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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인식의 현대강단문을 닫는 사람들(마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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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5.26  22: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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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을 닫는 사람들(설교)


본문말씀: 마태복음 23:13

 화가 있다와 복이 있다.

오늘부터 모두 7번에 걸쳐서 왜곡되고 잘못된 신앙의 모습들을 살펴 볼 것입니다. 지난주에도 말씀드렸듯이 이제부터 읽어갈 마태복음 23장의 “너희에게 화가 있다.”로 시작되는 저주선언은 모두 7개입니다. 그리고 이 저주선언이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 선언과 내용상 대칭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도 말씀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설교를 팔복선언과 연결하여 그 가운데서 저주에 대한 교훈의 의미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천국의 문을 닫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도 천국을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길 막힘과 고장 난 차

운전을 하다보면 가끔씩 막힐 일이 없는데도 도로가 꽉 막혀서 차들이 꼼짝 못하고 있다가 한참 후에야 겨우 빠져 나올 수 있는 경우를 만납니다. 그럴 때는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고 “왜 이런가?” 하면서 안절부절 하지 못할 때를 누구나가 다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더욱이 촉박한 시간에 쫓기게 될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러다가 그 교통지옥을 빠져 나오게 되면 대개의 경우 앞의 차가 고장이 나서 서 있었던 가 혹은 차 사고가 나 있을 경우입니다. 공사 중에는 공사 중이라는 안내판이라도 있어서 그나마 지체 이유라도 알 수가 있겠지만 이렇게 고장 난 차가 있어서 길이 막힐 때는 정말 답답하기가 그지없습니다.

고장 난 차! 이게 문제입니다. 고장 자체도 문제이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고장 나서 도로 중간에 서 버림으로서 다른 차들도 통행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의 문제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잘못된 신앙은 자신을 잘못된 길로 인도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문을 닫고서 자기도 들어가지 못하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잘못된 신앙의 모습은 어떤 것일까요?

 위선적 신앙

예수님의 첫 번째 저주의 선언을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아” 하면서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지적하면서 ‘위선자’ 라는 부가 설명을 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오늘 예수님의 눈에 ‘위선자’로 비쳐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당시 신앙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에 그 누구보다도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신앙이 규정하고 있는 사항들을 목숨을 다해서 지키려고 노력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민중들은 그들을 존경하고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하면 당시 모든 유대민중들이 바리새파 사람들을 싫어하고 증오하고 적대시 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하지만 그게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만큼 그들은 신앙생활을 지켜 나가는데 있어서 조금도 하자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신앙이 위선적이라고 지적하고 계십니다. 그들의 신앙은 위선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눈에는 그들은 문을 닫는 사람들로 비쳐졌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위선자’라는 지적은 꼭 겉과 속이 다른 사람, 흉내 내는 사람, 거짓으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위선자’는 그것 보다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위선, 본질의 상실

바리새인들이 위선자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해서가 아니라 열심히 살아가기는 하는데 진정 그리고 가장 중요한 본질이 오도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신앙의 가장 중요한 본질을 잃어버리고 열심만 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본질을 잃어버린 신앙의 열심은 문을 닫는 열심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한마디로 화해입니다. 깨어진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화해시키고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인간과 인간의 깨어진 관계, 분리되어진 관계를 화해시켜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리새’ 라는 단어의 뜻이 ‘분리되어진 사람’들이라는 것은 매우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신앙의 열심이라는 것을 매개로 하여 다른 사람들과 자신들을 분리시켜 나갔습니다.

그들은 열심히 믿을수록 더욱 더 다른 사람들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의 화해라는 믿음의 본질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위선입니다. 예수님은 본질(화해)을 잃어버린 상태를 신앙의 위선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이런 신앙양태는 천국 문을 닫는 행위라고 비판하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믿음을 빙자한 배타적인 모습, 나와 다른 사람을 향한 미움과 증오가 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의 화해를 위하여 일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한국 사회의 여러 가지 분열을 조장하는 사회적 역기능을 담당하고 있습니까?

 화해의 사도인가?

오늘 한국 기독교회의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에 대한 전투적인 태도, 다른 종교들을 향하여 내뿜는 무서운 적대감등은 오늘 우리 교회의 신앙의 열심이 어떤 열심인가를 보여주는 상징들이 아닐까요? 문화현상을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치 온 세상을 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듯이 전투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다빈치 코드라는 영화, 신의 길 인간의 길 다큐멘터리 방영, 그리고 어제 열린 레이디 가가 공연 반대 등을 예로 들지 않아도 우리들의 일상적인 신앙 언어에도 전투적인 용어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선교를 전쟁으로 비유하기도 하고 선교사들을 이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서 전투에 임하는 사람으로 묘사하는 등 온통 전투적인 용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들의 신앙이 너무 전투적이지 않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만들기에 충분하지 않습니까? 과연 우리는 전투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종교의 본질인 화해를 잃어버린 신앙은 오늘 천국 문을 닫고 나도 들어가지 못하고 또 다른 사람들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 불경스러운 행동입니다. 인간과 화해하시고 또 인간과 인간끼리 화해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닐까요? 전투적이 되면 될수록 그리고 분리주의적이 되면 될수록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전도하고 싶은 사람들로부터 고립되어 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고립되어질 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렇게 전하고 싶은 천국의 문을 가로 막는 현상을 보이게 된다는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화해자로 오셨습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시기 위하여 중재자로 오셨습니다. 화해는 오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본질입니다. 이 본질을 망각한 위선적인 신앙은 잘못된 신앙이며 천국 문을 닫아버리는 행동입니다. 오늘 우리는 천국 문을 연다고 하면서 오히려 닫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가난한 마음의 상실과 의를 버린 사람들

두 번째로 천국 문을 닫아 버리는 잘못된 신앙행태는 어떤 것일까요? 위에서 설명 드린 것처럼 오늘의 본문들은 마태 5장의 팔복선언들과 연결하여 생각하면 많은 도움이 됩니다. 오늘의 말씀은 마태복음 5:3 절과 그리고 10절의말씀과 대칭을 이루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 문을 닫아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의 저주와 천국을 차지하는 사람의 복된 모습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5:3절과 10절의 말씀의 내용을 살펴보면 오늘의 본문인 천국 문을 닫는 사람, 다시 말하면 천국을 차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천국 문을 닫고 자신도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은 바로 ‘가난한 마음’을 잃어버린 신앙입니다. 천국 문을 닫는 신앙은 ‘의를 저버리고’사는 사람들의 신앙입니다. 자신의 안락만을 위하여 다른 것에 대한 신경을 꺼버리고 눈을 감아 버리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열심히 일하지 않는 사람들의 신앙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하지 못할 것입니다.

 먼저, 가난한 마음을 잃어버린 신앙은 끝없는 욕심을 우리에게 줍니다. 욕심스러운 신앙은 천국 문을 닫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신앙이 우리의 욕심을 만족시켜주는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오히려 우리의 욕심을 점차 줄여나가는 동기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신앙이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해 주지 못하고 점차 ‘부자스럽’게 만들어가고 있다고 한다면 그 신앙은 우리를 결코 천국으로 인도해 주지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도 그렇고 불교에서도 그렇고 모든 영성 훈련을 실시하는 종교에서는 이처럼 마음을 가난하게 하는 훈련을 실시합니다. “비움”이 그것입니다. 결국 영성 훈련이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마음을 비게 하는 훈련 아니겠습니까? 영성훈련을 받고서도 그 마음이 분노로 ‘부자스럽게’ 가득 차 있다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영성훈련 끝에도 아직도 우리의 마음이 세속적인 명예와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부자스럽게’ 가득 차 있다면 그 신앙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해 줄 수 있을까요?

신앙은 우리의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가난한 마음을 갖게 하는 신앙이야 말로 천국 문을 여는 신앙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 기독교의 믿음의 모습들이 어떠합니까? 혹시 마음을 가난하게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점차 ‘부자스럽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 사람들에게 우리 기독교인들의 모습은 어떤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을까요?

신앙을 통해 ‘저 정상으로만 올라가려고 하는’ 욕심스러운 모습으로 비쳐 지고 있을까요? 아니면 ‘저 낮은 곳을 향하는’ 그리고 신앙을 통하여 ‘마음을 비우려는’ 가난한 마음의 소유자로 비쳐지고 있을까요? 가난한 마음을 잃어버린 믿음은 천국의 문을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못된 믿음’ 차라리 갖지 않았으면 오히려 더 나을 지도 모르는 그런 신앙입니다.

욕심스럽게 보이는 신앙인, 도무지 자기 것을 양보할 줄 모르고 오직 자기만 가지려고 하는 욕심스러운 모습으로 세상에 비쳐지고 있는 신앙인들, 그들은 천국 문을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지금 이 시각에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서고 있겠습니까.

 가난한 마음의 상실과 겸손의 상실

가난한 마음을 잃어버린 신앙은 겸손함을 잃어버린 신앙입니다. 가난한 마음을 잃어버리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교만함입니다. 겸손함을 잃어버립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이처럼 겸손함을 잃어버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겸손함을 잃어버리게 된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신앙에 대한 지식과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신앙의 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이었고 또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는 열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뛰어난 지식과 열심히 인하여 가난함을 잃어 버렸고 그 결과로 겸손함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고개 숙이는 법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늘 신앙에 있어서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겸손함을 잃어버린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추월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나를 추월하려는 모든 다른 시도’를 거부함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천국의 기회를 박탈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마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만 생각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당시 유대사회의 대다수의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정황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율법을 제대로 준수할 수 없다는 상황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은 어떠한 경우라도 지켜져야 했고 만일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가난한 마음을 잃어버린 신앙은 이처럼 독선적인 모습으로 되어갑니다. 독선적인 삶의 태도는 ‘정상참작’이라는 것을 전혀 하지 않는 삶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나름대로 신앙에 있어서 열심을 내기는 하였지만 그리고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 노력했고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패하고 있는 것은 바로 신앙의 가난한 마음, 남의 입장을 생각하는 ‘정상참작’의 배려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가난한 마음의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는 ‘배려의 신앙’입니다. 만일 우리가 가난한 마음의 신앙을 가질 수만 있다면 이웃에 대한 삶의 태도는 많은 변화를 겪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의의 상실

천국 문을 닫는 신앙은 어떤 모습입니까? 마태복음 5:10은 천국을 차지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천국을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차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천국을 차지하지 못합니까?

의를 외면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위를 향하여 눈을 감고 외면하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 땅 위에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이론만 앞세웠지 실제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 주 본문에서 예수님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던 것을 우리는 기억합니다.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지기 힘든 무거운 짐을 묶어서 남의 어개에 지우지만 자기들은 그 짐을 나르는 데, 손가락도 꼼짝하려고 하지 않는다.”(마 23: 3b~4)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는 신앙,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사용되어지는 믿음!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천국을 차지하게 할 수 없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지 않고 신앙의 경력만 쌓아가는 사람들, 하나님의 일은 하지 않고 교회의 교인 수만 늘어났으면 하는 목회자들, 이웃을 섬기라고 직분을 주었음에도 섬기는 일은 하지 않고 군림하고 다스리려고만 하는 교회 직분자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천국 문은 꽁꽁 얼어붙게 됩니다.

천국 문이 얼어붙게 되면 그 문을 열기가 점차 어려워 질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고 외면하는 신앙은 천국 문을 닫고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다른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오늘 우리는 누구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 신앙을 가지고 자신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천국 문을 여는 신앙을 갖고 있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나 때문에 천국 문을 닫는 그런 일을 하는 신앙을 갖고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 16: 19)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천국의 열쇠!

그것을 가지고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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