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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아이들과 같이마태복음 1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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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5.06  08:4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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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아이들과 같이

마태복음 18:1-6

그 때에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예수께서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저희 가운데 세우시고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5월 달은 ‘가정의 달‘ 이라고 합니다. 어른들과 부모님 자녀들과 청소년들의 미래에 대하여 생각하는 달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에서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어린이에 대한 교훈과 진리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저는 본문을 이렇게 이해하고 해석을 발전시켜 보았습니다. 제자들이란(어른 들) 누가 높냐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자들은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 할때에 누가 주님의 좌우편에 않을 것인가? 대하여 논쟁을 한적이 있습니다. 주님은 할결같이 그런 세속인 가치들에 메몰되여 논쟁하고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천국은 1. 어린이 같이 되던지(불가능) 2. 낮추던지(겸손은 힘들어) 3. 영접하던지(경로우대) 4. 실족케(아프게) 하면 죽이는 것이다. 라는 말씀을 극단적으로 하시는 것입니다.

최근 비정규직이나 실업자 노조문제등도 문제지만 사실 성인노동 운동은 많이 발전되여 왔습니다. 그러나 요즘 세계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것이 아동노동입니다. 아마죤의 강에서의 쪽배 장사 볼리비아의 구리광산의 채굴과 규폐증 인도 채석장의 여성노동 필리핀 메트로의 차량 구걸이나 베트남의 봉제공장, 방갈라데시의 수제 축구공 만들기, 아시안의 고산지대의 커피노동등입니다. 그래서 공정무역이나 아동노동 금지와 같은 법과 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 어린이 날을 주창한 초창기 지도자들의 원래 의도나 취지에 비추워서 생각을 해도 요즘 먹고 살기 좋고 편안 가정의 아이들을 더 먹이고 놀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평소에 잘먹고 잘지내고 어린이 날이라고 해서 더 호사라는 것이 어린이 날의 취지가 아닙니다.
   
 

어린이 헌장
최초의 헌장은 동화작가인 마해송(馬海松)·강소천(姜小泉)·방기환(方基煥) 등 7명이 성문화하여 1957년 2월 발표했다.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전문(前文)과 9개 항의 헌장을 마련하여, 같은 해 5월 5일 제35회 어린이날을 기하여 공포하였다. 그 후 주무부서인 보건복지부는 ‘굶주린 어린이는 먹여야 한다’ 등의 피상적인 내용을 전면 개정하고, 이를 1988년 제66회 어린이날을 기하여 다시 공포하였다. 제2의 어린이헌장은 전문과 11개 항으로 되어 있으며, 전문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갖는 민주사회 시민으로서의 어린이상을 구체화하였다. 대한민국 어린이헌장은 모든 어린이가 차별 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니고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 사람으로 존중되며, 바르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함을 지표로 삼는다.
① 어린이는 건전하게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 속에 자라야 한다.
② 어린이는 고른 영양을 섭취하고,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받으며, 맑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
③어린이는 좋은 교육시설에서 개인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교육을 받아야 한다.
④ 어린이는 빛나는 우리 문화를 이어받아, 새롭게 창조하고 널리 펴나가는 힘을 길러야 한다.
⑤ 어린이는 즐겁고 유익한 놀이와 오락을 위한 시설과 공간을 제공받아야 한다.
⑥ 어린이는 예절과 질서를 지키며, 한겨레로서 서로 돕고 스스로를 이기며, 책임을 다하는 민주시민으로 자라야 한다.
⑦ 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는 마음과 태도를 길러야 한다.
⑧ 어린이는 해로운 사회환경과 위험으로부터 먼저 보호되어야 한다.
⑨ 어린이는 학대를 받거나 버림을 당해서는 안 되고, 나쁜 일과 힘겨운 노동에 이용되지 말아야 한다.
⑩ 몸이나 마음에 장애를 가진 어린이는 필요한 교육과 치료를 받아야 하고, 빗나간 어린이는 선도되어야 한다.
⑪ 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이며 소망이다. 나라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 자라야 한다.

대단한 내용아닙니까? 일제하 전국민적으로 어려울 때였지만 더 어려운 아이들의 인권과 신장에 큰 관심을 기우리린 선조들의 인류에와 정신이 정말 귀합니다.

전에 이런 예화도 본적이 있습니다. 탁발스님이 공양을 하는 데 어느 집에서 아이을 많이 학대합니다. 구박을 하고 때리고 그래서 그 스님이 그 자라에 참여하여 아이에게 절을 하며 “ 귀하게 되실 분”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부모들에게도 앞으로 크게 쓰임을 받을 아이오니 잘 부탁합니다. 앞으로 영의정이 될 상이니 그렇게 대해야 합니다. 하니 부모들이 스님의 말을 믿고 그 아이를 극진히 보살피고 양육하였더랍니다. 그랳더니 그렇게 구박받고 천대받던 아이가 자라서 정말로 영의정이 되였다는 얘기입니다. 사람이 크게 되는 인자는 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그를 돌보고 양육하는 가에 달렸습니다. 부모와 사회의 책임이 참으로 크다는 것을 느낌니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라는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가 있습니다. 일본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만들어서 많은 이들에게 감명을 주고 여러 상도 받은 수작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주인공은 평범한 10살짜리 소녀입니다. 우연히 부모를 따라 잘못 도착한 곳이 온천장인데, 그곳은 온갖 요괴와 도깨비들이 목욕을 즐기러 오는 신들의 온천장이었지요.

거기서 부모는 너무 욕심을 부리고 많이 먹다가 그만 돼지로 변해버립니다. 이런 부모를 놔두고 차마 혼자 갈 수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치히로는 온천장의 잡일을 하며 부모를 구할 방도를 찾게 되는데요, 이런 설정은 어린이의 노동력마저 가혹하게 착취하는 오늘의 시장 상황과 소비자본주의 체제 속에서 돼지로 변한 현대인을 고발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에서 특히 황금으로 사람들을 유인하여 결국에는 잡아먹는 얼굴 없는 요괴는 맘몬의 우상신을 아주 적절히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치히로는 막다른 상황 속으로 유배당한 것이지요. 그것도 원해서 도착한 게 아니라, 불가항력적으로 치히로의 삶에 갑자기 밀어닥쳤으니까요. 온천장을 지배하는 마녀는 치히로에게 새 이름을 줍니다. 이제부터 ‘센’(千)이라 부르겠다고... 그 뜻은 천길입니다. ‘천 길 낭떠러지’라는 표현도 있듯이, 그만큼 깊은 세계라는 뜻이지요.

하지만 센은 단순히 숫자 ‘천’을 의미할 뿐입니다. 모든 걸 숫자로 환산해서 가치를 평가하는 자본주의적 속성을 암시하지요. 받는 돈의 액수가 적은 노동보다는 기왕이면 많이 받는 노동이 훨씬 더 가치있는 노동이라고, 우리 다 생각하지 않습니까? 연봉이 얼마냐, 아파트 평수가 몇 평이냐, 얼마짜리 자동차 타냐? 사람을 차별하고 그러지 않습니까?

치히로에서 센으로 이름이 바뀌는 설정은, 유배지에서 더 이상 동일한 정체성으로 살 수 없는, 정체성 말살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자본의 횡포가 극에 달한 현실 속에서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발상은 웃음거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니까 영특한 사람은 빨리빨리 자본주의의 속성을 파악하여 발 빠르게 변신을 해야 성공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치히로를 은밀히 도와주는 마녀 하수인 하쿠는, 센으로 이름이 바뀐 치히로에게 이름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지요. 본래의 자기 이름을 잊어버리면 그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거예요. 이 말에 치히로는 어떻게 해서든 이름을 잊지 않으려고 애를 쓰지요.

이름을 기억한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그건 일종의 사명 같은 겁니다. 자기가 어쩌다 그런 상황에 처했는지, 그리고 그 상황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기억하는 겁니다. 치히로로서는 얼른 부모님을 구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사명이예요. 그러니까 다른 것들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지요. 그래서 치히로는 얼굴 없는 요괴가 황금을 뿌려대면서 자기랑 친구하자고 해도 거들떠도 안 봅니다.

또 온천장 주인의 아들이 위협을 하고 협박을 해도 아랑곳없이 자기 길을 가요. 그래서 마침내 부모도 구하고, 요괴한테 잡혀 먹힌 사람들도 구하고, 황금의 신마저 굴복시키는 놀라운 일을 하게 되지요. 이렇게 해서 현재자본주의에 노예가 되고 휩사인 현대인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것입니다.

“평화로 가는 길은 없다. 평화가 곧 길이다.” 하신 틱낫한 스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아마 미야자키 감독도 이 영화에서 도탄에 빠진 인류를 구원할 길은 무기나 힘인 어른으로는 안된다고 보고 어린이, 혹은 여성으로 보고 있는 것 입니다. 그간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던 왕과 장군들 정복자들 보다는 그동안 역사속에서 보잘 것 없이 취급되고 그 역할이 두드러지지 못했던 인물들이야 말로 희망의 주역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이 어린 아이라는 표현은 헬라어 원어에는 ‘파이디온(paidion)’이라고 쓴다고 합니다. 이는 어린이라는 뜻보다는 “미숙한 존재” 를 가리킵니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약자을 뜻하는 것이지요. 마태복음 18장 6절은 이 어린 아이를 “작은 자”의 대명사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작은 자란 키가 작다는 뜻보다도 존재가 미약하다, 비중이 작다, 지위가 낮다는 의미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일반적인 어른의 눈으로는 이렇게 작은 자를 경멸하고 무시하는 게 통상적인 일입니다. “애들은 가라‘ 그게 어른의 관점이지요. 큰 집, 큰 차, 큰 냉장고, 큰 사무실 큰 교회가 성공의 표시로 착각하는 어른들은 작은 것들의 가치를 옳게 보는 눈을 잃어버리고 만 것 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는 그런 눈을 갖고서는 도저히 볼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작은 자를 알아보지 않고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낮은 자리에서 작은 자의 눈을 갖지 않고는 보이지 않고 열리지 않는 게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러면 작은 자의 눈이란 뭘까요?

그건 어른들이 정해놓은 세상의 질서에 아직 물들지 않은 눈입니다. 요즘에야 도무지 어린이라고 볼·수 없을 만치, 너무 일찌감치 어른화 되고 어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영악한 어린이가 많은 게 사실이지만, 거기다가 연예계 돈벌이를 위하여 혈안이 된 각종 미디어 산업이 저지른 연예인 만들기로의 아동학대와 폭력도 문제가 된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어린 아이 같아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간다” 는 예수님 말씀이 진리라면 우리에게 필요한 일은 작은 것의 소중함을 볼 줄 아는 눈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올해 우리 교단에서도 “그리스도인 작은 이의 벗” 이라는 주제를 갖고 장애인 여려운 아동시설 노동자들의 파업현장등을 찾아가며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그들을 위로하며 돌보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총회장님이나 사무총장이 직접 그런 현장을 찾은 예는 없었습니다. 지도자들이 높은 사람 성공한 사람 힘이 있는 사람도 만나야 하지만 약한 자를 만나야 이렇게 현장감이 살아납니다.

여기 아동 치히로는 바로 그런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남들은 모두 하쿠를 마녀의 하수인이라고 멀리할 때도 치히로는 그를 믿고 돌보고 끝까지 지켜줌으로써 그가 본래의 자기 모습, 곧 멋진 江의 신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줍니다. 큰 덩치와 권세로 협박하는 마녀의 아들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그의 선하고 약한 본성을 회복시켜 줍니다. 작은 어린아이 치히로와 맺는 모든 관계에서는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 자본주의라는 것은 강력한 인간성의 파괴를 요구합니다. ‘자본주의’라는 단어에는 돈이 주인이라는 의미입니다. 돈이면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대의 자본주의는 동양의 것이 아닌 서양의 것이다. 따라서 아무런 비판 없이 무조건적으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인 많은 동양의 나라들이 가치관의 혼란을 겪고 있으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쉽게 말해 우리가 타지로 갔을 경우 항상 마시는 물 때문에 탈이나 물갈이를 하듯이 문화와 가치관의 물갈이가 이루어지고 있는 중인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를 벗어나기 위해, 진정한 동양의 자본주의 문화를 꽃피우기 위해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화해와 진실이다.

자본주의의 수용에 대한 부작용이 클수록 사람들은 본연의 모습을 잃게 되고 어느 순간 그런 내 모습에 혼란스러워한다. 그리고는 무비판적이었던 내가 아닌 남을 탓하기에 급급해 진다. 내가 아니라 네 탓이라는 생각 속에서 서로를 헐뜯게 되는 것이다. 지금이 서양과 발전 세계화라는 것이 바로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따라서 더 늦기 전에 이 자본이 주인인 가치와 진심 어린 화해, 오해를 푸는 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삶을 이끌어 가는 것은 진실이라는 사실을 우리 마음 속 깊이 새겨야 한다. 어떤 오해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상대방을 대하면 마음과 마음의 교감을 이룰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이러한 사실에 주목하고 우리에게 진실을 믿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영성을 살림의 영성’이라는 이름을 붙힙니다. 이 말은 서양에는 없는 말입니다. 집안 살림살이, 겨우살이, 나라살림입니다. 이것은 사람을 살리는 말에서 왔습니다. 어린아이 노인 장애인 남의 도움이 없이는 살수 없는 사람들을 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양의 경영이나 운영하곤, 다른 말입니다. 죽임이 아닌 살림입니다. 살림은 죽임의 세력에 저항하는 영성입니다. 다만 그 저항의 방식은 철저히 일본적인 友情과 配慮(키쿠바리) 돌봄과 연대입니다. 무서운 권세 앞에도 결코 武力으로 맞서지 않고 한결같이 자비심을 발휘합니다.

전에 청년 학생들은 데모대에게 파이프와 돌과 화염병을 던졌지만 어머니와 여성들은 꽃을 전경들의 옷에 장비에 꽂아 줍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꼼짝을 못합니다. 폭력의 대응은 폭력이 아닌 사랑과 자비여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남북경색이나 개성공단 사건도 우리 측 인원이 전원 철수 하는 것은 사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평화의 단서가 되고 전쟁지력도 된다고 보는 데 피해를 최소화 한다고 돈 주고 다 데려왔는데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 측 피해 볼 것 없다. 한판 해보자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정치가가 할 일이 아닙니다. 군대는 몰라도 정치와 외교는 그것이 아닙니다. 작은 희생을 통하여 더 큰 희생을 막는 것이며 평화를 구하는 것인데 무엇가 크게 잘못되였습니다.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더 컬러 퍼플”에서 보면 이런 영성으로 살아낸 한 여성의 인간 승리가 담겨 있지요. ‘씰리’라는 이름의 흑인 여성은 인생에서 만난 모든 남자들로부터 피해를 당하는 데 강간당하고 매맞고, 또 의붓아버지와 사이에서 난 애들까지 빼앗기고, 팔리듯 시집간 집에서는 전 부인의 소생들한테 온갖 멸시와 구타를 당하지만, 그래도 무슨 희망인지를 버리지 않고 버텨냅니다. 자란 아이들이 아프리카에서 선교사가 되고 기이하게도 씰리와 관계 맺는 모든 상처 입은 영혼들은 치유와 회복에 이르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 힘이 어디에서 나올까요? 그것은 바로 그가 고통을 당했지만‘복수와 보복으로 살지 않고 살리는 영성으로 살았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이런 류의 영화가 기성사회의 기득권을 지키는 가난한 자들의 운명을 신의 뜻으로 받아드리다가 숙명으로 죽게 해서 거짓된 평화를 구하는 이들의 픽션에서 오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은 희망으로 받아드리고 믿고 싶습니다.

살림의 영성은 생명의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체험될 수 있습니다. 들에 핀 꽃 한 송이에도 하나님의 숨결이 담겨있다는 소박한 깨달음, 작은 것에서 큰 가치를 보는 눈이 있을 때, 내가 선 모든 공간, 내가 만나는 모든 관계가 하나님 나라로 돌변합니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참 좋은 세상이다.”라는 시구가 있습니다.

오늘 주보에도 올려져 있는 기도문 입니다만은 여기서 한번 더 소개합니다.

아이가 나무람 속에서 자라면 비난을 배웁니다.
아이가 적개심 속에서 자라면 싸우는 것을 배웁니다.
아이가 비웃음 속에서 자라면 부끄러움을 배웁니다.
아이가 수치심 속에서 자라면 죄의식을 배웁니다.
아이가 관대함 속에서 자라면 신뢰를 배웁니다.
아이가 격려 속에서 자라면 고마움을 배웁니다.
아이가 공평함 속에서 자라면 정의를 배웁니다.
아이가 인정 속에서 자라면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배웁니다.
아이가 받아들임과 우정 속에서 자라면 세상에서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오늘은 어린이만을 위한 날이 아닙니다. 어린이 처럼 무시받고 천대받고 보호없이는 살아갈 수없는 사람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야 합니다. 역사는 남성이 만들고 서양이 좌우지 하면서 백인이 그것을 조정합니다. 그리고 대학을 나온 사람들, 어른들입니다. 여기에 반대되는 것이 바로 작은 자이며 약한 자입니다. 보호를 받을 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착취당하고 있고 이용당하고 방치되여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작은 교회, 작은 사람들이지만 하나님의 뜻 안에서는 정말 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구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봅니다. 쎈과 이치로가 주는 메시지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제 세상은 깨끗하고 양심적인 사람들만이 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은 약자에 대하여 작은 자에 대하여 우리는 귀한 존재로 의식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기독교나 교회는 세상과 약자위에서 군림하거나 지배하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닥에서 함께 섬기는 자의 모습으로 다시 태여 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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