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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4.04.09  11:3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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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 역사와 종교

네덜란드는 국토의 25%가 해수면보다 낮기 때문에 바닷물을 퍼내고 흙을 채워 땅을 만들며 척박한 환경을 개척해왔습니다. 네덜란드하면 풍차가 가장 먼저 떠오를 정도로, 자연과 인간 사회를 위한 공존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나라다. 이러니 부지런 할 수 밖에 없으며 청교도적인 신앙으로 티셔프 하나로 여름을 나는 검소하다.  필립스전자는 식민지 시대부터 지금까지 세계적인 기업이다. 또 ESG 부문에서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미국 Morningstar의 조사에 따르면 네덜란드는 유럽 내에서 기업 지속가능성 부문 1위 국가다.

뿐만 아니라, 2022년 3월에 이루어진 KPMG의 조사에 따르면 네덜란드 기업의 76%가 ESG 기준에 맞춰 경영 여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다는 평이다. 그중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은 ESG 기업으로 꼽히는 ASML Holding이다. ASML은 칩 제조업체들이 필요로 하는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서비스 등 모든 것을 제공하는 파운드리 업체다. 실리콘에 패턴을 대량 생산하여 칩의 가치를 높이고 가격을 낮추는 데 기여한다. ASML의 고객에는 Intel, Samsung, TSMC 및 Global Foundry와 같은 세계 최고의 칩 제조업체다. 

네덜란드는 15세기 전까지는 국가라기보다는 신성 로마 제국 치하의 여러 제후국과 주교령들의 모임에 가까웠다. 14세기 중반부터는 루트비히 4세가 결혼을 통해 이 중 홀란트·제일란트·에노 백작을 겸하며 바이에른계 비텔스바흐 가문에서 이 지역을 상속했다. 그런데 14세기 프랑스 국왕 장 2세의 아들로서 부르고뉴 공국을 받은 대담공 필리프가 플랑드르의 마르그리트와 결혼하고 플랑드르 땅을 획득하면서 부르고뉴 공국에 의한 저지대 통일 사업이 시작되었다.

15세기에는 대공의 손자인 선량공 필리프가 이 지역의 제후국을 결혼 상속이나 정복으로 획득하고 비텔스바흐 가문의 자클린을 무찔러 그의 영지를 모두 빼앗았고 필리프의 손자 용담공 샤를도 정복을 계속해 지금의 베네룩스 일대와 프랑스 동부 지역을 아우르는 큰 국가로 만들었다. 이 부르고뉴국의 일부로서의 저지대를 부르고뉴 네덜란드라 하고 베네룩스가 국가 형태를 갖춘 것은 이 발루아-부르고뉴 공작들의 공로가 컸다.

카를로스 1세는 15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로 선출된 이후 물려받은 저지대 영지의 확장에 나서 추가로 투르네, 아르투아, 위트레흐트, 흐로닝언, 헬러 등을 추가로 확보해 저지대 지역의 17개 작위를 보유했고 1549년에는 황제 조칙을 발표해 저지대의 17개 작위를 사실상 단일 작위로서 한 명에게 상속할 것을 선언했다. 이 때부터 저지대의 17개 영지를 하나로 통합한 영토가 공식적으로 생겨났고 카를 5세가 이렇게 만들어진 저지대를 물려주기로 결정한 대상은 장남 펠리페 2세였다.

   
 

네덜란드 독립전쟁과 네덜란드 공화국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기 위해 우선 자신의 이복 누이인 마르가레테(Margherita di Parma, 1522~1586)를 네덜란드 섭정에 임명했고 성직자에 대한 교육을 강화하고 주교의 숫자를 늘리는 등 네덜란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일련의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저지대에서 이러한 조치는 도시 시민들 입장에서는 고유한 자치권에 대한 침해고 귀족들의 입장에서도 사제에게 높은 자질이 요구되는 등 '왕의 폭정'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

스페인은 자금 부담이 막중했고 네덜란드 역시 전쟁에 지쳤기는 마찬가지라 1609년 안트베르펜에서 양국은 12년 간의 휴전 조약을 체결했다. 네덜란드 지역은 스페인령 지역에 비해서 인구가 많이 늘어나서 이 당시였던 1609년에 네덜란드 지역의 인구는 1,500,000명이었고 스페인령 지역의 인구는 1,600,000명으로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같은 시기였던 1609년 네덜란드의 실질적인 수도였던 암스테르담의 인구는 70,000명으로 크게 증가해서 저지대 전체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시가 되었다.

결국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북부 7개 주와 브라반트의 절반은 네덜란드 공화국으로서 공식적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합쳐서 80년 동안 강력한 국가였던 스페인과의 전쟁 끝에 얻어낸 독립이었다. 하지만 네덜란드 공화국은 남부 네덜란드에 대한 영유권을 포기해야 했고 이것을 계기로 독립국을 세운 북부(네덜란드)와 스페인의 지배가 유지된 남부(벨기에 + 룩셈부르크)로 나뉘게 되었다.

한편 종교적으로 불관용적이었던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살던 유대인과 이슬람 계열의 주민들이 종교 재판소 등에 의해 이교도로 몰려 재산을 빼앗기고 학살당하는 등 핍박을 당하자 그나마 자유로운 분위기의 네덜란드로 이주했는데 이들에게는 네덜란드인들이 종파주의를 한 발 물러나게 할 정도의 기술과 역량이 있었다. 특히 유대인들은 오랜 기간 대부업을 해 귀금속 가공 기술과 금융업에 대한 역량이 높았고 이것이 네덜란드의 해운업 발전과 맞물려 무역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1581년 카토릭은 금지된 종교였다. 

다만 이런 네덜란드도 독립 이후에는 종교적으로 굉장히 억압적이었다. 종교의 자유란 개신교 신자의 자유일 뿐이었고 가톨릭 신자에게는 종교의 자유가 없었다. 가톨릭은 1581년에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1848년에서야 네덜란드 헌법에는 근대적 의미의 종교적 자유가 명시되어 가톨릭이 해금된 것은 1853년부터다. 물론 가톨릭 신자들이 다수이던 시절에도 네덜란드는 개신교에 비교적 관대한 지역이였고 따라서 장기간에 걸쳐 개신교화가 진행된 이후에도 비록 완벽하게 개인 단위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지는 않았지만 네덜란드 사회에는 '가톨릭 공동체'와 '유대교 공동체' 등의 존재가 사회적으로는 묵인되어 있어 당대 유럽의 종파주의 국가들보다는 그나마 관대한 지역이었다고는 할 수 있다.

16세기 네덜란드에서는 압도적으로 가톨릭 교세가 강했다. 다만 네덜란드를 비롯한 저지대와 한자 동맹의 도시들은 상대적으로 종교에 관대한 편이여서 타 유럽 지역에 비해서는 개신교의 교세가 그나마 강한 편이였다. 그래도 개신교 신자들은 '허용 받는 소수' 에 불과했다. 네덜란드의 독립은 중세 때부터 끊임없이 반복되는 '군주와 코뮌(도시 공동체)의 갈등'으로 일어난 것이다. 네덜란드 코뮌들의 입장에서는 펠리페 2세가 지역의 종교 문제에 관여하는 것 자체가 폭정의 표출이었고 이것은 가톨릭이냐 개신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성상 파괴 운동도 독립과는 거리가 먼데 칼뱅파는 성상을 파괴해도 합스부르크 통치의 상징물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네덜란드의 인구 대다수를 차지한 가톨릭 신자들은 물론이고 성상 파괴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던 루터파 신자 등 대다수의 네덜란드인들은 성상 파괴에 분노했고 오히려 합스부르크에 대한 지지만 강해지게 만들었다. 네덜란드 시민들이 단결해 봉기에 나선 것은 알바 공작의 가혹한 통치와 스페인군의 약탈 이후에 생긴 일이다.

1570년대부터 네덜란드 봉기의 지도자가 된 오라녀 공 빌럼은 이 전쟁을 '가톨릭에 대항하는 전쟁'이 아니라 '스페인의 지배에 대항하는 네덜란드인 모두의 투쟁'으로 보이기를 원했다. 빌럼은 본래 루터파 신자였고 개인적으로는 칼뱅파식 성상 파괴를 매우 혐오했다. 독립에 대한 열망이 가장 강한 것은 칼뱅파였고 이들은 비록 소수였지만 가장 전투적이면서도 단결도 잘 되어 있어서 네덜란드 독립 운동에서 칼뱅파의 공헌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인구 다수를 차지하던 개신교 신자들'이 '가톨릭'에 반발해 독립을 하지는 않았다. 네덜란드가 개신교화된 것은 독립 이후 장기간에 걸쳐 천천히 진행되어 온 결과다.

네덜란드의 황금 시대
독립은 했지만 영토, 인구, 자원 모두 크게 열세였고 세금 문제 이외의 문제는 합의하지 못해서 구조가 허술한 데다 스페인과의 관계도 악화되어서 네덜란드 선박의 스페인 입항이 금지당해 스페인과 무역을 할 수 없어 네덜란드의 산업이 막대한 타격을 입을 위기에 처하자 1602년 투자금 650만 길더로 세계 최초의 주식 회사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주식을 발행해 자금을 더 끌어모은 다음 대양으로 나섰다. 동인도 회사에 최초로 자본을 모았던 사람들은 대부분 선주였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에서 탈출한 세파르드 유대인이었다.

또한 동인도 주식 회사 이외에 1609년에 암스테르담에서 세계 최초의 증권 거래소를 설립해 잉글랜드와의 국채 거래로만 매년 2500만 길더 이상의 수익을 얻었고, 은행을 만들어 다른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금융업은 발전하기 시작했고 네덜란드에서는 불과 3%에 불과한 이자율로 돈을 빌릴 수 있었다. 네덜란드로 모여든 조선 기술자들은 제조 비용은 저렴하고 짐칸은 크면서 선원은 적게 필요한 플루이트 선을 개발해 네덜란드의 해운 산업 경쟁력이 높아진다. 플루이트선의 제조 비용은 잉글랜드의 배가 1300파운드일 때 800파운드에 불과했고 최종적인 운송 비용은 잉글랜드와 몇 배까지 벌어졌다.

이렇게 엄청난 발전에 힘입어 1700년에는 해양 패권을 차지한 암스테르담의 인구도 200,000명으로 계속 증가해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가지 혁신적인 체계로 네덜란드는 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 중국 등과의 상품 무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프랑스나 런던등 도시 거리가 오물과 악취가 가득했던 시절, 암스테르담은 청결했다. 

이는 1612년 발표된 법령에 따라 암스테르담의 '향긋한 공기와 미관과 쾌적함'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그 나무들을 훼손하는 행위가 금지되었다. 암스테르담은 권력을 기념하거나 표현할 목적이 아니라 시민들의 희망 사항을 중심으로 구상된 도시였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암스테르담은 대도시 발전의 역사에서 그토록 급진적인 도시 즉, 시민의 의지가 반영된 도시로 기록될 수 있었다. 

동인도 회사는 식민지 수탈 기업 

네덜란드는 남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각지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북미에도 뉴 암스테르담(현재의 뉴욕)을 세우는 등 위세를 떨쳤다. 이 시기 네덜란드는 거대한 양의 물자를 수송했고 노예 무역으로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유럽, 아메리카 대륙으로 보내거나 인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남미로 보내는 식으로 세계의 인종 분포까지 바꿔놨다. 전세계의 무역을 위해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와 서인도 회사를 만들어 관리했는데 이 방식은 적국인 영국도 따라했다.

조선에 표류했던 벨테브레(벨테브레이)와 헨드릭 하멜도 이 국가 출신으로 하멜은 탈출해 조국으로 돌아가 하멜 표류기를 쓴다. 종교적으로 자유로운 본토의 문화 덕분에 산업이 발전하자 사상도 크게 발전했고 바뤼흐 스피노자 같은 철학자도 나와 사상이나 신교 저작물을 퍼트리기 위한 출판 산업도 발전했다. 미술도 크게 발전했는데 자금은 많은데 땅이 좁아서 다른 투자 수단을 찾은 것이 미술품이었다.

칼뱅주의 풍토로 종교적인 내용을 담은 미술품을 만들 수 없기에 당시 유럽 미술계의 큰 손인 교회에 파는 대신 전 유럽인들에게 파는 것으로 타겟을 바꿨다.[32] 또 기존의 교회가 주문한 대로 미술품을 만드는 것에서 미술가들이 직접 나와서 물건을 파는 것으로 판매 방식도 바꾸면서 미술품 거래가 활발해지자 작품의 양과 질도 같이 향상되었다. 이 시기에 등장한 거장 중 대표적인 인물이 렘브란트다.

미술품 외에도 벌어들인 자금의 대부분이 총독과 귀족의 호화스런 왕궁을 만드는 데 쓰이는 대신 중소 상인들을 위한 주택을 만드는데 쓰이기도 했다. 이 시기에 터키에서 들어온 튤립이 인기를 얻으면서 튤립 구근이 하나의 투자 수단으로 인식되어 투기가 벌어졌고 결국은 튤립 공황을 맞게 되었다.

무역 경쟁과 쇠퇴
하지만, 네덜란드의 자체 생산품은 많지 않고 중개무역 유통-물류업으로 중간 수익을 주로 얻던, 중개 무역 중심의 산업 구조는 한계가 있었다. 결정타는 올리버 크롬웰의 항해조례(1651년)로, 이는 잉글랜드로 수입되는 물품은 그 물품의 원산지 국적의 선박이나 잉글랜드 선박만 허용한다라는 법률로, 당시 운송업과 무역업이 활발하던 네덜란드에게 선전 포고를 한 셈이었다.

빌럼 3세 사후 네덜란드의 스타트허우더(=국가원수)직은 45년간 공위시대를 거쳐 그의 증조할아버지 빌럼 1세(오라녀)의 동생 가문으로 이어지게 된다.[35] 17세기 말 루이 14세 치하 프랑스와의 장기전으로 타격을 입었고, 잉글랜드는 이 공백을 틈타 4차 영란전쟁에서 네덜란드에게 승전했다. 이후 네덜란드는 잉글랜드-영국과 프랑스에 기존의 상권을 잃기 시작했다.

근대
1806년에는 황제에 즉위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자신의 동생 루이 보나파르트를 네덜란드의 왕으로 임명해 홀란트 왕국이 수립되었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나폴레옹이 임명한 여러 친인척들이 부패하고 무능한 와중에도 그나마 친네덜란드적인 왕이어서 네덜란드인의 지지를 받았으나 대륙 봉쇄령을 거부했다는 빌미로 나폴레옹에 의해 1810년 홀란트 왕위에서 쫓겨났다. 이후 그의 아들 나폴레옹 루이가 왕위에 오르지만 즉위 10일 만에 프랑스 제국에게 합병당하고 말았다.

나폴레옹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던 1813년에 연합 네덜란드 주권공국이 잠시 생겨났다가 1815년에 나폴레옹이 완전히 패퇴하자 네덜란드는 빈 회의에 따라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와 묶어, 네덜란드의 마지막 슈타트하우더였던 빌럼 5세의 아들, 빌럼 1세를 초대국왕으로 하여 네덜란드 연합왕국을 이루어 독립했다. 이 시기까지 네덜란드 지역은 스페인 지역에 비해서 인구가 거의 늘어나지 않아서 네덜란드가 연합 왕국이 된 1815년에 네덜란드 지역의 인구는 2,400,000명이었고 벨기에 지역의 인구는 3,400,000명으로 네덜란드가 100만 명 정도 더 적었다.

네덜란드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할 때(1584년)는 7개의 주들이 연합한 공화국으로 시작했으나, 나폴레옹 전쟁 이후 다시 독립하면서 이 때까지 네덜란드 정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부 오라녀 공 빌럼의 가문이었던 오라녀나사우 가문을 왕가로 추대하면서 왕정으로 변하게 되었다. 원래 오라녀 공 빌럼은 독립 전쟁의 지도자로 신망이 높았기 때문에 독립 후 공화국 시대에도 국가 수반인 스타트하우더르(네덜란드어: Stadhouder, 영어: Stadtholder) 직을 오라녀 공의 후손들이 맡는 경우가 많았다.

새로이 네덜란드의 국왕으로 즉위한 빌럼 1세는 계몽 절대 군주로서 법 앞의 평등 등의 프랑스 혁명기에 도입된 근대적 혁신을 일부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중세적 계급 제도를 정치 제도로 재도입해 많은 고위직 네덜란드인을 귀족으로 임명하는 중도적 성향을 보였고, 칼뱅파로서 남부 네덜란드의 가톨릭 세력을 견제해 가톨릭 교회의 특권을 폐지하고 종교의 자유가 포함된 헌법을 반포했다.

상원과 하원으로 나뉜 의회(스타턴헤네랄 Staten-Generaal)는 존재했으나 선거권은 제한되어서 귀족 만이 상원 의원 후보가 될 수 있었고, 하원 의원은 직접 선거로 선출되지 않고 지방 의회에서 간접 선거로 선출되었다. 빌럼 1세의 치세 전반에는 남부(벨기에) 지역의 산업이 더 빠른 성장세를 보여 직물 제조업을 중심으로 발전했는데 남부 지역의 석탄 광산이 동력원이 되었다. 반면 북부 지역에서는 19세기 전반까지도 전통적인 교역 중심의 상업과 농업에 집중했고 북부의 제조업 발달은 비교적 늦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정치와 군사 방면에서 북부의 개신교도가 득세하는 현실에 불만을 품은 가톨릭 지역이고 산업적으로도 우세한 남부 지역은 빌럼 1세의 중앙 정권에 지속적으로 반발했고 결국 남부는 1830–1831년의 벨기에 혁명으로 분열되어 벨기에로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 벨기에 독립 이후에도 네덜란드는 높은 농업 생산성과 고도화된 무역 체계를 바탕으로 발전했으나 제조업의 발전은 늦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인구 가운데 농업 종사자 비율이 지속적으로 낮아졌고 산업 발전에 힘입어 빈곤층도 지속적으로 감소했다. 1891년에 설립된 필립스(Philips)가 전자 제품 제조업을 시작하는 등 네덜란드는 당대의 첨단 산업을 도입하는 데도 열성적이었다. 시작은 늦었지만 네덜란드의 제조업은 이웃한 벨기에보다 더 빠른 성장세를 보였다.

19세기 후반의 네덜란드 정치를 주도한 세력은 개신교도 자유주의자들이었다. 1840년에 빌럼 1세가 퇴위하고, 빌럼 2세가 통치하던 네덜란드는 1848년의 유럽 혁명에 직접 영향을 받지는 않았으나, 유럽의 정세를 불안하게 관망하던 빌럼 2세에게 저명한 자유주의자 정치인 요한 뤼돌프 토르베커(Johan Rudolph Thorbecke)가 같은 해 거의 혼자서 작성한 자유주의적 헌법을 제출한다.

19세기 후반의 네덜란드에서는 자유주의자가 고전적 자유주의자와 온건 자유주의자(보수적 자유주의자)로 나뉘고 보수주의자가 전통적 보수파, 가톨릭 세력, 개신교 온건 보수파(반혁명파Anti-Revolutionaire)로 나뉘어 연대를 거듭하는 의회 정치가 이어졌는데, 1850년대를 제외하면 대체로 자유주의 세력이 득세했다. 특히 1868–1901년의 약 30년에 이르는 시기에는 1874–1877년(4년), 1888–1891년(4년)의 짧은 예외를 제외하면 자유주의 세력이 연속해서 집권하는 '자유주의 시대'가 이어졌다.

정치 안정과 지속적인 산업 성장에 힘입어 19세기 후반의 네덜란드는 문화적으로도 번성했다. 미술에서는 프랑스 바르비종 화파의 영향을 받은 덴하흐 화파(Haagse School)가 등장해 사실주의 회화가 시대를 풍미했다. 빈센트 반고흐도 덴하흐 화파로 분류되지는 않지만 이 시대의 인물이고, 덴하흐의 미술적 풍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문학에서는 암스테르담에서 80년대 세대(Tachtigers)가 등장했고, 과학에서는 물리학과 생물학에서 당대의 선도적인 학자 요하네스 디데릭 판 데르 발스(Johannes Diderik van der Waals), 헨드릭 로런츠(Hendrik Lorentz), 휘호 더 프리스(Hugo de Vries) 등이 배출되었다.

현대
20세기 초의 네덜란드 정치에서는 종래의 자유주의–보수주의 대립이 이어지는 듯 보였으나 1894년부터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사회주의자들이 의회 정치에서 새로운 변수가 되기 시작했다. 1909년의 선거에서는 사회주의 세력의 사회민주노동자당(Sociaal-Democratische Arbeiderspartij, 이하 '사민당')이 자유주의 세력의 지지 기반을 대거 잠식해 개신교 온건 보수파들의 반혁명당(Anti-Revolutionaire Partij)이 제1당이 되었다. 913년에 네덜란드의 인구는 6,200,000명으로 증가해 있었다.

이 구도는 1917년의 총선에서도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이 시기에 자유주의–사회주의–기독교 보수주의 세력 간에 '1917년의 타협'(Pacificatie van 1917)이 이루어졌다. 1917년의 타협으로 네덜란드 의회 정치는 혁명적 변화를 겪었다. 우선 남성 시민의 완전한 보통선거권이 보장되었고 여성의 피선거권도 보장되어 1917년에 최초의 여성 하원의원 쉬저 흐루네베흐(Suze Groeneweg, 사민당)가 선출되었고 정당명부식 비례대표제가 모든 의석에 적용되었고 의무투표제도 시행되었다. 또한 70여년간 지속적인 정치 논쟁의 대상이 된 종립학교에 대한 국가의 재정 지원 문제도 1917년의 타협으로 공립과 사립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학교에 국가가 재정 지원을 하게 됨으로써 일단락되었다. 여성의 보통선거권은 1919년에 의회 승인을 거쳐 보장되었다.

남성 보통선거와 의무투표제로 인해 다음 해 시행된 1918년 총선부터는 선거 참여자 수가 6배 가까이 급증했는데 이 시기부터 역사적 자유주의자들의 몰락과 보수파의 득세가 일어났다. 자유연합당과 자유당의 의석은 1917년 총선의 도합 31석에서 1918년 총선의 도합 10석으로 격감했고 제2당 사민당의 의석(22석)도 대폭 늘기는 했지만 보수파 거대 양당인 제1당 가톨릭당(30석)과 제3당 반혁명당(13석)을 합치면 사민당 의석의 두 배에 근접했다. 여기에 역시 개신교계 중도우파 정당인 기독역사연합(Christelijk-Historische Unie)이 제4당(7석)을 차지했고 자유연합은 제5당(6석)으로 주저앉게 되었다.

이렇게 가톨릭당–사민당–반혁명당–기독역사연합이 각각 1, 2, 3, 4당을 차지하고 자유주의계 정당이 제5당을 차지하는 구도는 거의 변화 없이 1937년 총선까지 반복되어 전간기 네덜란드에는 보수주의 시대가 도래했다. 1930년대 다른 유럽 국가에서처럼 네덜란드에서도 파시즘 및 나치즘 계열 정당이 생겨났는데 파시스트당은 0.5% 미만의 득표로 의석을 획득하지 못했고 나치 계열의 네덜란드 국가사회주의 운동은 1937년 총선에서 4.2%를 득표해 4석을 획득하고 제6당이 되었지만 기존의 중도 보수 주도 다당제에 균열을 일으킬 수준은 아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네덜란드는 중립을 지켰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본토는 나치 독일에, 동인도 식민지는 일본 제국에 점령되었다.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가 국가판무관으로 임명되어 20만 명 이상의 네덜란드인들을 학살했다. 그렇기는 했어도 네덜란드에서 상황이 끝난 시기였던 1949년에 네덜란드의 인구는 10,100,000명으로 여전히 많이 증가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 역시 점령한 인도네시아인들을 탄압했으며, 인도네시아인들은 일본 점령기가 끝나자 독립을 선언하고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을 벌였고 네덜란드는 군대를 보내 막으려 했고 군사적으로는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압도적으로 우세를 점했으나 악화되어가는 국제 여론을 의식해 마지못해 독립을 인정했다. 이 당시 네덜란드가 벌인 학살과 인권 침해는 국제적으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현재 네덜란드의 식민지는 네덜란드령 안틸레스(퀴라소, 신트마르턴, 아루바, 카리브 네덜란드)만이 남아 있으며, 이들은 네덜란드 본국으로 편입되거나 폭넓은 자치권을 얻었다.

인도네시아는 독립 이후 벌어진 인도네시아 여러 도서 지역의 독립 요구에 대응해야 했다. 말루쿠 제도 남부 같은 경우에는 개신교도 인구가 많았는데 1950년대 독립을 요구하다가 인도네시아에 가혹하게 탄압받았다. 결국 말루쿠인이 수만 명이나 네덜란드로 이주해야 했고 그 여파로 말루쿠 독립파들이 네덜란드에 있는 인도네시아 대사관에 테러를 가하거나 인도네시아 정계 요인을 공격하고 1977년에는 네덜란드 열차를 납치해 말루쿠 독립 운동가 석방을 요구하는 등 네덜란드도 덩달아 당하는 것이 많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구 사민당을 중심으로 좌파 자유주의자와 진보적 기독교 민주주의자들이 합세해 노동당(Partij van de Arbeid)이 창당되었다. 전후 재건기에 빌럼 드레이스(Willem Drees)가 이끄는 노동당은 기독역사연합, 가톨릭 인민당(Katholieke Volkspartij), 보수자유주의(구 온건 자유주의, 중도우파) 계열 신당인 자유민주인민당(Volkspartij voor Vrijheid en Democratie)과 연정을 이루어 집권(1948–1951)에 성공했다. 드레이스 내각은 노동당의 인기와 선거 선전(1952년과 1956년 총선에서 노동당이 제1당이 됨)에 힘입어 연정 파트너에서 자유민주인민당을 빼고 반혁명당을 넣은 4자 연정으로 연이어 장기 집권에 성공해 드레이스 시대(1948–1958)가 이어졌다.

2017년 총선에서는 2017년 총선에서 극우 성향 자유당이 원내 2당으로 성장했고 냉전 시대부터 네덜란드 정계를 주름잡던 진보 진영의 맏형 노동당이 38석→9석으로 폭락하였으며, 그 노동당을 대신해 모로코계 아버지와 인도네시아계 어머니를 둔 예시 클라버 서기장이 이끄는 녹색좌파당이 14석, 노동당의 주니어 파트너에 만족하던 D66이 19석으로 대거 약진하면서 노동당 없는 새로운 좌우합작 연정이 출범할 전망이다. 2017년 3월 17일 투표 이후 무정부 상태가 장기화되었다가, 자유민주인민당(VVD), 기독교민주당(CDA), 중도 성향의 민주66당(D66), 기독교연합당(CU)의 4당 체제로 합의했다.

2021년 총선에서 의회 정치 시작한 1848년, 비례대표제 시작한 1918년 이래 원내 정당이 17개나 들어가는 기록을 세웠다.

종교적 상황
2022년 통계 기준으로 15세 이상 네덜란드 국민 중에서 무종교인은 57.5%에 달하며, 종교인구는 가톨릭이 18.2%, 개신교가 13.2%, 이슬람교가 5.6%, 기타 종교가 5.9%를 차지하고 있다.[1] 특이하게도 이 무종교율은 공산주의 체제를 겪지 않은 서유럽 국가로서 매우 높은 수치이다.[2] 종교적인 면에서는 독일과 비슷한 면이 많은데, 1. (현대에는 그렇지 않으나) 과거에 개신교 다수 지역이었다는 점 2. 교세가 지역에 따라서 확연하게 다르다는 점 등에서 그렇다.

전통적으로 네덜란드는 상업과 무역이 발달한 특성상 다양한 종교와 사상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며, 이로 인해 1950년대까지는 개신교, 가톨릭, 사회주의, 우파 세속주의가 각자 학교, 언론사, 정당 등을 조직하여 공존과 합의를 추구하는 '기둥화'(verzuiling) 사회가 성립되었다.

종교개혁 후 17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는 인구의 60%가 네덜란드 개혁교회로 일컬어지는 칼뱅파 개신교의 신자로 그 종교가 사회적, 문화적으로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으며 아브라함 카이퍼 등 목사 출신 총리도 배출되는 등 정치 분야에도 큰 영향력을 떨쳤으나 2차대전 후 개신교는 급격한 감소세를 탔고 무종교인이 늘면서 현대에는 사실상 소수종교로 전락했다.# 과거의 흔적은 왕실과 바이블벨트에만 남아있다고 봐야 할 수준.

가톨릭도 40%의 비율로 정당이나 방송국 활동으로 맞불을 놓으며 2차대전을 지나고도 1980년대까지는 개신교보다 좀 더 오래 버텼지만, 역시 현대에는 급격한 감소세를 보이고 있으며 그나마 적극적으로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도 얼마 없고 대다수는 냉담자들인 경우가 많아 통계상으로만 제1 종교집단의 지위를 유지하는 수준에서 체면 치례 중이다. 사실 벨기에의 가톨릭 비중이 50%대란 것과 비교하면 네덜란드의 가톨릭이 메이저라 보기도 어렵다.

이러한 1960년대부터의 탈종교화 현상을 탈기둥화(ontzuiling)라고도 부른다. 그럼에도 문화적, 정치적 영향력 면에서는 아직도 기독교의 영향이 꽤 남아있다. 최근에는 여느 유럽 국가들처럼 난민과 이민자들을 통한 무슬림 인구가 증가하면서 반이슬람 감정이 높아지는 추세이다. 2019년에 네덜란드에서는 직업훈련서 면도를 거부한 무슬림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지 말라는 판결이 나왔다.#

유럽계 식민제국들이 식민지의 종교에 영향을 주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처음에는 인도네시아에게 별다른 종교적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이는 상업적인 이윤만 남기면 OK를 외치는 네덜란드 항해자들 특유의 마인드도 한몫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상업적인 마인드가 충만하다고 한들, 원주민 중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서구화 비중이 높은 게 당연한지라, 점점 보이지 않는 차별이 형성된다.

또한 다른 제국주의 나라와 같이 엄청나게 약탈하고 뜯어가기는 매한가지라 인도네시아에서는 네덜란드에 대한 반감이 반기독교 감정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건 거의 수마트라 섬/자바 섬에 주로 있는 무슬림들 이야기이고,(이들이 인니 인구의 90% 가까이 된다.) 이리안자야나 말루쿠, 그리고 화교 같은 소수민족들은 오히려 네덜란드 선교사가 전해준 개혁교회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였기에 결국 민족 및 지역 간 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인도네시아의 종교 문단과 기독교공포증 문서를 참조하자.

가톨릭
명목상 네덜란드 최대의 종교집단. 하지만 실질 출석률은 여느 서유럽 국가들처럼 낮다. 또한 대다수가 노르트브라반트와 림뷔르흐, 그리고 동부 네이메헌 및 엔스헤더 근교 지역을 중심으로 몰려있다.

흔히 네덜란드 독립전쟁이 '민중의 애국적 개신교 vs 친합스부르크의 외세적 가톨릭'으로 단순화되지만, 봉기 직전의 네덜란드는 압도적인 가톨릭 다수 지역이었고, 네덜란드의 개신교화는 독립의 원인이 아닌 독립의 결과로 생긴 정치적인 문제였으며, 이마저도 점진적인 과정이었다. 네덜란드 독립전쟁은 개신교와 가톨릭의 종교전쟁이라기보다는, 반합스부르크와 친합스부르크의 전쟁이었고, 당장 네덜란드 성상 파괴운동만 하더라도 자신들을 반합스부르크와 선을 그었다.

16세기에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독립한 이래 국법으로 가톨릭을 금지하였으며, 이 조치는 무려 1853년까지 계속되었다. 그 뒤로 교계 제도가 회복되자 가톨릭국민당(KVP), 가톨릭 라디오 방송(KRO), Volkskrant 신문사 등을 조직하여 개신교 세력을 견제했다. 20세기에 진입하던 때 이미 개신교 비율이 감소 추세였던 반면, 가톨릭은 20세기 중반때까지 꾸준히 비율을 높여 1960년대 쯤에 약 40%로 정점을 찍었다. 다만 가톨릭의 비율 역시도 천천히 줄기 시작하여 2010년대에는 상기했듯 20%대로 감소했다.

개신교
네덜란드 국교회의 먼 전신은 1571년 독일 엠덴에서 개혁자들이 모여 총회를 연 것이 시초로, 이때는 아직 스페인의 가혹한 박해로 개혁교회 신앙을 지켜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그러다 네덜란드가 공화국으로 독립하고 한참 지난 1618년에 도르드레흐트에서 예정설에 대한 논란을 두고 총회가 열렸으며, 2년간의 토론 끝에 고마루스라는 한 위그노 출신 신학자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총회가 마무리되고, 패배한 알미니우스주의자들의 공적인 예배 활동을 전면금지시켰다.

18세기에서 20세기 초까지는 화란개혁주의로 일컬어지는 개신교 교세가 60%에 달해 베네룩스 3국 중 유일하게 개신교 위주의 문화를 갖고 있던 나라로 알려졌다.(1849년의 종교 분포도) 사실 종교개혁 초기만 해도 가톨릭의 비중이 더 높았다지만 스페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한 전쟁 와중에 현 네덜란드의 도시들 대다수가 개신교 진영으로 들어가면서 남부를 제외한 대다수 지역들에서 개신교가 퍼지기 시작했고, 성당의 성상을 철거하고 교회로 개조하는 사례도 이 때에 생겨났다.

그 뒤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늘면서 남부 브라반트와 동부 트벤터를 제외한 대다수 지역에 개신교가 퍼졌고, 2차대전 전인 1930년대까지는 다수 종교로 유지되었다.[10] 이 시대까지만 해도 프리슬란트, 드렌터, 흐로닝언 최북단 3개 주에 신자가 가장 많았으나 2차대전 후로는 역설적으로 개신교세가 가장 먼저 쇠퇴한 지역이 되어버렸다.

밑의 NCRV(Nederlandse Christelijke Radio Vereniging) 방송국 명칭에서도 알 수 있지만 개신교가 한참 끗발 날리던 시절에는 현대 대한민국처럼 기독교=개신교로 통했다. 벨기에와 달리 가톨릭은 스스로도 'Katholiek'으로 칭했다. 칼뱅파에 의해 종교개혁이 주도된 관계로 독일 등 루터교 국가에 비하면 장식적인 면에서 매우 절제된 인테리어를 갖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실제로 먼나라 이웃나라에서 설명한 것처럼 간단한 형태의 건물도 있지만, 델프트같은 큰 도시의 교회들은 나름대로 장식적 요소가 상당하다.

1948년 wcc제 1차 총회가 네덜란드에서 열렸는 데 2차 세계대전이후 유럽은 처음으로 종교을 토대로 세계적인 개신교 단체를 조직한 것이다. 이런 에큐메니컬 분위기의 중심이 되지만 다른 유럽 국가에 비하면 기독교 '전통 문화'는 매우 빈약한데, 이것도 종교개혁때 성상파괴의 영향으로 비성경적, 미신적이라는 이유로 유물이나 상징들을 상당수 폐지해버렸기 때문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신터클라스 축제를 가톨릭의 잔재라 하여 한동안 금지했다가 1990년대가 되어서야 다시 받아들인 사례도 있었다.

영미권, 한국처럼 칼뱅주의가 대세였으나 문화적인 차이로 인해 직분 명칭이나 예배의식, 관습적, 외형적인 부분에서 소소한 차이점이 있다. 이를테면 예배를 인도하고 교회를 책임지는 직분을 목사(pastor)가 아닌 다른 명칭으로 부르거나, 상대적으로 의식적인 요소가 중시되고 목사와 장로들이 행진한 후 악수하여 예배 시작을 알리는 것이 눈에 띄는 특징이며 찬송가를 부를 때 끝 절까지 다 부르지 않고 주제에 맞다고 생각되는 1~2절 정도만 추려서 부른다. 성만찬 횟수도 1분기당 1~2회 정도로 꽤 자주 한다. ‘’

그리고 한국 개신교도 입장에서는 상당히 황당해할만한 요소들도 있는데 십자가는 안 건다면서 ☧표시를 걸어놓는다던가, 'doophek'이라고 해서 가끔 가톨릭의 장궤틀 마냥 강대상과 회중석 사이에 울타리를 쳐놓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2~3부제로 예배를 진행할 경우 1부와 2부 사이의 텀이 길다. 1부가 10시에 있으면 2부는 저녁 5시에 있는 식으로 말이다.

그래서 한국 개신교처럼 교회 안에서 점심을 먹는 문화가 없고, 집에서 점심 먹고 놀다가 저녁 되면 다시 교회 가는 식으로 일요일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한국에 비하면 주일학교나 유년부 청년부 개념이 상대적으로 덜 발달되어 있다. 개신교의 전성기였던 19세기 중반~20세기 초에는 아브라함 카이퍼가 활동했던 반혁명당(ARP)[15]등 기독교 정당이 세력을 떨쳤으며 과거에 비해 종교적 영향력이 약화된 현대에도 반혁명당의 후신인 기독민주애원당(CDA), 기독교연합당(CU), 개혁정치당(SGP)등이 어느 정도 네덜란드 정계에 세를 확보하고 있다.

역사적, 신학적 이유로 교단이 상당히 분열되어 있었으나 2차대전 후 개신교 교세의 위축과 함께 상당수가 도태되었고, 2016년 기준으로 네덜란드에서 존재감이 있는 교단들은 아래와 같다. 네덜란드 개신교회(PKN, 영어로는 PCN) - 2004년 네덜란드 국가개혁교회(NHK), 화란개혁교회 총회파(GKN), 화란 루터교회(ELKN)이 1960년대부터 '함께 가는 길'(samen op weg)이란 모토 아래 재통합을 추진한 결과물로써, 여느 유럽 대륙의 주류 개신교단처럼 진보적인 성향이 강하다.

보수파는 '고백연합'(CV)과 '개혁주의 연맹'(GB)이 있으며, 개혁주의 연맹은 네덜란드 개신교회 내에서 가장 보수적인 파벌을 형성하고 있다. '고백운동' 계열의 교회들은 좀 더 유연해서 한국의 부흥성회 비슷한 집회도 연다. 진보파는 신정통주의(midden-orthodox) 계열과 완전 자유주의(vrijzinnig) 계열로 세분화되어 있다. 화란개혁교회연합 해방파(GKv)-1944년 개혁교회연합에서 교권 및 신학적 분쟁으로 분리된 교파이다. 한국 보수 개신교계, 특히 예장고신에서는 자매관계 등의 이유로 그냥 '화란개혁교회'라고만 해도 이 교단을 가리킬 정도로 은근히 유명하다.

기독개혁교회(CGK)-1834년에 국가교회에서 분리된 최초의 개혁교단. 위의 네덜란드 개신교회처럼 진보파와 보수파가 공존하고 있으며, 보수파는 'Bewaar het Pand'란 별칭으로 불린다.
그 외에 재건개혁교회(HHK)[19]와 Gereformeerde Gemeente등의 교단 등이 있다. 전통적으로 영어권의 KJV에 해당하는 국역성경(Statenvertaling)을 써 왔지만[20] 현대에는 대다수의 개신교 교파들이 새번역 성경(NBV)을 쓰고 있으며 보수 성향 교파에서만 국역성경을 고수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현대 네덜란드에서 개신교는 소수가 되어버렸고, 미국처럼 바이블벨트로 칭해지는 지역들에서 명맥이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유명 관광지 교회들 중에는 암스테르담 서교회(Westerkerk),[21]와 북교회(Noorderkerk) 델프트 구교회와 하우다 신트얀스 교회 정도에서 일요일에 현지 스타일 예배를 체험할 수 있다. 과거에는 지상파 방송에서 예배 실황중계를 한 적도 있었으나 2016년 이후 NPO의 편성 방침이 바뀌면서 모두 종영되었다. 현재는 NPO5 라디오에서 'Zin, zout en Zegen'이라는 음성 중계 방송을 들을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한국 개신교와의 관계
루터교회가 주류인 독일이나 북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칼뱅파 개혁교회의 세력이 강했던 역사 때문인지 한국에서도 긍정적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간간히 있다. 아예 예장고신, 예장합동의 사례처럼 교류하는 분위기도 있으며, 영미권이나 독일 못지 않게 유학 갔다온 목사 및 신학자들도 있다. 교류까지는 안 가도 대다수의 한국 장로교 교파중 고려파와 교류가 있다 손봉호박사가 화란 자유대학에서 공부했으며 합동측 총신대 학장을 지낸 정성구목사도 화란에서 공부했다. 이들은 웨스트민스터 문서, 독일의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과 함께 벨직 신앙고백과 도르트 신조를 인정하고 있다.

또한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 미국으로 건너간 사람들과 그 후예들까지 확대하면 헤르만 훅세마와 코넬리우스 반 틸이 한국 신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으며 캄펀에 있는 신학교는 부산과 천안 고신대학교와 자매관계이다. 비록 근대에 영미권과 같은 선교사 파송은 단 한 번도 없었으나 장로교와 같은 칼뱅주의로써 신학적, 교리적인 부분에서 상당히 통하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에 언어적인 장벽만 극복하면 공감하기 쉬운 부분도 꽤 있다.

하지만 영미식 장로교와 비교했을 때 형식적인 경향이 두드러지고, 2차대전 직후 주류 교단이 영미권처럼 에큐메니컬 성향으로 선회한 데다 정서 자체가 한국이나 영미권과는 분명 다른 점도 있으므로 이런 부분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실제로 네덜란드 '해방파' 교회(GKv)에서 2017년 6월 여성목사 안수 허용을 결의하자, 예장 고신 측에서 매우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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