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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4.15  08:3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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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부르심(암)

서경기목사(대전 영광교회, 서강대 졸업, 장신대 신대원 졸업)

대전신대원 채플에서 설교한다고 하니 아내가 ‘당신은 용모도 수려하지 않고, 언술도 뛰어나지 않아서, 틀림없이 신대원생들이 집중하지 않을 것이니, 설교라도 빨리 끝내라’고 엄명했다. 그러나 빨리 끝낼 재간이 없다는 게 문제다. 오늘 읽은 본문의 아모스 선지자는 직업 선지자가 아니었다. 뽕나무를 재배하고 양을 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선지자가 되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예언하였다. 나 역시 목회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는데, 우연한 사건으로 목회자로 부름 받았다. 그 후, 목회 여정은 남달리 변화무쌍했다. 이런 나의 목회 여정이 여러분의 장래 목회 여정에 혹 조금이라도 생각거리가 되길 바라면서 말씀드린다.

1. 중고등 때 역사가가 되려고 했다. 그래서 사학과에 진학했다. 79년 10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살해당했고, 대학들은 휴교했다. 학부 1학년이던 나는 경주 변두리 큰 집에서 몇 개월 지냈다. 주일이면 마을 교회에 출석했는데, 그 교회에는 목회자가 없어서 시내 큰 교회에서 전도사가 와서 설교만 하고 바로 본교회로 돌아갔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이런 시골 교회의 안타까운 사정이 내내 신경 쓰였다. 다시 서울에 돌아갈 때 나는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2. 신대원을 늦게 진학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바로 신대원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당시 부모님은 믿지 않았고, 일반대를 졸업한 형이 취업하지 않고 고신대학원에 진학해버렸다. 둘째인 내가 신대원에 가겠다고 한다면 집안이 발칵 뒤집힐 일이었다. 시간을 벌기 위해서 일반대학원에 진학했고 뒤늦게 신대원에 들어갔다.

3. 신대원에서 목회 방향이 농촌목회에서 노동목회로 바뀌었다. 내가 아직 교사로 있던 교회 고등부 전도사님이 노동목회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분을 통해서 가난한 자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진면모를 보게 되었다. 신대원 졸업 후,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시행하는 노동선교 훈련과정을 받았다. 1년 동안 여러 공장에 취업해서 노동체험을 했고, 전국 공단들을 방문하면서 산업현장을 이해했다.

그 후 산업선교회에서 간사로 있으면서 1년간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당시 산업선교회는 교회조차 좌파 단체로 오해했고, 영등포산업선교회 경력으로는 교회에서 사역할 수 없어서, 나는 일반 교회에서 사역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목사 안수를 받는 과정에서 이런 오해 때문에 ‘꼭 목사가 되어야 하는가’ 고민했다. 왜냐면 당시 노회 정치부장은 나를 빨갱이로 여겨 정치부 면접에서 탈락시켰고, 내게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다시 면접을 받으라 했다. 이런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목사가 되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생각했다. 영등포산업선교회 경력은 이후 총회파송 선교후보자로 면접을 볼 때도 다시 문제가 되었다.

4. 영등포산업선교회는 가정을 가진 이가 일하기에 무척 힘든 사역지이다. 노동자들이 공장에서 퇴근하여 오면 그때부터 사역이 시작되기 때문에 밤늦게 퇴근하거나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날이 허다했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태어난 후 2년 동안 가정을 돌보지 못하니 부부 갈등이 깊어졌다. 난처한 상황에 있을 때, 때마침 갈릴리교회가 불러 이주노동자 사역을 맡겼다. 당시 갈릴리교회는 다른 교회와 달리 이주노동자 선교에 매진했다. 88서울올림픽 이후, 한국이 잘 사는 나라로 알려지고 우리나라도 노동력이 부족하니 이주노동자들이 몰려들었다. 갈릴리교회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해서 식사 대접, 이발 봉사, 의료 진료와 치과 진료를 제공했고, 임금 체불 해결과 산업 재해 인정을 지원했고 이주노동자 신자 예배를 열었다.

이주노동자 선교를 할 때, 이주노동자의 삶과 문화와 종교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선교의 기본임을 깨달았다. 어느 해, 설 명절에 교회는 외롭게 지내는 이주노동자를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한 적이 있다. 소불고기, 식혜와 수정과와 떡을 잔뜩 준비하고 수백 명을 초대했다. 여기서 퀴즈 하나를 내겠다. 넌센스 퀴즈이니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라. 천국의 음식은 무엇일까? 당시 가장 많이 찾아온 네팔인들은 힌두교인들로 소고기를 먹지 않았다. 소불고기가 그대로 남았다. 식혜와 수정과는 특이한 향을 가진 음료다. 식혜와 수정과도 그대로 남았다. 그러면 떡은? 질고 단 떡도 먹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역시 그대로 남았다. 황당한 상황이었다. 이후 모두가 잘 먹는 음식이 무엇인지 찾게 되었다. 닭고기는 누구나 좋아했다. 한참 때는 매주 닭을 100킬로씩 튀겼다. 코카콜라도 모두 잘 마셨다. 매주 2리터 콜라를 네다섯 짝씩 제공했다. 바나나는 모두들 좋아했다. 천국의 음식은? 프라이드 치킨, 코카콜라, 바나나이다.

5. 이주노동자 선교를 하면서 이주노동자들이 온 나라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96년 가을에 담임목사님과 교인 심방을 하는 중에 ‘캄보디아 선교사를 보내야 하는데, 사람이 없어’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 즉시, ‘제가 가겠습니다’고 말씀드렸다. 이렇게 해서 총회 훈련을 받고 캄보디아 선교사로 가게 되었다. 3년 6개월간 프놈펜기술학교 교장으로서 사역했는데, 이때 선교지 주민과 동고동락 하는 게 선교의 기본임을 깨달았다. 97년 캄보디아에 내전이 일어났다. 많은 외국인들이 캄보디아를 떠났다. 선교사들도 떠났다. 그러나 우리 가족은 떠날 수가 없었다.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떠나면 다시 오기 힘들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냥 있기로 했다. 두려운 날의 연속이었다. 내전이 끝나고 평화가 왔을 때. 캄보디아인 스탭들은 전쟁터를 떠나지 않고 자기들과 함께 한 우리를 신뢰한다는 느낌이었다. 이후 스탭들과 좋은 관계를 맺고 선교 사역을 할 수 있었다.

프놈펜기술학교에서는 컴퓨터 영어 미용기술 키보드 등을 가르쳤다. 90년 후반 싱가폴제 에이서 컴퓨터는 2000달러 정도했다. 프놈펜에서 컴퓨터를 배우려면 한 달에 50불을 주어야 했다. 당시 캄보디아 공무원들의 월급은 20불 정도였다. 그런데 기술학교에서 컴퓨터를 무료로 가르친다 하니 얼마나 많은 지원자들이 몰렸겠는가? 우리는 독특하게 학생들을 선발했다. 입학시험에서 아주 높은 점수를 받은 지원자들도, 아주 낮은 점수를 받은 지원자들도 탈락시켰다.

높은 점수를 받은 이들은 다른 곳에도 배울 기회가 있고, 낮은 점수를 받은 이들은 배우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 정부 부서들, 고아원들, ngo들, 교회들, 선교사들에게 추천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결과 프놈펜기술학교는 작은 학교지만 정부 부서들과 교회들과 ngo들과 두루두루 좋은 관계를 맺고 협력하는 에큐메니칼 기관이 될 수 있었다.

6. 캄보디아로 파송한 갈릴리교회에서 나를 다시 불러 이주노동자 사역을 맡겼다. 이때 갈릴리교회 내에는 이미 필리핀교회와 파키스탄교회가 있었다. 내가 귀국한 후, 인도네시아교회와 몽골교회가 세워졌다. 인도네시아교회는 엄청 부흥해서 매주 평균 4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예배에 참석했다. 이 교회는 자체적으로 신학교를 두고 신학 교육을 했다. 본국 빈민 아동 200명과 결연을 맺고, 매달 교육비로 한 명당 2만 원씩을 보냈다.

각 교회는 자국인 목회자를 두었다. 자국인들이 주도하는 사역이 훨씬 효과적이었다.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세례를 받았다. 나중에 귀국한 한 이들이 인도네시아에서, 몽골에서, 파키스탄에서 교회를 세웠다. 코로나 시기에 인도네시아교회는 모교회인 갈릴리교회가 힘들다는 말을 듣고 상당한 금액을 보냈다는 말을 들었다.

7. 갈릴리교회를 사임한 후 몇 개월 쉬고 있을 때, 선교단체인 한아봉사회 사무총장님이 부르셨고 나는 그 부름에 바로 응하였다. 이후 11년간 사업국장으로, 사무총장으로 사역했다.

한아봉사회는 동남아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 4개국을 선교지로 에큐메니칼 디아코니아 미션을 지향하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지난 20년 동안 가난한 가정을 위해 2,000채 넘는 집을 지었다. 캄보디아에서는 통전적인 마을개발을 시행하며 캄보디아성서공회가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

라오스에서는 대전신대원 출신인 조현상 선교사가 탁월한 사역을 하고 있다. 라오스센타에서 현재 유치원, 초등학교, 장학사업, 식량제공 등의 사업을 하고 있다. 현재는 내년 9월을 목표로 중고등학교 설립을 진행하고 있다. 센타는 비록 수도 비엔티엔 외곽에 위치하지만 뛰어난 인재들을 배출하고 있다. 그간 센타 장학생 출신들이, 서울대 초청으로 1명은 유학했고, 1명은 유학 중이며, 일본과 중국 대학교에도 유학하고 있다.

8. 한아봉사회에서 사역하면서 2005년 후배와 함께 작은 교회를 개척하여 함께 목회했다. ‘가나안’ 성도들이 함께 성경공부를 하자고 부탁했고, 조금 지나서 예배드리자고 했고, 결국 여울교회를 개척했다. 이 교회는 생명 평화 나눔의 공동체를 지향하며, 그간 여러 ngo들과 공간을 공유하며, 이렇게 해서 절약한 재정으로 선교 사업에 힘쓸 수 있었다. 작은 교회이지만 굳건한 선교적 공동체가 될 수 있음을 경험했다.

9. 마지막으로 영광교회에 부임한 일이다. 한아봉사회에서 사역할 때, 영광교회 담임인 단필호 목사님이 라오스 선교 안내를 부탁하셨다. 당시 영광교회는 집중적으로 선교할 선교지를 찾고 있었다. 중국도 가보고, 필리핀도 가보고 베트남도 가본 끝에, 마침내 2005년 라오스를 선교지로 정했다. 영광교회가 단기선교팀을 구성하여 라오스에 갈 때, 여러 차례 동행하여 선교에 대해서 안내했다.

이를 좋게 본 단목사님은 은퇴하실 즈음에 내게 영광교회에 올 수 있느냐고 물으셨고, 나는 이 부름에 응했다. 라오스 선교를 안내하다가 안내한 교회의 위임목사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뽕나무를 재배하고 양을 치던 아모스를 부르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미천한 나도 부르셔서 다양한 사역을 맡기셨다. 아모스와 감히 비교될 수 없지만, 하나님이 부르실 때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응하였다. 그래서 이주노동자 선교도, 캄보디아 선교도, 선교단체 사역도, 그리고 영광교회 위임목사도 감당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 경험이 학우 여러분의 장래 목회 여정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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