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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종교 개혁가. 토마스 뮌처REFO 500을 준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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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1.01  20:4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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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종교 개혁가, 토마스 뮌처(Thomas M"untzer)
 
REFO 500을 준비하며
 
   
토마스 뮌쩌(Thomas M"untzer, 1489 ~ 1525.5.27)

초기 생애와 경력
뮌처는 하르츠 산맥의 슈톨베르크에서 한 시민의 아들로 1489태어났는데 유년기나 청소년기에 관해 알려진 바는 거의 없다. 그의 가족은 이단 사상과 관련된 시민 소요 혐의 때문에 슈톨베르크를 떠나야 했던 것 같으며, 그후 아셔스레벤·할버슈타트·크베들린부르크 등지를 전전했는데 뮌처는 크베들린부르크에서 라틴어 학교에 다닌 듯하다. 그의 이름이 1506년 라이프치히대학교 학적부에서 발견되었으며, 1512년 프랑크푸르트대학교에 입학하였고 후에 신학학사와 문학석사 자격을 얻었다.

라틴어·그리스어·히브리어에 능통한 전문적 언어학자로서, 고대문학과 인문주의 문학, 특히 성서에 조예가 깊은 당대 최고의 학식을 갖춘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1513년 할레(잘레)에서 조교수로 일했고, 1514, 1515년에는 아셔스레벤에서 성직자와 교사를 겸임하며 교회개혁을 위해 투쟁하는 중간계층을 대변했다. 또한 개혁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여러 비밀결사를 주도했다.

1516~17년 아셔스레벤의 프로제수도원 원장으로 일했고, 1517~18년에는 브라운슈바이크 마르티네움(시의 고등학교)에서 가르쳤으며 1518년에는 마르틴 루터와 그의 개혁사상에 매료 되었다. 1519년 그가 프란체스코수도회, 로마 가톨릭 교회의 위계질서, 성인숭배를 규탄하는 발언을 한 뒤 마르틴 루터 추종자라는 호칭이 붙었다. 그는 처음부터 독립적인 사상가였다. 라이프치히에서 벌어진 루터와 독일 신학자 요한 에크(1486~1543) 사이의 논쟁에 수시로 참석한 뒤 바이센펠스의 보이디츠 수도원에서 문헌연구에 몰입했다.(1519~20)

그곳에서 신비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기 나름대로의 종교개혁 사상을 발전시켰다. 지방의 시민들과 함께 비밀리에 일을 꾸미는 행동주의자였던 그가 이제는 루터가 출범시킨 종교개혁을 교회와 세속생활의 근본적인 변화, 즉 혁명으로 보는 개혁가로 성장했고 이후 자신의 입장도 이러한 기준에서 평가했다츠비카우에서는(1520~21) 상류계급과 초기 광산조합 사이의 사회적 긴장 속에서 목회자로 성공했다. 이때 그는 평민편에 섰는데, 그들이야말로 하나님의 법과 뜻을 땅에서 실행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의 관행뿐만 아니라 루터파의 개혁 이념에도 점점 더 반대하면서 또한 종파주의적 입장을 더욱 강화해 갔는데, 그것은 ' 츠비카우의 예언자들'로 알려진 급진적 종교개혁 집단의 지도자 니콜라우스 슈토르흐의 가르침으로서 진정한 권위란 성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사람들에게 부여한 내면의 빛이라고 보는 입장이었다. 츠비카우에서 추방된 뮌처는 15세기의 개혁자 얀 후스의 가르침을 따르는 보헤미아 집단인 타보르파(Taborites) 중에서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자츠와 프라하를 여행했다(1521). 1522년 노르트하우젠에서 루터 지지자들과 대항해 싸웠고, 그들과 신학적 견해가 다름이 더 분명해져 루터에게서 등을 돌렸다. 그를 도시에서 추방하도록 맨 처음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들도 루터파였다.

뮌처의 개혁운동
뮌처는 루터의 신학이론에 따라 종교혁명을 시작했지만 곧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는 가르침이 성령으로부터 온다고 믿고, 그 가르침들을 루터의 의인론(義認論:믿음에 의해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이나 성서의 권위에 대한 교리(성서는 신적 진리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교리)와 대립시켰다. 루터는 성서의 권위보다 성령의 내면적인 빛을 우위에 두는 뮌처에 대해 성령을 '털까지 통째로' 삼킨 자라고 비난했다. 뮌처 신학의 혁명적 측면은 반그리스도적 세상 권력이 필연적으로 정복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하나님의 도구인 민중 스스로가 이 변혁을 실천해야 한다는 명제를 결합시킨 데 있다. 그는 민중이 가진 것도 없고 지식에 오염되지도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잘 드러낼 것이라 믿었다.

1522년 말에는 바이마르와 비텐베르크를 거쳐 할레에 도착했다. 글라우하에서 설교를 통해 수많은 추종자들을 모았고, 이곳에서 후일 아내가 된 수녀 오틸리에(Ottilie von Gersen)를 만난 것 같다. 이들 사이에서 2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1523년 부활절 전에 뮌처는 만스펠트 광산 지역 근처 알슈테트의 작센 공동체 목사가 되었는데, 그의 가장 중요한 신앙적·전례적(典禮的)·정치적 저술들은 이곳에서 나왔다. 그중에는 〈독일교회 성무일과(聖務日課) German Church Office〉·〈독일 프로테스탄트 미사 German-Protestant Mass〉·〈항변 혹은 변호……

참그리스도교 신앙과 세례에 대해 Protestation or Defense……Regarding the Beginning of the True Christian Faith and Baptism〉·〈글로 씌어진 신앙에 대하여 Of Written Faith〉·〈거짓 믿음을 폭로함 Precise Exposure of False Belief〉 등이 있다. 또한 이곳에서 연설문 '방어의 동기'(Motivation for Defense)의 초안을 작성했고, ' 제후의 설교'(Princes Sermon)라는 연설을 했다. 이 연설은 종교개혁 원리에 호감을 갖고 있던 작센 제후들을 결집시켜 이른 바 반그리스도교 귀족들과 맞서게 하고 자신의 가르침을 보호하고자 한 것이었으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524년 '그리스도인 통합'이라는 이념을 기초로 해 하나의 자위조직으로서 알슈테트 연맹이 창설되었는데, 이것은 1524년 가을 그가 알슈테트를 떠날 때까지 그의 교리의 중심체였다. 

농민 반란
뮌처는 뮐하우젠에서 노동자 계급을 조직하고 '영원한 하나님의 계약'이라 불렀다(농민 전쟁). 그리고 1523년 이래 지속된 국내운동(회심의 내적 경험을 한 것으로 알려진 선택된 사람들이 지도하는 운동)을 더욱 본격화시켰다. 또다시 추방되자 뉘른베르크로 가서 중요한 정치적 저술을 펴냈다. 그 뒤 농민 반란(1524~25년에 무거운 세금, 경기침체, 기타 여러 불안 때문에 귀족들에 대항해 일어났으나 실패로 끝남)이 시작된 헤가우와 클레트가우를 방문했고, 그리센에서 겨울을 났다.

농민반란을 체험한 그는 뮐하우젠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고, 이곳은 반란자들이 정부 의회를 전복시키고 1525년 3월에 소위 '영원한 의회'를 세운 뒤 중부 독일의 반란 중심지가 되었다. 뮌처의 독불장군 같은 구상에 따라 1525년 4~5월 민중들은 종교·정치 권력자들에 대한 승리를 쟁취했다. 시민들과 심지어 상당수의 하위귀족들도 동맹에 가담했다. 뮌처와 추종자들은 확고하고 일관되게 운동을 밀고나갔다. 그러나 그들은 지역적 편협성을 극복할 능력이 부족했고, 결국 1525년 5월 15일 프랑켄하우젠 전투에서 제후들의 막강한 힘 앞에 패배했다(혁명).

그는 자신의 운동에 대한 저항은 이기적이고 물질적이며, 지역적인 동기에서 비롯된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고 배격했다. 그는 민중들이 자신들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을 깨닫고, 개인의 이익보다 집단의 이익을 위에 둘 때에만 사회변혁을 위한 하나님의 의지를 밖으로 드러낼 수 있다고 믿었다. 뮌처의 업적은 주로 농민들의 신앙·윤리 훈련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들이 사회적·법적 차별이 없는 미래사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그것은 지나친 요구였다.

반란 기간 동안 뮌처는 농민·상인·평민들의 당면문제에 관한 투쟁을 그리스도교 세계 전체의 해방과 관련지으려 했고, 다양한 집단들의 일상적인 문제들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반란은 실패했지만 그는 이 실패를 아직 정화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보았을 뿐 새로운 사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의 패배로 보지는 않았다.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뒤, 5월 27일 제후들의 뮐하우젠 병영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평가
농민반란의 유혈진압 이후 뮌처의 구상은 혁명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그의 구상은 자유로운 민중이 출현해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며, 무력행사도 불사한다는 것이다. 몇몇 학자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뮌처의 반대자들이 그의 사상의 혁명적 요소를 배격하고, 거짓과 날조, 비속한 언어로 그의 특성을 왜곡해 그를 유령이나 악마의 화신 같은 인물로 둔갑시켜 버렸다고 주장했다.

뮌처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난 후에도 그의 저술들은 교황의 금서목록에 올라 있었다. 루터 시대에까지 거슬러올라가는 뮌처 전설은 끈질기게 지속되어서 18세기의 합리주의적 계몽사상조차도 이를 제압하지 못했다. 19세기에야 비로소 뮌처는 학자들의 연구대상이 되었다. 그의 사람됨과 업적은 프랑스 혁명, 역사를 대립이념의 변증법적 전개로 보는 헤겔의 역사개념, 마르크스주의 역사관, 19세기 중반의 정치 민주화 운동 등의 영향을 받아 재해석되었다.

마르크스주의 역사 기술에서는 19~20세기 계급투쟁을 거쳐 사회주의에 이르는 혁명 전통이 뮌처에게서 시작되었다고 쓰고 그 사회주의에서 뮌처의 근본적인 관심이 성취되었다고 본다. 몇몇 프로테스탄트 역사 연구에서는 이단으로 취급받던 뮌처를 교회 안에 복귀시키려고 노력했다. 예를 들어 메노파 역사 기술에서는 대부분의 프로테스탄트나 로마 가톨릭교와는 다르게 뮌처를 해석한다. 뮌처에 대한 해석은 그의 사상의 두드러진 정치적 연관성 때문에 오늘날에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슈톨베르크 전경

 토마스 뮌처에 대한 논문(저자 미상) 

토마스 뮌쩌의 신학사상

   
 

목 차 

1. 서 론
2. 토마스 뮌쩌의 신학 사상
A. 토마스 뮌쩌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
B. 토마스 뮌쩌와 마틴 루터의 대립사상
(1) "오직 성경으로만" : 성령주의
(2) "오직 믿음으로만" : 제자도
(3) "두왕국 사상" : 종말론적 왕국
C. 급진적 종교개혁에서의 뮌쩌의 위치
D. 토마스 뮌쩌의 역사적 의의
3. 결론
참고문헌
 

1. 서 론 

16세기 종교개혁이라 하면, 일방통행적으로 루터의 개혁만을 생각해 왔었는데 루터에 대한 재평가들로 인해 16세기 종교개혁의 다원적이며 복합적인 배경들을 고찰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종교개혁을 사회경제사적 시각으로 바라다 보게 되었다. 그 결과 마틴 루터(Martin Luther)를 부패하고 오도(誤導)된 카톨릭 교회의 개혁자로 인정하면서 당시 농민들의 봉기를 주도한 토마스 뮌쩌(Thomas Muntzer)를 사회개혁의 선구자로 높이 평가하게 되었다.

실제로 종교개혁 당시의 사회개혁자들을 깊이 연구해 온 죠지 윌리암스(George Huntston Williams)의 작품들은 뮌쪄를 급진적 종교개혁자의 선구자들 중 하나로 표현한다.  사회개혁이 없는 종교개혁만의 개혁은 우리에게 큰 의미를 가져다 줄 수 없으므로 종교개혁 당시 일어났던 사회개혁 운동에 대한 고찰을 뮌쩌의 신학사상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2. 토마스 뮌쩌의 신학사상 

A. 토마스 뮌쩌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

뮌쩌의 사상을 근본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생애와 더불어 그에게 영향을 끼친 사람들에 대한 고찰이 필요할 것이다.
1) 마틴루터
1519년 5월 15일 Juterbog의 프란치스칸 수도사들에게 보내는 루터의 편지를 통해 볼때, 그당시 루터 자신은 뮌쩌를 적대시할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음을 알게된다. 1520년 5월 30일 Heinrich von Bunau에게 쓴 루터의 편지를 통해서 보아도 그는 여전히 뮌쩌를 자기편으로 여겼음을 알게된다. 더우기 1520년 봄, 루터의 천거에 의해 뮌쩌가 쯔비카우의 신부로 임명된 사실을 볼 때 루터는 뮌쩌에게 호감을 가졌던 것이 분명하다. 뮌쩌의 연구가 엘리거(W. Elliger)는 루터가 뮌쩌를 그와같이 여겼던 이유를 뮌쩌의 사상적 미완성에 돌리고 있다.

곧 아직까지는 그의 신학적 사상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는 것이다(당시 그의 나이는 30살). 이처럼 루터가 뮌쩌에게 호감을 가진 사실은 여러가지 사실을 알려주지만 무엇보다도 뮌쩌 또한 초기에는 루터를 존경했음을 암시해준다. 동년 7월 13일자로 루터에게 보내는 뮌쩌의 편지속에서 우리는 그와같은 사실을 알게 된다. 뮌쩌는 루터를 '하나님이 사랑하는 모델이자 등불'로 부른다. 이것은 뮌쩌가 어느정도 루터로부터 영향받았음을 증명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2) 쯔비카우의 예언자 니콜라스 스토르크
그러나 이윽고 뮌쩌는 그의 사상을 확고히하여 루터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게된다. 보이디쯔에 머물면서 읽었던 책, 곧 12세기의 시대경륜을 통해 묵시문학적 사사를 펼친 플로라의 요아킴(Joachim won Fiore)의 예레미아서주해서를 통해 역사에 대한 급진적인 관점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땅위에 로마제국에 이어 새시대가 올 것을 확신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영향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선택된 도구"로 여기에 되었다. 한편, 당시 타울러(Johannes Tauler)는 하나님을 만나는 과정으로서 내적 고난을 강조했는데 이로부터 뮌쩌는 그의 구원교리에서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얻기 위한 신비적 체험의 주된 구성요소로서 고난을 이끌어낸다. 구원을 확실히 하기까지에는 먼저 회의(懷疑)와 절망을 체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니콜라스 슈토르크의 신비주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윌리암스(G. Willams)와 그리취(Eric W. Gritsch)가 동의하는 것으로써 슈토르크의 영향이 뮌쩌의 신학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왔음이 분명하다. 특히 윌리암스는 슈토르크의 성령주의에 의해 뮌쩌가 루터의 신학을 극복했다고 덧붙힌다. 앞장에서 밝혔듯이 슈토르크는 쯔비카우의 견직공이었는데 후에 급진적 재세례파의 지도자가 된 인물로서 "환상과 꿈을 통한 직접적인 계시에 기초한 급진적 성서주의"를 가르쳤다. 아울러 그는 조만간 이 땅위에 천년왕국이 도래할 것을 기대했다.


이들 외에 뵈마르(Heinrich Boehmar)도 뮌쩌가 슈토르크의 영향아래 있음을 인정하는데 그는 특히 슈토르크의 성령주의와 천년왕국설 그리고 급진주의가 뮌쩌에게 영향을 주었음을 언급한다.  당시 쯔비카우와 보헤미아는 후스(Huss)파와 타보르파(Taborite,진보적인파) 운동의 중심지였는데 뮌쩌는 그들로부터도 큰 영향을 받게 된다. 후스파의 급진적인 단체인 타보르파는 "사도적인 순수함을 따르는 교회를 세우기 위해 선택된 자들이 쓰는 무력을 어느정도 정당화했는데, 이런 특징적인 사상들로부터 뮌쩌는 큰 영향을 받았다.

 B. 토마스 뮌쩌와 마틴 루터의 대립사상

 (1) "오직 성경으로만" : 성령주의
루터가 로마교회의 엄청난 부패에 항거하여 홀로 설 수 있었던 것은 성서에 대한 재발견이었다. 즉 그가 의심할 수 없었던 진리가 성서 속에 있었는데 그것은 그로 하여금 로마교회의 부패를 발견하게 하였고 그 부패에 부단히 맞설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루터는 성서를 제일로 삼을 수밖에 없었으며 계시의 유일하고 결정적인 근원으로 여길 수 밖에 없었다. 그런 배경속에서 그는 "오직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이라는 슬로건을 높이 들게 되었던 것이다. 성서 자체만으로도 모든것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로써 그는 성서의 절대권위를 주장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설교와 기록된 말씀외의 또다른 계시란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계시가 나타나고 매개되는 곳은 예배하는 공동체였다.
반면 뮌쩌에게는 성서만이 유일한 계시가 아니며 성서 속에서도 하나님의 계시를 발견할 수 있지만 성서외의 또다른 계시, 곧 개인의 영혼 깊은 곳에서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는 계시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영혼의 심연으로부터 살아있는 말씀을 솟구치게 하신다는 것이다. 뮌쩌에 의하면, 이 말씀이 내적 말씀인 것이다. 영혼의 고통과 회의(懷疑)에 반응하여 일어나는 계시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실행케 하며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한다.

(2) "오직 믿음으로만" : 제자도
루터에게 있어서 구원은 인간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다. 곧 구원은 인간의 행위로 이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이것이 로마서 1장 17절의 재발견이었다. 여기에서 무섭고 무자비하게 여겼던 하나님을 자비로운 사랑의 하나님으로 깨닫게 되었고 사람은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심판을 면하고 구원받게 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죄인인 인간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성령을 통한 은혜와 그에 대한 믿음만이 그를 의롭게 해준다. 오직 신앙으로만 가능하다. 그러기에 그 의(義)는 전가(轉嫁)된 의(義)이다. 즉 의인(義認)이요, 칭의(稱義)인 것이다.

반면 뮌쩌에게 있어서, 칭의는 실존적인 개인의 체험신앙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믿음을 고백한 자의 순종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된다. 그는 그런 순종을 가리켜 "그리스도에 대한 모방"이라 칭한다. 선택된 자의 표시는 세상적인 행동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명령을 충실하게 순종함으로 드러나는데 그 하나님의 명령은 다름아닌 사회정의의 실현이다. 뮌쩌의 이신칭의는 영혼 속에 들려지는 성령의 계시에 따라 역사 사회속에서 거룩하여 지는 것이다. 즉 뮌쩌의 의는 역사적. 사회적 실현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것이 곧 종말적 천국실현인 것이다.

(3) "두왕국 사상" : 종말론적 왕국
루터는 복음과 성령의 주권영역인 그리스도의 왕국과 죄와 율법과 죽음의 세계인 불신앙의 세상을 구분하였다. 그는 종말의 임박성을 느끼기는 했지만 신인협동의 원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기에 루터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위에 건설하려는 것은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뮌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는 신인협동을 통해 이루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괴르츠(Hans jurgen Goertz)는 뮌쩌의 천년왕국관이 중세 신비주의 유산인 "협동" 개념에 기초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뮌쩌는 두왕국을 통한 하나님의 주권사가 아니라 산상수훈등 과격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함으로 이루어지는 하나의 종말론적 왕국의 실현에 관심하였던 것이다. 그

러한 종말론적 왕국에 근거한 뮌쩌는 인간의 평등과 재사의 공유와 평등한 분배를 주장하였으며 그것의 모형으로써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공동체를 생각하였다. 결국 그런 사상적 배경으로 인해 로마교황과 봉건제후들이 그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한 천년왕국사상을 실현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당시 사회체제의 변혁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하나님의 선민(選民)을 이끌고 성스러운 천년왕국을 건설하는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이스라엘 민족이 약속받은 가나안 땅으로 전진해 들어간 사건을 자신의 모델로 삼았다.

라서 그는 교회를 통한 점진적인 개혁이 아니라 완전한 체제의 개혁과 정치, 사회의 개혁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곧 "교회없는 종교개혁" (Reformation without church)이었다. 종교학자 그리취는 이와같은 뮌쩌의 사상에 대해 "초기 프로테스탄티즘의 부단한 정신의 상징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C. 급진적 종교개혁에서의 뮌쩌의 위치
루터와 칼빈에 의해 주도된 개신교 종교개혁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면 한편에선 로마 카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과 기성 국가 권력 모두에 항거하여 일어난 소종파 운동이 있었으니 이를 가리켜 종교개혁좌파(T e Left Wing of Reformation)의 운동이라고 명명할 수 있겠다. 또한 이 운동은 스위스, 화란, 독일 등지에서 일어난 것으로써 이들 중 많은 교파들이 재세례(anabaptism)를 강조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제세례파"라고도 부른다. 사실상 지금까지는 종교개혁좌파계통의 운동에 대한 연구가 부족한 편이었는데 최근에 들어와서는 베인톤(Roland H. Baintion)교수와 윌리암스(George Williarms)교수의 노력에 의해 많은 진전을 보고 있다.


뮌쩌와 재세례파의 관계에 있어서는 뮌쩌가 농민전쟁당시에 유아세례를 반대했다는 점과 그의 천년왕국적 개념때문에 많은 오해를 빚고 있다. 심지어 불링거(H. Bullinger)는 재세례파의 기원을 뮌쩌나 뮌스터 사건(1534-35)에서 찾고 있는데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그리 간단하지 않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뮌쩌는 성경보다는 성령의 우월성을 주장하며 동시에 자신을 "성서에 속박되지 않는 내적인 말씀의 예언자"로 믿었으며 환상과 직접계시를 통한 성령주의를 설교하였다. 그가 유아세례를 거부함으로써 재세례파로 보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그를 재세례주의자로 몰아 붙힐 수는 없다. 재세례파가 주장하는 신약성경적인 교회와 신자의 세례의 회복에 대한 관심보다는 정치적,사회적혁명에 더 큰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아서도 그렇다.

"종교개혁좌파계통" 즉 "급진적 종교개혁"속에서 뮌쩌의 위치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선 오늘날 대체로 윌리암스의 견해가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는 급진적 종교개혁을 크게 3가지로 나눈다. 즉 재세례파(Anabaptist), 성령주의자(Spiritualist), 복음적인 이성주의자(Erangelical Rationalist)이다. 그는 뮌쩌를 이런 부류들 중 성령주의자, 특히 혁명적 성령주의자(Revolutionary Spiritualist)에 포함시킨다. 스위스 형제단의 지도자인 그레벨과의 관계속에서도 뮌쩌의 위치는 더욱 확실시 된다.

그레벨이 쯔빙글리와의 결별이후 1524년 9월 5일에 뮌쩌에게 긴밀한 연락과 협조를 요청하는 서신을 웠는데 그는 아무런 회답도 주지 않았다. 이점은 뮌쩌가 스위스 형제단의 재세례파운동에 별로 관심이 없었든지 신학적으로 맞물리는 접촉점을 찾지 못해서일 것이다. 곧 그레벨과는 달리 뮌쩌는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개혁을 과격한 행동으로 표출했던 것이다. 바로 위와 같은 점들은 뮌쩌를 "혁명적 영성주의자"로 본 윌리암스의 견해를 뒷받침해준다.

한편 트륄치에 의하면, 뮌쩌가 어떤 종파나 교회를 세우려 하지 않았으며 또한 종파를 위한 어떤 교리나 신조를 만들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그를 소종파주의자라기 보다는 신비가에 더 가깝다고 한다. 

D. 토마스 뮌쩌의 역사적 의의
루터의 종교개혁이 이루어 놓은 업적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루터로 인해 빚어진 농민전쟁의 참패가 16세기 이후 독일 사회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을 면할 수는 없다. 텐브록(R.H. Tenbrock)은 농민전쟁의 패배로 인해 이후 독일의 정치. 경제가 후진성을 유지할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한다.   틸리히(P. Tillich)는 루터의 두왕국론에 대해 말하기를 개인의 구원문제와 사회의 변혁문제를 별개의 것으로 대립시키면서 또한 개인의 구원과 역사 전체의 구원을 별도로 분리시킨 것이 두왕국이 갖는 큰 약점임을 지적한다. 그당시 종교개혁의 열망뿐이 아니라 사회개혁에 대한 열망이 거세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이를 그의 개혁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오늘날 루터의 두왕국교리는 실제적으로 교회로 하여금 국가의 일에 불간섭하게 하거나 협력하도록 만들었음이 지적되고 있다.

농민전쟁을 계기로 루터의 교회론은 국가의 공직자들과 결탁하는 국가교회의 방향으로 나갔으며 그 국가교회는 세속 권력자인 제후의 손에 들어가 프로이센의 융커당원들을 거쳐 나찌하의 제국교회로 이어졌음을 비판하는 것이다.
루터가 교회의 개혁에만 국한되었던 것에 반해, 토마스 뮌쩌는 사회적인 개혁에 까지 그의 개혁의 범위를 넓혔음이 분명하다. 그는 종교개혁을 뛰어넘어 이땅에 하나님의 나라의 문을 열기 위한 종교. 사회혁명을 원했던 것이다. 필자가 보는 한에 있어서 그의 신학은 세상은 변혁과 정신을 위해 큰 힘을 제공했으며 특히 사회구조의 변화와 개인 구원을 동시에 부르짖는 현대의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다.

뮌쩌가 이룬 개혁의 의미를 그리취는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뮌쩌의 개신교 의의는 그가 혁명을 계획하고 이를 거의 실현했다는 사실에 있기 보다는 차라리 기독교 신앙과 당시 민중의 입장간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성찰에 있다. 그가 의식적으로 신앙적 확신과 농민봉기에 대한 그의 개인적 관심을 연결했을 때 비록 기초적 윤곽일 뿐이긴 하지만 그는 사회적. 정치적 행동의 신학을 창조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정치. 사회. 종교적 상황속에서 하층계급이 주체세력이 되어 일어난 사회운동을 통해 볼 때 그들이 개혁요구 속에는 그 시대의 사회 개혁까지를 포함하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데 이에 뮌쩌는 그들의 개혁요구에 기꺼이 부응하였던 것이다.

뮌쩌에 대한 평가는 양극을 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농민전쟁이 극에 달했을 때 루터는 뮌쩌를 가리켜 "악마의 화신" 이 고 혹독히 비난했는데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루터주의자들은 뮌쩌를 가리켜 "불안한 영혼" 또는 "이기적인 환상가"라고 비판한다. 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를 "부르조아 혁명의 초기 영웅"으로 받든다.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서 그는 당대에 위대했던 인물로 즉 유럽에서 시민혁명의 시조가 된 위대한 지도자요 민중종교개혁자로 대두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뮌쩌에 대해 갖는 견해가 다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를 정치적으로 해석하기도 하고 하층계급의 권리를 주장한 혁명가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와는 달리 그를 사상적으로 해석하여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에 대항하여 하나님 나라를 지상에 세우려고 한 신학자로 이해한다. 뮌쩌는 지상적이 것을 위해 그의 신학으로 대항했으며 그의 삶을 불태웠던 것이다. 아뭏든 카알 카우츠키(Karl Kautsky)에 의해 뮌쩌가 사회주의의 선구자로 등 한 이래 변증법적 유물론의 정신으로 이해되고 있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민중신학자들에 의해 뮌쩌가 소개되고 있다. 그들은 민중신학의 전거(典據)를 교회사적으로 종교개혁 당시의 뮌쩌의 사상에서 찾음으로써 그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김용복에 의하면 토마스 뮌쩌는 민중과 함께 하는 교회를 창출한 인물로 평가된다. 또한 서남동은 "16세기 독일에서 뮌쩌의 출현으로 민중의 신학, 혁명의 신학은 뚜렸해진다. 루터는 수도원의 밀실에서 종교개혁 추진의 영감을 받았지만 뮌쩌는 사회운동에의 참여에서 혁명의 요청을 체득했다......뮌쩌가 겨냥한 것은 종교개혁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사회전반의 구조적 개현이었으며 그 행동적 주체는 어디까지나 민중이었다."고 하면서 뮌쩌의 위치를 새롭게 부각시키고 있다. 

3. 결론
16세기의 독일은 정치. 경제. 사회. 교회 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정치적으로 봉건 영주들의 황제권 찬탈이 계속되어 전쟁이 끝이지 않았으며 황제는 황제 나름대로 황제권 계승을 위해 자본가에게 정치자금을 차입하는 등 국가의 번영과 발전에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경제적으로는 신흥 자본주의로 대두로 도시의 실업가들이 등장하였고 농촌은 이농현상으로 피폐해져갔다. 더우기 영주들의 토지소유의 강화와 직접 경영등으로 농민의 어려움은 극에 달했다.

회 역시 일반 봉건 영주가 직면한 재정적 궁핍과 더불어 세속주의에 빠져 부패와 타락의 온상지가 되었다. 이러한 당시의 사회적 상황 속에서 국민들의 사회적 개혁의 열망은 당연한 처사였던 것이다. 따라서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당시 국민들의 개혁요구에 발을 맞추었던 토마스 뮌쩌의 생애는 오늘을 사는 교회로 하여금 고조되어가고 있는 실정에서 그의 생애와 사상이 새롭게 평가됨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 하겠다.

이제 20세기의 교회는 그 어느때보다도 사회의 구조적 개혁요구에 부응하려 하는 움직임들을 활발히 전개시키고 있으니 이러한 때일수록 사회개혁의 선구자인 토마스 뮌쩌에 대한 깊은 연구가 더 절실하다 하겠다.

교회는 사회 속에 있어서 사회와 더불어 공존하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교회의 신학은 사회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따라서 교회의 신학은 프락시스의 신학일 수 밖에 없다. 이는 구띠에레쯔(G.Gutierrez)의 다음의 말을 통해서도 분명해진다. "하나님 신앙은 그의 존재를 주장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위해 행동하는 데서 성립된다. 그것은 하나님을 설교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내어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신앙의 확증이다. 믿는 다는 것은 실천하는 것이다.

믿음은 사회속에서의 실천을 통해 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신학은 "인간이나 기본적 권리에 대한 인식론적 숙고에서 그치지 않고 크리스쳔 공동체의 삶에 있어서 경제, 사회, 문화적 문제에 있어 분명하고도 분석적인 작업을 해야하는 것이다." 결국 교회의 신학은 경제. 사회. 문화가 전반적으로 함께 어우러져 이루어질 때에만 참된 프락시스의 신학으로 발전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프락시스의 신학을 바로 뮌쩌의 종말론적 왕국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본 글에서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독일 국민은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요구했으며 이에 토마스 뮌쩌가 그의 삶을 받쳤음을 고찰해 보면서, 교회에 대한 새로운 이해가 시시각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이 때에, 더우기 교회의 사회개혁이 소리 높여 외쳐지고 있는 이 때에 그가 16세기에 이루어 놓은 작은 업적은 21세기를 살아가야 할 우리에게 커다란 좌표를 던져 준다고 하겠다. 

참 고 문 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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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룹바알
(121.XXX.XXX.61)
자칫 오해하기 쉬운 뮌쩌와 그의 사상에 대한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말 그대로 <좌파 개혁가>였고, 오순절 직통계시파 아닌가 하는 오해 때문일 것입니다.
그의 성령 이해 또한 오늘날 다시 써야 하는 성령론에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2014-11-01 23:41:46)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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