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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의 선비 남명 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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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2.23  14:3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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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직을 거부한 남명 조식

본관은 창녕,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여 천문, 역학, 지리, 그림, 의약, 군사 등에 두루 재주가 뛰어났다. 명종과  선조에게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받았으나 대부분을 거절하였으며 아울러 한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 그는 경상도 삼가현 사람으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는 데 아버지와 숙부가 문과에 급제함으로써 비로소 관료의 가문이 되어 사림파적 성향의 가학을 이룬다.

어린 시절부터 30세까지 서울 집을 비롯한 부친의 임지에서 생활하며 세상을 보는 안목을 넓혔고, 후에 명사가 된 인물들과 교제하였다. 조선 중기의 큰 학자로 성장하여 이황과 동년배로 실제로는 만나지는 못했으나 당시 경상좌·우도 혹은 오늘날의 경상남·북도 사림을 각각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여러 차례 관직이 내려졌으나 한번도 취임하지 않았고, 현실과 실천을 중시하며 비판정신이 투철한 학풍을 수립하였다.

조식은 1501년 7월 10일(음력 6월 26일) 연산군  7년 경상도 삼가현 토골[1](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에서 승문원 판교 조언형과  인천이씨  충순위(忠順衛) 이국(李菊)의 딸의 3남 5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와 쌍벽을 이루는  퇴계 이황  역시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였지만, 과거에는 1,2번 응시하고 이후로 응시하지 않았다.

그의 조상들은 대대로 한성부 고관으로 증조부 생원 조안습(曺安習)의 대에 이르러  경상남도  삼가현 판현에 자리잡아 살았다. 조식은 외가에서 태어나 살다가 아버지의 벼슬살이에 따라 5세 무렵  한성으로 이사했다. 5세 때까지 외가에서 자라다가 아버지가  장원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자  한성부로 이사해서 아버지 조언형에게서 문자를 배웠다. 

소년기에 조식은 이윤경, 이준경  형제, 이항 등과 죽마고우로 자라면서 학업을 닦았다. 아버지  조언형이 단천군수로 발령되자 단천서 경전자사(經典子史)와 천문, 지리 , 의방, 수학, 궁마, 진법 등 유교 성리학 외에도 다양한 지식과 재능을 익혔고, 특히 자기의 정신력과 집중력, 담력 등을 스스로 시험하려고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들고 밤을 새기도 하였다 한다.

또한  좌구명, 유종원의 문장과 노장학에 심취, 초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는 과거 공부보다도 정통 유학과 제자백가, 노장사상을 두루 접하면서 학문의 폭을 넓혔다 18세 때 북악산 밑의 장의동으로 이사하여 대곡 성운과 친구가 된 이래 평생을 교류하였고, 근처의 청풍계에 숨어살던  성수침  형제와 평생을 종유하였다. 이후 7∼8년 간 서울 근교의 백운대나 탕춘대의 무계동에 있는 절을 찾아 독서에 몰두하면서 때로 과거에 응시하기도 했다.

학문에 힘썼으며, 여러 책을 다독하던 중  1525년  25세 때 〈성리대전〉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에 충격을 받고 관직을 단념하게 된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작은 아버지인 조언경이 조광조  일파로 몰려 죽고 (일설에는 배척되었고), 아버지 조언형도 파직되고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리고는 처가 김해 탄동으로 옮겨 산해정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그의 학문적 목적은 거경집의(居敬執義)를 신조로 반궁체험(反躬體驗)과 거경실행(居敬實行)하는 데 있었다. 장인인 남평조씨  충순위 조수(曺琇)는 김해 일대의 부자 가문 출신으로, 그는 처가의 도움으로 경제적 안정을 갖게 되어 경제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1531년  친구이던  이준경과  송인수가  한성부에서 그에게 선물로 ≪심경≫과 ≪대학≫을 읽고 성리학에 침잠하면서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에 몰두했고, 성운·이원·신계성·이희안 등과 더불어 담론, 토론하거나 편지 서신으로 문답을 주고받으면서 의리의 구명과 실천에 힘써 그 학문적 기반을 쌓아나가게 된다.

30대 후반에 "경상좌도에는 퇴계가 있고 우도에는 남명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37세 되던 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되자 어머니를 설득, 과거를 포기한 뒤 비로소 처사로서 삶을 영위하며 본격적인 학문 연구와 덕성 수양, 후학 양성에 전념한다. 그는 일생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수행을 하듯 늘 근신하였다. 1539년(중종 33년) 38세에 특별히 초빙되어  헌릉 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벼슬을 고사하였고, 1544년  관찰사의 면담도 거절하였다.

   
 

추천과 출사 거부
그의 학식과 명망이 높아지자 회재 이언적은 그를 왕에게 추천하여  헌릉 참봉을 내려주었으나 조식은 나아가지 않았다. 또 퇴계  이황의 추천으로  단성 현감이 내려졌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퇴계  이황과는 그럭저럭 원만한 관계였으나 후일 퇴계가 고봉 기대승과 리기(理氣)의 사단칠정에 관한 7차 논쟁을 듣고 물뿌리고(灑) 마당쓰는(掃), 쇄소(灑掃)하는 생활 방법도 모르면서 천리(天理)를 논하며 선비를 참칭한다고 비판하면서 선비관에 대한 차이로  이황과 갈등하게 된다.

또 한번 만나기를 원하는 이언적의 요구도 후일을 기약하며 거절하였다. 1545년 인종  즉위 후 다시 조정에서 불러 조정에 잠시 다녀갔다. 명종  즉위 후 명종이 여러 번 그를 불렀으나 그때마다 사직상소를 올리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548년 전생서 주부(主簿), 1549년 명종 4년 전생서주부에 특진되었으나 고사하였고, 합천 삼가면 집 근처에 계부당(鷄伏堂; 닭이 알을 품는 집)과 뇌룡사(雷龍舍; 우레와 용의 집. 장자의 '尸居龍見 淵默雷聲'에서 따온 말)를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1551년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1553년 사도시주부(司導寺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뒤에 인종 때와 선조  때에도 사림들이 대거 등용되었으나 그는 관직에 나아가기를 거부했다. 그 뒤  선무랑에 제수되었다가  1555년  단성 현감, 1556년 종부시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지만, 역시 고사하였다. 단성현감 사직시 올린 상소는 '단성소'라고 불리는 '을묘사직소'라 불린다. 당시 사회에 대한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양사에서는 "군주에게 불경을 범했다"며 그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

이로 인하여 큰 어려움을 당하지만 대부분의 대신이나 사관들은 "초야에 묻힌 선비라 표현이 적절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 우국충정만은 높이 살 만한 것이다."라는 논리로 적극 변호하여 파문은 가라앉았다. 1559년(명종 14년) 조지서  사지(造紙暑司紙)에 임명되어 부임했었으나, 부임한지 얼마 뒤에 스스로 사직서를 냈다.

1561년 지리산의 덕천동으로 옮겨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독특한 학문의 체계를 이룩하였다. (주역에 '山天 大畜'괘를 따서 이름 지었다. 제자를 크게 키운다는 말이다. '山天'은 하늘을 품은 산을 뜻한다.) 남명은 번잡한 김해를 떠나 지리산 천왕봉 아래 덕산에 자리잡고  산천재를 짓고서 오직 학문과 제자 양성에 전념하였다. 이때 그는 '덕산에 묻혀산다(德山卜巨)'라는 시 칠언절구는 산천재 네 기둥의 주련에 새겨 있다.

그가 출사를 거부하고 은신한 것에 대해 후일 유홍준은 '남명의 이러한 복거와 불출사는 결코  죽림칠현 같은 은일자의 모습도 아니고  공자의 제자  안회와 같은 고고함의 경지도 아니었다. 그는 결코 세상을 외면해버린 은둔자가 아니었다. 그가 세상에 나아가지 않음은 시세가 발이나 씻고 있음이 낫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라고 평하였다. 이후에도  명종이 여러 번 그를 불렀고, 이황과 사림들이 그를 추천했지만 그는 한사코 사양하였다. 

1567년 5월 명종의 부름을 받고 찾아가 치국의 도리를 건의하고 돌아왔다. 만년에는 두류산에 들어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고사하였다. 그의 학문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지식을 알면 바로 행해야 된다는 실천궁행의 뜻을 피력하였다.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이러한 현실, 실천에 대한 강조는 후일 북인학파와  남인 실학파들이 실천, 실용성을 강조하는 풍토로 이어지게 된다. 

그의 제자로 김효원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등 저명한 학자들과  정인홍  등과 같은 관료학자, 의병장  곽재우가 배출되었다. 일반적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우도 지역(오늘날의 경상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학맥을 형성하였다. 그는  이황과  기대승  등과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이와 기에 대한 이기 논쟁을 모두 공리공담으로 치부했다. 그의 학맥은  북인에게 계승되었으나, 북인은  1623년  인조반정과  1624년의  이괄의 난  때 모두 숙청당하고 만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 중  김우옹과  한강 정구는  이황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고, 한강 정구의 제자들은  북인과  남인에 모두 진출하여, 그의 학문은 부분적으로  남인을 통해  조선후기까지 계승되었다. 명종말엽에 이량  세력과  윤원형이 몰락했음에도 출사를 거부했고, 이기의 일파도 몰락했으며, 선조  즉위 후에는  심통원  세력까지 제거되었지만 그는 조정에 출사하기를 거부하였다.

선조 즉위 후  이황의 문도들과  이이의 추종세력 간의 이와 기 논쟁이 다시 벌어지자 그는 이 모두 공리공담이라 비판하며, 실천과 궁행에 힘쓸 것을 호소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제자들 중에는  이황의 문도, 이이의 문도들과 갈등하기도 했다.

   
 

생애 후반
그는 아들을 잃은 뒤 자신의 친 외조카 중 이준민을 총애하였다. 아들의 죽음에 상심한 그는 외조카 이준민을 통해 죽은 차산을 떠올리기도 했다 한다. 진주에서 태어난 이준민은  과거 시험에 급제한 후  한성으로 이주했다. 그러나 이준민은 한성과 진주사이를 오가며 그의 집에도 들러  한성부  내에 이런 저런 소식을 전하기도 한다. 그밖에 대곡 성운의 편지를 전하거나, 문하생이자 외손녀사위이기도 한  김우옹의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이준민에게 옛 병풍에 글을 써주기도 하고, 두 번 과거에 급제 하여 거듭 승지가 되자 직접 축하하였으며, 인편이 어어지지 않아 소식 전할 수 없는 것을 몹씨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누이 조씨가 죽자 이준민이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지나친 효행으로 병이나자 생질의 병을 걱정하기도 하였다. 그는 한때 오건(吳健)에게 '자수(子修)의 증세가 오래도록 낫지 않고 있다는데, 거리가 워낙 멀다보니 더한지 덜한지 계속 들을 수 없어, 단지 날마다 근심 속에 탄식만 할 따름입니다.'라면서 사적인 서신에서 이를 토로하기도 했다.  관료들의 부패 지적과 최후 1568년 선조가 다시 불렀으나 역시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 '무진대사'(戊辰對事)를 올렸다.

또한 관료들의 폐단을 지적한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히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였다. 1569년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했고, 1570년 선조의 소명(召命)에도 응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1604년(선조 37)에 처음 간행된 ≪남명집≫과 ≪남명학기유편 南冥學記類編≫·≪신명사도 神明舍圖≫·≪파한잡기 破閑雜記≫가 있으며, 문학작품으로 '남명가', '권선지로가 勸善指路歌' 등이 전한다.

1571년(선조 5년) 선조가 그에게 특별히 식물(食物)과 전답을 하사하자 그는 이를 받고 사은소(謝恩疏)를 올렸다. 1572년  1월에 경상도 감영(監營)에서 남명에게 병이 있다고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은 특별히 전의(典醫)를 파견하였지만, 전의가 도착하기 전에 남명은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경의(敬義)의 중요함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했고, 경의에 관계된 옛 사람들의 중요한 말을 외웠다. 음력 2월 8일에 몸채에서 자세를 단정히 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부음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예관을 보내 치제하였다. 그의 나이는 72세였다.

사후
선조 때  증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에 증직되었다가, 광해군  즉위 후  북인이 집권하게 되면서 1615년(광해군 7)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그해 시호는 문정공(文貞公)이 추증되었다. 동인의 영수였던 김효원은  이황의 문인으로 수학했지만 조식의 문하에도 출입하며 수학하였다. 그의 문인들은 대부분  북인  붕당을 형성했는데 이들은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었다가  대북  정인홍과 정인홍의 문인  이이첨이  인조 반정  이후 몰락하면서 몰락하게 된다.[12] 그 뒤  윤휴, 허목  등 일부를 통해  남인으로도 학맥이 일부 이어졌다.

1576년 조식의 문도들이 덕천의 산천재 부근에 세운  덕산서원에 배향되었고, 그의 고향인 삼가에도  회현서원을 세워 봉향하였으며 1578년에는 김해의 탄동에  신산서원을 세웠다. 광해군 때 대북세력이 집권하자 조식의 문인들은 스승에 대한 추존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해 세 서원 모두  사액을 받았다. 그밖에 진주의  덕천서원, 삼가의 용암서원에 제향되었다. 북인의 몰락으로 그는 조선사회에서 저평가되어오다가  1874년(고종 1년) 흥선대원군  집정 이후부터  이이, 이황, 성혼, 서경덕에 필적하는  성리학자로 인식, 재평가되었다.

경상우도의 학파
조식은 16세기 당시 경상좌도의 이황과 나란히 경상우도를 대표하던 유학자로서 양측이 다 우수한 문인 집단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개중에는 두 문하에 모두 출입한 사람들도 있었다. 고려 때에 성리학이 전래된 이래 그것의 도입과 전개를 주도한 학자들이 영남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당시 영남의 좌․우도를 대표한 이들은 동시에 조선 유학을 영도하는 위치하는 입장이었다.

특히 경상우도는 김종직, 남곤, 김굉필, 정여창 등 영남 사림파의 대표적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 사림파의 실천적 학문 전통 가운데서 성장한 조식은 개인적으로 사림의 인물들과 밀접한 인적 관계로 맺어져 있었으며, 그 집안의 학문적 배경도 사림파에 속했다. 그러한 까닭에 그는 평생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는 중국  송(宋)대의 학자들에 의해 이미 완성되었고, 남은 문제는 오로지 실천이라고 하는 원, 명대로부터 조선 전기로 이어지는 유학의 학문적 입장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제자 정인홍의 회·퇴배척(晦退排斥)과 독주로 인해 남명학파의 한 축이던  정구가 떨어져 나가고  정온(鄭蘊) 등이 분립하는 내부의 분열을 겪은 데다, 인조반정과  이괄의 난  이후  북인이 모두 역으로 몰려 죽임당하면서 정치적으로 몰락, 남명학파는 그 세력이 크게 쇠퇴하여 겨우 진주 등 경상우도 일대로 영향력이 대폭 축소되었다. 난세에는 벼슬을 하지 않아야 한다며 평생 처사로 남았다. 한편 1544년 벼슬길에 나가보라는  이황의 권고도 거절하였다.

이황이 그에게 관직에 나갈 것을 권유하자, 이황 자신도 여러 번 사직하고 사퇴하면서, 자신더러는 관직에 나갈 것을 권고하는 저의가 뭐냐며 추궁하기도 한다. 이황이 주로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성리학의 이론 공부에 심취했던 반면 남명은 이론 논쟁을 비판하면서 실천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으며, 노장 사상 등 이단에 대해서도 포용적이었다.[14] 유학자이자 성리학자였던 그는 조선 시대 내내 다른 유학자들이 도교와 노장 사상을 이단시한 것과 달리 노자와 장자에게도 취할 점이 있다고 본 몇 안 되는 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황은 그에 대해 "오만하여 중용의 도를 기대하기 어렵고, 노장에 물든 병통이 있다"고 비판했는데, 조식은 이에 선비들이 공부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부모의 고혈을 짜고, 여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다고 응수했다. 남명은 "요즘 학자들은 물 뿌리고 청소하는 절차도 모르면서 입으로는 천리(天理, 하늘의 진리)를 담론하며 허명을 훔친다." 고 맞대응 하는 등의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황의 조식 비판은 후일  정인홍이 조식을 옹호하는 글을 올림으로서 다시한번 재현된다. 

후일 조식의 제자와 이황의 제자들은 율곡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과 대립하며  동인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황의 제자와 조식의 제자 간 사상의 차이는 다시  동인을 양분화시키는 원인이 된다. 같은 해에 태어난 두 거유의 상이한 출세관과 학문관은 결국  남인과  북인의 분화로 이어졌고, 당쟁을 격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실천 강조 
조식이 말하는 실천에는 물론 《소학》(小學)과 《가례》(家禮)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적 예의 실천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유학의 본령으로 생각하는 《대학》(大學)의 학문관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면이 강하다. 즉 유학자는 고답적인 이론에 매몰되어 현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실학적 학문관이다. 이는 성(性)과 천도(天道)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지 않았던 공자  이래로 유학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된 견해이기는 하지만, 특히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학문적 문제의식의 핵심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식은 조선 전기 사림파의 실천적 학풍과 조선 후기  실학파의 현실을 중시하는 학풍을 이어주는 사상사적 고리로 간주될 수 있다.

또한 조식은 우리 나라의 유학자들 가운데서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그가 사직소를 통해 당대의 정치에 대해 과감한 비판을 행한 데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또한 역대의 인물에 대해 그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에 따라 비판을 감행한 데서도 두드러진다. 또한 우리나라의 유학자들 가운데서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그가 사직소를 통해 당대의 정치에 대해 과감한 비판을 행한 데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또한 역대의 인물에 대해 그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에 따라 비판을 감행한 데서도 두드러진다.

그러므로 성호 이익  같은 이는 그에 대해 “우리나라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東方氣節之最)”이라는 찬사를 부여하였고, 또한 퇴계학파는 인(仁)을, 남명학파는 의(義)를 중시한 점을 그 특징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대체로 조식 및 남명학파에 대한 공통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조식의 역대 인물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출처(出處), 벼슬에 나아갈 때와 나아가지 말아야 할 시기에 대한 명철한 판단 여부가 그 기준을 이루었다. 그는 제자들에 대해서도 “출처는 군자의 큰 절개”라 하여 이를 매우 강조하였다. 그 자신은 한평생 열 차례 이상 조정으로부터 벼슬을 받았지만, 한 번도 취임한 적이 없었다.

저서와 작품

1555년(명종 10년_22세) 조정에 올라온 한 장의 상소문은 명종 시대 정국을 요동친다. 조식이 올린 상소문은 관직을 사양하는 것이지만 내용은 명종(1534~1567년, 재위 1545~1567년)이 정치를 잘못하고 있어 민심이 떠나고 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었다.

"선무랑으로서 단성현감에 새로 제수된 조식은 진실로 황공하여 머리를 조아리며 주상전하께 상소하옵니다" 

엎드려 생각하옵건대 선왕(중종)께서 신이 보잘것없는 줄을 모르시고 처음으로 참봉에 제수하셨고, 전하께서 왕위를 이어받으셔서 두 차례 주부에 제수하셨고 이번에 또 현감으로 제수하시니, 두렵고 불안하여 마치 산을 짊어진 듯합니다. 그럼에도 감히 한번 대궐에 나아가 전하의 은혜에 사은숙배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군주가 인재를 등용함은 목수가 목재를 가져다 쓰는 것과 같아,깊은 산과 큰 늪의 재목을 모두 이용해서 큰 집을 완공할 전에, 토목수가 알맞은 재목을 가져다 쓸 뿐이지 목재가 스스로 참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인재를 등용하심은 나라를 가진 군주로서의 책임이지만, 신은 맡은 일을 감당치 못할까 걱정됩니다. 이 때문에 감히 그 큰 은혜를 사사로이 받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신이 머뭇거리며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뜻을, 어진이를 갈망하시는 전하께 감히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벼슬에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까닭은 두가지입니다. 지금 신은 나이가 예순에 가깝지만 학술은 거칠고 어두우며 문장은 과거에 겨우 합격하기에도 부족하여, 행실은 물뿌리고 비질하는 일을 감당하기에도 부족합니다.

과거에 급제하려고 노력한 10여년 동안 세 차례나 실패하고 물러났으니, 애초 과거를 일삼지 않았던 사람이 아닙니다.설사 과거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발끈하여 과거를 당장 집어치운 평범한 백성에 불과할 뿐 큰 일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두루 갖춘 인재가 아닙니다. 하물며 사람됨의 선악은 결코 과거 응시 여부에 달려 있지 않음에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미천한 신이 헛된 명망을 훔쳐서 담당 관원에게 잘못 알려졌고, 담당 관원은 신의 헛된 명망만을 듣고서 전하를 그르쳤습니다.

전하께서는 과연 신을 어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문장에 능한 자라고 해서 꼭 도가 있지는 않으며,도가 있는 사람은 반드시 신과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전하께서만 신을 모르시는 것이 아니고, 재상들도 신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지 못하고 등용했다가 훗날 국가의 치욕이 된다면, 그 죄가 어찌 미천한 신에게만 있겠습니까? 헛된 명망을 바쳐 몸을 파느니보다는 실제로 곡식을 바쳐서 관직을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신은 차라리 제 한 몸을 저버릴지언정 차마 전하를 저버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이점이 나아가기 어려워하는 첫째 이유입니다. 전하의 나랏일은 이미 그릇되었으며,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갔으며, 인심도 이미 떠났습니다. 비유하면 이 나라는 백 년 동안 벌레가 속을 갉아먹 진액이 이미 말라버린 큰 나무와 같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거센 비바람이 언제 갑자기 닥칠지를 까마득히 모르고 지내온지 오래 되었습니다.

조정의 인물 가운데 충성스럽고 뜻 있는 신하가 없는 것이 아니고,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나라 일에 힘 쓸 선비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는 아랫자리에서 희희덕거리며 주색을 즐기고 있으며,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어물거리며 오직 뇌물로 재산만 불리고 있습니다.물고기의 배가 썩어가는데도 아무도 치유하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내직에 있는 신하들은 용이 연못을 차지하고 버티듯 후원 세력을 심고 있으며, 외직에 있는 신하들은 들판에서 이리가 날뛰듯 백성을 수탈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가죽이 없어지면 털이 붙어있을 곳이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습니다.신은 이때문에 낮에는 깊이 생각하고 길이 탄식하면서 자주 하늘을 우러러 보고, 밤에는 흐느끼며 침울해 하면서 천정을 우러러 본지 오래 되었습니다. 대비께서는 비록 생각이 깊으시다 하나 깊은 궁중의 일개 과부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다만 선왕의 일개 어린 후사이실뿐입니다.그러나 온갖 천재와 억만 갈래의 인심을 어떻게 감당해 내며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냇물이 마르고 곡식이 하늘에서 내리니 그 조짐이 무엇을 뜻하겠습니까?

노랫가락이 구슬프고 흰옷을 즐겨 입으니, 소리와 형상에서 이미 그 조짐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때에는 주공소공의 재주를 겸한 사람이 정승의 자리에 있다하더라도 또한 어떻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지푸라기같은 미천한 신의 재주로써 무엇을 하겠습니까? 위로는 만에 하나도 위태로움을 붙들 수 없고, 아래로는 털끝만큼도 백성을 보호할 수 없을 것이니, 전하의 신하 노릇하기가 또한 어렵지 않겠습니까? 변변찮은 이름을 팔아 전하의 관직을 얻어 그 녹을 먹으면서도 그 녹에 맞는 일을 하지 못한다면 이 역시 신이 원하는 바가아닙니다. 이점이 둘째 이유입니다.

그리고 신이 보건대, 근래 변방에 왜적의 변란이 있어서 여러 대부들이 제때에 밥을 먹지 못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를 놀랍게 여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20년 전에 터졌을 것인데 전하의 신성한 무덕에 힘입어 지금에야 비로서 터진 것이지, 하룻저녁에 갑자기 생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평소 조정에서 재물을 받고 사람을 임용하였기에 재물은 한 곳에 모였지만 백성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장수로서 적합한 사람이 없고 성에는 군졸이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왜적들이 무인지경으로 들어오듯이 쳐들어온 것이니, 어찌 이상하게 여길 일이겠습니까? 이것은 또한 대마도의 왜놈들이 본토의 왜놈들과 몰래 결탁하여 그 앞잡이가 되어 만고에 남을 치욕을 끼친 것 입니다.왕의 신성한 위엄을 떨치지 못해서 적에게 어이없이 패하고 말았습니다.어찌 옛 신하를 대우하는 것은 주나라 법보다도 엄격하면서 왜적을 용납하는 은덕은 춘추시대 송나라보다 도리어 더 하단 말입니까?

세종대왕께서 남쪽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시고 성종대왕께서 북쪽으로 여진족을 정벌하신 일을 보더라도, 어찌 오늘날 같은 일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이런 것은 피부에 생긴 병에 불과하고 심장이나 뱃속의 병은 못됩니다. 심장이나 뱃속의 병은 걸리고 막혀서 상하가 서로 통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때가 경대부들이 목이 마르고 입술이 타도록 수레를 치달리며 분주히 주선을 해야하는 시점입니다.근위병을 불러 모으고 국사를 정돈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정사나 형벌에 달려있지 않고 오직 전하의 마음 하나에 달려 있습니다.

말이 땀을 흘리듯 마음속으로 노심초사하여 만 마리의 소가 갈만한 넓은 땅에서 공을 거두는 것도 그 기틀은 전하 스스로의 마음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바는 무슨 일입니까? 학문을 좋아하십니까? 풍류와 여색을 좋아하십니까?활쏘기와 말 달리기를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좋아하시는 바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달려있습니다.만약 어느날 흠칫 놀라 깨달아 분발해 학문에 힘을 쓰시어 홀연히 명덕과 신민의 도리를 얻으신다면, 명덕과 신민의 도리 속에 온갖 선이 갖추어지고 온갖 교화도 거기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들어서 시행하면, 나라를 고루 잘 다스려지게 할 수 있고 백성을 화합하게 하 수 있으며 위태로움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을 요약하여 내 몸에 간직한다면, 텅 빈 거울이 만물을 비추듯 저울이 물건을 공평하게 되듯 생각에 사특함이 없게 될 것입니다.불교에서 말하는 선정이란 것도 이마음을 간진하는 데 달려 있을 뿐이니,위로 천리를 통달하는 측면에서는 유교와 불교가 한가지입니다.

다만 불교는 인사에서 시행할 경우 현실에 발을 붙이지 않기 때문에 우리 유가에서는 배우지 않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이미 불교를 좋아하십니다.만약 그 마음을 학문하는 데로 옮기신다면 바로 우리 유가의 일이 될 것입니다. 이렇게만 하신다면 어렸을 때 집을 잃었던 아이가 제 집으로 돌아와서 부모친척형제친구를 만나보는 경우가 어찌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군주가 사람을 임용할 적에는 자신의 몸으로써 모범을 보여야 하고, 자신의 몸을 닦을 적에는 도로써 해야 하는 것 입니다.

전하께서 만약 사람을 등용하실 적에 자신의 몸으로써 하신다면 조정에 있는 사람이 모두 사직을 보위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아무일도 모르는 미천한 신 같은 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만약 사람을 취할 적에 몸으로써 하지 않으시고 눈으로만 하신다면 가까이서 시종하는 사람 말고는 모두 전하를 속이고 저버리는 무리일 것이니. 앞뒤가 꽉 막힌 고집스런 소신 같은 자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뒷날 전하께서 왕도정치를 행하는 경지로 덕화를 이룩하신다면 소신도 마부같은 말직에서나마 채찍을 잡고 마음과 힘을 다하여 신하의 직분을 다할 것이니 임금님을 섬길 날이 어찌 없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데 전하께서는 반드시 정심으로서 신민의 요체를 삼으시고 수신으로서 사람을 임용하는 근본으로 삼으셔서 왕도의 표준을 세우도록 하소서.왕도의 표준이 표준 구실을 하지 못하면 나라는 나라로서의 구실을 못하게 될 것입니다. 밝게 살펴주시길 엎드려 바라옵니다. 신 조식은 떨리고 두려운 마음을 감당하지 못한채 죽음을 무릎쓰고 아뢰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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