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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스 선교사의 제주 탐방기
김인주 기자  |  thpr00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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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2.23  10:4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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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스 선교사의 제주 탐방기

김인주목사(제주 봉성교회) 이 원고는 제주 제민일보에 기도한 것임 

개신교 선교사로서 처음으로 제주도를 방문한 인물들은 피터스(Alexander A. Pieters)와 켄뮤어(Alexander Kenmure) 이며, 또한 개신교 선교사로서 최초로 ‘제주도 탐방기’를 쓴 사람은 피터스 선교사이다. 피터스 선교사는 미국성서공회의 첫 번째 매서인으로 임명되어 1895년 대한국에 와서 한글성경 반포에 큰 획을 그었다. 그는 대한국에 와서 미국성서공회의 매서전도인 사역을 하며 한글을 배운지 4년 만에 틈틈이 시간을 내어 번역한 『시편촬요』로 구약을 한글로 번역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었다.

피터스는 1899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맥코믹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후 필리핀 사역을 하다가, 1904년 한국으로 임명받아 다시 올 수 있었다. 여기에 번역해 소개하는 “A VISIT TO QUELPART(제주도 탐방기)”는 1899년 4월 『The Korean Repository』에 처음 수록 되었고, 1905년에는 『The Korea Review』 편집부에서 이 탐방기 내용 중 후반부를 2회에 걸쳐 다시 연재해 소개하였다.

피터스 선교사가 제주도를 탐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대영성서공회 총무켄뮤어의 후원이 큰 역할을 했다고 보인다. 제주도 탐방 여행시 켄뮤어는 대영성서공회 한국 총무, 피터스는 켄뮤어가 권유해 임명한 대영성서공회 부총무였다.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이러한 켄뮤어와 피터스의 제주도 탐방기에 관한 자료를 먼저 살펴본 후 피터스가 쓴 ‘제주도 탐방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사진출처 한국장로신문

제물포에서 군산까지

켄뮤어(Mr. Kenmure)씨와 나는 2월 18일 한국 증기선 창룡(Chang Riong)호를 타고 제물포를 떠나 켈파트(제주도)로 출발했다. 오후 6시 30분 제물포를 출발해 다음 날 오전 9시에 첫 번째 기착지인 군산에 도착했다. 우리는 두루 의사(Dr. Drew)와 전킨(Mr. Junkin)선교사를 만나기 위해 해변으로 갔고, 그날이 주일 이어서 한국인들의 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우리는 약 50여명의 교인들이 참석한 것을 보고 놀랐다. 내가 3년 전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기독교에 대해 알기를 원하는 원입인은 3명밖에 없었는데, 이제 전킨 선교사의 교회에는 남성 28명과 여성 9명의 등록 교인이 있다. 지난 연례회의 이후에 모든 여성 교인들은 입교를 했으며, 그 회의 이후 남자 교인들 수는 두 배로 늘어났다.

교회당은 성도 수에 비해 너무 좁아서 새 예배당 건축을 위해 모금을 하고 있다. 매주일 연보 금액은 1.5달러($ 1.5) 이상이며 새 예배당에 필요한 재정 상당 부분이 이미 채워져 있다. 몇 년 전 군산에서 관청을 다른 도성으로 옮긴 이후 도성은 빠르게 쇄락해 갔고, 지금은 주택 수가 이전의 절반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5월 1일 항구가 개항되게 되면 그것은 빨리 회복 될 것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군산은 창포강(Chang-Po river, 현 금강)하구에 위치하며 항구가 크고 수심이 깊지만, 만조 때에만 대형 증기선이 통과 할 수 있는 약점이 있다.

강을 따라 많은 읍들과 마을이 있다. 강 위쪽으로 90리(27마일)를 거슬러 올라가면 강경(Kan gim, 江景)이 있고, 동쪽으로 20리 동쪽으로 더 가면 놀미(Nolmi)가 있는데 이 두 도성은 이 지방에서는 큰 읍이고 여기서 (5일 마다) 장이 열린다. 강을 따라 3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충청남도 수도인 공주(Kong-Joo, 公州)가 있는데 여기서는 매해 2차례 커다란 축제가 열린다. 강을 따라 공주까지 배의 운항이 가능하고, 군산 동쪽 100리 지점에는 전라북도 도청인 전주가 있다.

이 지역에서 군산 북부까지 30리 안쪽과 강 건너편까지 소형 배로 갈 수 있다. 군산 북부 지역과 강 건너편 언덕은 울창한 소나무로 덮여있고 최근에는 석탄층이 발견되었다. 항구 맞은편에는 섬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는 봄, 여름에 수백 척의 어선이 모여든다. 군산 지역은 땅이 비옥하고 인구가 많으며, 좋은 숲이 있고 날씨는 서울보다 훨씬 온화하며, 번영하는 요새를 건설할 수 있는 요건을 갖췄다.

군산을 중심으로 이 지역의 특징은 들판과 언덕 위에 버려진 사람 시체들이 흩뿌려져 있었다. 사람들은 자주 시체를 땅에 매장하지 않고 땅 위에 놓고는 약 3피트(약 0.9m) 높이의 짚 더미로 덮었다. 비와 바람으로 짚이 썩고 날아가는 데 오래 걸리지 않고 뼈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광경을 몇 년 전 묻히지 않은 채로 남겨진 전라도 남부에서 동학군과 대한국 군인들 간의 전투 이후 시체를 개와 까마귀를 위해 버려둔 것을 제외하고는 대한국의 다른 지역에서는 본 적이 없다.

목포에서

우리는 다음 날(2월 20일) 오전 6시에 군산을 떠나 같은 날 저녁 목포에 도착했다. 항구로 접근하는 수로 길은 폭이 약 400야드(약 366m)에 불과하고 조수 물이 시속 9노트(약 17km)의 속도로 밀려들고 나가기 때문에, 작은 증기선은 종종 해류에 의해 밀려 나가기도 한다.

항만 입구 안쪽에는 3개 지역으로 연결되는 커다란 만이 있는데, 북쪽으로는 무안군으로 갈 수 있고, 남쪽으로는 풍요한 해남 계곡으로, 동쪽은 목포로 연결되는 입구가 있다. 항구는 넓고 수심은 매우 깊으며 평균 10파톰(약 18m)이고 해안에서 100야드(약 91m) 이내의 수심은 9파톰(약 16m)에 달한다. 나는 목포항 개항 이전에 이곳을 두 차례 방문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곳곳을 잘 알아볼 수 없도록 많이 변했다.

이러한 급격한 도성의 변화는 마치 아라비안나이트에 나오는 이야기의 한 장면과 같다. 2년 전 목포 항구는 물에서 갑작스럽게 솟아 오른 넓은 논과 갯벌로 둘러싸여있는 큰 바위 위에 지어진 몇 채의 오두막뿐이었다. 이제는 모든 허름한 집들이 사라졌고, 갯벌 옆 해변은 지금은 그 길을 따라 새로운 일본인 상점들이 즐비하게 세워져 있다. 바위 옆의 해변은 매립되었으며, 이제 세관 창고를 짓고 보트를 싣고 내리기에 충분하다.

목포는 한국에서 유명한 곡강(Kok river, 현 영산강)하구에 위치해 있는데, 그 특징적인 구불구불한 강을 가리켜 아흔아홉 구비 강 이라 불린다, 강 위쪽으로 300리 거슬러 가면 5개의 커다란 도읍이 있다. 즉, 나주(Na-Joo, 羅州), 광주(Quang-Joo,光州), 능주(Nung-Joo,綾州), 남평(Nem-Pion,南平), 화순(Wha-Sung,和順)이 있으며 모두 10마일(약 16Km) 정도씩 떨어져 있다. 이 도시들 중 나주는 전라남도의 옛 수도이고 광주는 전남의 새 수도이다. 이 도시는 한국에서 가장 땅이 비옥하고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이다.

몇 마일마다 큰 마을과 도읍을 만나게 되고, 논은 수 마일에 걸쳐 뻗어 있고 1년에 2작물을 수확하게 되는데, 보리나 밀 그리고 벼를 수확한다. 산은 그리 많지 않고 높지도 않으며 도로 사정은 좋다. 쌀, 보리, 콩, 대나무는 물론 그 재료로 만든 모든 물건들, 자생 면화와 식물 재료로 만든 옷, 나무 광택제 등이 전국으로 보내진다. 전신국이 개설 된 이후로 수출입이 매일 증가하고 있으며, 해관장 대리인 아모르(Mr. Armor) 씨가 비유적으로 표현했지만, 목포와 서울을 연결하는 철도가 건설되면 목포는 머지않아 한국의 상하이가 될 것이라 했다. 항구는 매우 빠르게 발전하고 있으며, 다시 해관장 대리 아모르(Mr. Armor)의 말을 인용하자면 며칠 동안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그는 그 차이를 쉽게 알게 된다고 한다. 여기 목포에는 이미 은행, 보험사, 일본 우체국, 한국 우편국 및 전신국, 정미소가 있다. 소시엔 카이샤(Soshien Kaisha)의 증기선이 이곳을 정기적으로 운항하고 있으며, 올해 봄부터는 니뽄 유센 카이샤(Nippon Yusen Kaisha)의 증기선도 이곳을 경유할 예정이다. 아직까지 외국인 모임에는 로마 가톨릭 선교사 아모르(Armore), 벨씨 부부( Mr. and Mrs. Bell)그리고 오웬( Dr. Owen)의사가 전부이다.

제주도에 도착하다

우리는 22일 아침 목포를 떠났지만 2시간의 항해 후 한국의 또 다른 증기선 ‘현익(Hyenik)’호를 만났고, 그 배가 알려준 정보로는 방금 제주도에서 돌아왔는데 그곳에는 강풍이 불고 있어 화물과 승객을 내릴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사태는 항구 시설이 없을 뿐만 아니라 피항 시설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목포로 되돌아가서 하루 종일 기다려야 했다. 우리는 다시 밤 12시가 돼서야 출항했고, 다음날(2월 23일) 정오에 제주섬 해안에 도착했다.

우리는 해안 약 1마일 밖에 닻을 내렸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30분을 기다려야 했고, 증기선은 작은 한국 배 두 척이 다가올 때까지 계속해서 매우 불안하게 흔들거리며 파도 위에서 요동쳤다. 우리는 작은 배 중 한 배에 짐을 실을 수 있었고, 거의 30분 동안 온몸이 비에 젖은 후에야 제주(Chai-joo) 외곽에 있는 어부의 허름한 집으로 우리의 짐을 옮길 수 있었다. 그 시각부터 우리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비는 7일간 밤낮으로 쉬지 않고 퍼부었다. 이 기나긴 시간 동안 우리는 방의 넓이가 6제곱피트(약 0.56㎡)에 불과하고 높이가 6피트(약 1.83m)도 안 되는 어두컴컴한 방에 갇혀있었다.

대한국을 여행하면서 겪는 여러 가지 난관이 있지만, 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며칠 동안 오두막의 작은 방에 갇혀있다는 것은 견뎌내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 없겠지만, 누구든 같은 경험을 한다면 내 말을 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낮에는 너무 어두워서 책을 읽기조차 힘들었다. 이에 대한 보상 심리로 우리는 종종 밤에는 커다란 양초 5개를 동시에 켜놓았다. 우리는 비가 전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아 절망에 빠진 나머지 어서 이 섬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8일째 되던 날(3월 2일), 비는 그치고 개이기 시작해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다음 날은 쨍하고 밝은 해를 볼 수 있게 되어, 우리는 깊은 진흙탕 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떠나고 싶었지만 일주일간 비가 너무 퍼부어 건너야 할 개울에 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우리는 다음 날(3월 4일)을 기다려 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 여행을 떠났다. 출발하기 전 우리는 말(馬)을 빌리려 했지만, 일 년 중 이 시기에는 말이 너무 약해서 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길은 강원도의 험지보다 훨씬 다니기 어려운 상태로 변해, 내가 여태껏 가본 길 중 최악의 상황이라 다른 이름이 필요하지 않다면 ‘길’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였다. 그것은 오로지 1피트(약 0.3m) 간격으로 서 있는 두 개의 돌담이라 부를 수 있으며, 모든 가능한 크기와 모양의 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여기저기 돌벽이 무너져 내려 길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

내린 비로 인해 빗물과 진흙이 돌 사이 공간을 가득 채워, 도로가 마르면 누군가는 그 길을 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돌 위를 밟으며 나아가야 했는데 여러 번 발이 돌 위에서 미끄러져 물웅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땅바닥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 채 걷다 보니 곧 현기증이 생겼고, 정오쯤 되자 나에게는 심한 두통이 몰려왔다.

길은 계속 오르막이어서 걷기 힘든 것이 당연했는데, 그 와중에 생긴 불편한 마음이 우리를 더 힘들게 했다. 4시간이나 걸었지만 6마일(약 9.7km)밖에 못 나아간 후, 우리는 오두막이 몇 채 있는 어떤 마을에 도착했다. 거기서 우리와 같이 간 일꾼들은 마을 사람들과 30여 분 동안 실랑이를 한 후에야 드디어 함께 간 일꾼들에게는 수수(기장)밥을, 우리에게는 쌀밥을 해주겠다고 동의했다.

점심 식사 후 우리는 계속해서 길을 갔고 주변이 어둑해질 즈음에 또 다른 비슷한 몇 채의 오두막이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는 출발 전에 섬 전체에 주막집이 없다는 말을 들었지만, 현과 현 사이에는 관에서 지은 관아 건물이 있으며 여행하는 관리들의 숙박을 위해 객사19)를 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13마일(약 21km)이 넘지 않는 여정이었지만 우리는 하루 종일 걷기에 녹초가 되어, 사려 깊은 관아에서 관리하는 객사에서 지낼 수 있는 편안한 밤의 휴식을 갈망하고 있었다.

여러분들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집을 보며 느낀 바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6제곱피트(약 0.56㎡, 미주 18. 참조)도 안 되는 방 넓이, 천장 높이는 5피트(약 1.5m)가 조금 넘고, 황토 흙벽이며, 거미줄이 쳐있고 연기로 그을린 검은 천장, 방바닥은 흙바닥, 3피트(약 0.9m) 크기로 잘 닫히지도 않는 문 등…. 방 한구석 기둥에는 곡물로 가득 찬 바구니들과 방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불결한 낡은 겨울옷, 버선, 낡은 밀짚 가방, 항아리 등등 많이 있었다. 그나마 이 방은 그 숙소에서 가장 괜찮은 집이었다. 그 옆으로 우리 방보다 상태가 좋지 않은 다른 방이 있었는데, 숙소 관리인이 이곳에 있던 그의 병든 아내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 함께 간 우리 한국인 일꾼들은 기온이 빙점 이하였지만 밖에서 저녁을 먹고 집 밖의 헛간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나는 관아를 위해 이 집을 지은 관리는 유배된 관리 중에 있다고 보이지 않고, 이 집을 지은 관리가 유배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낡은 버선들과 지저분한 벽 사이에 끼어 잠을 청했다. 나는 우리가 안내 일꾼들처럼 마당에서 잘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벼룩, 바퀴벌레 등은 우리에게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아침이 일어나 보니 우리 온몸에서 그들의 많은 흔적을 쉽게 볼 수 있었다.

대정현

우리는 다음 날(역주: 3월 5일) 일찍 출발했다. 처음 30리 길은 매우 좋았다. 돌이 몇 개 밖에 없었고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20리 길은 그 어떤 길보다 험했다. 내리막길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발을 내딛으며 날카로운 돌 표면 위에 강하게 부딪쳤고, 비록 우리의 눈은 신중하고 조심하며 바닥을 보며 내려왔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돌과 부딪쳤다. 나아가는 길 내내 집이 한 채도 보이지 않았지만, 6시간 동안 속보로 이동한 끝에 우리는 대정(Tai-chang)에 도착했다.

읍에 가까이 가면서 우리는 도로가 포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포장 상태는 우리가 진흙 길을 걷는 것이 더 나을법한 그런 상태였다. 피곤하고 배가 고파 지쳐서 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팔다리를 펴고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찾았지만, 우리에게 적합한 주막이나 집은 없다는 대답을 담담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2개의 커다란 바위 위에 녹초가 되어 앉아서, 우리를 둘러싸고 쳐다보며 여러 가지 표정을 짓고 온갖 종류의 말을 쏟아내는 엄청난 군중과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30여 분 동안 그들과 성과 없는 논쟁을 벌인 후, 우리는 현감에게 가서 우리에게 숙소를 내어주도록 부탁하기로 했다. 우리는 연로하신 현감 몸이 아프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우리를 충심으로 대해주었다. 주사(Chusa)는 우리가 묵을 집을 찾기 위해 즉시 출발했다.

현감께서는 우리가 바로 방문하지 못한 일에 대해 미안하다고 했고, 주민의 무성의에 대해 사과했다. 사실은 그러한 조치가 우리가 방문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며, 그는 우리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주사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다과와 음료를 대접받았는데, 즉 쌀과자, 포멜로, 꿀, 위스키, 가루 설탕, 그리고 파이프 담배였다. 담배는 관아 하인이 장죽담뱃대에 조심스럽게 불을 붙여서 몇 모금 빤 후에 건네줬다. 오래지 않아 주사가 돌아와 우리를 숙소로 안내했다.

이 집 역시 단칸방이었으며, 이곳에서만 방에 두 개의 문이 있었는데 하나는 암소 축사로, 다른 하나는 마구간으로 통하는 문이 달려 있었다. 어쨌든 이 문의 용도는 신선한 공기를 순환시키는 목적을 가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3일 동안 소와 말을 가까이 이웃으로 두고 함께 지냈다.

넷째 날(역주: 5일~7일까지 3일간 묵었으니 여행 넷째 날은 3월 8일) 오전에는 비가 내렸지만, 정오가 되자 개이기 시작해 우리는 출발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하늘이 마음을 바꾼 것처럼 보였고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빗속에서 약 10리를 걸어야만 했고,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다음 날(역주: 3월 9일) 아침에는 밝은 햇살이 보였고,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저녁이 되어 우리가 쉴 수 있는 곳에 도착하기까지 지나온 거리는 70리였다. 길 상태가 좋아 오늘은 걷기 쉬운 날이었다. 그러나 이 구간에서, 우리는 그렇게 걸었지만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기 훨씬 전에 땅거미가 져버렸다. 한 시간 반 동안 우리는 좁은 돌길 위의 어둠 속을 걸어야 했으니, 우리가 이곳에 도착해 얼마나 행복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의 안쓰러운 발이 감수한 모든 생채기와 긁힘과 온갖 고난에도 불구하고, 숙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목이 부러지지 않았음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정의현

다음 날(역주: 1899년 3월 10일) 하늘은 다시 꾸물거렸지만 우리는 다른 날과 같이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끈기에 대한 보상으로 좋은 샤워 목욕을 할 수 있었다. 중간에 정오까지 우리는 소나기를 맞으며 목적지인 정의(Chang-ni, 旌義)에 도착했다. 여기에도 주막은 없었고 우리는 다시 정의 현감을 찾아가야 했다. 우리는 그가 오수를 즐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관리들 중 어느 누구도 그를 깨울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려야만 했다. 우리는 곧 짜증이 났고, 당직을 맡은 사람 중 한 명에게 현감이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우리가 묵을 숙소를 마련해 달라고 말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들은 우리의 주장에 콧방귀도 안 뀌고는 계속 기다리라고만 했다. 배가 고프고 온몸이 젖어 있었지만, 그들이 하찮게 여기지 않도록 매우 강력하게 얘기를 했다. 그 강력한 말이 그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곧 우리는 그동안 사용하지 않던 곰팡이가 핀 관아 객사로 안내되었다. 우리는 즉시 짐 꾸러미를 풀어 통조림 수프를 데우고 차를 데워서 먹을 준비를 마쳤다.

음식 몇 숟가락을 입에 넣고 있을 바로 그때, 우리는 문밖에서 현감이 도착하였다는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먹으려던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그는 약 20여 명의 관원의 호위를 받으며 도착했다.

4명의 남자가 그의 앞에 섰는데, 한 명은 4피트 길이의 장죽 담뱃대를 들고, 한 명은 그의 우산, 한 명은 그의 공식 문장(紋章), 또 한 명은 그의 담배 가방을 들었다. 물론 우리는 하던 저녁 식사를 중단하고 그를 대접해야 했는데, 그의 방문이 충분하게 세 시간이나 되었기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제주 귀환

다음 날(3월 11일)에도 그는 우리를 방문해 거의 서너 시간을 보냈고,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며 내일 다시 우리를 보러 오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듣고 우리는 신경이 곤두서서, 강한 북풍에도 불구하고 다음 날(3월 12일) 아침 떠나기로 했다.

강한 바람이 몰아쳐서 그 강풍을 뚫고 나가기는 쉽지 않았다. 너무나 추웠기 때문에 나는 출발하기 전에 겉옷을 끼어 입었고 켄뮤어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했다. 그는 나를 보고 웃으면서 자신은 온실에서 자란 식물이 아니라고 하며 그냥 출발했다. 곧 몸을 따뜻하게 유지하기 위해 그는 빠른 걸음으로 나아갔고, 우리는 그의 뒤에 한참 떨어져 뒤처져 갔다. 길을 모르고 갔기에 그가 길을 잃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우리가 저녁 식사 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는 거기에 없었으며 길잡이들 중 어느 누구도 그를 보지 못했다. 내가 생각하기로 그는 우리가 점심을 먹고 숙박을 하려고 계획한 그 마을의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마을로 가는 길을 묻지 못했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가 나아가는 동안 그를 찾기 위해 함께 간 일꾼을 보냈다. 우리가 쉬려고 멈춘 곳에 도착한 시각은 겨우 5시였다. 거기에서 제주(Chai-poo)까지의 거리는 20리(또는 7마일)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계속 나아가서 제주 섬 여행을 마치기로 결정했다. 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만약 켄뮤어 씨가 오면 그를 제주(Chai-poo)로 바로 올 수 있도록 안내해 달라고 부탁을 하고, 안내 일꾼들과 계속해 나아갔다.

그러나 우리가 제주(Chai-poo)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이미 거기에 도착한 켄뮤어 씨를 발견할 수 있었다. 길을 잃어버린 것을 알게 된 그는 제주(Chai-poo)로 곧바로 가기로 결심하고, 갈 길을 물어물어 하루 종일 쉬지도 음식물을 먹지도 못하고 걸어서 제주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드디어 우리는 섬 일주 여행을 마쳤다고 생각하며 큰 안도감을 가질 수 있었다.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회장 박준서 교수 

   
                                                                      * 사진출처 한국장로신문 

박준서 교수는 “몇 년 전, L.A 근교 패서디나(Pasadena)에 있는 풀러 신학교에서 연구교수를 지낸 일이 있었다. 패서디나는 피터스 목사가 은퇴 후 미국에서 말년을 보낸 곳이다. 인근의 묘비도 없이 방치되어 있는 그의 묘역을 보고, 평생 구약을 공부하고 가르쳐 온 사람으로서 충격으로 당시 한인 목사님 모임에서 피터스 목사님 묘소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였고 앞으로 피터스 목사님의 공적을 알리는 것이 교수로서 나의 책임이라고 생각하고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를 시작한다.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는 2018년 12월 피터스 목사의 묘소가 있는 묘원 추모관에 ‘피터스 목사 기념동판’을 설치하고 매주 아름다운 꽃으로 목사님 묘소에 ‘꽃봉헌’을 해오고 있다. 금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피터스 목사에 관한 최초의 전기가 되는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 목사’를 출간했고, ‘시편촬요’와 ‘찬셩시 영인본’을 출간했다.

박 교수에 따르면,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 <시편촬요>는 최초의 한글 구약성경이라는 것 외에도 몇 가지 중요한 점이 있다. 이는 △영어나 중국어 중역이 아니라, 피터스가 능숙한 히브리어로 원문에서 직접 번역 △모든 사람이 읽을 수 있도록 순 한글로 번역 △띄어쓰기가 보편화 되기 전, 띄어쓰기 시행 △피터스의 한국 입국 2년 만에 혼자 힘으로 구약 중 번역이 가장 난해한 시편을 유려한 한국어로 번역 등이다.

이번에 출간된 <시편촬요>에는 <찬셩시>도 수록돼 있다. 박 교수는 “피터스는 시편을 번역하면서, 찬송가 가사도 작사했다. 유대인 전통에서 시편은 읽는 책이 아니라 노래로 부르는 것”이라며 “그가 번역한 시편을 주제로 17편의 찬송가 가사를 작사했고, ‘시편촬요’와 같은 해 출간된 초기 찬송가 ‘찬셩시’에 수록했다(1898년)”고 설명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75장(주여 우리 무리를), 383장(눈을 들어 산을 보니) 등은 피터스 목사가 작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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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Advent) 교회력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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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 교수 시국성명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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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회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대한 긴급 제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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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대 김철홍 교수 글에 대한 학생들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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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 당회원, 당회장의 역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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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교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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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하는 교회 탐방(거룩한 빛 광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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