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 신학의 설교와 십자가 신학의 설교 - 예장뉴스
예장뉴스
연못골 이야기(기획)REFO 500(1517-2017)
영광 신학의 설교와 십자가 신학의 설교번영주의 설교 비판
예장뉴스 기자  |  webmaster@pck-good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2.04.18  18:03:09
트위터 페이스북

영광 신학의 설교와 십자가 신학의 설교 - 오늘날 번영주의 설교 비판

한국개혁신학회(회장 권호덕 교수)는 지난 9일(토)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과천소망교회에서 "개혁신앙과 한국교회 설교"라는 주제로 '제26회 정기학술심포지엄'을 가졌다. 개회예배 기조강연은 김영한 교수(숭실대, 고문)가 '영광 신학의 설교와 십자가 신학의 설교 - 오늘날 번영주의 설교 비판'이라는 주제로 전했다. 다음은 김영한 교수 기조강연 전문.


머리말

개혁교회는 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다. 교회는 이 어려운 시대에 이 세상을 바로 이끄는 하나님의 진리등대이다. 교회가 이 시대를 바로 선도하는 수단은 설교이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법이 해이해진 시대에 모세의 율법을 바르게 해석했고, 제사장들의 타락한 예배 관행과 설교를 비판하였다. 올바른 설교는 교회의 영성을 바르게 세우는 기반이다.

그런데 포스트모던 시대(the postmodern era)에 설교가 소비자 구미에 영합하는 신실용주의(neo-pragmatism)의 사고에 젖어 들고 있다. 오늘날 미국교회를 비롯한 한국교회의 상당수 목회자들이 지나치게 번영과 성공을 하나님 축복의 기준으로 설정하여 설교함으로써 물질주의로 얼룩진 오늘날 시대에 영합하고 있다. 이러한 영합의 정신은 중세 스콜라주의가 가졌던 세속적 번영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도달하려는 영광 신학에 물든 현상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본고는 오늘날 번영과 성공위주의 설교를 비판하면서, 그것의 원형인 중세 스콜라주의의 영광신학을 비판적으로 살펴보고 조직신학적으로 종교개혁자 루터의 십자가 신학의 설교 착상이 교회 갱신을 위하여 필요함을 제시하는데 있다.

I. 성공주의 설교 - 오늘날 복음주의 미국교회 및 한국교회 설교의 현황

1. 미국교회의 번영주의 신학

마이클 호튼은 그의 저서『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에서 오늘날 미국 번영주의적 복음주의가 지니고 있는 8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시녀가 된 하나님, 실용주의적 복음주의, 소비자 중심주의, 구원으로부터 자기 존중으로, 감정중심의 신앙, 이교도로의 복귀, 각자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공동체의 상실 등이다.

미국의 복음주의권은 방송망, 출판사, 광고대행업, 위락시설 들을 갖춘 관광지 그리고 유람선까지 자체적으로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다. 복음주의권은 마케팅이 성공하자 이러한 복음주의의 성장을 하나의 영적 부흥으로까지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여론 조사가인 죠지 바나(George Barna)와 윌리엄 메케이(William McKay)에 의하면 “수백만 달러를 라디오, TV 등을 통한 미디어 사역과 전도를 위한 출판물에 투자하는 데도 불구하고 지난 5년간 기독교의 실질 성장은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고 평가하고 있다.

권위 있는 연구기관인 옥스퍼드 분석(Oxford Analytica)는 “인상적인 통계 수치 그리고 외견상 노랄만한 부흥의 열기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기독교는 겉으로 나타나는 현상하고는 판이하게 다른 상황 하에 있다는 증거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회에 대한 영향력에 관한 자료들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

오늘날 미국의 복음주의권 번영신학에서는 권력, 인기 그리고 성장에 대한 잘못된 가치관과 환상으로 말미암아 기독교 내의 성공에 대한 건전하지 못한 선입견과 복음의 메시지보다도 방법론, 진리 보다는 기법, 질보다는 양을 추구해 나가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개혁신학자 프랜시스 쉐퍼(Francis Shaeffer)는 오늘날 복음주의 기독교를 파괴시키고 손상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복음주의라는 명목을 가진 잘못된 복음주의임을 경고하였다. 그는 오늘날의 기독교가 인생의 진정한 목적이 되질 못하고 사람들의 기호나 만족시켜주는 대용품으로 전락하고 천박해졌으며, 피상적으로 되어가고 있음을 지적했다.

미국 번영 복음주의자들은 존 듀이(John Dewey)의 실용주의 철학의 영향을 받아 종교를 적극적 사고방식에 의한 심리학적 긍정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긍정의 힘과 적극적 사고방식을 강조하는 설교는 종교의 기능 가운데 위로와 소망 그리고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오는 인간 승리, 사업성공 등 수평적 차원의 행복일 뿐이다. 신앙이란 성공을 위해 필요한 수단이며, 하나님이란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역할을 하는 존재 이상을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조엘 오스틴(Joel Osteen)과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의 설교는 신자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갖는 것을 강조하는 수직적 차원을 경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미국의 소위 복음주의 설교자들은 청중을 소비자로 간주하고 그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를 들려줘야 설교를 부담없이 듣게 된다고 주장한다. 미국 버지니아 대학의 사회학 교수인 제임스 헌터(James D. Hunter)는 열여섯개의 복음주의권 학교들의 학생들과 교수진을 분석하였다. 이들 가운데 67%가 자신들이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이는 첫 번째 이유가‘인생의 의미와 목적에 대한 인식"이며,“하나님이 내 삶에 변화를 주셨다”말하고 있다. 이들 거의 절반(46%)이 대부분의 상황에서 사람들에게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갈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주 밥맛없이‘ 느끼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도날드 블로쉬(Donald Bloesch)는 다음같이 개탄한다: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인들의 교회생활 속에서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현상 중의 하나는 교리적이며 사도들로부터 전승되어 오는 기독교의 본질적 내용이 교회 내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으며, 내면적 영성의 개발이나 영혼구원에 관해서는 중요성을 부여하면서, 종교개혁으로 재발견되고, 그 가치가 새롭게 증가된 사도적 신앙에 대한 신뢰는 형편없을 정도로 부족한 지경에 있다.” 그는 역사적 복음주의와 세속화된 복음주의를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복음주의 신앙은 사도적 증거에 기초하고 펠라기우스주의와의 투쟁과정에서 어거스틴에 의해서 재확인되고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에 의해 재발견된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다. 이러한 역사적 복음주의는 오늘날 미국 기독교 내에 참으로 심하게 침투되어 있는 관념화된 복음주의 혹은 세속문화에 오염된 복음주의와는 명백히 구분되어야 한다.”

2. 번영주의 설교

미국의 유명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2006년 12월호에서 부유한 삶에 대해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 교회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타임』은 오늘날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설교주제가 부유함을 하나님의 축복이면서 신앙의 열매로 강조하는 경향이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나님은 당신이 부자이길 원하시는가? 이를 지지하는 복음주의자들이 늘고 있다”고 심층 보도하였다.

『타임』이 보도한 내용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1980년대 구가하던 번영의 신학이 최근 다시 부활한 가운데 예측할 수 없을 만큼 붐을 이루고 있다. 타임지의 보도는, ‘긍정의 힘’으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 휴스턴의 레이크우드교회의 담임목사 조엘 오스틴(Joel Osteen), 포터스하우스교회의 담임목사 제이크, 월드체인저스교회의 담임목사 크레플로달람 등 소위 미국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는 메가처치(megachurch) 목회자들의 목회방침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이들 목회자들은 번영의 신학을 인용하며 설교하고 있다.

미국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소위 메가처치(megachurch)의 설교흐름은 ‘번영의 신학’(Theology of Prosperity)에 기초하고 있다. 번영신학은 부자 되기 원하는 성도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를 제공한다. 기독교 서적으로서 일반 도서판매량에서 상위권에 오른 ‘긍정의 힘’은 세계 보수주의 교회는 물론 자유주의 교회에까지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 바 있다. 이와 관련, 레이크우드감리교회 담임목사 템플은 “기독교 문화에서 번영의 복음은 어디에나 있다. 가장 가까운 서점에 가서 많이 판매되는 서적의 종류가 무엇인지 한 번 확인해 보면 우리는 번영의 신학이 얼마나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밝혔다.

현재 3만명이 출석하고 있는 레이크우드교회의 오스틴은 자신은 결코 돈에 대해 설교하지 않았다며 자신의 축복관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나는 누구나 자신의 삶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설교했다.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되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길 원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청구서에 대해 지불할 돈이 필요한 것도 아시고, 자녀들이 대학에 입학하기 원하는 우리의 생각도 아신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되길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가 부자가 되기 원하신다고 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오스틴은 돈에 대해 직접적인 설교는 하지 않았지만 하나님-개인의 관계를 ‘필요를 충족하는 관계’로 설정한 것만은 사실이다. 오스틴은 2009년 4월 25일에도 뉴욕의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희망의 밤”(Night of Hope)을 가지고 여기에 모인 4만7천여명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였다.

텔레비전의 인기 설교가면서 목사요 작가인 조이스 메이어(Joyce Mayer)는 다음같이 주장한다. “누가 천국에 갈 때까지 비참하고 가난하고 상처받고 추한 채로 있어야 하는 신앙에 들어가고 싶겠는가. 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고 싶어 하신다고 믿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자가 되기길 원하신다.” 그는 직접적으로 기독교신자들은 부자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설교하고 있다.

이처럼 번영주의 설교는 메가처치(megachurch)에서 강하게 주장되며 현재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늘 비판적이어서 언제나 이방인 취급을 당해왔던 흑인교회를 점령하는 중에 있다. 매주 8,500여 명이 모이는 월드체인저스교회의 담임목사 달라는 이렇게 설교한다. “하나님의 권능이 바로 이곳에 임할 태세로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나는 우리가 언제 교회에 나가야하는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일터로 나아갈 때 하나님의 권능이 여러분과 함께 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설교는 주로 사람들이, 특히 전문직에서 성공하는데 영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는 “번영의 복음은 회중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달라는 복음서를 인용해 설교하는 중 가능하면 신도들에게 실생활에서 태도를 연마하고 집중력과 활동력을 기르면서 일상생활에서 절도를 지키고 또 사고방식을 바꾸어 결국에는 어떻게 보다 바람직한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알려주려고 노력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복음은 구원의 복음에서 실생활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는 삶의 실용적인 기술로 변모하고 있다.

미국 메가처치들이 강조하는 번영의 복음(신학)은 그동안 의도적으로 무관심했던 재정에 대한 관심이 목회주제에 포함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합리성과 실용이라는 단어가 익숙한 미국 중산층 이상의 교인들을 대상으로 한 메가처치들의 신 목회조류는 교인들의 기호를 따라가는 현대목회 패턴의 드러내 준다. 이들 번영주의 복음 전도자들은 “예수야말로 자기 향상-자기 개발에 있어서 최상의 프로그램”이라고 본다, 성공과 능력(힘, 재력, 권력) 개발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죄나 죄책감 등을 유발하는 부정적인 설교(은혜, 선택, 칭의, 대속적 구속에 관한 주제)로 회중들의 기분을 나쁘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국의 새로운 경향 덕분에 혜택을 본 교단은 오순절교회였다. 신앙 치유운동자인 패트 로버트슨(Pat Robertson)은 믿음을 “우주적 힘(cosmic power)의 단추를 누르는 손가락”이라고 본다. 그는 회중들에게 ‘번영의 법칙“을 활용하라고 설교한다: ”그것은 라디오 주파수나 텔레비전의 채널을 맞추는 것과 같아서 바른 주파수를 맞추면 그 프로그램을 잡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오순절교단은 사실상 ‘근면히 일하는 것’, ‘좋은 가정경제 꾸리기’를 강조해 왔는데 이른바 번영의 복음 때문에 오순절교단은 미국의 주류교단으로 설 수 있게 됐다.

3. 한국교회의 번영주의 및 성공주의

1) 한국사회: 동방예의지국에서 자본주의적 물량사회로 변화

최근 동방예의지국인 우리 한국사회를 뒤집어 놓은 것은 ‘돈버는 것’이었다. 경제적인 윤택함을 가장 좋은 미덕이면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증거물로 주장하곤 했다. 1970년대의 새마을운동, 1980년대의 올림픽 유치에 이어 벤처열풍과 신용카드 시대 등 우리가 살아왔던 지난 시간들은 ‘경제적인 여유만이 유일한 우리의 살 길’임을 주장해왔던 시기였다.

여기서 문제는 단 하나, 우리의 안전과 삶을 보장하는 것을 하나님이 아니라 돈이라고 믿는 이 시대의 삶의 문화가 갈수록 견고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질의 옹위를 받으며 부를 축적해야 삶이 안전해 진다는 우리의 생각들이 매우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복지국가에 대한 환상은 경계할 만하다. 풍요로움이 에워싼 복지국가의 실체는 사실 하나님의 보호로 이루어진 국가가 아니라는 점에서 우리는 다른 시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질적인 기반을 전제로 한 복지국가의 실현은, 유감스럽게도 하나님 없는 국가의 도래를 기대하는 것일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물질로부터 안전을 기대하는 교회와 신앙인들의 왜곡되고 변질되는 삶의 문화는 우리가 사는 도시를 물질만능의 도시면서 은행과 거대기업을 중심에 둔 도시로 만드는데 도움을 줄 뿐이다.

하나님을 믿되 어떻게 믿을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신앙과 관련해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우리는 21세기를 살면서 매우 진지하고 구체적으로 물어 보어야 한다. 신도시 뉴타운에 교회부지를 분양받은 것을 놓고 기뻐하는 목회자들이 많다. 교회의 가치는 영혼구원이 일어나는 기적적인 장소로서 놀랍기 보다는 엄청난 부동산 가격상승에서 비롯된 교회의 건물가치 상승 때문에 놀라는 곳으로 변질되고 있다. 과부의 두 렙돈에 감격하는 대신 교회건축에 내놓는 수 억 원에 감격한다. 가난한 신앙인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어서 빨리 부자가 되어 하나님의 축복을 증거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2) 번영주의와 성공주의에 물든 한국교회 강단

미국 복음주의권 목회자들 가운데서도 이러한 번영주의적 설교를 심각한 문제라고 진단하며 “거짓 우상을 만드는 일에 교회가 앞장서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로 우리나라에 와서 세미나를 인도했던 새들백교회의 담임목사 릭 워렌(Rick Warren)은 번영의 복음을 ‘허튼 소리’라고 일축하며 ‘우상을 섬기는 일’이라고 크게 우려하고 있다.

번영과 기복을 강조하는 시대에 개혁교회와 신학은 개혁주의 전통을 다시 활성화 시켜야 한다. 물질적인 부요보다 영적인 부요가 더 가치가 있다. 영적인 풍요와 함께 물질적인 풍성함 역시 기독교인이 누려야할 복이지만, 이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잊어버리거나 왜곡하게 하는 사실이라는 것을 새겨야 한다. 부와 번영, 긍정의 사고방식은 오직 십자가의 복음을 믿을 때 그 다음에 찾아오는 부차적인 것이다. 우선순위가 뒤바뀔 수 있는 현대사회의 치열한 경쟁 때문에 복음의 진리는 늘 세상 속에서 위협을 받고 있다. 사회 정치적으로 미국의 영향력이 그 어느 때보다 강해지고 있는 최근, 미국 대형교회의 한국기독교에 대한 파워 역시 점점 커지는 양상이다. 우리나라 대형교회들 역시 이같은 흐름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교회는 세속의 가치나 풍조에 따라가서는 않된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요 소금이라고 하셨다. 교회는 세상을 밝히는 등대가 되고 부패를 방지하는 소금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를 주도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중심의 실체는 경제력이다. 그리고 대도시의 중심에는 은행과 거대기업 건물 그리고 고층빌딩이 자리 잡고 있다. ‘돈 버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이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

겸손과 양보와 정직과 근면이 신자의 주요덕목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상징물이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야 하는데 유감스럽게도 세속적 번영과 성공이 오늘날의 금송아지로 자리잡고 있다.

최근 일산의 한 교회는 장로를 세우는 과정에서 교회내분이 일어났다. 교회 리모델링을 앞두고 있는 교회는 은퇴장로의 자리를 위해 3명의 장로를 세웠고 후보자는 각각 3천만 원의 헌금을 약정했다. 문제는 장로 후보자의 자질검증에 있었다. 평상시 주일 대예배 지각과 결석을 반복하던 한 성도가 장로후보에 거론되자 성도들이 반발하고 나선 것이다. 교회의 임명 강행에 급기야 성도들은 장로를 뽑는 기준을 제시해달라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교회의 제직 임명이 헌금과 관련된 것은 한 두 교회만의 특이한 사례가 아니다. 이러한 관행은 한국교회 전반에 퍼진 것이며 헌신과 봉사의 직책보다 명예와 권력의 자리로 인식되고 있다. 실제로 개 교회 장로들은 교단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니 권력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왜 교회가 직분을 매매하기에 이르렀을까. 성직자들이 먼저 물질에 무릎을 꿇었기 때문은 아닐까. 교회지도자의 타락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신학교육의 타락은 목회자의 질적 하락을 가져왔고 검증받지 못한 교회를 여기저기 세우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 교회의 성장은 막대한 헌금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목회자에게 주었다. 그래서 스스로 풍성한 헌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노력한 목회자를 찾기란 힘든 실정이다. 심지어 1990년대 이후 교회건축 붐이 일면서 교회당 매매까지 극성을 부리고 있으니 안타까운 상황이 아닐 수 없다.

3) 한국교회 강단의 번영주의 설교

한국교회의 위기는 설교의 위기, 강단의 위기에서 비롯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대사회적 역량을 상실하고 세상으로부터의 비판을 넘어 혹독한 비난의 대상으로까지 전락하면서 성도들도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우리는 “한국의 대형교회 강단이 건강한 강단일 것이라는 그릇된 인식에서 벗어나야 하며, 물량주의의 대형교회를 우상화하는 한국교회의 잘못된 시각에서도 벗어나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 위기에는 대형교회의 책임이 적지 않다. 한국교회 상위 20개 대형교회 성도의 수를 합하면 150만 명 이상이다. 또 이들은 사회 각계각층에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세상에 나가 그리스도인처럼 살고 있다면 한국교회가 이렇게 비난을 받지 않을 것이다.

한국 성도들은 너무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같다. 한국교회 성도들은 공익을 추구하기 보다는 사익추구에 보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고, 교회 안에서의 윤리는 강조하면서도 정작 사회 안에서의 윤리, 사회 정의에는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러한 원인은 바로 목회자들에게 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청중들이 들을 수 있는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노력을 통해 청중들의 삶을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않아야 한다. 사도바울 당시 자신의 권력과 신학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복음을 미끼로 쓴 이들이 많았는데, 오늘날 복음에 불순물을 넣고 있는 설교자들에게도 사도바울은 똑같이 지적하고 있다.

부와 성공을 강조하는 설교는 성경적이지 않고 개혁주의 전통에도 어긋난다. “많은 목회자들이 적극적, 긍정적인 사고방식이나, 성공에만 관심을 집중시켜 예수님의 십자가가 없는 말씀을 전하고 있다. 설교자는 청중들이 듣기 원하는 설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청중들이 들어야 하는 설교를 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이런 십자가 중심의 설교를 듣기 힘들다.”오늘날 교회성장이란 이름으로 마케팅 원리를 적용하여 추구신학을 추진하는 인위적 노력이 행해지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인본주의 설교의 경향은 오늘날 한국교회 강단을 오염시키고 있다. 결과적으로 사죄의 은총과 사죄를 통한 구원의 감격이 소멸되어 가는 불행한 교인을 만들어 가고 있는 현실이다.

4) 값싼 복음은 면죄부 판매

사랑의교회 원로목사 옥한흠은 “예수 이름이면 무엇이나 통하고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든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값싼 복음이 남발되고 있다”고 한국교회 설교의 위기를 지적한 바 있다. 물량주의와 타협한 교회는 더 많은 성도를 끌어 모으기 위해 헌금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팔아왔다.“사람들의 비위에 맞춘 값싼 설교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간 큰 예배자를 양산했다.”“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도 회개할 줄 모른다”는 표현은 오늘날 ‘어게인 1907’을 외치며 “회개합니다”라고 눈물을 쏟아내는 성도들에게 다시 들려주어야할 말이다. 눈물을 흘리고 애통함에 무릎꿇고 기도하는 이들이 있지만 부흥은 오지 않는다. 진정성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내 기도만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내 죄만은 용서해주실 것”이라는 성도들의 비뚤어진 신앙은 헌금으로 면죄부를 사고 헌금으로 축복을 받는 웃지못할 상황을 만들었다. 교회 밖에서 누가 봐도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사람도 교회 안에만 들어서면 존경받은 성도가 되는 것이 교회의 현실이다. 밖에서 숱한 죄를 지어도 교회 안에서는 새벽예배에 성실히 참여하고 십일조를 정확히 드리며 주일성수에 최선을 다하는 교인이기 때문이다.

II. 중세교회의 영광의 신학 비판으로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

위에서 살펴 본 바 번영과 성공을 신앙의 기준으로 보는 번영주의는 신학적으로 이미 중세를 지배한 스콜라의 영광신학에서 나타나고 있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세속적인 번영과 성공에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한 중세 스콜라 신학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부르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십자가 신학을 제시하였다.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은 루터가 1518년 개최된 하이델베르그 논쟁(Die Heidelberger Disputation)에서 발표한 그의 신학의 특징을 드러내는 중요한 착상이다. 이 토론에서 루터는 40개 논제를 준비했는데 그중에서 28개는 신학에 관한 것, 12개는 철학에 관한 것이었다. 루터는 이 논제에서 인간의 죄성, 인간의 노예의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공로가 배제된 하나님의 절대적 은총을 말하고 있다. 루터는 이 논제에서 신 인식에 관한 중세 스콜라주의를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라 불렀고, 그가 제시한 신학을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이라고 불렀다.

1. 영광신학 비판 - 잘못된 하나님 인식의 길

루터는 영광의 신학을 다음같이 정의한다: 영광의 신학이란 “신학자가 하나님의 본질을 그의 사역에서 지각해서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본질을 보는” 신학이다. 영광의 신학은 출애굽기 33장이 보여주는 모세처럼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신학이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을 인식하고자 하며 하나님의 보이는 본질을 통해서 그의 보이지 않는 본질의 지혜를 파기한다. 루터는 피력한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십자가의 낮아지심과 수치 속에서 인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그의 영광과 존엄성 속에서 인식하는 것은 어느 누구에게도 충분하지 않고 필요하지 않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 인식이요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길이다. 영광의 신학은 “주여 아버지를 보여주소서”(요14:8) 라고 간청하는 빌립의 요구에 상응하는 신학이다. 그러나 예수는 빌립처럼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찾는 자들을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린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14;8).

영광의 신학이란 하나님의 사역(Werke)으로부터 시도하는 하나님의 인식이다. 이 사역이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을 말한다. 그리고 인간의 행위이다. 하나님을 창조사역으로부터 인식하고자 하는 자연신학과 사변적 형이상학과 도덕적 인간의 행위 거룩성은 함께 속한다. 영광의 신학은 인간을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교만으로 이끌고 간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영광과 능력”(Glorie und Macht)을 기준으로 내세운다.

루터는 중세 스콜라주의가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영광의 신학이라고 비판하면서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는 십자가 신학을 제시하고 있다. 중세의 스콜라주의는 인간의 도덕적 노력과 이성적 추론에 의하여 하나님 인식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인간의 종교적 사색이나 행위의 의(work-righteousness)를 통하여 하나님에게 직접 나아고자 하는 인본주의적 시도이다. 이것은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 상승하는 구조를 갖는다. 그러므로 이는 영광의 신학이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을 공개적인 신적 능력, 지혜와 영광 속에서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인식하고자 한다. 영광의 신학은 인간을 윤리적 실적으로 행위하는 자, 하나님 앞에 율법의 이행자로서 세운다. 그래서 도덕적 행위주의(moralischer Aktivismus)를 정당화 한다.

세상의 지혜란 인간의 도덕성과 이성의 능력을 말하며, 여기서 인간은 자기의 공로를 통하여 하나님에게로 나가고자 한다. 이것은 영광의 신학이다. 영광의 신학은 십자가에 달리시고 십자가에 감추어져 있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의 영광과 인정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이 영광의 신학이 인간의 도덕성과 이성을 신뢰하는 도덕주의와 합리주의에 기인한 다. 루터는 이러한 인간의 방법으로는 하나님에게 다가 갈 수 없다고 선언한다. 인간이 하나님에게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달려 있다. 세상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세상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달린 약하고 무능한 자로 보기 때문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시작하여 한국의 설교단에 영향을 미치는 성공주의와 번영주의 설교는 그 역사적 뿌리를 이 중세의 영광의 신학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번영의 신학은 신자가 축복을 받고, 교회가 양적으로 팽창하고, 신자가 하는 모든 사업이 잘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는 것으로 선포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속의 번영과 성공에서 자신을 드러내지 아니하신다. 역사적으로 중세에 있었던 십자군 전쟁, 성지 예루살렘을 이슬람으로부터 탈환하기 위한 십자군 원정은 당시 세속적인 성과를 거둔지는 몰라도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겠다는 영광의 신학 사고가 지배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 십자가 신학 - 바른 하나님 인식의 길

루터는 십자가 신학을 다음같이 정의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의 보이는 것, 그의 뒷면을 고통과 십자가를 통해서 보고 지각한다.” 루터는 출애굽기 33장 주석을 통하여 십자가 신학을 전개한다. 모세는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간구한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신다: “네가 나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의 얼굴을 보는 자는 살지 못하리라“(출33;20). 하나님은 모세를 바위 틈에 두시고 그의 영광이 지나가기 까지 모세를 그의 손으로 덮으신다. 모세는 하나님의 뒷면만을 보고, 그의 영광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의 뒷면을 보는 신학이다.

십자가 신학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신자의 십자가를 하나님 인식의 기준으로 제시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이 숨어 계신 처소, 즉 약하심, 미련함 속에서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인식하고자 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인간을 고난과 수난으로 부름 받은 자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이 십자가는 하나님 앞에 서는 인간을 무능화 한다. 인간이 스스로 무엇을 하는 대신에 오히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인간 속에 행하시도록 한다. 인간은 순수히 하나님의 공로와 은혜를 수용하는 자가 된다. 십자가 신학은 영광의 신학의 기준에 따르면 고난, 즉 악함과 미련함 속에서 하나님을 인식한다.

루터는 피력한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사역들로부터 하나님의 인식을 오용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은 다시 고난으로부터 인식되기를 원하며, 보이지 않는 본성의 지혜는 보이는 본성의 지혜를 통해서 폐기되기 원하신다.” 루터에 의하면 하나님의 계시됨과 십자가 속에 그의 감추심은 대립된다. 루터에 의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안에 진정한 신학과 진정한 신 인식이 있다. 십자가는 자연신학과 자연적인 에토스(ethos)의 자기의식을 깨뜨린다. 십자가는 인간의 성공이나 번영의식을 깨뜨린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 우리를 만나신다, 그래서 인간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기의 죽음으로 경험한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하나님의 지혜이다. 이에 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세상의 지혜에는 감추어져 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연약하고, 우둔한 것이 나타나 있다. 십자가 신학은 십자가에 달리신 십자가에 감추어진 하나님을 증언한다. 이것은 오로지 겸허하고 가난한 마음을 통하여 가능하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폐(die Verh?llung Gottes)이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능(die Ohnmacht Gottes)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은 직접적으로 계시되지 않고 역설적으로 그의 무능과 낮아지심 속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루터는 말하기를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진노 속에 감추어져 있으며, 하나님의 선물과 복은 십자가 아래, 말하자면 “불행과 재난” 아래 감추어져 있다. 하나님의 진리는 세상의 눈에는 거짓(L?ge)으로, 세상의 거짓은 진리로서 나타난다. 루터는 하나님은 세상에 대하여 악마처럼 다가온다.

십자가 신학의 사고에 의하면 하나님은 수천명, 수만명이 모여서 열광하고 설교자가 스타(star)처럼 청중의 환호성을 자아내게 하는 설교단에 계시기 보다는 인간적으로는 너무나도 초라한 소수의 무리들이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간절히 말씀을 듣는 세상적으로는 너무나도 초라한 설교단에 임재해 계신다. 설교자가 마치 황제처럼 청중들을 종교적 열광으로 몰아가고 번영과 성공을 나누어주는 설교단이 아니라 청결한 마음을 지닌 소수의 청중에게 재난과 어려움과 질병 가운데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진실한 설교단에 하나님은 임재해 계신다.

III. 십자가적 신학의 설교 착상

오늘날 한국교회가 사회적 신뢰를 받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가 한국교회가 이기주의적 영성에 사로 잡혀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이러한 이기주의적 영성은 번영주의와 성공주의라는 세속주의 설교에 감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설교가 십자가 신학적으로 새롭게 갱신되어야 한다. 번영과 성공을 지향하는 영광신학의 사고에서 나눔과 헌신을 지향하는 십자가 신학의 사고로 나아가야 한다. 십자가 신학의 설교 착상은 다음과 같이 특징지울 수 있다.

1. 인간은 고난을 통하여 신에게 나아간다.

뉴욕타임스(NYT) 2008년 12월호에 의하면 미국 뉴욕주 맨해셋의 셸터 록 교회는 갑자기 불어난 신규 교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접는 의자 100개와 설교를 시청할 수 있는 TV 모니터가 설치된 소예배실을 급히 마련했다. 교인이 6000명가량이던 시애틀의 마스 힐 교회도 지난 9월 이후에만 1000명이 새로 교인 등록을 했다. 뉴저지(New Jersey)주의 라이프 크리스천 교회는 교인들의 기도 요청이 평소의 2배가 됐는데 대개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거나 얻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미국인들이 월가의 금융부도로 인한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고통을 당하면서 안식을 찾으려고 몰려들고 있다. 이들 교회는 어려운 경제 상황에 걸맞게, 설교 제목도 '재정적인 평화' '불안한 시대의 신앙' 등으로 바꿔 교인들에게 실용적인 조언을 주려고 애쓴다고 NYT는 보도했다. 2009년 4월 뉴욕의 양키스 스타디움에서 조엘 오스틴이 설교하는 소망의 집회에 4만7천명이 미국인들이 모인 것도 어려운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다. 오늘날 한국사회도 미국 월가의 금융위기에서 시작된 세계적인 불황기 속에서 경제적인 어려움의 한파를 맞고 있다. 한국교회는 이러한 사회적 현실 속에서 진정한 소금과 빛의 사명을 다해야 한다. 먼저 소금이 되어야 한다. 교회는 번영의 복음 보다는 십자가의 복음을 증거해야 하겠다. 고난을 통한 인간 내면의 성숙과 하나님과의 만남을 제시해주어야 한다. 경제적인 어려움 등 각종 어려운 고난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부르시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고난 속에서 인간은 자기의 한계를 깨닫고 초월자에게 나아갈 수 있는 마음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인간은 이기심의 극복, 자기와의 선한 싸움. 고난을 통해서 성화된다.

성경은 세상의 번영이란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또한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그에게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 제 몫을 받아 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전 5:19). 우리가 누리는 삶이 그 분의 선물이 아니라 나의 욕망과 이기적인 동기에 지배된다면 우리의 생활은 변혁되어야 마땅하다. 우리의 번영과 성공이 하나님의 선물과 은혜가 아니라 나의 노력의 대가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과 허영과 으스댐의 마음에 지배받는 것이다. 성경은 허영을 드러내는 치장을 예리하게 비판하고 있다: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벧전 3:3-4). 첨단기술을 자랑하는 포스트모던 시대는 우리로 하여금 이웃을 경쟁의 상대로 바라보도록 왜곡해왔다. 진부한 차림새를 보이는 상대방을 무시하는 우리의 마음은 번영주의적 ‘왜곡’을 증명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세속적 번영과 성공을 이룬 것이 바른 신앙의 표징으로 생각하는 것은 세속의 풍습에 물드는 것이다. 한국교회 강단은 번영과 성공을 찬양하는 영광신학의 설교를 바꾸고 고난과 인내와 나눔의 가치를 강조하는 십자가 신학의 설교를 해야 한다.

3. 이웃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자기 희생(고난)이다.

초창기 한국 기독교는 우리 사회에 들어와 하나님 앞에서 양반과 쌍놈이라는 사회적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하나님 안에서 주인과 종, 남자와 여자, 노인과 어린이의 벽을 허물므로써 봉건사회의 구습을 타파하는데 공헌을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는 새로운 종교적 계층을 형성하고 신자들의 이해관계만을 챙기는 인상을 줌으로써 사회적으로 기독교신자들이 이기주의적이라는 냉소를 받는다.

이제 한국교회는 초창기의 대사회적 헌신과 지도자적 마음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교회의 존재는 이웃과 타자를 섬기는 것이다.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타자의 유익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무속적 기복신앙의 극복이다. 하나님을 소원 성취의 수단으로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구속하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옥합을 깨뜨린 여인처럼 나의 귀한 것을 주님에게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 헌신은 이웃을 위한 헌신과 사랑으로 나타나야 한다. 2008년 미국 발 금융위기로 시작된 세계적 경제적 위기의 상황 속에서 오늘날 설교는 가진 자가 덜 가진 자와의 나눔으로 표현되도록 십자가 신학적 설교가 요청된다.

4. 기독교 설교의 핵심은 십자가이며, 십자가 정신이란 이웃을 위하여 자기를 내어줌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당하고 있는 고난을 대표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다. 십자가 사건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신자는 칭의의 신앙에서 성화의 신앙으로 성숙해야 한다. 소유의 신앙에서 섬김의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이 십자가는 내가 있는 처소의 어려운 문제를 위하여 나의 몫을 다하는 신앙이다.

본회퍼는 말하는 바 같이 기독교 신자는 그리스도 같이 이 세상에서 자신만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타인을 위한 존재이다. 그리스도는 선한 사마리아인으로서 강도만나 죽게된 사람을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기름으로 상처를 닦아주고 부비를 주면서 그를 살려 주었다. 오늘날 기독교 신자의 진정한 삶의 자세는 이 어려운 시대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여기에 개혁교회의 설교는 십자가 신학으로 정위 되어야 한다. 자기의 뜻을 성취하기 위하여 헌금을 드리고, 하나님 앞에 애걸하는 기독교인이 아니라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성숙한 신자가 되도록 설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십자가 신학의 설교는 무속신앙적 사고방식의 변혁을 말한다. 하나님을 내 뜻에 맞도록 변화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뜻과 삶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성찰하고 변화되는 사고방식이다. 십자가 신학적 설교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갖도록 변혁적 설교를 해야 한다.

V. 번영주의 세계관에 대결하는 십자가 신학적 설교

오늘날 개혁교회의 설교는 물질주의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 올바른 개혁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한 설교를 해야 한다. 이를 위한 신학적 착상은 영광의 신학을 거부하고 십자가 신학의 착상에 입각한 설교이다. 설교는 문화변혁의 정신을 가져야 한다. 복음의 말씀을 가지고 오늘의 문화를 비판적으로 해부해야 한다. 개혁교회는 오늘날의 번영주의 세계관의 문제를 십자가의 말씀으로 드러내고 설교 자체는 십자가 영성에 기반해야 한다.

1. 번영과 성공주의 세계관과의 대결은 하나님 말씀의 선포

오늘날 한국교회의 침체는 바로 이러한 물량주의적 성공주의적 설교가 그 한계에 도달하여 사회적으로 불신을 받고 있다. “한국교회 부흥이 정체된 원인은 외부에 있다. 경제성장이 가속화되면서 교회도 물량주의에 합류했고 사회, 문화, 정치 전 분야에 걸쳐 리더십을 발휘하던 교회는 경제와 소비중심의 시대인 2000년대 들어 바른 소리를 내지 못한 채 사회적 매력을 잃고 말았다.” 오히려 오늘날 한국교회는 부정과 타락에 둔감한 모습까지 보인다. 고속 성장을 거듭하는 목회자들을 시기하며 ‘이단’ 정죄를 밥 먹듯이 하다가도 사회법에서조차 파렴치하다고 판결받은 비윤리적인 지도층에 대해서는 계도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스스로 자정 능력을 포기한 채 ‘하나님의 기준’을 버리고 ‘세상의 기준’인 돈과 권력, 명예를 따라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제 한국교회 설교는 십자가의 말씀을 가지고 번영과 성공을 구가하는 세속주의적 세계관과 대결해야 한다. 그리고 희생과 헌신을 실천하고 열매를 맺는 십자가 신학적 세계관을 선포해야 한다.

2. 십자가 영성이 기반된 설교

십자가 신학의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십자가 영성을 함양해야 한다. 십자가 영성이란 하나님 주권적이며, 고난에 동참하며, 불우한 이웃과 나눔과 타자에 대한 사랑이다. 교회가 이러한 영성에 기반할 때 사회를 향하여 존재가치를 실현한다. 그렇지 아니한 설교는 능력없는 수사학에 불과한 설교이다. 회중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기 위해서 먼저 말씀으로 묵은 땅인 돌짝 밭을 갈아 엎어야 한다. 여기에는 말씀으로 죄에 대한 지적(나태와 안일, 자기애, 이기심, 교만, 자만 등)을 해야 한다. 그 후에 비로소 용서와 평안과 소망과 평강을 말씀을 전할 수 있다. 내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게세마네의 주님의 영성이다. 그리고 기복적으로 이기주의적 영성이 아니라 자기를 모든 사람들의 대속으로 헌신하는 이타주의적 영성이다.

3. 청중의 인기에 연연치 않고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설교

오늘날 포퓰리즘 설교로 오염된 한국강단에는 사도바울의 설교 자세를 되찾아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보다는 청중들의 귀를 즐겁게 하기 원하여 설교로 변질되는 현상을 극복해야 한다. 어떤 재미있는 이야기로 회중들의 관심을 끌 것인가 어떤 성공철학과 축복 사례를 소개하여 회중들의 마음을 흥분시킬 것인지 하는 경향에서 돌아서야 한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네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음이라”(행20;27).

오늘날 하나님이 이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전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무엇인지 무릎끓고 기도하며 본문에 대한 깊은 연구와 해석에 집중하려는 자세가 요청된다.

누가의 사도행전은 초대교회 성장에 있어서 사도의 가르침이 주도적 원리였다고 말한다: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행2;42-47). 사도의 가르침은 오직 구속의 메시지였다. 다음으로 교제하며, 기도에 전혀 힘썼다. 사도들은 복음의 수용에 앞서 듣는 자들의 죄에 대한 회개를 강조했다. 죄를 깨닫기 위해서는 율법이 전해져야 한다. 루터는 말한다: “율법의 방망이로 영혼이 상처를 받은 다음에 은혜의 기름이 유효하다.”그래서 루터는 율법 속에 복음이 있고, 복음 속에 율법이 있다고 말했다.

종교개혁자 칼빈의 설교는 철저한 강해설교였고 구약의 배경으로 한 복음의 설명이었다. 그가 3년간 스트라스부르그(Strassburg) 피난민 교회를 섬기다가 제네바 성 삐에르 강단에 복귀하였을 때 그의 설교 본문은 3년전 설교하였던 본문 바로 그 다음 본문이었다. 그의 설교에는 웃기려 짜깁기 한 예화나 주관적 시사해설이나 인간적 성공과 축복을 내세운 포퓰리즘적 요소(popularistic elements)가 없었다. 칼빈의 설교는 성경 강해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를 증거하였다.

맺음말

오늘날 한국교회 설교는 미국의 실용주의적 번영신학에 기초한 설교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복음의 본질인 십자가의 헌신과 희생의 정신이 오늘날의 시대정신인 번영과 행복으로 바뀌며, 기독교 복음이 오늘날의 상업주의 내지 마케팅과 결부되고 있다. 이것은 복음의 변질이다. 한국교회는 양적 성장 중심의 번영설교에서 말씀중심의 질적 성장으로 그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번영주의와 영광신학에 입각한 인본주의 설교에서 말씀중심의 십자가 신학에 입각한 신본주의 설교로 바꾸어야 한다. 강단의 설교는 회중들이 듣기 좋아하는 소비자 위주의 설교가 아니라 이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해야 한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의 실용주의적 세계관과 결별하고, 십자가의 말씀에 기초한 헌신과 충성의 세계관을 정립해야 한다. 강단설교가 그 패러다임을 미국에서 모방한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번영주의 사고방식의 설교에서 말씀중심의, 십자가신학적 사고방식의 설교로 바꾸어야 한다.

<한글초록>

1980년대 구가하던 번영의 신학이 최근 미국에서 다시 붐을 이루고 있다. 미국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는 소위 메가처치(megachurch)의 설교흐름은 ‘번영의 신학’(Theology of Prosperity)에 기초하고 있다. 번영신학은 부자 되기 원하는 성도들의 구미에 맞는 설교를 제공한다. 여기서 복음은 구원의 복음에서 실생활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는 삶의 실용적인 기술로 변모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형교회들 역시 이같은 흐름을 피할 수 없이 영향을 받고 있다. 하나님의 복은 세속적 지위와 재물의 번영으로 나타난다고 설교하고 있다. 교회의 제직 임명이 돈과 관련된 것은 한 두 교회의 특이한 사례가 아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대사회적 영향력을 상실하고 세상으로부터의 비판을 넘어 혹독한 비난의 대상으로까지 전락하면서 성도들도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 사람들의 비위에 맞춘 값싼 설교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고도 회개할 줄 모르는 간 큰 예배자를 양산했다.“내 기도만 들어주시는 하나님이 내 죄만은 용서해주실 것”이라는 성도들의 비뚤어진 신앙은 헌금으로 면죄부를 사고 헌금으로 축복을 받는 웃지 못할 상황을 만들었다.

번영과 성공을 신앙의 기준으로 보는 번영주의는 신학적으로 이미 중세를 지배한 스콜라의 영광신학에서 나타나고 있다. 영광의 신학은 하나님을 인식하는데 “영광과 능력”(Glorie und Macht)을 기준으로 내세운다. 영광의 신학은 인간을 자기 공로를 내세우는 교만으로 이끌고 간다. 종교개혁자 루터는 세속적인 번영과 성공에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한 중세 스콜라 신학을 영광의 신학이라고 부르면서 이에 대한 대안으로 십자가 신학을 제시하였다.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의 보이는 것, 그의 뒷면을 고통과 십자가를 통해서 보고 하나님을 인식한다. 십자가의 신학은 하나님이 숨어 계신 처소, 즉 약하심, 미련함 속에서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인식하고자 한다.

십자가 신학의 설교 착상은 다음과 같은 영성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인간은 고난을 통하여 신에게 나아간다. 인간은 이기심의 극복, 자기와의 선한 싸움. 고난을 통해서 성화된다. 이웃에 대한 사랑과 헌신은 자기 희생(고난)이다. 기독교 설교의 핵심은 십자가이며, 십자가 정신이란 이웃을 위하여 자기를 내어줌이다. 물질주의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 속에서 개혁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한 설교가 요청된다. 이를 위한 설교의 신학적 착상은 영광의 신학을 거부하고 십자가 신학의 착상에 입각한 설교이다. 설교는 문화의 옷을 입어야 한다. 복음을 오늘의 언어를 사용하여 전달해야 한다. 오늘날의 번영주의 세계관의 문제를 십자가의 말씀으로 드러내고 설교 자체는 십자가 영성에 기반해야 한다.

주제어 : 영광의 신학, 십자가 신학, 개혁주의 설교, 십자가의 말씀
Key-words: theology of glory, theology of cross, reformed theology, the Word of cross.

<Abstract>

The Preaching in the Theology of Prosperity and The one in the Theology of the Cross

The prosperity theology spreading wide in 1980s experiences boom again recently in USA. The streams of preaching of the so-called megachurch influencing the American society is based on the theology of prosperity. The prosperity theology provides the preaching tastes the appetites of the members who want to become rich. The Gospel is here changed from the one of redemption into the pragmatic technic of living to guide the actual life to the desirable direction.

The megachurches in Korea have been affected, influenced not avoiding this trends. It is preached that God's blessing appears as a prosperity of secular position and goods. It was not in the specific cases of the one or two churches that the appointment of churches staffs were linked to the moneys. Korean church lost the power of social influence, became an object of the harsh blame beyond the criticism from the society. The church members are decreasing rapidly. The cheap preaching adjusted to the appetite of the congregation produced the worshippers with the big liver who do not know to repent, while disobedient to the command of God. The perverted faith of the christians that the God hearing only my prayer shall forgive also my sins made the comic situation of buying the indulgence and blessing with money.

The prosperitism to view the prosperity and success as the criterion of the faith had already appeared theologically in the scholastic theology of glory dominating the medieval age. The theology of glory, suggesting in the cognition of God the glory and power as criteria, leads the humans to the superbia of affirming his own works. The Reformator Martin Luther suggested the theology of cross as the alternative, calling the scholastic theology the one of glory. The theology of cross sees and cognizes through the suffering and cross the back side of God, namely, the visible side of God. It indirectly cognizes the God in the hidden side, namely the weakness and the foolishness.

The idea of preaching in the theology of cross is characterized as follows: Human comes through suffering into God. Human is sanctified through the overcoming the egoism, good combat with himself, and suffering. The love and sacrifice toward the neighbor is the self-sacrifice. The core of christian preaching is the cross and the spirit of the cross is the giving oneself to neighbors. In the postmodern age in which the materialistic worldview is ruling, a preaching based on the reformed worldview is needed. The theological idea of preaching for it is to deny the theology of glory and to conduct the preaching based on the theology of cross. The preaching put on the clothes of the culture. One needs to communicate the Gospel in the languages of today. The preaching should be based on the spirituality of cross exposing with the Word of the cross the problem of the worldview of prosperitism.

Yung Han Kim (Soongsil University Graduate School of Christian Studies)

<참고문헌>
Althaus, Paul, Die Theologie Martin Luthers, Gerd Mohn: Guetersloher Verlagshaus, 1963
Robertson, Pat, The Secret Kingdom: A Promise of Hope and Freedom in a World of Turmoil (Nashville: Nelson, 1983)
Hunter, James D., Evangelicalism: The Coming Generation, Chicago: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87)
von Loewenich, W., Luthers Theologia crucis, 1929, 4. Aufla. 1954
Martin Luther. The Man and His Work, trans. by Lawrence W. Denef M, Minneapolis: Augusburg Publishing House, 박호용 역, 마르틴 루터, 그 인간과 업적, 성지출판사, 2002,,
김주환, 마르틴 루터의 삶과 신학이야기, 대한기독서회, 2002,
Sweet, Leonard, "A New Reformation: Re-Creating Worship for a Postmodern World," in: Experience God in Worship (Loveland: Group, 2000)
, Postmodern Pilgrims, 『영성과 감성을 하나로 묶는 미래교회』, 김영래 엮, 서울: 좋은 씨앗, 2002
Graham, Preaching to a Postmodern World, 『포스트모던 시대의 설교전략』최종수 엮, 서울: 한국 기독교연구소, 2006
Kimall, Dan, Emerging Church, 『시대를 리드하는 교회』서울: 이레서원, 2007
4인의 설교자들이 강조하는 이 시대에 필요한 설교, 한국교회여, 말씀 강단에 십자가 복음을 세워라“
08.09.23 오후 8:42;44, 표성중 기자(kodesh21@igoodnews.tv
곽선희 목사 “개신교인 감소, 목사들이 공부 안해서” 워싱턴DC 교역자세미나서 설교 패러다임 전환 강조 [2008-03-29 07:48] 워싱턴=조요한 기자 john@chdaily
김의환, “한국교회 강단 어떻게 개혁 할 것인가?. 하나님의 메시지 바르고 능력있게 전함이 우선.” 교회연합신문 제768호 , 2009년 3월 15일 8면
정일웅, 한국교회와 실천신학, 이레서원, 2002
주승중,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의 설교와 목회,” 『한국교회 목회의 미래』, 숭실대학교 제 17회 전국 목회자 세미나 자료집, 2009년 2월, 212-224
마이클 호튼,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나침판, 2001,
은준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포럼서 발제 예정 [2007-09-08 17:00], 크리스쳔 투데이
인간의 불황은 신의 호황? 실업·파산 탓에 교회 등 인기… "안식 찾고 싶다" 이용수 기자 hejsue@chosun.com 입력 : 2008.12.25 03:17
영성없는 집회는 ‘쇼’, 하나님 임재 있어야”[인터뷰] 20주년 맞은 오륜교회 김은호 목사 [2009-02-25 07:10]송경호 기자 khsong@chtoday.co.kr
타임지 최근호, 번영의 복음 놓고 찬반논쟁 하는 미국기독교계 소개. 성도의 물질적 필요를 채우는 하나님 VS 영적인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 [2006.12.11 오후 4:04:55], 윤영호 기자 [yyho@igoodnews.net]
21세기 한국사회와 교회를 말한다-축복과 경영, [2006.12.11 오후 5:35:57], 윤영호 기자 [yyho@igoodnews.net]
값싼 축복과 면죄부를 팔아 얻은 성장, 한계에 이르다. [2007.02.15 오후 4:25:18], 이현주 기자
프레드 크레독, “출석을 부를 때,” 『당신의 설교는 창조적 입니까?』성종현 역, 서울: 그루터기 하우스, 2001,

김영한 교수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예장뉴스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많이 본 기사
1
"한국교회 진단과 대안" 정성진 목사 초청 강연회
2
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 교수 시국성명서 발표
3
이찬수 목사, 정말 아픈가?
4
102회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대한 긴급 제안서
5
김동호 목사 이미 은퇴한 목사아닌 가?
6
“인성검사 통과 안 되면 목사 안수 못받는다”
7
명성교회 후임 청빙위원회 발표
8
장신대 김철홍 교수 글에 대한 학생들 입장
9
개혁하는 교회 탐방(거룩한 빛 광성교회)
10
원주제일교회 성도들 주일 날 상경 시위
신문사소개후원하기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성동구 성수동 성덕정 17길 10 A동 202호   |  전화 : 02-469-4402  |  행정 : ds2sgt@daum.net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서울 아02054  |  발행인 · 편집인 : 유재무 |  대표 : 이명남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 진
Copyright © 2011 예장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pck-goo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