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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골 이야기(기획)REFO 500(1517-2017)
함께 공존하는 교회가 생명력 있는 교회다.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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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1.18  00: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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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형교회 어떻게 해야 우리와 공존할 수 있나?

사회에서 대 기업을 비난하지만 그래도 대기업이 하는 일도 있다. 과거 대 기업들은 문어발식 기업군도 문제지만 정경유착이라는 특혜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상대적으로 중소기업과 밴쳐기업을 보호하고 독려한다. 최근엔 청년창업과 1인 기업을 적극 장려하고 있다. 대 기업이 기업활동을 국내에만 머물지 않고 세계로 나가야 한다. 선진국들도 경쟁하고 국가는 각종지원을 한다. 그것은 가서 돈 많이 벌어오고 세금도 내고 고용도 늘리라는 말이다. 그런면에서 대형화는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기업이 과연 그렇게 성장하고 그런 공식으로 가는가? 그렇게 하는 곳은 얼마되지 않는다. 무리한 투자와 세금포탈, 외화도피로 자본 거덜나면 정부 공적자금 받아서 기업은 망해도 기업가는 살려내니 도덕적 해이가 이룰 말할 수 없다. 이런 대형화의 폐해는 기업만이 아니다. 건물도 그렇다. 그래서 대형화는 필요악이다. 요즘 장안의 화재는 잠실의 제 2 롯데월드 건물인데 겉보기는 우리나라의 건축기술이나 능력이 대단하다고 본다. 하지만 건축 당시부터 특혜의혹(성남비행장의 고도제한)에 지반침하와 주변 상권잠식에 사고다발로 대형건물 하나 때문에 이런 고생과 희생을 당해는 것이 정상인가? 하는 생각이다.

교회는 어떤가? 슈바르츠라는 사람은 NCD라는 이론을 통하여 교회는 문제만 없으면 자연적으로 성장한다고 했다. 그래도 얼마까지라는 것은 있어야 할 것이다. 어디 까지 성장하면 좋을 까? 보통 한 5천명이 넘는 교회를 대형교회라고 할 수 있다. 만약 1 만명이 넘는 교회라면 그것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데 드는 비용도 대단할 것이다. 그래서 이런 대형화의 발상은 교회의 정신이라기 보다 기업적 경영이 우선될 것이다. 그 인원들이 활동하는 예배공간과 부속건물, 관리팀 주차문제등 그 사회적 비용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럼 사람들이 왜 그렇게 모일까? 저절로 오지는 않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자 백화점이나 큰 건물을 비유한다면 싸거나 꼭 필요한 것이 있으면 사람들은 올 것이다. 사람들은 맘에 들면 사는 것을 아까워 하지 않는다. 어느 교회에 자기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곳에 갈 것이다. 불편해도 돈을 드려서 라도 간다. 그러나 그렇게 온다고 해도 한계는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국가에서는 다중이 모이고 돈을 버는 백화점에는 교통 혼잡부담금을 내게 한다. 그곳으로 오기 위한 도로와 혼잡으로 인한 타인의 손해에 대한 세금일 것이다.

한 예로 모 교회는 주일날 교인들의 들고 나는 문제로 그 주변의 아파트 주민들의 불만이 이루말도 못한다고 한다. 교회인근에 사는 이들이 무시로 교회로 드나드는 차량으로 인하여 불만이 고조되여 분쟁이 된바도 있다. 그래서 건물도 그렇고 모든 것은 아무리 크다고 해도 일정하게 규제를 한다. 건물도 그렇고 아파트 평수도 그렇고 허가사항이다. 그것은 다중이용시의 번잡과 위험성등 때문이다. 그런데 유독 교회는 그런 규제를 받는 곳도 내부적으로 제한하는 곳이 없다. 년전에 분당 우리교회 이찬수 목사가 매년 304천명씨 느는 교인들을 앞으로 10년후에는 흩는 다는 선언을 한바 있는 데 이는 더 비판받아 마땅하다.

아무리 온다고 해도 1만명도 10만도 좋다는 것인가?“ 그것은 안된다. 평균치는 있어야 한다. 군대로 치면 아무리 능력있고 용감한 장군도 1개 사단만 맡는 것 처럼 자신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하여도 몇만명을 놓고 설교는 할수 있는 지는 몰라도 일반적으로 목회를 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초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주로하는 일을 보면 외부 강연이나 회의 연합회등 교회 외적인 활동이 주다. 그렇게 많은 교인은 부목사 직원들이 관리하는 것이다. 아니 사육되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 곳은 좋은 음향시설과 화면을 띄어놓고 설교를 할 수는 있어도 양들을 돌아보는 목양으로써의 목회라고는 말할 수는 없다. 교인들을 부목사나 직원, 컴퓨터가 관리를 할 것이다. 목사는 오직 설교로만 소통한다. 심방과 면담은 극히 적은 이들과만 나눌 수 있다. 교인들은 그냥 관성에 떠 밀려 가는 것이다. 적당히 듣고 헌금내고 맘편하게 오고 가는 체육관 관중식 교회이다.

그럼 목사와 신자가 얼마의 사랑과 교감이 있어야 정상일까? 국가는 기준을 두워서 규제를 한다고 했다. 자동차도 보면 자신의 부와 권위를 자랑하려고 큰 차(험비)도 타지만 더 크게 보이려고 버스를 타지는 않는 다. 집도 마찮가지다. 아무리 넓은 집을 원해도 아파트의 경우 그 폭이 5배 이상을 넘지는 않는 다. 그런데 유독 교회만 평균치가 없이 무한대이다. 이게 정상일까요? 차고 넘치는 데도 계속해서 교인들을 오라고 전도를 종용하고 동원을 강조한다. 이게 제 정신일까? 정말 영혼의 구원과 인도를 위한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교회로 사람들을 더 많이 오게하고 그래서 더 많은 헌금을 내게 하고 더 큰 건물을 짓고 높게 보이려는 인본주의적인 발상 때문이다.

옛날에도 규제는 있었다. 아무리 사대부 부자라도 99칸 이상의 집을 지을 수가 없었다. 1칸 집이 서민이라면 100배를 넘는 부의 대형화는 안된다는 의미다. 또 경주의 최 부자집의 가훈인 육연(六然) 수신(修身)를 보면
자처초연(自處超然),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라
대인애연(對人靄然),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해라
무사징연(無事澄然),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라
유사감연(有事敢然),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라
득의담연(得意淡然),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라
실의태연(失意泰然),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하라

*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라, 높은 벼슬에 올랐다가 휘말려 집안의 화를 당할 수 있다. * 재산은 1년에 1만 석(5천 가마니)이상 모으지 말아라,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르니 1만 석 이상의 재산은 이웃에 돌려 사회에 환원해라. * 나그네를 후하게 대접하라. * 흉년에는 남의 논, 밭을 매입하지 말라. * 가문의 며느리들이 시집오면 3년 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특히 흉년에는 양식을 풀라고 했단다. 부자가 3대를 못간다는 말의 뜻을 알수가 있다.

사람들이 일하고 받는 월급도 그 편차가 있지만 적어도 한 용역에서 5배 이상의 차이가 난다면 그것은 문제다. 최대치와 최소치라는 합리성이 있다. 그러나 교회만 유일하게 없는 데 이것은 약육강식(弱肉强食) 아닌 가? 인위적으로 대형교회를 추구하는 목사들은 그것을 합리화라기를 하나님의 뜻이며 축복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절대로 축복이 아니다. 이런 대형화는 모든 것을 독식하는 데 그 자신의 정신과 영혼마져도 황폐하게 되는 것이다.

자 초대형 교회의 영향력이 노회에서 어떻게 발현되는 지 보자 97회 총회에 서울의 동남노회는 38명의 총대가 파송되였다. 그중 목사 총대의 4명이 한 당회이고 장로도 9명으로 총 13명이 총대다. 전체 38명중 약 30%가 특정교회의 지도자들이다. 이것은 숫자에 불과한 일이 아니다. 그 노회를 좌우지 할 수 있는 힘이다. 그들이 내는 상회비나 기여도를 무기로 한 노회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대형화의 폐해이다. 이 교회는 2014년 가을 노회에서는 부노회장의 노회장 승계를 뒤엎고 자기네 교회 장로를 바로 노회장으로 올려버렸다.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반대할 수 없다. 
   
      고 방지일 목사를 조문하고 나오는 김삼환 목사 일행

대 기업의 임원이나 이사회도 요즘은 다양성이라는 것 때문에 특정 지역이나 기관, 학교등 영향력을 받는 구룹를 배제하는 것이 추세다. 그런데도 대형교회들은 대내외적으로 막상 파워를 갖고 독주를 하고 있다. 이들이 외부 활동을 위하여 나가서 쓰는 돈이 보통이 아니다. 때로는 교회의 헌금을 인출하여 기업을 인수하고 설립하고 운영하고 있다. 이것은 전형적인 교회의 모습이 아니다.

교회는 예배하는 공동체다. 은혜가 되고 편안한 곳 가까운 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지금 그것을 기준으로 하여 교회를 선택하지 않고 있다. 유명한 곳 세속적인 파워나 능력이 있을 곳, 거기서 힘있고 능력있는 이들과 구룹이 되어 언젠가 도움을 주고 받을 수 있는 곳을 찿는 다. 이런 허위의식으로 신앙행활을 하는 것은 미련한 것이고 성경적이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도 세속주의 축복주의로 인한 잘못된 목회관이 무심한 대중의 기복적 욕구를 자극하고 저들로 하여금 예수믿는 것은 복받기 위한 것이고 그래서 누가 출세를 하고 복을 받았다는 증거에 현혹되여 건강한 신앙의 마비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형교회도 이제 함께 공존하려면 여기까지라는 것을 선언해야 한다. 그래서 더 이상의 건물을 짓고 교인들에게 편익을 제공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주변의 교회와 다른 동역자들과 공존할 수가 있다. 지역상권을 위하여 대형마트가 강제로 휴일을 하게 하고 백화점이 셔틀버스 운행을 중단했듯이, 교회는 몰려오는 이들을 위한 편의를 더 늘려지 말아야 한다. 어느 음식점은 준비한 재료가 떨어지면 문을 닫는 다고 한다. 이런 일은 고객에 대한 써비스측면도 있지만 본인 자신과 종업원 가정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동종업종 업자들과 공생공존하는 길이다. 장사꾼에게도 이런 의미와 도리가 있는 데 어째서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이런 인간적인 정과 의리가 남아있지 않을 까?

하나님의 원하시는 것이란 핑계를 대기도 한다. 그럼 이렇게 물어봅시다. 하나님이 그렇게 많이 모여서 예배하기를 원하고 계실까? 부대비용이 그렇게 드려서 누군가의 시간과 정성을 희생하고 뒷밭침하는 것을 원하실까? 그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각 일뿐이다. 대형화는 필요 악이다. 그래서 대형화의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은 어디 까지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자기과시와 허영심으로 멈출줄 모르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와 같이 쾌속질주하는 것이 요즘의 대형교회의 문제다. 그들은 돈을 주체못하고 밖으로 가져나와 별짓을 다한다. 교인들은 자녀들의 등록금과 집세 건강과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데 대형교회의 성직자들은 그 자녀들로 왕족처럼 살며 돈도 흥청망청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조화로운 평균치안에서 서로 공존하는 것이 필요하다. 축소지향적이고 정체, 규격화는 거부하지만 거의 100배가 넘는 차이는 불편이지 축복이 아니다.

대형화는 불법이나 적은 아니지만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 대기업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듯이 대형교회의 역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자들을 돌보고 도와주고 같이 성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의 대형화는 교인들의 쏠림현상으로 작은 교회 없는 교인들을 도둑질한다. 새벽기도 중계방송에 선전과 홍보로 인하여 명품을 선호하듯 명품교회 명품설교로 치장하여 교인들을 현혹하고 있다. 지금 국가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동반성장을 위하여 개입을 하는 이유도 그것이다. 대형화로 인한 독과점, 싹쓸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지금 처럼 대형화된 교회의 지도자들이 한국교회를 과잉대표하고 약한 교회 작은 교회와 목회자들을 대상화 하고 객체화하여 지배하고 엽신여기고 횡포를 부리는 것은 안된다. 대형화로 군림하고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더 희생하고 받은 축복과 은혜를 공공화한다면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 키 크다고 더 일잘하고 운동 잘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은 적당해야 한다. 크다고 주님의 사명을 더 잘 감당하는 것도 아니다. 인위적인 대형화, 과시적인 대형화는 이제 그만해도 된다. 한 사람의 목회자 그가 감당할 수 있는 목양의 질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옛날의 학교는 콩나물 교실이었다. 지금은 한반에 15명 내외다. 질적인 수업과 돌봄을 위해서다. 대형화 누굴위해서인가? 교인인가? 자신의 야망인가? 

자기과시와 허영심으로 멈출줄 모르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타고 쾌속질주하는 것이 요즘의 대형교회의 문제다. 돈 주체를 못하고 써도 써도 남아도니 별짓을 다하는 것이다. 일반교인들은 자녀들 등록금과 집세, 건강과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데 교회는 흥청망청이다. 모든 것은 조화롭게 평균치 안에서 서로 공존하는 것이 필요함에도 빈익빈 부익부의 대형화는 공룡이요 기형으로 사실 불편한 존재이다. 예수님을 곤혹스럽게 했던 유혹은 속된 세상 힘의 과시가 아니었던가? 돌 같이 흔한 엄청난 양의 재화 만들기, 세상을 호령하는 권력의 집중 과시, 만유인력 법칙을 뛰어넘는 초자연적 신통력, 이런 것 아니었던가. 이런 세속적 가치의 극대화를 세상은 '성공', '승리', 그리고 '영광'이라고 분칠하고 찬탄한다. 이런 탐욕적 호명에 민감하게 호응하는 종교가 있다면 그것은 참된 뜻에서 종교가 아니다. '으뜸 가르침'(宗敎)은 그곳에 이미 없다.
   
 

대형화에 대하여 전 부총리 한완상 박사(장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국이 진실로 세계 복음화—이 말은 정말 오염된 표현이지만, 하나님나라 확산의 뜻에서 쓴다면—의 동력이 되려면, 10만 명 거느린다고 자랑하는 거대 교회가 서로 소통하고 사랑하는 100명으로 구성된 1000개의 작은 교회들로 나눠지면서 널리 확산되어야 합니다. 거대화한 교회로 확대되면 예수님을 유혹했던 어둠의 세력이 신나게 다가올 것입니다. 작지만 예수님의 영, 고난과 부활의 영으로 서로 사랑하며 함께 공의와 샬롬을 만들어 가는 누룩 교회, 겨자씨 교회가 바로 예수님의 몸 된 공동체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공동체의 힘은 확대되면 줄어지지만 확산되면 오히려 커지게 마련이지요. 바로 이런 교회가 그립습니다.” 라고.

결론적으로 대형화는 누구에게 좋은 것인가? 아니 누구의 요구인가?
아무에게도 좋지 않은 것이라는 결론으로 나는 6가지로 제시한다.
   
 

1. 우선 담임목사에게는 과중한 설교의 횟수로 인한 영적 정신적 부담이다. 이것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교인들의 행사로 인한 분주함으로 건강의 문제와 가족과의 온전한 생활, 교인과도 전인적 목회를 하기가 힘들다. 그 밖의 외부 활동과 재정의 임의적인 사용으로 인한 위험성이 있다. 대개의 한국교회는 교회권한의 위임이나 분산없이 전권을 1인이 갖기에 사고나기 딱 좋은 구조이다.

2. 교인들에게도 별로다. 많은 교인들로 인하여 복잡하기에 진지한 교류가 어렵다. 그리고 스치는 만남과 목자와의 밀도 있는 교제와 사귐이 없다.

3. 지역사회는 많은 교인들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교통과 소음으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4. 지역교회 쏠림현상으로 인하여 인근의 교회가 공존하지 못한다. 부족한 것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생존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싹쓸이 전도와 물량공세 등으로 이웃교회의 생존과 성장에 문제가 된다.

5. 대형화는 필연적으로 그 부대비용과 유지비용으로 인한 소비와 낭비가 있게 된다. 그 큰 교회당을 단 몇 번 사용을 위하여 지출되는 경비는 사실상 문제다. 하나님이 그것을 원하실까? 그렇게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정직하게 말하면 그것은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

6. 부목사들에게는 과도한 업무로 인한 피로감과 업무과중으로 인한 착취다. 300명 교회에 3명의 목사를 고용할 수 있다면 3천이면 30명, 3만 이면 300명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면 실제로 부교역자를 그렇게 고용하는가? 아니다. 그렇기에 중소형 교회가 많은 것이 목회자 수급이나 고용에 있어서 더 좋은 것이지 대형화는 오히려 목사의 사역의 기회를 협소하게 하고 업무는 더 과중하다.

7. 불경스럽지만 그럼 하나님께는 좋은 것인가? 그렇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목회학에서는 한 목회자가 진정한 목양을 위한 적정 숫자를 300명으로 보기도 하고 150명이라고 한다. 교회가 자립 자생하고 지역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으려면 150~200명은 되어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다. 그러나 달라진 세상에서 1천 명 아니 크게 봐서 1만 명이라고 하자. 그것을 감당하는 것만으로도 초인적인 목회요. 능력일 것이다. 그 이상은 사실 말도 안 된다고 보는 것이 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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