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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평목협 2012년 교회개혁 심포지움이정배 교수(감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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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6.08  21:5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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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평목협 2012년 교회개혁 심포지움 

이정배 교수(감신대)

                        -공교회 운동과 성직자 영성운동을 생각하며-

   
        * 목정평 심포지움  패널 좌로 부터 유재무, 나핵집, 이정배, 남재영 목사, 이재정 신부, 김희원 목사

지금 교회 밖 정치권에서는 민주화 세력의 정권 재창출을 위한 -백낙청이 제시한- ‘2013년 의제’가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일정부분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원탁회의가 이를 뒷받침하는 형세이다. 현실적으로 그 가능성에 대한 염려가 있으나 생각을 모을 수 있는 의제(agenda)가 분명하단 점에서 오늘 한국 교회에게 시사점을 준다. 주지하듯 2019년 까지 한국교회는 역사적으로 엄청난 사건을 준비하고 기념해야만 한다. 정의와 생명을 주제로 한 2013년 WCC 대회가 그것이고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 행사 그리고 민족을 위해 종교인들 모두가 협력했던 3.1운동 100년 역사가 그것들이다.

하지만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열리는 목하(目下)의 WCC 대회가 한기총 측의 집단적 반발과 NCC 측의 지도력 부재 등으로 천문학적 비용이 소요되는 소모성 잔치가 될 공산이 크고 2010년 대 끝자락에 있는 교회를 넘는 종교연합운동은 자기울타리를 지키려는 교회의 배타적(수세적) 정서로 인해 축하와 기념의 자리가 만들어 질 수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5년이란 시간이 남아있고 너나할 것 없이 종교개혁의 필연성을 절감하는 상황에서 500년 역사를 무(無)로 돌려보낸다면 단언컨대 한국교회의 앞날은 없다. 이점에서 목정평은 지금부터 어떤 방식으로든지 한국교회 개혁을 위한 ‘2017년 의제’를 만들어 개혁과 새 창조의 공감대를 확산시켜 나가야만 한다. 종교개혁을 기념하는 것은 개혁이 역사 속에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당위성 때문일 것이다.

발제자는 <신학사상(2012 봄)>에 발표한 한 논문에서 한국 교회에 사라진 세 목소리를 언급하였다. 그것은 ‘고독하라’, ‘저항하라’ 그리고 ‘상상(창조)하라’는 것이었다. 맘몬의 늪에 빠져 세속적 취급을 받는 교회 현실에서 신(神)을 바라보는 뼈 속 깊은 고독은 실종되었고 어느덧 다수가 되어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감추고 변명하느라 거짓된 세상을 향한 저항도 잊었으며 정치적 비호를 받는 기득권자가 된 탓에 자신의 테두리 속에 안주할 뿐 창조적 소수자의 역할을 포기한 한국교회의 앞날을 염려해서였다. 진실된 고독이 없기에 창조적 상상력이 부재하고 그러다 보니 저항할 수 있는 힘이 생기(生起)치 않는 것은 자명한 이치이다. 하여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이 기독교가 로마를 기독교 화시켰는지 오히려 로마가 기독교를 기독교화 한 것인지를 물었듯이 이제 막 일백년의 역사를 지난 한국 개신교는 자본주의를 복음화 한 것인지 아니면 복음을 자본주의화 한 것인지를 깊게 성찰해야 할 것이다.

항시 거룩의 포장을 썼으나 교회의 존재 양식, 목회자들의 삶의 양태가 자본(돈)의 힘에 종속되어 있는 까닭이다. 물론 이웃 종교들 경우도 다르지 않으나 오백 여년의 세월을 지닌 그들을 향해 짧은 역사의 기독교의 할 말이 너무 적다. 기독교가 외치는 메시지에 담긴 상상력, 꿈이 너무도 작고 소통되는 공감력이 너무도 없다. 우리가 전하는 구원, 영생 등의 언어가 ‘너나 잘 하세요’라는 말로 메아리 쳐 돌아오고 있는 서글픈 현실이다. 소수 대형교회의 도덕적 타락이 뜻있는 소수 작은 교회들의 미래(선교)를 어둡게 만든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제는 삼박자 구원론에 기원한 기독교가 주는 복(福)의 약발도 그 수명이 다한 듯 보여 진다. 그런 세속적 복을 기독교 교회에서 구할 만큼 신앙인들의 삶이 계몽이전의 상태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과연 기독교가 무엇을 가지고 향후 이 땅에 존재할 것인지 생존전략의 차원이 물어져야 할 시점인 것이다. 크게 기대하지는 않으나 WCC 총회가 이 땅에 정의와 생명의 가치를 확실히 심어주길 바라는 것도 이런 이유라 하겠다.

고독과 저항 그리고 상상은 각기 그에 상응하여 기독교에게 세 종류의 눈을 뜨도록 요청한다. 신앙의 눈, 의심의 눈 그리고 자기발견의 눈이 바로 그것이다. ‘신앙의 눈’은 자기 전통의 원류를 다시 찾는 힘을 준다. 한강물이 아무리 넓고 화려한 들 누구도 그물을 마시려 머리 숙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강원도 산골에 흐르는 소박한 물줄기 앞에서 사람들은 기꺼이 멈춰 서지 않겠는가?. 이점에서 기독교는 최소주의에 입각하여 자신의 진리를 간단 소박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종교개혁의 ‘오직 믿음으로만’의 원리도 과감하게 수정할 여지가 많다.

이 명제는 가톨릭교회의 일천년 역사에 대한 반명제(홍은 보완)일 뿐 성서 자체의 가르침은 아닐 것이다. 어찌 행위를 동반치 않는 믿음만을 예수가 말했고 바울이 가르쳤단 말인가? 영생을 묻는 율법학자에게 ‘가서 사마리아인처럼 행하라’고 한 분이 예수였고 바울 당시 기독교인이란 사회적 통념이었던 노예제도의 포기 및 여성의 지위 향상을 수반하는 것으로서 (자발적)불편한 삶을 감수하는 존재를 일컫지 않았던가? 이점에서 항차 한국사회가 요청하는 종교개혁은 (교리적)개종에 초점을 두는 것으로 충분치 않다. 자기 전통에 대한 의심의 눈이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설교로 재생산되는 성서와 전통이 사람들에게 빵이 아니라 돌덩이가 되는 현실에 대해 깊이 성찰해야만 한다.

하느님 그가 기독교만의 하느님이 아니라는 생각(바르트) 역시 중요하다. 기독교가 안팎을 가르며 이분법적 틀에 안주할 경우 그것은 이데올로기가 될 뿐이다. 복음을 이데올로기화하고 율법처럼 오용하는 한국 교회를 향한 ‘의심의 눈’이 작동되어야 한다. 지금 시민 불복종 운동처럼 교회를 사랑하되 교회를 거부하는 이들의 숫자가 점점 많아지는 추세이다. 교리(표피)적 종교가 아니라 심층(영성)적 종교가 흥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영성 없는 종교는 존재할 수 없으나 종교 없는 영성은 가능하다’(매튜 폭스)는 판단에서다. ‘기독교 이후 시대’를 살고 있다는 자각을 아성(兒聲)에 군림하며 비대해진 한국 교회가 놓치고 있는 현실을 의심이 눈이 직시해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자기발견의 눈이 더없이 필요하다. 자기발견의 눈이란 세계관의 한계가 곧 종교의 한계이듯이 기독교 밖에 세계에서 생겨난 종교들에 대한 기독교의 시각 변화를 적시한다. 지금껏 기독교가 역사 속에서 살아남았던 것은 자신의 순수성을 지켜서가 아니라 창조적으로 여타 종교들과 만났던 탓이었다.(존 캅). 원시 기독교가 구약은 물론 영지주의, 스토아 철학 등의 종교 혼합적 현상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불트만). 특정 종교만으로 오늘과 같은 지구(생태)적 차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세계관적 차이로 생겨난 자신 밖의 종교에 대한 진지한 이해 및 창조적 대화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는 모험도 요청된다.

지금껏 희랍사조와 만났거나(가톨릭), 유기체 세계관의 몰락과 대두된 기계론적 세계관과 조우했던(개신교) 기독교가 아니라 유불선의 세계관에서 이해되는 기독교의 모습 상상해볼만한 일이다. 힌두교만큼 존재 자체(神)에 대한 이해를 철저히 하는 종교가 없으며 기독교 이상으로 역사적 우발성(성육신)을 철저하게 수용하는 종교 역시 찾기 어려우며 관계성(성령)을 철저하게 사유하는 종교로서 불교 혹은 신유학만한 것이 없다는 신(新) 삼위일체 논리도 계발되고 있는 실정이다.(C. 슈나이더).

오늘 “교회개혁과 새로운 연합운동” 이란 주제 하에 목정평이 제안한 의제는 구체적으로 공교회 운동과 목회자(영성)운동이었다. 매우 시의적절한 주제라 생각하며 제안서의 내용을 충분히 숙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를 더욱 큰 차원으로 발전시켜 새로운 종교개혁을 위한 ‘2017년 의제’로서 진일보시키고자 한다. 이를 위한 때가 기독교 안팎에서 무르익었다고 보는 까닭이다. 주지하듯 중세 가톨릭교회의 타락과 구텐베르크에 의한 활자발명 그리고 민족주의의 등장이 근대의 여명을 가져왔고 종교개혁을 가능토록 했던 동인이었다. 한 가지 더 보탠다면 중세의 유기체적 세계관의 붕괴와 함께 기계론적 세계관이 등장한 것도 개신교의 시작과 짝할 수 있는 내용이다.

오늘 우리시대도 방향은 다르지만 이와 같은 여건이 충족되어 있다. 자본주의를 일으켰던 개신교가 오히려 자본주의에 잠식되었고 SNS를 비롯한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기술로 소통능력이 질적으로 달라졌으며 민중도 군중도 아닌 다중(多衆)의 등장으로 제국에 맞선 탈(脫)민족주의, 다문화주의가 대세를 이루고 있고 기계론적 세계관이 역동적인 유기체적 세계관으로 바꿔지는 상황인 것이다. 세계관과 종교의 관계가 물과 물고기의 관계라 한다면 중세의 가톨릭, 근대의 개신교를 넘어 이제 탈근대(탈식민지)에 적합한 새로운 기독교가 형태를 들어내야 할 시점이라 생각된다.

물론 이들 간에 불연속성만 강조할 이유는 없다. 의당 연속성이 없지 않을 것인 바, 일정부분의 차이 역시 적극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는 존재유비(Analogia Entis)와 신앙유비(Analogia fidei)를 넘어 범재신론(Panentheism)의 신학적 구조를 염두에 둔 말이다. 유기체적 공감의 확대가 시대 필연적 요청임을 아는 까닭이다. 과학사가 리프킨이 인터넷과 재생에너지의 결합으로 인류의 미래를 위한 3차 산업혁명을 예견했듯이 기독교 역시 이렇듯 새로운 물적 토대를 바탕 하여 자신 및 세상의 미래를 책임져야 옳다. 목정평이 제안한 공(公)교회 운동, 성직자(영성)운동 역시 이런 토대 하에서 생각될 여지가 충분히 많다. 이런 생각에 기초할 때 교회 및 성직자의 변혁운동은 과연 어떤 의제로서 표현되며 어느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하는 것일까?

우선 극히 소수의 대형교회와 대다수 소형내지 미자립 교회들이 공존하는 현실 자체가 공교회적 특성을 부정내지 반감시킨다. 이런 구조를 유지한 채로 교회 및 목사의 수가 지속적으로 늘고 있는 것도 공교회 운동의 걸림돌이다. 일찍이 함석헌은 땅에 들어 온 기독교가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된 것을 질타한 바 있다. 신학대학의 난립, 목회자의 질적 저하, 교파중심의 교육, 감투싸움 등이 모두 뒤따라오는 문제점들일 것이다. 교회세습 역시 기업의 사사(私事)화를 방불토록 하는 바, 본래 우주(Panta)를 뜻하는 그리스도 몸의 신비를 죽이는 일이 분명하다.

목사의 크기가 교회의 크기로 가늠되는 목회적 현실은 공교회는커녕 자본주의적 실상을 반영할 뿐이다. 이점에서 공교회에로의 길은 두 방향에서 시작될 수 있다. 우선 대형교회들의 탈(脫)중심화, 여럿의 소규모 단위로 나뉘는 위로부터의 혁명이다. 이는 교회가 자신의 왕국을 세우는 것을 포기할 때 가능한 일이다. 지(支)교회를 세우고, 양노원을 짖고 스포츠 센터와 취미교실 그리고 교회 묘지를 운영하는 등 출생에서 죽음, 심지어 취미생활마저 책임지는 마치 대기업과 같은 교회가 존재하는 한 그것이 설령 좋은 일이라 할지라고 그것은 세속적 왕국일 뿐 하느님 나라와 거리가 멀다.

세 종류의 눈으로 성서를 읽어 세상을 옳게 살 수 있는 하느님 자녀를 만드는 소박한 공간이면 족하다. 큰 교회 짓고 빛에 허덕이는 교회가 한둘이 아닌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성도들의 헌금이 곧바로 은행이자로 지불되는 현실 앞에서 누가 공교회를 생각하겠는가? 외부적 요인으로 교회구조가 재편되는 수모를 당하기 전에 스스로 분산되는 작은 교회 운동을 시작해야만 한다. 아직도 시간이 남아있음을 감사하며 현실의 교회가 예수가 말했듯 무너져야 할 성전인 것을 직시할 때가 된 것이다. 만약 위로부터의 개혁이 힘겹다면 수많은 작은 교회들의 연합운동이 더욱 절실해 진다. 교회적, 사회적 이슈가 생길 때마다 새 정보매체를 통해 수많은 소(所)교회들이 모여 같은 소리, 동일한 행동을 하는 구조가 생겨나야 할 것이다. 대교회를 지향하는 교회운동이 아니라 저마다 소신껏 목회하되 감당해야 할 시대적 사명을 위해 함께 뜻을 펴는 연합체운동의 활성화를 소망한다. 실상 이를 위해 지방회가 있고 연회가 있는 것이지만 의미 없는 행정으로 시간을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실상이 그러하다면 깊은 우환의식을 갖고 세상과 만나는 새로운 행정조직이 필요한 바, 이 일을 위한 작은 교회들의 조직체가 생겨났으면 좋겠다. 이런 선상에서 본 발제자는 오래 전부터 구나 군단위에서 33인의 종교인 모임이 구성되기를 바래왔다. 선교의 과제가 독립이었던 시절 종교 차를 막론하여 33인의 민족대표가 활동했듯이 우리 시대, 지역현안을 위해 종교인 33인의 모임이 지역에서 함께 활동할 수 있다면 종교전체가 더불어 상생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물론 33이란 숫자는 상징성을 띠는 것으로 숫자가 많아지면 좋을 수도 있다. NCC와 한기총 모두가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위상을 갖지 못한 현실에서 교파, 종파를 막론한 지역 교회(종교인)들 모임의 활성화는 교회의 앞날을 위해 화급한 사안이다.

발제자는 종종 가톨릭교회 신부들이 개신교 목회자들의 창조력, 자발성 등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읽은 적이 있다. 큰 조직으로서 교회는 나름의 메카니즘으로 움직이기에 창조성이 결핍되기 십상이다. 이점에서 한국 교회의 미래, 공교회로서의 위상 역시 오히려 작은 교회가 될 때 확립될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어느 정도 규칙은 있어야겠으나 작은 교회에서 저마다 목회자들이 진정성을 갖고 창조적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면-대교회를 모방치 않고-교회는 작다한들 세상에서 꼭 필요한 조직체로 평가받을 것이다. 지난해부터 발제자는 시인 박노해가 대표로 있는 ‘나눔 문화’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20여명의 연구원들이 박노해와 함께 전쟁지역 어린아동들을 위해 도서관 짖는 운동을 하는 모임이다. 대학시절 시인으로부터 인문학적 소양을 배운 연구원들은 최저급여를 받으면서도 자신의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며 삶을 바치고 있다. 내뱉는 말과 삶이 다르지 않음을 보았던 젊은이들이 ‘나와 같이 살자’는 시인의 부름에 전심으로 응답한 까닭이다.

시인 박노해는 우리가 설교하듯 매주 한편의 시를 후원자들에게 보내며 세상의 그늘진 곳을 함께 바라보자고 손을 내밀고 있고 500여명의 순수 후원자들의 기금으로 10년 넘게 나눔 문화를 운영했으며 10여개의 도서관을 세웠다. 이들 모임에서 발제자는 영성을 느꼈고 참 교회를 보았으며 그리 되었으면 하는 부러움과 그렇지 못한 부끄러움을 맘속에서 교차시켰다. 공교회운동과 성직자(영성)운동은 바로 목회자들이 성도들을 향하여 ‘우리 함께 살자’고 손을 내밀 때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작은 교회 일지라도 그곳을 정말 값진 곳으로 알고 매순간 제소리를 내며 같이 살자고 손을 내미는 목회자가 있을 때 거기서 교회개혁운동은 시작된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목회적 현실이 확고해야 교회의 타락을 두려움 없이 질타할 수 있고 공교회운동을 지속적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주변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대안교회들이 생겨나고 있다. 초교파적으로 목사 안수를 주는 단체도 생겨났다. 새길 교회를 필두로 하여 평신도 운동 역시 이곳저곳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런 현상이 꼭 바람직한 것만도 아니고 누군가에 의해 재대로 평가할 사안이지만 이런 현상, 추세 자체를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필자 역시도 이런 형태의 교회에서 설교자로 참여하기에 이런 양상을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목정평이 추구하는 공교회 운동도 이점에서 대안 운동의 일환일 것이며 나아가 근원회복 운동이라 말 할 수 있겠다. 앞으로도 이런 추세는 지속될 것인 바, 발제자는 기왕지사 이런 대안교회들이 저마다 카리스마를 갖고 다양한 형태로 발전해 주길 소망한다.

예컨대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교회, 장애인을 위한 교회, 청소년 교육을 위한 교회, 미혼모 내지 이주 여성을 위한 교회 그리고 음악과 예술을 특화 시킨 교회, 인문학적 상상력을 키워주는 교회, 영화와 연극을 통해 예배드리는 교회, 종교수행을 의례로 하는 교회, 종교간 대화에 전념하는 교회 등 사회 그늘진 구석을 담당하거나 그간 등한시했던 부분을 활성화 시키는 형태의 교회들이 출현하기를 바라고 있다. 발제자는 이를 카리스마의 다양성이라 부르며 향후 교파 간 차이를 대신하는 개념으로 자리 잡았으면 좋겠다. 저마다 상이한 카리스마(은사) 교회 공동체가 형성됨으로서 개신교 교회는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정도로 세상과 소통하고 공감하며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교파간의 차이란 앞으로 누구라도 큰 관심두지 않을 것 같다.

따라서 교파들을 하나로 만들려는 기존의 에큐메니칼 운동에게 큰 의미를 두는 대신 대안 교회들로 하여금 카리스마 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격려하는 일에 마음을 모아야 할 것이다. 동일한 카리스마에 관심하는 신자들끼리 모여 공동체를 조직하고 그 교회들이 자연스레 교파를 초월하여 건전한 연합 운동을 아래로부터 형성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카리스마 공동체로 됨에 있어 대안교회들의 역할이 두드러진다면 대형교회들 역시 영향 받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발제자의 판단이다.

이상과 같이 두서없는 중에 글의 끝자락에 이르렀다. 어느 확실한 의제를 끄집어 낼 것처럼 시작되었으나 너무도 평범하고 때론 허공을 치는 이야기가 된 것 같아 목정평에 송구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발제자는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교회개혁을 위한 2017년 의제를 확실히 만들어 낼 것과 2017년 공교회 체제 굳히기를 원론적으로 제안했다. 오늘의 토론 속에서 이를 위한 절차와 과정 그리고 내용들이 토론되기를 바란다. 큰 틀에서 발제자는 오늘 우리 현실이 두 번째 종교개혁이 성사될 카이로스적 시점인 것을 역설했고 향후 신앙의인을 넘어 행위를 내포하는 뿌리신앙을 찾고자 했고 새로운 세계관에 걸맞게 신학의 패러다임 자체를 재고할 것을 주문했다.

여백 없어 짧게 표현했으나 범재신론이란 언표 속에 함축된 무한한 신학적 상상력을 가시화시켜내야만 한다. 이런 토대 하에서만 공교회 운동이 새로운 방식으로 생기(生起)될 수 있다. 공교회란 뿌리신앙을 향한 고독과 세상에 대한 저항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향한 상상력, 곧 믿음과 의심 그리고 창조력이 함께 하는 교회를 뜻했고 이를 위해 작은 교회가 될 것을 주장했다. 대교회들이 탈(脫)중심화되지 못한다면 소신껏 목회하는 작은 교회들끼리 확실한 의제를 갖고 연합체를 구성하여 큰 교회 못지않게 세상을 위한 존재가 될 수 있고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점에서 대안 교회의 출현 역시 눈여겨 볼 측변이 많았다. 그들을 카리스마 공동체로 키워 세상과 소통하고 공감하는 힘을 들어 낼 때 소위 큰 교회들에게 미칠 영향력 또한 작지 않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든 교회들이 카리스마 공동체로 거듭 날 것을 주문한 것도 토론주제이다.

출생부터 죽음까지를 서비스하는 교회가 바람직한 교회가 일 수 없다. 이는 세상에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세상으로부터 아무 영향도 받지 않으려는 교만한 교회의 실상일 뿐이다. 안식일과 여타의 날이 구별 없고 교회안팎이 차이 없으며 일상이 바로 성육의 영역인 것을 아는 교회가 진정한 그리스도의 교회이고 공교회의 모습이라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목회자들 자신의 문제 역시 중요했다.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살자’고 말할 수 있는 목회자의 길을 걸을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교회가 목정평의 목회자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지도 자문할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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