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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쟁과 영국 복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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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4.02.25  15: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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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영국 복음주의 각성운동의 배경

"월간 목회" 2006년 9월호에서 

   
 

1. 서론

‘부흥’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언제나 가슴 설레는 기대감을 주는 단어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과거 역사에 나타났던 부흥운동을 살펴보고 그 원인을 추적하여 현재에 적용해 보려는 노력을 계속하게 된다. 특별히 18세기는 근대기의 두드러진 부흥운동의 세기라고 볼 수 있는데, 그 부흥운동의 범위가 전세계적일 뿐만 아니라, 부흥운동의 강도도 세상을 변혁시키는 대각성의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특별히 18세기 영국의 복음주의 각석 운동에 초점을 맞추어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한 단서를 찾아보고자 한다. 

2. 30년전쟁’(Thirty Year's War, 1618~1648)

이후 처참한 폐허 속에서 꽃피어난 독일의 경건주의 운동은 슈패너(Philip J. Spener)와 프랑케(August H. Franke)를 중심으로 하여 교회의 영적 개혁, 윤리적 개혁, 내적 체험의 강조 및 신앙의 실천을 강조하면서 18세기 부흥의 서두주자 역할을 하였다.  

경건주의의 영향으로 일어난 모라비안(Moravian)운동도 진젠도르프(Graf Nicholas Zinzendorf)백작의 지도아래 1727년부터 조직적인 운동으로 정착되었다. 모라비안교도들은 루터교와는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독자적인 영성을 추구하였는데, 특히 신비주의에 가까우리만치 성령의 강림과 임재를 추구하는 기도운동과 전세계를 상대로 선교사를 파송하는 강력한 선교운동이 두 축을 이루었다. 18세기 영국의 영적대각성운동의 지도자인 존 웨스리(John Wesley)가 1738년에 영국 런던의 올더스게이트가(Aldersgate Street)에서 모라비안교도의 모임에 참여했다가 성령의 감화를 받고 구원의 확신을 체험하며 부흥운동의 선두주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진 일이다.

경건주의와 모라비안운동으로 시작된 영적각성운동은 18세기에 이르러 영국과 미국 두 대륙에서 크게 꽃피우게 되었다. 미국은 1726년부터 독립선언을 하였던 1776년까지 50년의 세월 동안에 ‘제 1차 대각성운동’(The First Great Awakening)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이후 거의 50년을 주기로 해서 부흥과 쇠퇴의 과정을 반복하게 된다.

미국의 대각성운동과는 달리 영국의 18세기 부흥운동은 ‘복음주의 각성운동’(Evangelical Awakening)이라고 부른다. 왜냐하면 18세기 영국에 만연하던 인본주의적인 종교사상인 이신론(Deism)에 대항하여 성서적인 복음주의 운동이 크게 부흥되었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복음주의 각성운동은 당시 영국 국교회의 영적인 실패를 배경으로 해서 일어났다. 18세기 영국은 산업혁명의 시기로서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가난한 다수의 노동자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17세기부터 식자층간에 일어난 합리주의 사상의 요체인 이신론은 일부 지식층의 지적 요구는 만족시켰는지 몰라도 대중의 영혼에는 전혀 은혜를 끼치지 못했다.

이신론은 17세기말부터 정통 기독교를 위협하기 시작하면서 18세기 초에는 그 절정에 이르렀다. 이신론의 조직신학자로 간주되는 헐버트 경(Lord Herbert of Cherbury)은 1645년에 「제 민족의 종교화 그 원인에 관하여」라는 책을 저술하여 이신론의 5대 교리를 제시했다. 5대 교리는 첫째, 하나님은 존재하신다. 둘째,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의무가 있다. 셋째, 예배의 핵심은 도덕을 실천하는 것이다. 넷째, 도덕을 실천하지 못한 인간은 죄를 회개해야 할 의무가 있다. 다섯째, 도덕실천 여부에 대한 상벌은 사후에 온다. 이러한 교리들은 무신론은 아닐지라도, 이성을 만들어낸 신에 관한 교리에 불과하지 성서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아니었다. 기독교를 하나님과의 개인적 관계에서 오늘 생생한 체험을 무시하고, 일개 도덕종교를 전락시켰던 것이었다. 헐버트 경은 “종교간의 갈등원인은 인간이 이러한 이성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사제들이 사람을 속였기 때문이며, 계시는 위장된 미신이요, 그리스도는 이방마술사보다 낳을 것이 없는 존재다”라고 말하였다.

이신론의 강력한 도전과 함께, 국가교회의 신축성 없는 구조는 가난한 다중에 대한 목회적 돌봄에 실패하였다. 끊임없이 설립되는 새로운 마을 등을 효과적으로 관리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소수의 설교자들을 불러 일으키셨다. 이들은 개인적인 회개와 함께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체험하며 성화를 이루어가라는 체험적인 메시지를 강조하면서 부흥의 도화선이 되었다.

18세기 영국의 복음주의 각성운동은 세가지 부류로 일어났다. 하나는 존 웨슬리를 중심으로 해서 알미니안 주의를 취하는 감리교도의 부흥이요, 둘째는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를 중심으로 해서 칼빈주의를 취하는 감리교도의 부흥이요, 셋째는 부흥운동에 찬성하면서도 영국 국교회에서 분리되기를 거부하여 국교회안에 남아있던 복음주의자(Evangelicals)들의 부흥운동이다. 이들은 특히 18세기 후반에 캠브리지 대학을 중심으로 해서 일어 났으며 캠브리지 소재 성삼위일체교회(Holy Trinity Church)를 50년 동안 목회했던 찰스 사이몬(Charles Simeon, 1759-1839)은 그 중요한 지도자였다. 이들은 성경유포, 선교지원, 노예제도 반대 등 다양한 사역에 앞장서며 청교도적 윤리를 강조하였다. 

3. 알미니안주의 감리교도의 부흥

존 웨슬리(1703~1791)의 부흥운동은 가히 전설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의 생애에 나타난 부흥요소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가정적인 영적분위기가 큰 영향을 끼쳤다. 영국 국교회 사제인 아버지 사무엘 웨슬리(Samuel Wesley)와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Susannah Wesley)사이에서 태어난 19남매 중 15번째였으므로, 가정 자체가 큰 교회였고, 가정교육이 곧 신앙교육이었다.

둘째, 좋은 신앙서적의 영향이 컸다. 웨슬리는 옥스포드대학 재학 중에 기독교신비주의자들의 저서를 탐독했을 뿐만 아니라, 이신론에 반대하는 윌리암 로우(William Law)교수의 영향을 크게 받고 경건, 실천, 체험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그 자신이 그러한 체험을 소유하지는 못하는 단계에 머무르고 있었다.

셋째, 모라비안교도들의 ‘구원의 확신’에 관한 도전이 큰 영향을 주었다. 웨슬리는 모라비안교도들과 몇 번에 걸친 만남을 가지게 되었다. 첫째는 미국의 새 식민지 조오지아주에 목회하러 갔다가 Spangenbery라는 모라비안 지도자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당혹하게 되었다. 선교의 실패를 체험하고 귀국하여 738년 런던 올더스게이트가의 모라비안 교도 모임에 참석했다가 루터의「로마서강해서문」을 듣는 중 구원의 확신을 체험케 되고, 모라비안 지도자 피터 뵐러(Peter Bohler)와 교제하며 신본주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 후 1738년 여름 진젠도르프를 방문하였으나 교회운영 방식에 차이를 보임으로 웨슬리는 독자노선을 걷게 되었다.

넷째, 기도 중에 임하는 성령의 강력한 임재 체험은 웨슬리로 하여금 담대한 설교자로서 능력을 구비케 하였다. 이성으로만 말하는 이신론자들과 다른 점이 바로 이런 체험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1738년 밤에 철야기도를 하던 웨슬리는 성령의 강한 임재를 체험하고 이후로 성령에 이끌린 설교자가 되었다.

다섯째, 강력한 운동으로 성장할 수 있는 전도방법과 조직력을 창안했다는 점이다. 1739년 4월부터 조지 휫필드의 제안으로 옥외설교를 시작하여 52년간 4만 번에 해당하는 설교를 한 웨슬리는 회원12명으로 구성된 속회 제도, 평신도 설교자 제도, 전국을 순회구역으로 나누어 관리하는 관리사(Superintendent) 제도 등을 통해 결국은 국교회로부터 독립하며 사역자를 직접 안수할 수 있는 대교단으로 성장케 된 것이다.
웨슬리의 신학은 감리교 내에서도 휫필드와 갈등을 일으켰고, 그의 구원론이나 완전론은 신학적인 검토와 필요하나 그는 신학자라기 보다는 목회자요, 부흥사였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4. 칼빈주의 감리교도의 부흥

칼빈주의 감리교도의 부흥은 웨슬리와 함께 옥스포드대학의 신성구락부 소속이던 조지 휫필드가 주도하였다. 그는 웨슬리보다 조직력은 떨어졌으나 쉽고 대중적인 언어로 회중들에게 접근했으며, 칼빈주의 신학을 열정적으로 마음에 호소한 인물이었다. 휫필드는 영국뿐만이 아니라 미국 뉴잉글랜드와 남부 식민지를 두루 다니며 순회설교자로 사역함으로써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와 함께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의 공동주역이 되었다.

휫필드는 매튜헨리의 주석을 즐겨 읽었고 자기의 설교준비는 매튜헨리가 다 해 놓았다고 말했다. 그의 사후 칼빈주의 감리교도들은 셋으로 분리되어 계속 발전하였다. 하나는 헌팅돈(Huntingdon) 백작부인이 주도하는 그룹, 둘째는 장막문도(Tafernacle Connection), 셋째는 웨일즈의 칼빈주의 감리교도(Welsh Calvinistic Methodists)들이다.

헌팅돈 백작부인인 셀리나 셜리(Selina Shirley)는 1739년부터 감리교 운동에 가담하여 휫필드와 관련을 맺고 칼빈주의 감리교 운동을 주도 하였다. 영국전역에 감리교 군목을 파송하고, 남웨일즈에 감리교 신학교를 운영하였다. 웨일즈의 칼빈주의 감리교도 강력한 부흥운동을 지향하는 칼빈주의 교회를 세워 현재도 1500개 이상의 교회가 존속하고 있다. 

5. 영국 국교회의 복음주의자들

영국 옥스포드대학은 로마 가톨릭적인 요소를 회귀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므로 ‘옥스포드 운동’이라고 하면 ‘고(高)교회운동’으로서 구교적 요소를 회복하려는 운동을 가리킨다. 그러나 캠브리지 대학은 청교도의 산실로서 영국 국교회내의 ‘귀(歸)교회운동’ 즉 복음주의 운동의 요람이 되었다. 이들은 신학적으로 칼빈주의를 취하면서, 청교도윤리를 강조하였다. 이들은 성령운동가라기 보다는 교육 운동, 선교 운동, 노예폐지 운동, 성경유포 운동을 핵심으로 하면서 하나님의 부흥을 체험하였다.

사이몬은 성삼위일체교회에서 50년간 사역하면서 ‘교회 선교사협회’(Church Missionary Society)와 ‘영국과 해외 성서공회’(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를 강력하게 후원하였다. 특히 19세기 초 노예 폐지 운동을 했던 클래팜 섹트(Clapham Sect)는 선교에 앞장서는 헨리 벤(Henry Venn), 존 벤(John Venn)과 같은 인물을 배출했고, 노예폐지의 주도자였던 윌리암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같은 인물을 배출했다. 주일학교(Sunday School)를 창시하여 가난한 근로자들의 자녀 교육을 강조했던 한나 모어(Hannah More)도 클래팜 섹트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6. 결론

18세기 영국의 복음주의 각성운동은 성령체험과 조직력을 강조하는 웨슬리식 부흥과, 바른 신학의 대중화를 시도한 휫필드식 부흥과 교육, 선교, 사회정화를 강조한 복음주의자들의 부흥의 세 부류가 있었다고 결론 지을 수 있다.

한국교회는 지금까지 웨슬리식 성령체험과 조직력을 강조하여 부흥을 이루어 왔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성령체험의 변질화, 부패화가 가속화된 느낌이 짙다. 그러므로 조지 휫필드식의 바른 신학에 근거한 성령체험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즉 웨슬리와 휫필드를 나누는 것이 아닌라 휫필드의 신학과 열정, 대중화한 복음에 웨슬리식의 참된 성령체험 성결을 지향하는 성령체험이 다시 강조될 필요가 있다는 의미이다. 성령체험의 강조는 신앙의 개인주의화, 신비주의화, 비인격화의 위험을 낳을 수 있으므로 캠브리지 대학을 중심으로한 상식을 갖춘 신앙표현 즉 선교교육, 사회교화, 성경교육 등이 우리 시대에 균형 있게 강조 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한국교회는 20세기에 20년을 주기로 해서 부흥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성령의 강한 임재를 체험하고 부흥을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다. 지금도 성령 받은 부흥사로 활약하는 분들이 그 시대에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들이다. 70년대와 80년대 초반까지도 그 부흥의 불은 지속되었으나, 90년대와 21세기에 들어서서 전반적으로 쇠퇴하게 된 현실을 맞게 되었다. 한국교회도 이제 미국식 50년 주기의 부흥의 시기에 들어왔다는 의미도 될 수 있는 것이다.

1950년대에 크게 부은바 된 성령의 역사가 이제 2010년을 바라보는 시대에 다시 부은바 되기를 소망한다. 아울러 첫 부흥의 오류와 실패를 다시 반복하지 않도록 휫필드의 바른 신학과 복음주의자들의 건전한 교회의 공헌이 균형 있게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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