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롬교회 28주년 기념 강연 (2) - 예장뉴스
예장뉴스
생각 나누기지금 찾아갑니다.
새롬교회 28주년 기념 강연 (2)지역공동체를 위한 생명망
이원돈 기고  |  wewinwin@hanmail.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4.06.18  18:42:41
트위터 페이스북

                        새롬교회 28주년 기념 강연 (2)  지역공동체를 위한 생명망

 홍성현목사(갈릴리신대원 원장)

  
   
 
 철학의 세계로 들어가 보아도 비슷하다. 그리스 문화를 보면 희랍의 초기 철학자들은 모두 신중심의 세계관을 과감하게 비판하였다. 그들이 사는 이 세상을 신 중심으로 해석하던 과거의 방식을 버리고 인간의 머리와 이성과 사상을 이용하여 그들이 살고 있는 그들의 세상을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희랍철학이다. 풀라톤이 그랬고 소크라테스가 그랬다. 희랍의 유명한 시인 호머(기원정 7-8세기)에서 이미 신인동형론적인 특성이 부각되었는데 호머는 신들을 상당한 정도로 탈신성화 시켰다. 즉 초월을 세속화시킨 것이다. 시인 헤시오도스(760-750 b.c.)는 올림푸스산의 신들의 이야기에서 헬라문화를 세상에 초점을 맞추는 단초를 열었다. 그 신들의 이야기들이 인간의 영역으로 옮겨와 있는 것을 발견한다. 인간적인 동기에 기초한 신들의 이야기로 발전했다. 초월이 현세의 인간의 삶을 위한 것임을 확실하게 했다.

그 이후의 철학자들은 이전의 세계의 역사들을 이 세상의 변화를 추구하는 과정으로 이해하였다. “인간들의 지혜에 대한 사랑”이 희랍철학이다. 철학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지혜에 대한 사랑”이다. 철학자들은 인간의 지혜를 사랑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인간들이 사는 이 세상, 이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알려고 노력했고 그리고 그 생각한 것을 글로 남겼다. 지혜는 이 세상의 삶을 위한 필수 조건이기 때문이다. 쉬운 말로 세상의 생명망을 위한 철학을 했던 것이다. 공중에 뜬, 허공에 뜬 초월 철학이 아니고 세상의 생명망을 위한 철학이었다.

풀라톤의 대화록을 보면 쏘크라테스(470 혹은 469-399 BC)는 쏘피스트 들이 사회적인 지위와 영향력을 가지고 있을 때에 살던 분인데 소피스트들은 아테네시의 민주화에 공헌한 분들이다. 정치와 사회적인 모든 조직에서의 민주화에서만 지역의 생명망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사회적인 문제가 토의를 거치고 투표를 거쳐서 결정되는 사회가 되었을 때에 중요한 것은 잘 정리된 논리나 이론 전개가 필수적이었다. 이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연설학원이 세워졌고 표현의 기술을 익히는 공부를 하였다. 이런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 곧 소피스트들이었다. 이들이 세상의 생명망을 위해 앞장 선 사람들이었다.

쏘크라테스나 소피스트들은 그리스문화의 중심을 이 세상에 두고 토론하고 연설하였다. 그런데 소피스트들은 수사학적 기교에 관심을 둔 반하여 소크라테스는 선에 대한 지식과 헌신이 기교에 앞서는 것을 보여주었다. 쏘크라테스는 이상적 실재의 영역이 있음을 인정함에서 그것이 이 세상의 변화를 꽤하는 이상임을 확신했다. 이 세계를 위하는 다른 초월의 세계를 전제한 것이리라! 그 이전의 풀라톤주의자들은 이상적 실재에만 정신을 판 나머지 이 세상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쏘크라테스에 와서는 지금의 세계가 더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 세상의 이상을 초월에서 발견하였다. 그러나 그 초월의 이상은 현실 속에서 실현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풀라톤은 정상적인 인간의 진술과 믿음의 의미를 이행하기 위하여 이데아 혹은 형상(forms)의 세계를 설정하였다. 예컨대 선이라던가 아름답다는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원래 있는 어떤 것이라고 알았다. 선은 월래 있는 것이고 인간은 그것을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으로 풀라톤은 믿었다. 수학적 형상들과도 같은 원리다. 수학의 원리들은 수학자들이 만든 것이 아니고 발견한 것이다. 진선미도 같은 것이다. 풀라톤의 위대성은 이런 가치들을 이 세상을 위하여 필요한 것으로 바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발 더 나아가서 그리스 철학사상을 이 세상에 중심하고 설명을 시도했다. 그는 이 세상을 넘어선 제일원인들을 신이라고 부르면서도 그것들은 성격상 이 세상적이라고 이해하였다. 풀라톤의 사고의 방향은 위쪽으로 더 향하고 있는데 반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래쪽으로 더 향하고 있다.

 
   
 

초월신앙은 성경의 기초이다. 문제는 그 초월이 이 세상의 생명망을 위한 것으로 해석이 되는가 아닌가에 있다. 초월이 이세상의 생명망을 위한 것이 아닐 때는 그것은 가짜 초월이요 거짓 초월이다. 즉 허상이다. 이 세상을 위한 생명망과 직결되지 않은 초월은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생명망과 직결된 초월만이 진짜 초월이다. 초월은 이 세상을 위해 존재할 때에 의미를 갖는다.

다시 강조하지만 희랍의 철학이란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y)이다. 희랍철학자들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면서 좋은 삶이 무엇인지를 찾아 헤멘 사람들이다. 세계와 인간관계를 통전적으로 이해하려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초월, 신 자체를 사람들의 삶을 위하여 연구하고 관심하였다. 즉 문화, 세상의 변화가 주제였다. 이 세상의 삶의 확언을 위하여 저 세상에 관심했던 것이다. 성경의 언어로 하나님은 이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제1원인의 설명 역시 이 세상에 대한 확언이 필요해서였다.

구약에서 신이 여럿이 아니고 한 분만 있다는 사상으로의 변화는 이 세상의 변혁을 위한 작업이라고 여겨진다. 애굽 탈출 이후 유대인들이 빚진 신은 단 한 분 야웨이시다. 이 초월자에게 이 땅에서의 자유와 해방이 빚진 것이다. 더 이상 다른 신들은 필요가 없고 오직 한 분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김에서 이 세상의 삶의 변화를 추구하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우상 타파운동이 시작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을 탈애굽시킨 신 야웨만이 참 신으로 받았다. 그 신만이 이스라엘에게 세상의 생명망을 주셨기 때문이다.

주전 6세기경의 예언자들은 땅을 만든 신이 야웨 하나님이심임을 고백한다. 예레미아는 10장 3절에서 5절까지에서 다른 신들을 거부한다. 그 다음에 쓰여진 창세기에서는 야웨 하나님의 창조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을 창조하신 유일한 창조주 하나님만을 섬김에서 이 세상의 주로 하나님을 고백한다. 신앙의 세속화가 여기에 있다. 땅을 잘 다스리라는 신의 음성을 귀담아 들으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을 유대교가 했다. 역사의식이 유대교에서 시작이 되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변혁을 중요시한 증거다. 율법도 이런 관건에서 나왔지만 기득권자들이 이것을 오용하여 약자 지배를 위해 썼을 뿐이다. 그래서 예수의 등장이 율법파기 선언과 함께 시작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도 바울 시대에 극심한 핍박 속에서 초월적인 신앙이 깊게 번져갔음이 당연하다. 그런 초월의 믿음, 죽은 후의 천국에 대한 믿음 없이는 그 참혹한 죽음의 현실을 이겨낼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올 때는 일제의 탄압이 시작되던 때였다. 1900년에 들어서면서 합방이 되고 민족독립운동이 세차게 일면서 일제는 머리 좋고 가슴 뜨거운 조선 사람들을 잡아죽이기 시작했다. 그 중엔 그리스도인들이 다수였다. 이런 어려운 때에 초월의 신앙이 없으면 살아나갈 수가 없었다. 서양의 선교사들로 부터 전달된 복음은 그래서 초월적이 되었다.

매우 가난한 삶을 살던 중국에 들어왔던 기독교복음 역시 초월적이었다. 그 초월적 복음이 아편으로 이해되었다. 기독교의 초월신앙이 아편처럼 일시적으로 고통을 치유는 시키지만 근본적인 치유를 시켜주지 못했다. 따라서 모택동이 중국을 정복하면서 이런 초월적인 신앙이 거부되었다. 초월의 신앙에서 의는 꺾이고 선은 짓눌렸기 때문이다. 당시의 기독교 초월의 신앙은 이 땅에서 토지를 빼앗긴 백성들에게 천국의 땅을 더 많이 차지하게 한다는 허망한 약속을 줌에서 착취자들이 계속적으로 약한자들의 땅을 빼앗도록 방치했었다. 중국의 새 혁명이 일어난 것은 초월의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이 세상의 생명망을 구축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자각이 있었다. 현실의 부정과 불의와 억압을 초월의 신앙이 막아내지 못했기에 중국의 생명들이 계속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한 당시 기독교청년회 총무인 젊은 오요종목사와 같은 기독인들이 새롭게 조직한 교단이 삼자교회(애국운동)다. 지금 중국에 공인된 기독교가 바로 삼자교회이다. 팅주교 등이 대표로 있는 중국의 삼자교회의 신학의 핵심은 이 세상을 변화시켜서 눌린 자와 가난 자가 없는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고 모든 백성들이 평등하게 행복을 누리면서 평화롭게 살도록 돕자는 데 있다. 중국의 삼자교회에서는 초월의 신앙이 중국인들의 생명망과 직결되는 신학을 구축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처음 온 선교사들이 우리 민족이 일제에 눌려살면서 큰 아픔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고 초월적인 신앙을 심어줘서 아픈 현실의 삶을 이겨내게 한 것은 잘 했는데 그것에서 끝인 것이 너무나 아쉽다. 보다 더 적극적인 이 세상안에서의 생명망 목회를 하신 예수의 삶과 교훈을 밝혀내지 못한 것이다.

예수는 가난한 유대 백성들의 이 세상에서의 생명망을 넓히려다가 죽으신 것이다. 민중을 살리기 위하여 초월을 슬로간으로 내걸고는 민중을 탈취하는 당대의 유대교의 종교 부로카들과 로마정권의 정치 권력가들과 예수는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결국엔 유대인들이 전국에서 모여드는 해방절 유월절 때에 지역 생명망을 확대하려는 예수를 초월신앙을 빙자하여 밥 먹고 살던 제사장들과 장로들 그리고 로마의 정치 권력자들이 잡아 죽인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는 갈릴리 지역의 생명망을 넓혀나가시던 자에게 가해진 정치권력의 폭력이었다. 예수가 단순히 초월의 신앙 목회를 하셨다면 십자가 처형은 없었을 것이다. 예수가 갈릴리의 가난한 사람들의 생명을 진작시키시려고 생명망목회를 적극적으로 하시다가 결국엔 기득권 세력들의 이해관계에 직면하게 됨에서 참혹한 죽음을 당하신 것이다. 예수를 죽음 앞에서 떨지 않게 한 것은 초월신앙이다. 실로 그는 백성들의 생명망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내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초월의 신앙이 전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죽음 앞에서 외쳤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새롬교회가 지역의 생명망을 넓히는 일을 계속 하기를 바란다. 그 앞길이 평탄치 않다는 것을 늘 알고 있어야 한다. 초월의 신앙을 가진자는 생명을 걸고 이 땅에 생“명망을 놓아가는 자다. 이 땅에서 생명망을 만들어감에서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 이 새롬교회의 역사가 길어질수록 생명망이 더 멀리 그리고 넓게 펼쳐나가서 많은 생명들을 살려내기를 기원한다.

 
   
 

[관련기사]

이원돈 기고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많이 본 기사
1
"한국교회 진단과 대안" 정성진 목사 초청 강연회
2
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 교수 시국성명서 발표
3
이찬수 목사, 정말 아픈가?
4
“인성검사 통과 안 되면 목사 안수 못받는다”
5
김동호 목사 이미 은퇴한 목사아닌 가?
6
102회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대한 긴급 제안서
7
원주제일교회 성도들 주일 날 상경 시위
8
장신대 김철홍 교수 글에 대한 학생들 입장
9
개혁하는 교회 탐방(거룩한 빛 광성교회)
10
대림절(Advent) 교회력의 의미
신문사소개후원하기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성동구 성수동 성덕정 17길 10 A동 202호   |  전화 : 02-469-4402  |  행정 : ds2sgt@daum.net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서울 아02054  |  발행인 · 편집인 : 유재무 |  대표 : 이명남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 진
Copyright © 2011 예장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pck-goo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