얀 후스(Jan Hus, 1372~1415) 체코의 신학자 - 예장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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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후스(Jan Hus, 1372~1415) 체코의 신학자후스 개혁 600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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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2.27  11: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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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얀 후스(Jan Hus, 1372~1415), 체코 신학자

후스의 개혁 600주년

   

   
 
2017년은 종교 개혁가인 독일 마르틴 루터의 개혁운동 500주년이 되는 중요한 해이다. 먼저 그의 조국 독일에도 그 해를 중심으로 개혁가의 도시 돌아보기를 홍보하고 있다. 그리고 이미 화란에 본부를 둔 <REFO 500>이라는 기념사업회가 조직되어 벌써부터 활동하고 있다. 한국지부(위원장 이종윤 목사)는 주로 복음주의권인 합동측 총신대 교수들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 기독교 단체로는 PCK 목회자들이 2015년 12월 "교회개혁 예장 목회자 연대" 라는 개혁운동 단체를 조직하여 교회 개혁 500주년을 준비하면서 그들의 정신과 사상을 살펴보고 또 오늘의 우리교회 개혁의 실질적인 과제들을 모색하고 있다. 이런 교회개혁 운동의 흐름을 찾아보는 일환으로 지난 번 네덜란드 교회에 이어서 개혁가 이전의 개혁가들로 금년 600주년을 맞는 체코의 '얀 후스'를 소개한다. 

   
루터가 구 교회의 잘못에 대한 95개 조항을 붙혔던 비텐베르크 성당

체고, 프라하의 봄
체코의 수도는 프라하다. 국립 공항 이름도 프라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은 바츨라프 하벨 공항으로 바뀌었다. 프랑스의 샤를 드골 공항이나 미국의 존 F 케네디 공항처럼 실존인물의 이름을 공항에 붙이는 것은 그 인물이 국가적인 지도자였음을 의미한다. 바츨라프 하벨(Václav Havel),  그는 2차 대전 후 소련에 의해 공산주의 독재국가가 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독재에 저항한 민족 지도자였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의 민주화를 이루어 낸 "벨벳 혁명"을 이끌어 소련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했고, 이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첫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분열을 막지는 못했다. 하지만 다시 체코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재선까지 성공하여 체코의 민주화와 경제발전을 지휘하고 EU 가입의 초석을 놓았다. 
 
그 이전 196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당 제1서기 두프체크에 의해 시발된 '프라하의 봄'은 1960년대 정체된 경제에 대한 국민의 높은 불만과 자치권을 제한받던 슬로바키아 민족의 감정도 악화되어 일어났다. 1968년 1월 당 총회에서는 노보트니가 당 제1서기를 사임하고 개혁파인 두프체크가 그 자리를 맡아 국가 주요요직에 개혁파를 임명했으며, 4월에는 다음과 같은 행동강령을 발표했다. ①재판의 독립, ②의회제도의 확립, ③언론의 사전검열제 폐지, ④민주적인 선거법제도의 창설, ⑤언론·출판·집회의 자유 보장, ⑥국외여행·이주의 자유보장, ⑦경찰정치의 종식, ⑧공업·농업 부문의 개혁 ⑨체코와 슬로바키아의 동등한 권리에 의한 연방제 이행, ⑩자주독립에 대한 대외정책 추진, ⑪과거에 권리를 박탈 당한 모든 시민의 완전한 복권 등이었다.

   
프라하의 봄, 침공한 소련군 탱크에 저항하는 젊은 학생들

두프체크는 이와 같은 개혁조치를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라고 했는데, 언론·집회·출판 등이 자유화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잠시 동안의 '프라하의 봄'이 유지되었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 사태가 동유럽으로 파급될 것을 우려한 소련은 1968년 8월 20일 당서기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앞세우고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5개국 군대 약 20만 명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 두프체크를 비롯한 개혁파 지도자들을 소련으로 연행했다. 이로써 프라하의 봄은 막을 내리고 1969년 4월 당 제1서기가 된 후사크에 의해 사태가 수습 되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시민들은 두프체크를 지지하며 시민혁명을 일으켰고 소련은 탱크를 앞세워 진압과 침공을 한다. 그리고 1968년 바츨라프 광장에서 얀 팔라치라는 학생의 분신으로 세계적인 뉴스가 되기도 하였다. 그후 동유럽이 공산주의에서 벗어나면서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분리 된다. 20년 후, 1989년 하벨의 지지자들에 의하여 다시 100만 명이 바츨라프 광장에 집결하면서 이 광장은 체코 민주화의 상징이며 성지가 된다.  

블타바(몰다우)강의 정경이 아름다운 선율로 수놓인 스메타나의 교향시 ‘나의 조국(MA VLAST)’은 체코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널리 사랑받고 있는 얀 후스(Jan Hus)와 그의 사상, 그를 따르는 후스파의 이야기라고 한다. 교회사에서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개혁가들의 이야기가 많이 있다. 16세기 본격적인 종교개혁 운동이 일어나기 전 이미 타락한 구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개혁가들의 움직임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그래서 일부 교회사 연구가들은 이들 교회개혁운동들을 ‘첫 번째(과격한) 종교개혁운동’이라고 부른다. 이중 가장 대표적인 개혁운동은 13세기 발덴저, 15세기 보헤미아에서의 종교개혁운동이다.

얀 후스
그 중에 한 사람 1415년 7월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이단자로 낙인 찍혀 화형당한 체코인으로만 알려진 '얀 후스'가 있다. 그는 1370년 남보헤미안 후시네크 지방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사제의 길에 들어서서 프라하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연구하였다. 그가 사제가 되고자 했던 동기는 그 당시 농부의 아들들이 그랬듯이 안정된 생활기반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신학수업 과정에서 철저한 변화를 경험하고 열정적인 진리의 탐구자요 신학자로 거듭난다. 그에게는 체코 종교개혁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는 얀 밀리치 크로메리즈와 마티아스 본 야노프의 신학사상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후스에게 영향을 준 사상가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 교수였던 존 위클리프(1330∼1384)였다. 위클리프는 성경에 입각해 기존 교회질서에 준열한 비판을 가하고 철저한 교회개혁을 부르짖었던 종교개혁의 선구자였다. 영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후스는 1398년부터 프라하대학 철학부에서 강의했다. 1402년부터는 3,000명 가량이 모이던 프라하 베들레헴 성당에서 설교자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체코 선현들의 개혁전통에 굳건히 선 민족 설교가로서의 면모를 과시했는데 당시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던 프라하에는 황제 카를4세가 자신의 이름을 따 독일어로 교육하는 대학을 세워 독일어와 독일문화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체적인 신앙고백과 모국어를 중심한 신학운동을 전개한 후스의 개혁운동은 체코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얀 후스는 프라하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1393년 학사에 해당하는 학위를 받고 1396년 인문학 마스터(mistr svobodných umění) 학위를 받는다. 그 후 1400년부터 대학에서 교양 학부와 신학부의 교수로 일했으며, 로마 가톨릭 사제가 된다. 그리고 프라하의 성 미카엘 교회 (Kostel sv. Michala)에서 설교하기 시작한다. 1402년 3월 14일부터 베들레헴 성당(Betlémská kaple)의 설교자로 활동했다. 1401년에는 철학부의 학장을 맞고 1년 후에는 대학의 총장이 되어 체코인들이 독일의 힘에 맞서 싸울 것을 독려한다. 그는 프라하 대학의 지도적인 체코인 교수로서 라틴어 뿐 아니라 체코어로도 저술 활동을 했고, 체코어를 개량하고 체코어 철자법을 개혁하여 지금까지 이어지게 하였으며 모국어인 체코어 찬송가를 보급하였다.

   
후스의 초상

그는 체코어와 라틴어로 수 많은 글을 남겼는데 설교만 해도 무려 3,000여 편이 넘는다. 그의 설교는 평민들로부터 왕족과 귀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경청했다. 그의 교회개혁과 사회윤리적 내용을 지닌 설교는 청중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후스의 비판이 중세교회의 치부였던 '면죄부 판매'에까지 이르자 교황, 왕, 귀족, 교회지도자들 등 기득권층이 강력하게 견제했다. 후스는 프라하에서 모든 교회활동을 금지 당하는 처분을 받게 된다. 후스는 부패한 교회의 기득권 세력과 타협하지 않고 남뵈멘지역으로 가서 들판과 광장에서 민중을 향해 진리를 설교했다. 이 무렵 후스가 로마교회의 잘못을 지적하기 위하여 라틴어로 쓴 대작이 ‘교회론(De ecclesia)’이다.

후스의 개혁운동
후스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는 교황권 분열에 직면하여 ‘교회의 개혁과 일치’를 명분으로 콘스탄츠에서 열렸던 공의회를 기점으로 구체화 된다. 공의회는 이단자로 처형된 위클리프와 후스 사상과의 관련성을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후스를 소환한다. 후스의 친구들은 공의회가 명분으로 내세우는 교회일치와 개혁의 이면에는 커다란 음모가 도사리고 있음을 간파하고 후스가 콘스탄츠에 가는 것을 한사코 만류하였다. 그러나 후스는 교회 지도자들과 맞붙게 될 논쟁에 대비해 그의 입장을 철저히 준비한 후 콘스탄츠로 향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보헤미아의 왕을 겸하고 있던 지그문트 황제도 그의 신변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편지를 써주기까지 한다. 그러나 후스는 도착하자마자 감옥에 갇히고 만다.

후스에게는 주장을 내세우거나 대화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도리어 후스가 쓰지도 않은 글들을 빌미로 법정에 고소 되고 이단자로 판결 받는다. 후스는 끈질기게 그가 주장했던 입장을 철회하도록 강요 받았지만 사람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에 대한 순종의 길을 선택했다. 마침내 그는 1415년 7월6일, 콘스탄츠의 화형대에서 이단자의 누명을 쓴 채 죽어갔다. 후스와 같은 신학적 입장에서 후스의 입장을 대변했던 히로니무스 폰 프라하도 같은 이유로 같은 방법에 의해 같은 장소에서 화형대의 연기로 사라졌다. 지금도 독일 콘스탄츠에는 두 사람의 이름이 새겨진 큰 바위가 그 날의 비정한 사건을 말 없이 증언하고 있다.

후스의 처형은 체코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체코 땅에는 혁명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1415년 가을에는 여러 귀족들이 콘스탄츠 종교회의의 결정을 거부한다는 결의문을 발표하고, 후스의 가르침에 따라 체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수호하겠다는 선언문을 발표한다. 이는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도전과 봉기의 신호였으며, 프라하 대학교 교수들과 체코 대중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들은 성만찬 때에 신약성서의 최후의 만찬 이야기에 근거하여 빵과 포도주를 모두 나누었으며(그 전에는 성직자들에게만 포도주를 나누는 것이 허용 되었는데, 후스가 살아 있을때 지지자들이 후스의 허락을 받아 이를 채택하기 시작했다), 포도주를 담은 성작은 후스주의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프라하 - 얀 후스 종교개혁광장(프라하 중앙광장)

결국 후스파와 로마 가톨릭 사이의 갈등은 깊어졌고 1419년 7월 30일 프라하의 노베메스토에서 얀 젤리프스키(Jan Zelivsky)가 주도하는 강경파 후스주의자들이 동료 후스주의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시 의회 의원들을 시청 창문 밖으로 던지는 제 1차 창문투척사건이 발생했으며, 며칠 뒤 바츨라프 4세가 죽자 후스주의자들은 보헤미아를 장악하게 된다. 후스의 처형 뒤 후스의 사상과 뜻을 이어받은 강력한 신앙공동체인 보헤미안 동포단이 형성돼 이들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복음이 체코 민중의 가슴에 심어졌다. 보헤미안 동포단은 경건주의의 모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계 선교의 아방가르드 역할을 했다.

1432년 후스파 교도들은 공의회가 열리는 바젤에 와서 후스가 지향했던 종교개혁의 정당성을 변호하고 그 정당성을 인정 받았다. 후스는 단순히 교회개혁의 선구자로서 뿐 아니라 주체적인 민족정신을 고양시킨 애국자로 지금까지 체코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 1915년, 후스 사후 500년을 맞아 프라하 구시가 중심부에 후스의 기념비가 세워져 이곳을 찾는 이들에게 민족 주체성과 독립정신을 증언하고 있으며 이후 체코는 공산권 되었지만 그 민족정신은 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체코 교회는 알렉산더 두프체코 서기장 시절 체코의 얀팔라치라는 학생의 분신자살과 구 소련의 체코침공 등 현대사의 많은 굴곡 속에서도 문화적으로 종교적으로 자신들만의 정신을 지켜왔으며 공산주의 사상 속에서으로 로마드카와 같은 걸출한 신학자도 배출한 바 있다.

올 2015년 후스의 개혁 600년을 맞는 해, 후스의 개혁신앙과 정신을 따르는 체코 형제복음 교단은 많은 행사들을 예고하고 있다. 다음은 체코의 선교사 이종실 선교사가 페이스북에 소개한 글이다. 이 교단과 PCK는 2000년대 교단 간 협정을 맺은 바 있다.

"6백년 된 옛날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불필요한 보수주의의 되새김이며 힘과 자원의 무의미한 소비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마스터 얀 후스의 죽음 이후 많은 일들이 일어났고, 바뀐 것은 사실입니다. 후스는 체코인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10인 가운데 속하였습니다.(2005년, 체코 국영방송이 실시한 앙케이트 결과) 그러나 그의 입장과 원칙은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지나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확인 되었습니다. 7월에 프라하로 그리고 축제의 다른 기간에도 여러 지역으로 여러분을 초청합니다. 다음과 같이 후스를 만날 수 있습니다.

다음은 후스의 올해 기념행사에 대한 체코형제복음교단 요엘 루믈 교단 총회장의 말이다.

• 거짓된 위선을 좋아하지 않고 신뢰 받도록 노력한 후스
• 거짓을 미워하고 진리를 기뻐하기 위해 많이 힘들었고 자기 부인을 해야 했던 후스
• 교만과 거만함을 거부하였으며 모든 사람들에 대해 심지어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배려를 하였던 후스
• 태만을 싫어하였으며, 양심과 질서로 더 잘 살 수 있다고 믿었던 후스
• 기행(奇行)이 무엇인지 알았으나, 절제와 검소함을 견고하게 붙잡았던 후스
• 체념을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인생의 기쁨을 찾았던 후스
• 기괴하고 천박한 민족주의를 이해하지 않았지만, 체코적인 것과 체코 문화를 좋아하였던 후스
• 게으름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창작과 지식에 대한 갈망을 좋아하였던 후스
• 난폭함을 거부하였으며 미래의 관점에 대한 보증으로서 순결함과 도덕성을 사랑하였던 후스
• 잘못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용납하지 않았으며 다시 고치려고 노력하였던 후스

오셔서 마스터 얀 후스의 이러한 유산을 만나신다면 그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후스의 사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진리의 추구’였다. 그는 이렇게 역설했다. “크리스천들이여! 진리를 찾으라. 진리에 귀를 기울여라. 진리를 배우라. 진리를 사랑하라. 진리를 말하고, 죽음을 두려워 말고, 진리를 사수하라.” 그에게 진리의 근원과 진리의 표준은 성경 말씀이었다.

후스의 종교개혁사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다. 둘째, 성직자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셋째, 성직매매를 금지한다. 넷째, 성서가 신앙과 행위를 판단하는 유일한 기준이다.

자신의 믿음 때문에 화형대로 끌려가기 전 감옥에서 드렸던 후스의 기도

나는 비록 약하나 당신의 뒤를 좇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나의 영혼을 강건케 하셔서 기꺼이 감당하도록 하소서.
만약 육신이 약하거든 당신의 은혜로 앞장을 세우소서.
은혜가 당신과 나 사이에 그리고 내 뒤에 따르게 하소서.
주 예수님 당신이 아니시면 당신을 위하여 잔인한 죽음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나에게 두려움이 없는 심장과 올바른 신앙과 요동치 않는 소망과 완전한 사랑을 주옵소서.
당신을 위해 인내와 기쁨으로 저의 생명을 바치게 하옵소서.
"너희 안에서 일하시며 자기가 참으로 기뻐하는 것을 원하게도 하시고 행하게도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빌2:13)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시험을 이기게 하시는 우리의 능력이십니다!

ㅡ 얀 후스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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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실
(78.XXX.XXX.69)
국립어학원의 외국어표기법에 따르면
얀 밀리치 크로메리즈 -> 크로미에르지체의 얀 밀리치
마티아스 본 야노프 -> 야노프의 마데이
로 표기할 수 있습니다.

(2015-03-11 15:4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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