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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식의 현대강단개선문, Benz 그리고 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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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5.10  08:3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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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선문, Benz 그리고 나귀


본문말씀: 마가복음 11장 1절부터 11절까지

성서정과: 이사야 50:4~9a, 시편 118:1~2, 19~29, 빌립보서 2:5~11

 오늘은 교회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 사건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실 때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였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사실은 종려주일이라는 말보다는 고난시작 주일이라는 말이 더 어울리지 않나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서정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구약에서는 먼저 이사야 50:4~9a(묵묵히 고난을 참아내는 고난 받는 종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시편 118:1~2, 19~29(주께서 하신 기이한 일을 찬양합니다.) 신약에서는 오늘의 설교본문인 마가복음 11장 1절부터 11절까지입니다. 서신서는 바울의 빌립보서 2:5~11(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을 것을 말합니다.)입니다. 오늘의 성서정과는 우리의 주님 되시고 왕이 되시는 예수님이 어떤 삶을 사셨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주님이시며 왕이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의 태도가 오늘 우리 주위에 있는 주님들과 왕들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가를 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선문과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

개선문(凱旋門, Triumphal Arch)은 대체로 어떤 정복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황제나 장군을 전쟁터에서 승리해 돌아오는 황제 또는 장군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문을 말하는 것인데 일반적으로는 개인 또는 국민이 이룩한 공적을 기념할 목적으로 세운 대문 형식의 건조물을 말합니다.

주로 로마 시대에 많이 건축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탈리아에서 이러한 개선문을 가장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개선문에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전쟁이고 또 하나는 승리라고 하는 큰 업적입니다. 전쟁을 하여 큰 업적을 이룬 사람을 화려하게 맞이하는 의미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순절,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해 보는 기간의 마지막 주를 보내면서 오늘 우리는 위에서 말한 개선문을 연상케 하는 본문을 접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기록은 단순합니다. 예수님의 일생의 마지막 기간에 주님은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십니다. 예수님이 성으로 들어오자 사람들은 주님을 열렬히 영접합니다. 마치 전쟁애서 이기고 돌아온 장군을 맞이하듯이 그들은 열광합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하면서 환영하는 장면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어떤 교회 전통에서는 오늘의 장면을‘승리의 입성’혹은 ‘왕의 입성’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개선문과 성공적 삶

오늘의 시대에 있어서 이런 개선문과 같은 환영의 잔치는 별로 없습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오고 다른 나라를 정복함으로서 영토를 넓힌 사람들에 대한 환영식은 별로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의 시대도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개선하는 로마 시대의 장군들을 환영했던 모습처럼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한 열렬한 환영을 보내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 시대에서 오직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만이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찬사를 받았듯이 오늘도 오직 일단 성공하고 난 사람들에 대한 찬사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개선문을 통하여 화려하게 입성하기 위해서는 어찌되었든 성공하고 보아야 한다는 가치관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이렇듯 오직 성공한 사람만이 대접을 받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오직 무엇인가를 이룩한 사람만이 개선문으로 통과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는 이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까? 예수님도 오늘의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는 사건을 여느 로마의 장군처럼 말을 타고 승리의 입성으로 생각하고 계셨을까요?

 새끼 나귀를 타심

저는 일주일 내내 본문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저에게 떠나지 않는 질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 분은 걸어 들어오셔도 될 터인데(그리고 지금까지 걸어 다니셨습니다) 왜 무엇인가를 탈 것을 타고 들어오셨는가 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은 지금까지 우리가 복음서를 통하여 알아왔던 예수님의 평상시의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주님은 한 번도 무엇인가를 타보신 적이 없었습니다. 그 분은 늘 민중들과 삶을 함께 하셨고 그 자신이 민중의 삶을 떠나보신 적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먼지 나는 갈릴리 마을을 샌들 하나 신으시고 다니셨습니다. 주님은 샌들 하나 여분으로 가지고 다니신 적도 없으셨습니다. 그는 들판에서 잠을 자기도 하는 등 짐승도 새도 잘 곳이 있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 둘 곳 하나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의 그의 생애의 말기에 새끼 나귀를 타시는 행동을 하십니다.

왜 예수님은 이러한 행동을 하셨을까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예수님의 행동은 의도되었던 것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나귀타심의 돌출 나는 행동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요?

 제사장, 예언자 그리고 지혜자

이스라엘의 유대교내에서는 전통적으로 크게 세 가지의 오래된 전통이 있습니다. 제사장 계열의 전통, 지혜자 전통과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언자 전통이 그것입니다. 율법은 제사장 전통에서 간직한 것이고, 예언은 예언자 전통에서 간직한 것이고, 시, 역사, 지혜 등은 지혜자 전통에서 간직한 것입니다.

제사장 전통은 아론 시대 이후 세습되어지는 직책이었습니다. 그리고 늘 유대교의 핵심적인 위치에서 율법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입니다. 그러니까 제사장 전통의 근거는 율법에 있습니다.

이에 비해 지혜자 전통은 오랜 인생 경험과 전해져 내려오는 금언이나 속담이나 체험적 지혜로부터 비롯됩니다. 세상을 살다보니까 ‘이런 경험은 이런 교훈을 저런 경험은 저런 교훈을 주더라.’하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사신 인생의 선배들과 믿음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삶의 지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그 근거를 둡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이 그들이 하는 말의 권위의 근거입니다. 예언자들은 율법과 인간의 삶의 지혜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메시지는 매우 강력한 어조로 전달되었고 또 어떤 경우에는 상징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예언자들은 환상과 꿈을 보기도 합니다. 예레미야는 특별히 상징적인 행동을 많이 한 예언자로 유명합니다. 목에 멍에를 메고 다닌 행동은 쉬운 예이기도 합니다.

주님은 유대교의 이 세 가지 전통을 대변하고 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주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면서 유대교의 전통에서 나타나는 예언자들의 전통을 이어 받고 있습니다. 하늘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상징적인 행동을 보였던 예레미야와 같이 주님은 오늘 새끼 나귀를 타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당시 로마 인들에게 하나님의 강력한 메시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나귀 타심은 이러한 예언자들의 전통에서부터 나타나는 예언자의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예언자적 상징행위를 하시는 예수님

예수님은 이러한 예언자로서의 상징적인 행동을 통하여 자신의 예루살렘 입성은 로마 장군의 개선행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의 나라는 로마 황제의 나라와 전적으로 다른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은 걸어오시지도 않고 말을 타시지도 않은 채 엉뚱한 새끼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고 계십니다.

이런 행위를 통하여 예수님은 몇 가지 면에서 당시의 생각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계십니다. 첫째는 평화의 메시지를 가지고 전쟁의 메시지를 말하는 폭력적인 로마의 문화에 도전하고 계십니다. 둘째는 힘을 가진 자 만이 찬사를 받고 높은 사람만이 인정을 받는 당시 로마의 거짓된 평화(Paz Romana)에 도전하고 계십니다.

그 분은 새끼 나귀를 타고 들어오시면서 당시에 만연해 있던 폭력적인 문화와 성공문화 그로 인한 거짓 평화의 잘못된 모습을 드러내시고 계십니다. 새끼 나귀를 타신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그들이 생각하고 있던 힘, 성공, 경쟁, 시기를 기본으로 하는 나라와는 질적으로 다른 것임을 역설하고 계십니다.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실 때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요, 나의가 세상에 속한 것이라, 나의 부하들이 싸워서 나를 유대 사람들의 손에 넘어가지 않게 했을 것이요, 그러나 사실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 18:36) 라고 말씀 하셨던 것입니다.

 나귀 타신 예수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우리가 추구하고 있는 나라가 무엇인가를 성찰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가치관에 사로잡혀 삶을 살아가고 있는 가를 보아야 합니다. 말을 타고 의기양양하게 개선문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모습에 현혹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가치관에 사로잡히게 되거나 혹은 신앙을 우리로 하여금 말을 타고 늠름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개선문을 통과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오늘 새끼 나귀를 타시고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외면하거나 발견하지 못하고 놓쳐 버리게 될 지도 모릅니다.

오늘도 예수님은 새끼 나귀를 타시고 우리의 삶에 입성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이 세상의 가치관들을 향하여 도전하고 계십니다.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헛된 가치관들을 내려놓게 만드는 종려주일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세계로 인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이러한 예언자의 상징적인 행위들을 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상징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면 사회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벤츠타기와 상징적 행위

벤츠(람보르기니, 롤스로이스, 벤틀리 등등)라는 고급 자동차가 있습니다. 어쩌면 부의 상징 중의 하나 일 것입니다. 목회자가 벤츠를 타도되는 것일까요 아니면 타면 안 되는 것일까요?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렇습니다. 그 행위가 그 사회의 가치관과 문화를 인도할 수 있는 상징적인 행위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답변이 달라질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벤츠 혹은 기타 부의 상징을 인생의 최고의 가치로 삼고자 하는 소비와 물질 중심의 이 사회에서 한 목회자가 하나님의 나라는 그런 물질적인 소비력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떠한 상징적인 행위로 표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목회자나 교회가 사회에서 신뢰를 잃게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상징적인 행위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회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가는 예언자적인 상징행위가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문화와 종교의 심장부인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새끼 나귀를 타시는 예언자적인 상징행위를 보여 주십니다. 그 행위를 통하여 그 심장부의 문화와 종교가 하나님의 나라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말을 타고 의기양양하게 개선문을 통과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말을 타고 개선하는 로마의 문화에 젖어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신앙인 것처럼 착각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말을 타고 승리하여 장군처럼 개선문을 통과하는 것은 우리의 삶을 헛된 것에 매달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눈을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세상의 나라로 향하게 만들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시는 예수님은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많은 사람이 헛되고 일시적인 것을 찾아 헤매고 있을 때 우리로 하여금 진정한 생명이 풍요로운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게 될 것입니다.  

예수 닮기

2012년도 종려주일,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의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십니다. 혹시 우리는 벤츠를 타고 개선문을 통과 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가요? 그러나 예수님은 2012년 오늘에도 벤츠가 아닌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십니다. 벤츠로 상징되는 오늘 현대의 문화에 도전장을 내미시면서 오늘도 또 다시 그 분은 새끼 나귀를 타고 우리에게 오십니다.

주님은 자신 스스로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빌 2:6~7)

그 분은 자신을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겼고, 그의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셨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침을 뱉으면서 모욕하여도 그것을 피하려고 얼굴을 가리지도 않으셨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모욕을 당하여도 마음 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각오하고 모든 어려움을 견디어 내셨습니다. (사 50:6~7)

고난의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고 짊어지시려고 오늘도 우리의 삶에 오시는 예수님을 놓치지 않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번 종려주일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세상의 가치관을 하나님 나라의 그것으로 조금이나마 씻어 낼 수 있는 한 주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새끼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예언자적 상징행위를 반복할 수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에게 새 땅과 새 하늘의 희망을 주는 부활의 기쁨을 기다리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끼 나귀를 타시고 우리의 삶으로 들어오시는 그 분을 우리 삶의 가장 소중한 곳으로 모셔 들어 그 분과 함께 살아가심으로서 부활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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