히 마지막 문장에 ‘아멘’이 등장하는 등, 기독교 용어도 숨김없이 등장한다. 당시 이 작품은 일간신문 광고에 지속적으로 실릴 만큼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다. 

광학서포(廣學書鋪)는 윤치호, 이상설 등이 1906년 4월에 문명개화와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설립한 출판사였다. 대표적인 신소설인 이인직의 『혈의루』와 『귀의성(상)』, 신채호가 번역한 『이태리건국삼걸전』, 장지연의 『애국부인전』 등의 애국계몽 소설이 이곳에서 출판되었다. 

‘세상을 깨우치는 종’이라는 뜻의 ‘경세종’은 원래 정동제일교회에 세워진 종 이름이다. 이 종은 1902년 불의의 해난 사고를 당해 순직한 감리교 최초의 선교사이자 정동제일교회 초대 담임목사인 아펜젤러 선교사를 추모하기 위해 순직 5주년을 맞은 1907년에 만들어 세웠다. 당시 교회를 담임하던 최병헌 목사가 발의해 교인들이 모은 성금으로 미국에서 만들어 들여온 이 종은 미국 독립을 상징하는 필라델피아의 ‘자유의 종’을 본뜬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종의 이름은 상동교회와 함께 애국독립 운동의 본거지로서 지사들이 모여 항일의지를 불태우고 시민들의 애국정신을 일깨우는 구심점 역할을 하던 정동교회의 상징성을 함축한 이름이라고 생각된다. 경세종은 지금도 정동교회 안의 문화재교회에 보존되어 있으나 1990년 이후 사용이 중단되었다. 

소설은 춘흥을 못 이겨 산에 오른 한 사람과 그를 속이려고 접근한 풍수들이 만나 함께 엿본 금수와 곤충들의 친목회 장면이 이야기의 골간을 이루고 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교회 안팎의 도덕적 일탈과 무지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는데, 그것은 기독교 신앙을 통한 문명화만이 날로 쇠퇴해가는 국권을 지켜낼 수 있다는 기독교 민족주의 의식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저자는 미국이 개국 130여 년 만에 세계 최고의 부강한 나라가 된 것은 미국 사람들의 철저한 기독교 신앙 때문이었다면서 올빼미의 입을 통해 이렇게 경고하고 있다. 

“완고니 수구니 하는 자들이 실로 답답해요. 이 세계를 비교하여 보면 몇백 년 전에 유럽이나 아메리카나 다 캄캄한 밤과 같이 문명치 못하고 그 때에 아세아는 낮과 같이 문명한 빛이 있더니 지금은 유럽과 아메리카는 광명한 낮이 되고 먼저 문명하던 아세아는 도리어 광명한 빛이 있으나 보지도 못하고… 백인종들이 종교의 힘으로 교육하여 저렇듯 강성한 것이올시다마는 문명의 열매 되는 각종 기계와 물건은 취하여 가지나 문명의 근본 된 그 종교는 알아볼 생각도 없는 고로 눈이 있어도 마땅히 볼 것을 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일향 저 모양으로 지내면 백인종의 노예 되기는 우리가 눈 깜짝할 동안 될 것인 줄 확실히 아나이다.” 

서양 문명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기독교를 받아들이면 우리도 그들과 같은 부강한 국가를 이룰 수 있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노예가 되고 말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김필수는 나라의 부강이 한두 사람의 빼어난 영웅에 의해서 추동되는 것은 아니라, 백성 모두의 도덕성 회복, 기독교 문명화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경세종』은 1907년 평양을 중심으로 세차게 타올랐던 기독교 대부흥운동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1903년 원산에서 시작되어 1907년 1월 평양에서 절정을 이룬 기독교 대부흥운동은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교회 성장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한국교회 고유의 성격을 특징짓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부흥운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바로 ‘회개-죄의 고백’이었다. 그래서 ‘대부흥운동’이라는 말 대신 ‘대각성운동’이라 불리기도 하며, 평양에서 특히 뜨겁게 달아올라 ‘평양 대부흥운동’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각성운동이 가장 뜨겁게 달아올라 있던 1907년, 김필수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평양에서는 그해 5월, 신학생들을 위한 특별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김필수는 대각성운동의 현장 한가운데서 이를 직접 체험한 것이다. 

작가의 눈에 비친 현실 사회는 심각한 도덕적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다. 문명은 어두워 낡은 인습에 젖어 살면서도 모두들 인간으로서의 도리와 의무를 망각한 채 이기적인 욕망에만 얽매여 살기 때문이다. 금수와 곤충들의 모임이 기독교 신앙공동체임을 미루어 볼 때 『경세종』은 기독교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본 현실 사회의 온갖 병적 징후들에 대한 비판으로 읽힌다. 또한 기독교가 문명의 핵심이며, 불교나 유교는 더 이상 문명의 진보를 견인할 수 없다는 견해도 드러나 있다. 

『경세종』은 우리 근대소설사에서 미국에 대한 인식을 비교적 적극적으로 드러낸 최초의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김필수는 기독교 문명화를 통한 도덕성 회복이 나라를 구하는 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본보기를 미국에서 찾고 있다. “북아메리카에 ‘합중국’이 있는데, 그 나라는 서력 일천칠백십육 년 칠월 사일에 독립국이 되었는데, 한 달에 네 날씩, 일 년에 오십이 일은 임금부터 백성까지 전국에 세상일은 쉬고 하나님께 예배하나니, 지금 개국한지 일백삼십이 년쯤 되매 일 년에 오십이 일씩 계산하면 육천팔백육십사 일을 전혀 논 것 같으되, 그 나라 부강은 귀 있는 자들이 들었을 것이오.” 

『경세종』은 기독교 전교를 의도한 호교론적 바탕 위에 쓰인 것이지만, 맹목적인 호교론적 차원의 소설이 아니라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가 전제된 기독교 전교 소설이다. 같은 관점으로 볼 때, 작품에서 강조되고 있는 도덕성의 회복은 개인적 차원의 윤리 개념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의 사회윤리 개념이다. 작품에 드러난 사회비판 의식이 역사적・사회적 맥락 위에서 보다 깊이 있게 성찰되지 못한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예컨대, 양반들의 가렴주구와 외세 침탈 등에 의해 민중들이 절대빈곤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현실을 지나친 채, 여자들의 매춘을 개인의 도덕적 타락 행위로 이해하거나, 아기를 낳아 버리는 악습을 비판하면서 ‘과부재가금지법’이나 시비하는 것 등이다. 

이것은 기독교 대각성운동이 가지는 한계이기도 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일제 식민주의자들을 미워한 죄까지 회개하면서, 식민지 현실을 한국인 자신의 죗값으로 이해하거나 한국인들의 신앙을 단련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으로 해석할 정도였다. 과거를 꿈꾸던 선비 출신 김필수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나라의 운명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지식인이었다. 그래서 젊은 나이에 개화파 혁명가들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망명객의 신세로 내몰리기도 하였다. 그의 인식의 자장 안에 든 조선의 현실은 혁명이 필요한 사회였고, 기독교인이 되어 바라본 그것은 무지와 죄악으로 가득 찬 세계였다. 기독교 문명화만이 유일한 활로라고 믿어 목사가 되는 길에 들어섰을 때, 평양을 중심으로 불타오른 대각성운동을 현장에서 체험했다.

그리고 ‘세상을 깨우는 종’, 『경세종』을 써서 스스로 운동의 주체가 되었다. 건국 132년 만에 세계 제일의 부강한 나라를 이룬 미국의 힘이 기독교 문명화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세종』은 기독교 전교를 의도한 호교론적 바탕 위에 쓰인 것이지만, 맹목적인 호교론적 차원의 소설이 아니라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가 전제된 기독교 전교 소설이다. 같은 관점으로 볼 때, 작품에서 강조되고 있는 도덕성의 회복은 개인적 차원의 윤리 개념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의 사회윤리 개념이다. 

『경세종』은 일차적으로 초기 기독교 지식인들의 기독교 인식 방법을 이해하는 데 유효한 자료이나, 김필수와 그의 기독교 사상의 연원을 밝히는 데도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 근대소설 또는 기독교 소설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될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기독교대백과사전
「중앙일보」 1973년 12월 6일자 기사, “일진회원 숫자풀이로 욕하는 노래 웅변가론 김필수ㆍ김일선ㆍ김창제 꼽아”
“기독교 문명화의 길 – 김필수의 『경세종』”, 『기독교사상』 2020년 3월호
박정규, “제4회 총회장 김필수(金弼秀) 목사”, 『교회연합신문』 2016년 2월 4일자.
전택부, “추강 김필수 목사,” 『청년』(1971년 5월 3일), 2.
이재근 (2019). 추강(秋岡) 김필수(金弼秀)의 생애와 유산 : 목회자, 기독 사회운동가, 문필가. 한국기독교와 역사, (51), 75-112.
김수진, 『총회를 섬겨 온 일꾼들 : 총회장 88인 열전』(한국장로교출판사, 2005), 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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