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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광은목사(1923-1970) 탄생 1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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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2.19  20:4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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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암교회서 성대히 열려 

호가 牛臣(소같은 일군)이신 황광은목사(1923-1970)가 세상에 오신지 100년이 되는 해에 섬기던 영암교회(유상진목사)와 고인의 교훈과 존경을 잊지 않는 분들이 모였다. 약관 47세에 10년째 섬기던 영암교회서 지병으로 소천하신 것에 아쉼이 여전하다. 그후 10주기, 25주기, 30주기 추모를 했지만 고인에 대한 추억은 시간이 갈수록  애잔하다. 황목사를 기억하는 이들도 하나 둘 사라져 가는 떄에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시모였다.

이 행사는 교회만이 나선 것이 아니다. 황목사의 자취가 남아있는 한국스카우트연맹, 서울 YWCA, 삼동 소년촌, 대광중고동창회(13-18회) 후원으로 영암교회가 주관했다. 행사 사회는 영암교회 유상진위임 목사의 사회로 김충열목사(영세교회 원로)의 기도와 대광고 제자 조유택목사(남대문교회 원로)가 설교했으며 이수영목사(새문안교회 은퇴)가 축도했다.

김형석교수등의 추모 영상과 우리교단 모교회인 새문안 제자 김종희목사(전경신 교목) 대광고 제자 백도웅목사(전 NCCK총무) 엄문용박사, 대광고 제자 임광진장로(전 재일본 한국YMCA총무)의 회고가 있었다. 한국스카우트연맹은 현 회관 건축에 공이 크고 6대 사무총장을 지낸 공로로 봉사대장 훈장을 추서했다.

   
 

유족은 2남 2녀중 차녀 황은숙사모(사위 김정호목사는 뉴욕 후러싱제일교회)가 미국에서 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또 황목사의 유지를 받드는 우신장학회의 후원으로 기존에 출판된 "인간 황광은"(김희보목사 저) 와 이번 행사를 준비하며 모은 원고로 2권의 책자를 출판한 “신앙과지성사” 최병천장로에게도 축하와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최근 모이는 일이 쉽지 않은 가운데 드물게도 영암교회 본당을 꽉채운 성원이었다. 하나같이 고인을 기억하는 분들의 말은 “성자, 작은 예수” 라는 말이 인색하지 않아 보인다. 고인을 기억하는 분들이 거의 초중고등학생들이었는 데 황목사의 체취나 설교 언행에 대하여 진한 감동이 여전해 보인다.

우리교단에 큰 목사들이 여럿이고 공부를 많이 한 분들, 큰 교회를 목회한 분들, 집안이나 인물들이 좋은 분들이 적지 않치만 언행일치를 보이고 후학들로부터 한결같이 존경을 받는 분들은 그렇게 많치는 않아 보이는 가운데 황광은 목사야 말로 영적으로 우리교단의  큰 자산으로 목회자들이 본받아야 할 대목이 많다. 

   
   
 

황목사의 약력

황목사를 회고하는 이들의 몇가지 사연증 귀한 것은 책자를 참조하시고 공식적으로 나온 것만 소개할 것 같으면 평북 용천에서 출생후 월남하여 한영고등학교 야간을 나와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다. 청소년 시절부터 고아들 공동체인 향린원에서 숙식을 하면서 돌보는 삶을 시작한다. 이런 연고로 1947년에 YMCA소년부 간사를 시작하여 한국전쟁중인 1951년 제주도에서 한국보육원 책임자가 된다.

황목사와 사모의 제안으로 한강변 땅을 국가로 부터 불하받아 삼동소년촌(미국의 보이스 타운과 같은 전쟁 고아 수용소) 창설하고 교육과 돌봄으로 자립심을 키워주는 운동을 한다. 그리고 1961년에 대한소년단(보이스카우트) 6대 사무총장을 역임하여 발전에 크게 기여한다.

   
 

1955년부터 새문안교회 부임하여 1958년에 부목사로 안수받고 사역하면서 크리스찬신문 초대 편집인,기독교교육 주관,새벗 어린지 잡지 창간 편집장, 연극단 창립,아동영화 제작, 예술활동에 조예을 보이셨는 데 마술과 동화구연등 다재다능하셨다고 기억한다.

1960년에는 기독교 명문사학 대광학교 교목으로 부임한다. 1년간 시무후 인근의 영암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는 다. 그러면서 대광초중고 학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 윤석열 대통령도 대광초 시절 황목사의 설교를 듣고 보이스카으우트 활동을 했으며 영암교회에 출석했다고 소회한 바 있다.

영암교회에서 1970년 10년이 되던해에 건강이 좋지 않아 47세로 안타깝게 소천한다. 사모 김유선은 김관식목사의 막내 딸이신데 카나다토론도대학과 프린스턴신학대학을 나오시고 귀국해 함흥영생중고등학교 교장을 지낸 교육자다. 해방후 조선신학교 교수를 지내셨고 황목사 사모는 이대 약대를 나온 재원이었다.

황목사 사후 사모는 잠시 YWCA간사를 하다가 미국 시카코로 이민을 가서 4 자녀를 홀홀단신으로 생활전선에 뛰어 들어 교육을 시킨다. 그리고 늦은 나이게 맥코믹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고 황화자 전도사(여전도회 전국연합회 총무)를 만나 국내와 연결이 되여 여전도회 선교사업인 "작은 자 선교회" 을 후원한다. 그리고 황목사 사후 25주년에는 미국과 세계에 있는 지인들이 시카코에서 모이기도 했다. 그리고 당시 100만원을 기부하여 황목사의 아호을 따라 우신장학회를 만든다.

   
                                     * 황목사 둘째 딸과 사위 김정호목사(미국 NY후러싱제일교회)와 백도웅목사

제자 백도웅, 김종희목사의 회고담 

회고중 대광고 제자 백도웅목사(전 NCCK총무)는 4.19 혁명 당시 가두시위를 나가려던 학생들을 교직원들이 모두 걱정하는 가운데 기도한 후에 교장 이장로장로와 교사들이 앞장서 큰 사고없이 귀가한다. 그 배경에는 당시 영락교회 오제도 공안검사가 기독교사학의 사정을 감안해준 것이다.

흥분한 학생들이 학교에 온 후에 안정되지 않차 황목사는 말씀과 기도로 분위기를 가라앉힌 후 “대광은 황소다. 황소가 성이 나 한번 드리 받고는 꼴밭에서 풀을 먹는 다” 는 말로 학생의 본분은 공부이니 이제 교실로 돌아가라는 식으로 들뜬 젊은이들을 다독거리는 지혜를 발휘하신 분이라는 증언이다.

새문안교회 고등부 시절 만나 목사가 되고 평생 교목을 지내시다 은퇴한 김종희목사의 회고담은 직접 소개하는 데 가난한 거지를 보면 옷을 걸쳐주는 등 말과 행동을 일치 시킨 분이라는 것이다. 큰 일이야 나라가 하지만 작은 일은 좀 있는 사람이 우선 도와야 한다는 취지였다.

   
                                              * 앞줄 좌로 부터 백도웅,한사람 건너 김종희목사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황광은 목사님/김종희목사

1. 황목사님은 성 프랜시스이셨다
목사님은 성프랜시스같으신 분이고 다재다능하신 팔방미인이시다. 황광은 목사님이 새문 안교회에 오신 것은내가 1955년 그러니까 내가고등학교 2학년때이다. 내가 알기로는 난 지도 보이스타운에서 고아들을 위해서 일하시다가 새문안교회 전도사로 오셔서 교육전도사로 유년부 중고등부를 지도하시고 그후 안수받으시고 대광학교 교목실장으로 가실대까지 새문안교회 부목사로 시무하셨다. 그후 그는 대광학교교목으로수고하시다가 영암교회에 당회장으로 목회중에 지병으로 소천하셨다.대광학교 강당에서 발인예배를 드렸는데 2000명의 조객들이 그의 소천을 슬퍼했다. 내 옆에서 어떤 목사님이 “황목사가 10년만더 살고 가셨더라면”하며 아쉬워했다. 황광은 목사님은 못하시는 것이없다 사람들은 목사님을 팔방미인이라고 불렀다. 목사 서울보이스카웃연맹간사장, 아동문학가, 고아의 아버지, 청소년 지도자 등 피아노를 비롯하여 트럽팻 등 악기다루기는 물론 간단한 마술 기크레이션지도 손가락 땐스 등 다재 다능하신 분이다. 청빈으로말하면 6.25동난 제주도피란때 냉수 한그릇 떠놓고 결혼식을 올렸다고 하셨고 새문안교회 부목사로 계실 때 교회 앞 길건너편 동네 비들기집같은 연립주택에 사실 때 필자는 같은 연립주택 바로 옆주택에서 살았는데 목사님은 절대로 쌀로만 된 흰밥을 안잡수신다. 반드시 보리 가 섞인밥이라야 식사를하신다. 깡보리밥도 제대로 못얻어먹는 고아들을 생각하고 함께 고통을 당한다는 것이다. 사모님 이 보리를 섞어 밥을 하시느냐고 무척이나 고생을 하셨다.새문안교회 부목사로 계시면 서 기상대 올라가는 입구 지금 고려병원 자리에 일본식 적산집이 있었는데 그 집 2층을 전세내서 10명의 고아들을먹이고 길르시면서 취직도 시켜주셨다.내가 대학교에 입학했을 때 모자라는 등록금을 내주셨고 졸업 할 때까지 모자라는 등록금을 내 주셨다. 그러면서도 당신은 양복도 무르팍이 바래고 불룩나온 바지를 입 고 다니셨다. 한번은 부르셔서 사무실에 갔더니 10권 씨리스로나오는 교육에 관한 책을 한권주시면서 월부로 파는 책인데 당신이 지불할테니 이 책을 꼭 읽으라고 하셨다. 아마 내가 교육기관인 학원선교에 목회하게 될 것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신 것같 다. 한번은 사택으로 오라고 불르셔서 갔더니 현관에 바지하나를 들고 나와 계셨다. 당신이 입고계신 무르팍이 바래고 불쑥 나온 바지를 입고계셨으면서도 무르팍이 바래지도 않고 반듯한 새 바지 를 입으라고 내 주셨다. 목사님은 어렸을 때 어머니가 누릉지를 긁어주면 곧 밖으로 나가서 거지아이들에게 주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형님이 사준 새 오바를 입고나가자마자 역시 거지에게 벗어주었 다는 애기를 들었다. 마치 성프란시스처럼 사신 분이다. 

2. 황 목사님은 실천 우선 교육자 이셨다.
목사님은 거지에 대한 관심도 특별하시다. 길가다가 걸인을 만났을 때 근성을 키워준다 는 이유로 동전한 입 안주는 사람들은 핑계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근본 대책을 세워주지 못할바에는 걸인이 당장 필요한 것(당시 10원)만 주면 이웃으로서의 최소한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근본적인 대책은 하나님이 하실일이고 나라에서 할 일이라는 말씀이시다. 급한 것은 급한대로 해결해 주 어야 하고 근본적인 대책은 또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한번은 중고등부(옛날에는 중고가 분리되지 않고 모두 중고등부라고 했다) 학생임원을 종각 3층으로 부르셨다. 교회창립70주년 기념으로 창립자의 손자인 원일환장로님이 미국에서 주조해서 배에 싣고와 종탑꼭때기에 설치한 교회종(지금은 교회 계단 옆에설치)을 치는 밧줄이 2층까지 매달려 느러져 있는 좁은 방이었다. 어느 새 세수대야에 물과 수건을 마련해 놓으시고 남학생들의 손수 손을 씻어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 셨다. 여학생들에게는 학생 본인 스스로 손을 씻으라고 하시고 수건으로 물젖은 손을 친히 닦 아주셨다. 대광학교교목으로 목회하시면서 세족식을 하신 것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매 월요일마다 학교 하학후에 중등부 임원들을 교회 사무실로 오라고 해서 기도회를 해주셨다. 한번은 월요일 기도회때 숙제를 주셨는데 다음 한주간동안 아무하고도 말 하지 말고 일주일을 살아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키느라고 누가 말을 걸까봐서 사람을 피했고 학교에서도 선생님이 질문을 할까봐서 선생님 낯을 피해서 공부를 하느라고 일주일 동안 아슬아슬한 경험을 했다. 또 한번은 다음 월요일에 올때는 피를 한방울 내서 가지고 오라는 숙제를 주셨다. 한 주 일이 지났다 약속된 월요일 방과후 보통 교회로 곧장 갔는데 그 날은 피를 내기 위해서 집으로 갔다. 나는 쇠못을 오른선에 잡고 왼 손바닦을 뚫어보았다. 무척 아프도록 찔렀는데도 아무리 찔 러도 피가나지 않는다. 그래서 현관 앞 콘크리트에다가 못 끝을 날카롭게 갈아가지고 다시 시도 를 했다. 나름대로는 힘껏 찔렀는데 손바닥 한가운데 작은 상처가 나고 살이 조금 벌어 졌을 뿐 피가 나오지 않았다. 한참 기다리니까 상처난 손바닥에서 약간의 피가 한방울 간신히 솟아올랐다. 그래서 종이에 무쳐가지고 그날 기도회 모임이 있는 황목사님 사무실로 갔다. 피를 내 온 사람은 남학생만 두사람이었다. 당시 새문안교회 당회장이신 강태국목사님의 둘째 아들이 강우정이었는 데 새끼손가락을 반창고로 칭칭 매고 왔다. 손가락을 면도칼로 잘라서 피를 낸 것이다. 지금 상계동소재 한국성서신학대학교 강우정 총장이 바로 그 사람이다. 황목사님은 피를 확인만 하시고 무슨 뜻 인지 왜 그런 일을 시키시는 것인지 목사님은 말씀이 없으셨다. 필자가 그뜻을 깨달은 것은 신학을 하면서였다. 말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께 서 재판받으실때에 심문에 일체 답을 하지 않으신 것을 해보라는 뜻이었고, 피를 가지고 오라고 한 것은 고난 주간에 예수님의 고난을 스스로 체험하도록 하신 숙제였던 것 같 다. 하도 오래간만에 그 뜻을 터득했기 때문에 그숙제를 주신 시기가 어느때인지는 확인할 길 이 없으나 틀림없이 사순절과 고난주간이 아니었나 싶다. 내 해석이 맞는지는 확실하지 는 않지만 그냥 그렇게추측해 보는 것뿐이다. 아마 내해석이 틀림이 없을 것같다. 황목 사님의 교육은 참으로 독특했다. 말과 설명이나 해석이 필요없다 행동을 먼저 시키고 그 리고 스스로 알아서 깨달으라는 것이었다.죤 두이의 learning be doing의교육이론을 믿음으로 확신을 가지고 개방적이고 여유있고 미래지향적인 교육이다.

3.황 목사님은 에큐메니칼의 선구자셨다.
그분은 대단한 활동가였다. 교회의 목회하시는 종교지도자면서도 보이스카웃 서울연맹 대장을 하시는 사회지도자셨고 새문안교회에 보이스카웃을 창설하셨다. 당시 교회에 보 이스카웃이 창설된 교회는 대광고등학교 학원선교목사로 교목실장을 사임하시고 교회목회를 하신 김동수목사님이 시무하시던 성광교회와 황광은 목사님이 부교역자로 수고하신 새문안교회 뿐이었 다. 필자도 황광은 목사님의 지도로 당시 보이스카웃활동을 했고 새문안교회에서 실시한 보이스카웃 지도자 훈련과정을 수료했다. 지금은 미국에 가계신 당시 YMCA 레크 레이션 간사이셨던 이창식 집사님이 새문안교회에 집사님으로서 황목사님을 좋아하신 분 이었는데 새문안교회 보이스카웃 대장이셨는데 필자가 신대원을 졸업하고 새문안교회에 서 2년간(1969년-70년) 중등부 지도목사로 있는 동안 당시 대장이셨던 그 분 밑에서 부대장을 했고 그분이 미국가게 되자 그 분을 이어서 필자도 보이스카웃 대장을 2년 동안 했다. 보이스카웃활동은 현장경험을 위주로 하는 교육활동이다. 국정 공휴일에는 산이나 들 바다로 데리고 다니는등 다양한 현장 활동을 통해 자연을 익히고 견문을 넓임으로 공동체성을 함양하도록 한것도 그분의 흉내를 낸 것이다. 봄방학이 되면 우리 중고등부 남녀 학생 임원들을 고아원으로 데리고가서 고아들이 겨우내 벗어 놓은 빨래를 시키기도 했다. 학생수련회를 고아원(봉일천고아원)에 가서 하면서 고아들 이 먹는 미끈미끈하고 입천정을 꾹꾹찌르는 시커먼 깡보리밥을 고아원 학생들과 함께 먹도록 하기도 했다. 집에서 이밥등 고급스러운 음식만 먹던 학생들은 처음에는 밥을 못먹었고 머기를 꺼렸지만 나중에는 별수 없이 먹을 수 밖에 없다. 말하자면 그같은 수련회에서의 집단훈련을 통해서 가난과 고통을 당하는 이웃과 함께 고통을 나누는 교육을 체험시킨 것이다. 나는 여름방학이면 우리 경신학교 학생들을 나의 신학교 선배이시고 광주 기독병원 치과의사로 일하시는 박종삼목사님이 운영하시는 전라도 광주 고아원시설에 데리 고 가서 그들과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일하는 여름봉사를 3년 계속 3회에 걸쳐서 하면서 황목 사님의 흉내를 내보았다. 어떤 대학교 총장의 강연중에 실력이란 영어단어를 하나 더 안다던가 방정식을 하나 더 아는 것도 실력이지만 진성한 실력이란 위기대처능력을 말한다고 했다. 위기대처 능력은 현장경험이 많은 사람이 강하다고 했다. 교실에서 배운 것을 현장에 가서 실천하고 현장에서 실천한 토대위에서 교실에서 배움으로 위기대처 능력 곧 실력을 가추는 것이다.그분은 아동을 좋아하셨고 아동문학가이시며 아동설교, 날아가는 새구두,호르라기 부는 소년 등 많은 동화책을 내셨다. 동화작가이실 뿐 아니라 구현동화에 있어서 가히 일인자 이셨다. 그리고 리크레이션에 있어서 대가이시다.리크레이션 시간에는 요술도 잘 부리신다. 손부채로, 머리 카락으로, 맨손으로 하는 요술은 모두가 홀딱넘어간다. 그분은 아동설교를 잘하실 뿐 아 니라 중고등부학생들에게도 그리고 장년들에게도 아주 기억에서 살아지지 않을 좋은 설 교를 하시는 분이었다.황목사님에게는 교회지도자로서 또 다른 중요한 면이 있다. 황목사님은 에큐메니칼정신을 실천을 통해 교육하셨다. 영락교회에 무슨 집회가 있었는 데 거기에 중고등부 학생임원들을 데리고 가서 예배에 참여했다. 목회자가 자기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보다 더 큰 교회에 자신이 지도하는 학생들을 인도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한번은 우리 고등부 학생들을 모두 데리고 명동 성당에 가서 미사드리는데 참여하기도 했다. 개교회와 교파와 종단을 초월한 교육이었음을 후일 내가 에큐메니칼을 배우면서 깨닫게 된 것이다. 지금 같으면 아마 모르기는 해도 성균관이나 사찰에도 데리고 가실 분이 아니었나 생각해보 기도 한다.그분은 폭넓은 목회활동을 하셨다. 그분은 한국교회 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교육협회 총무로도 활약하셨다. 

4. 황목사님은 일꾼을 기르시는 목사님이셨다.
황목사님은 대단한 리더쉽의 교육자이시다. 그분이 한국기독교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교육부총무로 일하실대였다. 필자가 신대원3학년 1965년 여름방학이었다. 제31회 한국기독교 교육대회를 열었는데 그 대회를 준비하는 일이었다. 신대원 졸업반인 나를 아 르바이트를 시키셨다. 2차대전 때문에 중단되어 수십년간 끊어졌던 것인데 해방후 6.25 전란으로 계속해서 못하다가 이제 비로서 전국대회를 한다는 것이었다. 전국에서 초교파적으로 1500명의 교회학교교사들이 이화여자대학에 모여서 5일간 아침부 터 밤 늦게까지 진행되는 대회를 하는 대회였는데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는 규모면에 서나 조직면에서 가히 상상못할만큼 큰 초대형 대회였다. 필자도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그 대회 에 교회학교 교사로서 참여해서 큰 감명을 받은 기억이 새롭다. 미국에서 인쇄한 크고 작은 그림 성화셋트를 참석한 1500명참가자에게 무료로 나누어주었는데 당시 에는 교회교육자료가 전무하던 시대였으므로 그 그림이 참으로 최고의 인기있는 교육자 료였다. 후에 깨달은 것이지만 내가 가난하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시키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그 같은 대회를 치루는 과정과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이 틀림없다. 아닌게 아니라 아르바이트생으로 그 대회를 치루면서 많은 것을 배웠고 그 때 배운 것은 그후 나의 목회생활 에 특히 그같은 대회를 할 때마다 나에게 자신감을 주었다. 그분은 훌륭한 멘토였다. 어느해인지 기억이 없으나 1968년 봄 내가 목사안수를 받자마자였다. 영암교회 당회장으로 계실 때 몸이 불편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영암교회 사택에 문안을 간 일이 있었다. 그 때 병석에 누으셔 서 하시는 말씀이 기억난다. 설교준비가 참으로 어려울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목사 초기에는 설교를 스스로 창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훌륭한 목사님의 잘된 설교를 그대 로 하는 것도 하나의 좋은 훈련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나는 황목사님의 날아가는 새구두라는 동화설교책에 실린 <뿌라맨의 음악대>라는 동화설교를 그후 유년주일학교 지도목사로 일할 때면 해주었고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 황목사님 돌아가신후에 안성진목사님이 선물로 주신 황목사님 의 수상집 김호식목사님등 몇분이서 펴낸 “내일을 보람있게”를 소중하게 소장하고 애용하고 있다. 황목사님이 필자가 학생시절 가난했을 때에 아무 말이나 조건없이 물질적으로 정신적으 로 베프신 은혜며 목사님의 설교와 교육방법과 학생들을 사랑하시든 그 모습은 평생 잊 을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일평생 나에게 도전이 되는 것들이었다. 황목사님 같으신 분이 나의 성장과정에서 청소년 중요한 시기에 나의 지도자이셨다는 것을 항상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필자 김종희 목사/경신중.고등학교 명예교목 대한예수교장로회 서울노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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