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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9.21  16: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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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과 사회법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성당(Canterbury Cathedral)

지금 교회법과 사회법의 서로 다른 배경으로 인한 다른 판결로 교회들이 열병을 앓고 있다.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를 사회법으로 규정하거나 판단하는 것에 대하여 사실 조심스럽다. 법학자들은 그런 주장을 한다. 그래서 어떤 법관은 교회 사건을 곤혹스러워 하고 심리 중 혹은 판결 전에 양자에게 화해와 중재를 요구하기도 한다. 종교단체의 문제의 최종심을 사회법으로만 적용하는 것을 좋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교회법으로서 구제받지 못한 이들이 교회 법 절차의 심각한 하자나 재판부의 도덕적 문제, 민주주의 기본 원리나 정의에 어긋나서 사회법으로 가지고 가는 것은 말릴 도리가 없다. 그들이 종교인이기 전에 한 국가의 구성원으로 기본권과 인권이 현저히 침해 당하거나 불리한 대우를 받았다면 당연히 국가법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강북제일교회는 물론 봉천교회도 사회법으로 가는 것을 탓하고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주교 토마스 베케트 참살 사건
교회법과 사회법의 충돌은 역사상 많이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여기 의미있는 자료을 소개한다. 교회와 사회법의 역사적인 최초의 충돌은 1170년 영국 캔터베리 대성당의 주교좌 토마스 베케트가 네 명의 기사들에게 도끼로 맞아 죽는 사건이 있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성직자나 주교가 치정이나 적대자들로부터 암살이나 죽임을 당한 경우는 있었지만 신앙심이 높은 영국에서 그것도 성당 안에서 주교가 도끼에 찍혀 살륙을 당한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가? 거기에는 교회와 국가, 교회법과 사회법이라는 갈등이 있었다.

당시 영국에는 ‘성직자특권법’(Beneit of the Clergy)이 있었는데, 이 법은 성직자는 국가 반역죄 외에 어떠한 범죄도 교회 법정에서만 재판을 받을 권리를 주장할 수 있었다. 살인, 절도, 강간, 약탈, 폭행, 노상 강도짓을 해도 자신이 성직자라는 사실만 증명되면 세속법의 처벌을 피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것은 성직자들이 특권적으로 누리는 잘못된 법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당시는 교회도 사회도 시민도 이 법에 관하여 일언반구도 하지 못했다. 우선은 법을 만들 수 있는 이들과 그 법의 혜택을 누리는 이들이 서로들 친구들이기 때문이었다.

영국의 왕 헨리 2세와 그의 충직한 신하들은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한다는 정의의 관점에서 ‘범죄한 성직자’도 국가법으로 다스리기를 원했다. 하지만 교회의 권위와 성직자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교권은 이를 개인의 문제임에도 이것을 확대해석하여 교회에 대한 간섭 혹은 나아가 성직권에 대한 세속권의 도전 구도로 만들어 성직자의 범죄의 문제는 오직 교회에서만 다뤄야 한다는 이론을 만들었고 그 논리로 사회법을 누르고 있었다.

특히 이런 논리를 대표하는 토마스 베케트 주교는 성직자이면서 동시에 대법관에도 임명된 당시 최고 지성인이었다. 그렇게 그는 국가가 성직자를 처벌하면 교회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범죄를 저지른 질 나쁜 성직자들이 계속 생겨나는데도 당시 국가에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게 된 셈이다. 그러나 왕은 1164년 공의회를 소집하여 왕의 허락 없는 로마에 상소 금지, 외국여행 금지, 그리고 범죄한 성직자는 평신도로 강등시키는 법안을 마련한다.

범죄한 성직자들을 교회의 잘못된 권세로부터 보호 받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국가의 정당한 조치였다. 베케트를 위시한 영국교회는 이에 저항했다. 신앙의 이름으로 그리고 이때부터 국가와 교회는 갈등하기 시작했고 왕의 진노로 말미암아 베케트 주교는 6년이나 피신하여 지내면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교회의 권세를 지키는 인물로 추앙받았는데 그는 “하느님께 속한 것을 시저에게 넘겨주지 않겠다.” 는 결심을 하는 자들을 대변한 것이었다.

그가 복권되어 로마에서 돌아갈 때 자신이 없는 동안 강력한 사회법으로 성직자를 통제하려는 영국 왕과 그 법에 승복하거나 충성하는 일부 주교들의 파면장을 교황으로부터 받으며 문제는 시작된다. 이러한 베케트의 행동으로 인하여 울화통을 터뜨린  왕에 대하여 충성심 강한 기사들 몇 명이 결국 일을 저지르게 된다. 대성당에서 도끼로 베케트를 암살한 것이다. '하늘의 권세자' 주교 베케트의 이런 참살 소식은 당시 영국과 그리스도교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우매한 민심은  이 문제의 화살을 엉뚱하게도 왕에게 돌린다. 결국 왕은 로마 교황에게 무릎을 꿇게 되었고 공개적인 속죄 기도와 고행을 치렀다. 그리고 죽은 베케트는 3년 만에 성인으로 시성되어 영국과 유럽에서 순교자로 명성을 떨치며 그 이름을 올렸다. 이러한 베케트를 위로하고 기억하기 위하여 세워진 캔터베리 대성당은 사실 그의 사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후 이 켄터베리 성당은 우매한 민중들의 가장 유명한 순례지가 되었다. 또 "성인과 순교자는 무덤에서도 통치한다.” 는 유명한 말이 나왔다. 이러한 내용은 담은 문학작품 “대성당의 살인” 이라는 제목으로 영국의 문인 T. S. 엘리어트(Eliot) 는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죽어서도 권세를 누리는 베케트의 무덤을 향한 우매한 순례객들을 소재로 한 것이다.

한국교회의 실상
한국의 보수적인 목회자와 대형교회의 성공주의 목회를 대표하는 조용기 목사 부자가 교회를 자기가 키웠다고 맘대로 돈을 가져다 썼다가 장로들의 고발로 사회법정에서 실형을 선고 당했다. 그의 변호인들이나 보수적인 교계는 선처를 바랐는데 한국교회의 영향력과 사회봉사, 초범, 고령인점을 들었다. 그러나 이미 정치권의 탄원서와 동업자들의 이해 관계를 업고 법정 구속은 면했다. 또 한국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교회에서도 역시 교회의 돈이 넘쳐나 쓰고도 남아서 따로 관리하다가 사고가 나기도 했었다. 사회법으로 차자면 이는 조세포탈과 금융법 위반으로 처벌감이다. 

오늘날 가장 평화롭고 사회의 모범이 되어야 할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인들 사이도 서로 물고 뜯고 죽이기 위하여 고소와 고발을 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상회에 대한 지도와 감독도 미흡하지만 절차를 거치거나 화해 조정도 없이 사회법으로 나가기도 한다. 교회의 선배들은 문제가 복잡하고 이견이 분분한 교회의 분쟁이나 고소나 고발을 일삼는 전과가 있는 교회는 사고 당회로 분류하여 치리장을 파송, 화해와 권고의 조치를 하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지경에 이르렀는가? 그러니 판결에 승복하지 아니하고 사회법에 호소를 하는 것을 나무라기도 뭐하다.

교회법에서 사회법으로 가는 문제는 주로 절차상의 문제들이 많은 데 교회법의 오심이나 불법성을 호소하고 있다.  교회 재판도 상식과 신앙으로 하면 된다.  그런데 이해 당사자들의 안면 정치와 로비로 인하여 재판국이 흔들린다는 말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 최근 봉천교회의 사건을 다룬 재판국원이 금품을 수수했다는 문제가 불거져 나오면서 우리교단과 재판국의 구성원에 대한 도덕적 해이가 극에 달했다는 비판이다. 이렇게 되니 교회가 사회에 대하여 할 말이 없어진다. 

우리사회도 과거에는 판결이 정치적 영향을 받기도 하고 전관 예우나 거대 로펌의 힘이 없지 않으나 일반적으로 법원의 판결이 소송 당사자들로부터 영향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간혹 검사나 변호사가 로비를 받았거나 금품을 수수했다는 말은 있지만 신성해야 할 교회 재판에서 재판관들이 금품을 수수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다. 사실 여부는 추후에 밝혀지겠지만 정황과 증거들이 나왔다면 그것만으로도 일벌백계하여 즉각 직위해제하고 사회법에 의하여 처벌 받아야 할 것이다.

이번 99회기 총회는 PCK총회 100년을 준비하는 회기로 여러 가지 면에서 교회개혁과 변화의 기로에 서있는데 무엇보다도 교회의 성장이 둔화되었다지만 더욱 복잡하고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고 이해관계가 충돌하고 있다. 그리하여 개인 간의 감정도 이권도 법리로 포장하여 고소와 고발이 폭주한다. 그런데 총회 재판국원은 연조와 노회 별 할당으로 공천위가 공천하나 교권 정치인사들이 로비를 하여 노른자위 부서들을 맴돌아 다시 들어가므로 권력화 되었다는 지적이다. 이번에 총대들은 총회의 망신을 자초한 뇌물수수 재판국원들을 직권 면직하여 당사자는 목회도 할 수 없도록 출교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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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터베리 대성당, 1988년에 지정된 세계문화유산
(위, 사진)

캔트 지방의 캔터베리 성당은 영국 교회의 정신적 지주이다.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노르만 왕조를 세운 정복왕 윌리엄 1세는 앵글로색슨 식의 전례와 성당을 싫어해 에설버트 왕 때부터 성당이 있던 곳에 새로 대성당을 지으라고 명했다. 명령을 받은 랜프랭크 대주교는 70세의 고령이었지만,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대성당을 완성하려고 했다. 그러나 예상 밖으로 일정이 늦어지고 건축가가 몇 차례나 바뀌어, 1130년이 되어서야 간신히 헌당식을 할 수 있었다.

캔터베리 대성당은 한 암살 사건을 계기로 솝꼽히는 순례지가 되었다. 사건은 대성당이 헌당된 지 40년 만에 일어났다. 당시 국왕이었던 헨리 2세는 성직자인 토머스 베켓을 중용해 대법관에 임명했고, 1162년에는 대주교 자리에 앉혔다. 이 때까지만 해도 베켓은 헨리 2세한테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성직에 있으면서도 왕권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대주교가 된 이후에는 태도가 바뀌어 교회 권리를 옹호했다. 1164년에는 교회 재판권을 제한하려는 클라렌든 헌장에 서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헨리 2세의 노여움을 사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 뒤 1170년에 로마 교황의 압력에 굴복한 국왕과 화해하고 귀국한 베켓은 교황의 지지를 등에 업고, 국왕 편에 선 주교들을 차례차례 해임시켰다. 정교를 분리하려는 시도가 방해받자 헨리 2세는 분노를 터뜨렸다. 왕이 홧김에 내뱉은 말이 화근이 되어 그의 충복이었던 4명의 기사가 1170년 12월 29일 캔터베리 대성당 안에서 베켓을 살해했다. 헨리 2세는 번민했고, 살해 무대가 된 대성당에 참배하라고 사람들에게 호소했다. 또한 베켓의 밑에 있던 수사들은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고 철야 기도를 올렸다. 이런 모습을 본 사람들은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수군거렸다. 암살된 지 3년 만에 베켓은 성인으로 추종되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대성당을 찾는 순례자가 늘어났고, 순례자를 위한 숙박 시설뿐만 아니라 수도원까지 건립되기에 이르렀다. 이 가운데에는 영국 최초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원도 있다. 일찍이 에라스무스는 베켓의 무덤이 보석 등으로 호화롭게 치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 여행 메모에 “성토마스 베켓은 틀림없이 자신의 무덤이 꽃으로 뒤덮이기를 바랐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오늘날 베켓의 무덤에는 간소한 묘비뿐이다. 교회의 옹호자인 베켓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고, 무덤은 1538년에 헨리 8세의 명령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베켓의 암살만큼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종교 사건도 없었다. 베켓에 관한 이야기는 소설이나 연극,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1935년에는 미국 태생의 영국 작가 토머스 엘리엇이 [대성당의 살인]을 발표했는데, 이 시극은 같은 해 대성당에서 초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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