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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식의 현대강단보는 것으로 살지 않습니다(고후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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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4.19  10: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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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는 것으로 살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7절)

/ 홍인식 목사(현대교회)
/ 일 시: 2012년 4월 15일 오전예배(부활 후 두 번째 주일)

성서정과를 잠시 멈추면서

지금까지 저는 여러분들에게 성서정과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왔습니다. 성서정과를 중심으로 하는 설교는 요즘 많이 권장되는 설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을 중심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목회적 상황이서로 다른 곳에서 일률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알맞은 균형을 이루면서 성서정과의 사용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부터 저는 10여 차례에 걸쳐서 믿음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것은 금년도 우리교회의 목회 표어인 “예수님 따르기”의 가장 기본적인 지침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른 다는 것은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교회는 단순한 사회의 섬김 공동체와는 구분되어집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임을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간다고 하신 말씀처럼 우리의 삶의 기초는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의 원천인 믿음회복 운동이야말로 우리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직 현상과 결과만을 중시하는 현 시대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오히려 원천으로 돌아가는 신앙운동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고린도 후서 5장 7절의 말씀인 “우리는 믿음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이지, 보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Vivimos por fe, no por vista; We live-walk- by faith, not by sight)를 중심으로 해서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교회는? 일반적으로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의 모임이라고 정의되어 왔습니다. 이 말을 좀 더 확장해서 생각해 보면 교회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를 말하게 될 때 반드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모든 모임은 그 모임의 존재목적이 있고 존재기반이 있게 마련입니다. 정부가 그렇고 모든 기관들이 다 그렇습니다. 모든 단체는 그 존재목적과 기반에 따라서 운영하는 방법과 방침들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단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행동거지도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존재목적과 존재기반이 믿음에 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교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최근 교회를 비판하는 일들이 무척 많아 졌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많은 비판들의 내용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오늘의 교회가 존재기반을 상실함으로부터 오는 것이었습니다. 교회가 다른 단체와 비교해서 다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총회장 선거를 해도 금권 및 부정선거가 성행하고 교회 내에서도 서로 권력다툼이 일어나고 비열한 비방들이 난무하고. 기업경영 방식이 그대로 적용되고. 도대체 다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교회가 존재기반인 믿음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라는 존재기반이 상실되어지니까 세속적인 기반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를 통하여 성도의 교제가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교회를 통하여 여러 가지 정보교환이 이루어지고 서로 도움을 베푸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본질적인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현상들은 믿음의 본질을 회복했을 때 나타나는 믿음의 열매들이고 구체적인 표현들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던 진정한 믿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무엇이고 믿는 이들은 누구입니까?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성서의 말씀인 고린도후서 5장 7절은 이에 대하여 간결하면서도 매우 명확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이지, 보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Vivimos por fe, no por vista; We live walk by faith, not by sight)

RSV 번역은 살아간다는 것을 walk 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중심축으로 해서 걸어간다는 것입니다. 교회와 믿는 이들은 자신의 삶의 중심축을 믿음에 두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믿는 이들의 중요한 삶의 모습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보는 것을 바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저는 여러분들과 함께 몇 주 동안 어쩌면 우리가 가장 잘 알고 있고 기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삶을 정립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바탕으로 예수님을 따라 걸어가는 공동체의 특징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들이 오늘 우리 교회와 교우들 사이에서 발견되어 지고 있는 가를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성숙입니다. 자라남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삶은 한계가 분명합니다. 우리가 보는 눈의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자람을 멈춘 사람들입니다. 자람을 멈춘 사람들은 결코 하늘의 큰 뜻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위대한 스승인 다석 류영모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현상 속에서 산 우주가 지니고 있는 생명의 율동을 느껴야 한다. 사람은 한정된 곳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정 없는 곳에 뜻이 있다. 그러므로 하늘을 쳐다보며 우주에서 생명의 고동을 느끼면서 살아야 한다”

믿음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은 믿음이라고 하면 어떤 고정된 개념이나 생각을 변함없이 지켜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변화가 있으면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한국교인들의 문제 중의 하나가 이처럼 진리 혹은 믿음을 고정(固定)적이고 정체(停滯)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성서번역에 대한 생각들입니다. 개신교와 카톨릭교가 공동으로 성서를 번역하였습니다. 그것이 공동번역입니다. 공동번역 작업이 한창 이루어질 때 어떤 유력한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 이 망할 놈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고쳐! 이 천벌 받을 놈들!” 이라고 호통을 쳤습니다. 표준 새번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진리와 믿음을 고정적이고 정체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개역성경으로 말하자면 이런 우스운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누가 개역성경을 번역했는가? 라는 질문에 “토플 시험 보면 떨어질 한국 사람들과 한글시험 보면 떨어질 미국사람들이 합작해서 만든 것이다”라고 대답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정체적이지 않습니다.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넓고 광활한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도록 해 줍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저 언덕 너머에 있는 넓은 세계를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좁은 나의 세계를 벗어나서 성숙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믿음과 진리는 유동적이고(변화하고) 역동적(상황에 민감)임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믿음은 보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를 향한 진보임을 깨닫게 됩니다. 종교라는 말을 라틴어로 religio 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옛 것에 붙들어 매둔다’ 라는 뜻입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갑니다. 종교인으로 남는 사람들은 보는 것을 바탕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늘 옛 세계만을 그리워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종교인을 넘어서서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늘 자라납니다. 늘 변화하고 역동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자신의 제자이며 동료인 디모데에게 말합니다.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물리치십시오.(...) 이 이들을 실천하고 그것에 전심전력을 다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대가 발전하는 모습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나게 하십시오.”(디모데전서 4:7, 15)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는 바로 진리와 믿음을 고정적이고 정체적인 것으로 보는 당시의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러한 생각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세계를 향하여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라고 말합니다.

우리 교회는 믿음을 세워가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숙의 정신, 발전의 정신, 진보의 모습을 회복하겠다는 것입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의 모습, 발전해 나가는 모습을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는 공동체로 만들어나가야 할 것입니다. 믿음의 공동체의 특징은 성숙한 자라남입니다.

믿음의 공동체의 특징은 모험입니다. 도전입니다.

보는 것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전하지 못합니다. 모험할 줄 모릅니다. 그들은 오늘의 삶에만 만족하고 다른 것들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보이는 것만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면서 살아갑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히브리 민족들은 이제 가나안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들은 각 지파에서 한 명씩 정탐꾼을 선발합니다. 얼마간의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는 서로 달랐습니다. 열 사람은 가나안 땅에서 네피림의 자손을 보았다고 하면서 두려움에 가득 찬 보고를 합니다. 가나안 점령이 불가능함을 보고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그 땅을 점령합시다. 우리는 반드시 그 땅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라고 보고합니다. 같은 상황을 보고 왜 보고가 서로 달랐습니까? 어디서 차이가 나는 것입니까?

그 차이는 보이는 것을 바탕으로 사는 것인가 아니면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것인가의 차이입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전적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그들을 도와주신다는 확신 속에서 어려움을 향하여 도전장을 내밉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큰 족적을 남겼던 수많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의 흐름을 바꿀 수 있었습니다. 성서에서도 아브라함이 우리의 믿음의조상이라고 불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모험 정신이었습니다. 그의 도전적인 삶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를 향하여 나아가는 도전적인 삶에 대한 용기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떠나라’는 명령을 듣고 주저함 없이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떠났습니다. 히브리서는 그 모습을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분깃으로 받을 땅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였지만 떠난 것입니다 ”(히브리서 11:8)

오늘 우리의 상황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을 바탕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당황하지 말고 오히려 도전적인 모습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위축된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의 열림을 확신하면서 모험을 하고 도전적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험과 도전은 무모함이 아닙니다. 우리의 개인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전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험과 도전은 이 땅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모험과 도전입니다. 믿음을 우리로 하여금 용기를 갖게 만듭니다. 믿음을 세워가며 예수님을 따라가는 공동체는 바로 하나님의 세계를 향한 도전과 모험의 정신을 회복하고 바로 세우야 합니다.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면서 모험과 도전의 정신을 회복하는 우리 교회와 교우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믿음의 공동체의 특징은 의연함입니다. 품위의 회복입니다.

보이는 것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상황의 변화 앞에서 당황합니다. 의연함을 잃어버립니다. 당장 죽을 것 같이 난리입니다. 보이는 것을 바탕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인내와 참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혼란함이 없습니다. 당황함이 없습니다. 흔들림이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어떤 상황의 변화 앞에서도 의연함과 품위를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성서의 인물 중에서 품위 있는 삶의 모습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람으로 요셉을 꼽는 것에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한 여자의 유혹 앞에서도 그는 의연함을 잃지 않았습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혀서도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하는 등 의젓함과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성서의 인물 중에서도 이처럼 품위 있는 사람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의 생애의 기록에서 어려움에 처해 당황하거나 호들갑을 떨고 울고불고 죽겠다고 한 사실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요셉은 품위의 신앙인이었습니다. 요셉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갔기에 그러한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오직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사람만이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고 의연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공동체는 이처럼 믿음의 품위를 세워가는 공동체입니다. 오늘 우리는 믿는 이들로서 품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살아간다는 평가를 받는 품위 있는 신앙인들이고 품위 있는 교회입니까?

예수님을 따라가는 공동체는 의연함을 보여줍니다. 품위 있는 noble 삶을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믿음을 세워가는 공동체가 되자고 하는 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살아가는 요셉과 같은 품위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공동체가 되자고 하는 것입니다.

나가면서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감으로서 항상 자라나는 성숙함을, 하나님의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모험하는 초심을,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림이 없는 의연함과 품위를 세워 나가며 예수님을 부지런히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이 상실되는 오늘의 현실에서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도록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믿음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이지, 보는 것을 바탕으로 삼아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Vivimos por fe, no por vista; We live-walk- by faith, not by s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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