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샘의 말씀 - 예장뉴스
예장뉴스
생각 나누기나는 설교다
솔샘의 말씀가까운 길(로마서 10:5-13)
정병진 목사  |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3.02.27  14:25:07
트위터 페이스북

                                 가까운 길

로마서 10:5-13

모세는 율법에 근거한 의를 두고 기록하기를 “율법을 행한 사람은 그것으로 살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에 근거한 의를 두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는 마음 속으로 ‘누가 하늘에 올라갈 것이냐’ 하고 말하지도 말아라. (그것은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끌어올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네게 가까이 있다. 네 입에 있고, 네 마음에 있다”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입니다. 당신이 만일 예수는 주님이라고 입으로 고백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으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믿어서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서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성경은 “그를 믿은 사람은 누구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고 말합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주님이 되어 주시고,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풍성한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수행의 길

불교에는 ‘무문관 수행’이란 게 있습니다. 비좁은 선방, 혹은 토굴이나 움막에 들어가 짧게는 몇달 길게는 수년간 두문불출하고 오로지 수행에만 정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단 무문관에 들어가면 무슨 일이 있건 일체 출입이 금지됩니다. 작은 배식구만 남겨두고는 밖에서 출입구에 못질을 하거나 아예 출입구 자체를 막아 없애버립니다. 그러다보니 심지어 병에 걸려도 홀로 끙끙 앓으며 견뎌야 한답니다.

지금은 사라졌으나 서울 도봉산의 천축사에는 70년대까지만 해도 이런 무문관이 있어 두 명의 승려가 무려 6년간 면벽수행을 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그 중 한명인 제선이란 승려는 그런 고행을 하는 이유를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라 밝혔습니다. 붓다 같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한 실력을 기르려 고행을 자처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지금도 무문관 수행을 하는 한국의 승려가 전국적으로 약 60여명이 있다고 합니다. 제선처럼 6년까지 길게 수행하는 사람은 없으나 지금 같은 시대에 그래도 그 정도 수행자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운 일입니다.

가톨릭도 봉쇄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하는 수도자들이 있습니다. 봉쇄 수도원은 한번 들어가면 죽을 때가지 나올 수 없는 곳입니다. 이 같은 봉쇄 수도원의 사계를 찍은 다큐 영화 <위대한 침묵>을 본 적 있습니다. 프랑스 알프스산 자락의 카르투시오 수도원의 일상을 담은건데 시종일관 대사가 거의 없습니다. 거기 수도사들은 침묵과 고독에 머무는 것을 그들의 ‘가장 중요한 지향과 소명’으로 여기며 하루 8시간씩 독방에 기거하며 기도합니다. “어찌 저렇게 사나” 싶을 정도 무척 갑갑해 보이기도 하지만, 신앙의 일념으로 일생을 바쳐 수도생활에 전념하는 그들 모습이 잔잔한 감동을 불러일으킵니다. 불교와 가톨릭에 이처럼 고행 수도의 전통이 있는 것과 달리 개신교는 수도원조차 매우 드문 실정입니다.

이현필 선생이 세운 동관원, 엄두섭 목사의 은성수도원, 디아코니아 자매회 같은 일부 수도회가 있지만 무문관의 면벽수행이나 봉쇄 수도원 수준의 고행을 하진 않습니다. 그 대신 동광원과 디아코니아 자매회의 경우 중증 장애인들을 돌보는 섬김의 사역을 열심히 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나 홀로 독방에 들어 앉아 수행하는 일보다, 이처럼 내 도움이 필요한 곳에 가서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더 중요한 수도생활로 본다는 점이 개신교 수도회의 특징이 아닌가 합니다. 불교, 가톨릭, 개신교의 수도 전통에 차이가 있는 까닭은 닮고자하는 신앙 모델과 지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령 개신교는 소외된 자들의 벗이셨던 예수님을 그 신앙의 중심에 두기에 고행의 수도생활보다 이웃사랑 실천에 관심이 더 많습니다. 반면 불교는 붓다의 고행과 해탈을 모델로 하기에 사회봉사보다는 수행이 더 우선입니다. 가톨릭은 성모 마리아, 사도 바울 또는 프란체스코를 비롯한 많은 성인을 모델로 독신생활을 칭송하고 중시한 결과 수도원이 자연스레 발전한 것으로 보입니다.

가깝고 먼길

각 종교마다 나름 궁극적 지향점이 있습니다. 불교는 해탈과 깨달음을 얻고자 하고, 기독교는 구원을 얻고자 하고, 유교에서 학문을 닦는 궁극적 목적은 성인(聖人)이 되는 데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이자 <성서조선>으로 잘 알려진 김교신 선생은 그의 책 <신앙론>에서 자신이 왜 기독교인이 되었는지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숭상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나이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志學), 서른 살에 섰으며(而立), 마흔살에 미혹되지 않았고(不惑), 쉰살에 천명을 알았으며(知天命), 예순에 귀가 순했고(耳順), 일흔에는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으나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從心)”고 말합니다. 김교신은 공자보다 최소 10년은 단축해 종심(從心)의 경지에 도달해보리라 작심하고 밤낮 열심으로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힘써봐도 이러다간 60세는 고사하고 80세에도 도달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어 점차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그는 한 청년 전도사에게서 귀가 번쩍 트이는 소릴 듣습니다. 전도사는 “굳이 70세까지 갈 필요도 없이 20살 청년이라도 기독교인이 되면 능히 종심(從心)에 이를 수 있다” 하였습니다. 김교신은 이때부터 성서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여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성서의 도덕률이 유교의 가르침보다 훨씬 심오하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가령 공자는 “의를 보고 행치 않으면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見義不爲無勇也)고 말하는데, 성서는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않으면 죄”(약 4:17)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다 기독교 복음의 초점이 ‘자아의 수양 발전’ 보다는 죄인된 자아를 부정하고 주님 앞에 항복하여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데 있음을 깨닫습니다. 아마 김교신 선생이 기독교 신자가 되지 않았다면 한학자로 평범하게 살다 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고 나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중요함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식민지 조국을 구하고자 전심전력하였습니다. 처음에는 기독교 복음이 공자의 가르침에 비해 그 완성에 도달하기 훨씬 간단하고 쉬워보였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애 전체를 걸어야 했던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네 입과 마음에

사도 바울은 로마서 9장부터 11장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의 운명이 어찌될 것인지를 다룹니다. 여기에는 그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동족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정이 크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그 열정은 눈먼 신앙과 잘못된 지식에서 비롯된 것이라 매우 위험하였습니다. ‘사랑의 열정’을 갖는 건 좋지만 방향이 잘못되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괜히 생사람을 잡게 됩니다. 전에 사귀던 아가씨의 어머니가 결혼에 반대한다고 살해까지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이미 그 아가씨도 청년에게서 마음이 떠난지 한참 지난 상태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입니까? 종교에서도 빗나간 신앙 열정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빚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바울 자신이 그 산 증인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자신이 “동족 가운데서, 동갑내기 또래의 많은 사람보다 유대교 신앙에 앞서 있었고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데도 훨씬 더 열성이었다”(갈 1:14)고 말합니다. 그 열성으로 교회를 몹시 박해하였고 아예 없애버리려 시도하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 같은 태도를 취해야 마땅하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주님 앞에 큰 죄였음을 뒤늦게 알고 자신을 죄인 중에서 가장 큰 죄인(딤전 1:15)이라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제보니 동족 이스라엘이 과거 자신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한 채 율법의 의와 이스라엘의 특권을 자랑했고 ‘자신들의 의’를 세우기에 여념없었습니다. 즉 이스라엘은 그들이 할례와 율법을 소유한 언약백성이라는 사실 자체만으로 마치 구원이 보장이나 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실천에는 뒷전이었고 그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 것들에 지나친 관심을 쏟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비판하실 때 “너희는 박하, 회향,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도 소홀히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마 23:23)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의 껍데기도 필요하지만 율법의 정신 곧 알맹이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흔히 “율법에 근거한 의”와 “믿음에 근거한 의”를 대립된 것처럼 이해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잘 살펴보면 꼭 그렇진 않다는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은 율법을 행하는 삶과 ‘진실한 마음과 온전한 믿음’이 함께 가야함을 가르칩니다. 말씀의 올바른 실천은 마음과 입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모세는 언약의 계명이 하늘이나 바다에 있는 게 아니고 “너희에게 아주 가까운 마음과 입에 있다”(신 30:14)고 하였습니다. 물론 사람은 때로 마음에 없는 행위를 할 수도 있으나, 마음과 행위를 하나로 합하여 실천할 때 거기에는 우리 삶 전체가 담기게 되어 폭발력을 갖게 됩니다.

구원의 열쇠

바울은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 입으로 고백하고 부활의 주님을 마음으로 믿었듯 그의 동족 이스라엘도 그렇게 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리하면 이방인들과 똑같이 하나님이 베푸시는 구원과 은혜를 맛보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내가 믿사오며’에 해당하는 라틴어 ‘크레도’(credo)는 본디 ‘내 심장을 바칩니다’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내 삶 전체를 그분께 바치겠다는 다짐이자 약속입니다. 바울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해 구원을 얻을 것”(롬 10:10)이라 했습니다. 이것을 단지 마음과 입의 고백일 뿐이라며 가볍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야말로 나의 주님이십니다.”라는 고백 한 마디만으로도 목숨을 바쳐야했던 시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저 높은 하늘이나 저 무저갱 같은 심연에서 죽을 고생을 다해 얻어야할 정도로 멀리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구원은 예수님을 부활하신 주님이시라 우리 마음과 입으로 믿고 고백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하였습니다. 긴 세월 아주 힘든 고행을 해야하는 것도 아니고 많은 발품을 팔아 야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부르며 우리 삶을 그분께 드리겠다는 진심어린 고백이 있으면 됩니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가르치는 구원의 열쇠입니다. 이 열쇠로 열면 하늘 문이 스르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 가운데 부활의 예수님이 주님이 되시고 구원의 길로 늘 인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많이 본 기사
1
“인성검사 통과 안 되면 목사 안수 못받는다”
2
김동호 목사 이미 은퇴한 목사아닌 가?
3
이찬수 목사, 정말 아픈가?
4
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 교수 시국성명서 발표
5
대림절(Advent) 교회력의 의미
6
102회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대한 긴급 제안서
7
장신대 김철홍 교수 글에 대한 학생들 입장
8
이정훈 교수는 누구인가?
9
장로교회의 당회원, 당회장의 역할(1)
10
개혁하는 교회 탐방(거룩한 빛 광성교회)
신문사소개후원하기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명칭 : 예장뉴스 (pckgoodnews.com)   |  등록번호 : 서울,아02054   |  등록일자 : 2012년 4월 3일   |   제호 : 예장뉴스   |  대표 : 이상진
발행인겸 편집인 : 유재무   |  발행소(주소) : 서울 성동구 성덕정 17길-10, A동 202호   |   사무소 : 서울 종로구 대학로 3길 29, 100주년 610호
발행일자 : 2012년 6월 25일   |  행정메일: ds2sgt@daum.net   |  전화번호 : 02)469-4402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재왕
Copyright © 2011 예장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pck-goo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