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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사회성홍성현 목사 (갈릴리신학대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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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2.27  10:5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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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사회성
마25: 31-40

/ 홍성현 목사 (갈릴리신학대학원 원장)

   

기독교는 가장 어두운 세대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실로 암흑시대였습니다. 중세기적인 그런 의미에서의 어두운 시대가 아니라 기독교를 박해하는 무서운 시대였다는 뜻입니다. 로마 황제들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만 충성하는 기독교 교인들을 무섭게 박해했는데 그런 속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이 살아남은 것은 첫째는 부활신앙이었고 다음에는 그들의 무서운 단결과 친교였고 그리고는 소 그룹의 공동체 구조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조직적인 핍박 속에서도 당시 인구의 5% 내지는 20%까지를 그리스도인들로 만든 것을 보면 교회가 꾸준히 양적인 성장을 거듭했다는 증거입니다.

로마 박해시대, 교회의 성장
교회의 성장은 자연스럽게 이뤄졌습니다. 전투적 전도운동이 조직적으로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로마 정권의 무서운 핍박 속에서 그런 전도운동은 실제로 불가능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토록 많은 교인들이 교회로 나오게 되었을까요? 결론은 초대 성도들의 구체적인 일상의 삶을 이웃 사람들이 직접 보고 교회로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모여 예배 드릴 건물도 제대로 없었기에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도 없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소수의 모임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기껏 15명 내지 20여명 정도의 교인들이 모이니 작은 교회로 출발을 하면서 교인들 간에는 더욱 뜨겁게 뭉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서로 잘 알게 되고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되니 서로를 깊이 사랑했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일대 일 전도가 되어서 교회가 점점 번창해 갔던 것입니다.

지금은 세례 교인이 되게 하는 마28장의 “대위임”에 대한 의무적인 전도운동을 권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런 전도활동이 불가능했기에 3세기 중반 카르타고 싸이프러스 감독의 세례자들을 위한 문답서 120문안에도 전도에 관한 언급이 없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말로서는 전도할 수가 없었기에 구체적인 삶을 통해서 사람들의 매력을 끌었을 뿐입니다.

그들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매력을 끈 다른 한 면은 로마의 외적문화와 가치체계에서는 만날 수 없는 어떤 삶의 자세 때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로마의 화려한 문화에 소외감을 느끼고 때론 저항감을 가졌던 사람들이 기독교 신자들의 검소하고 성실한 삶의 모습을 보고는 그것이 좋아서 이웃들이 교회로 입적했습니다. 초대 교회의 예수의 문화는 당시 화려했던 로마의 문화인 물질적이고 화려했던 방종한 문화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로마 문화에서 소외되거나 거부된 자들이 아니면 로마의 방종한 문화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교회로 발을 옮겼을 것입니다. 불확실한 세대, 폭력이 난무하는 세대, 그래서 늘 불안과 공포와 죽음의 위협 속에 살던 사람들은 교회로 나아와 위로를 받고 해방과 자유를 만끽했던 것입니다. 욕심 없는 청빈한 삶을 통하여 자기의 작은 것이라도 남과 나누면서 사는 삶에서 보람을 느끼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모여서 교회의 한 식구들이 되었으니 그런 교회의 분위기에서는 진정한 평등이 이뤄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회적 계급이 무너지고 신분적 차별도 제거되고 부자와 가난한자의 구별도 모두 없어졌습니다. 거기서는 과부와 고아가 관심의 대상이 되고 어린아이들과 노인들이 홀대받지 않았습니다. 병든 자들과 감옥에 갇힌 자들이 돌봄을 받았습니다. 실로 이곳에 평화가 있었고 기쁨이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민중들은 참된 희년을 맛보았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공동체이니 핍박이 아무리 심해도 떠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니 핍박이 심할수록 더 단단하게 뭉쳐서 한 공동체를 이뤄갔을 것입니다.

313년 기독교 타락의 시작
여기까지는 참으로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기독교가 자유화되면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313년 콘스탄틴의 기독교에로의 개종 이후 기독교는 로마 제국의 국교로 자리잡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후 교회는 정치의 권력을 업고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독교는 불행하게도 로마의 문화에 함몰되어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즉 기득권 세력과 일치됨으로서 교회의 본래의 존재 이유를 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 자체가 결국엔 지배 문화화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교회의 원래의 모습은 점점 퇴색하기 시작했습니다.

392년까지 이미 제국의 50% 인구가 기독인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같은 해에 당시 황제 데오도시우스는 기독교 이외의 타종교 예배를 불법화했습니다. 기독교에로의 개종도 폭력으로 한 경우들이 허다했습니다. 국교인 기독교와 다른 이념과 교리를 가진 사람들을 이단으로 처단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소위 기독교국(Christendom)이란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로마국과 기독교가 동일시 되는 우를 범했고 이방 선교는 로마의 문화 이식과 동일하게 인식되었습니다. 개종은 곧 자기의 문화를 버리고 로마의 문화를 받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비호 아래에서 비대해진 기독교가 교세를 더욱 확대하는 과정 속에서 산 속으로 조용히 숨어 들어가는 수도원 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흥미롭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거대한 흐름의 외적문화에 대한 “저항 문화”(counter-culture)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도원 운동은 교회의 외면화에 반대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기수 루터가 위텐베르크 정문 게시판에 써 놓은 95개조의 개혁 내용들의 대부분이 교회의 외면화를 비판하는 것들임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컨데 62조에는 교회의 참 보화는 내적인 신앙이라고 정리하면서 로마교회의 타락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외면화”란 신앙의 구체적 표현으로서의 외적 나타남이 아니고 도리어 내적인 신앙을 파괴시키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외식, 위선 문화를 말합니다. 즉 거짓되고 가식 화된 외면화입니다. 이런 외면화는 권력자와 가진 자의 착취 문화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는 것들입니다. 교회 내부 안에 세운 성자상 이라던가, 면죄부판매 등등은 단적으로 그것을 증거해 줍니다. 이러한 중세 시대를 일컬어 암흑시대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이러한 가식적인 교회의 꼴을 보고 싶지 않은 신앙인들이 수도원으로 발길을 돌린 것은 당연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소유자들이 종교개혁의 성공을 이룩하도록 도왔습니다.

루터의 한계와 WCC의 출현
루터의 종교개혁은 한 마디로 기독교국이라는 틀을 벗어나거나 아니면 파괴시키자는 데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그 분도 결국은 교회, 국가, 기업(상업) 공존의 새로운 틀 속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가 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농민 편에 서지 못한 이유가 그것이었습니다. 중세기적 가식 문화의 일차적 해방에는 성공했으나 또 다른 하나의 벽은 헐지 못했습니다. 그 벽은 당시의 지배문화를 향유하는 자들과 그것 때문에 희생을 당하는 자들 가운데 놓여졌던 것입니다. 최근에 와서 루터는 선교학적으로도 비판을 받고 있는데 그에게는 구라파 아닌 다른 나라와 민족들에 대한 에큐메니칼한 관심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가 촬스 5세 앞에서 자기의 입장을 변호하던 1521년에 이미 포르투갈에서 신학을 공부한 바 있는 한 흑인(Dom Henrique)이 콩고의 감독으로 임명되었을 정도로 제삼세계에 기독교가 널리 퍼져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루터의 신학에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해외 선교운동이 루터 좌파였던 재세례파와 그 후대 경건주의자들에 의하여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그러나 이들의 해외 선교 역시 비판을 받는 이유는 그들의 선교사들이 파송된 곳들이 새롭게 식민지화된 곳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개혁교회도 크리스텐돔(Christendom)의 이미지를 깨끗이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교회와 세상의 이원론을 깨부수면서 문화신학을 발전시킨 것은 기독교국의 개념을 깨는데는 공헌했으나 또 하나의 다른 벽은 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그들은 지배자들의 문화로 충일한 세상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런 점에서 그들은 진정한 인본주의 신학을 창도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밖으로 들어 나는 화려한 문화에 희생되고 가려버린 민중들의 신학을 창안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 밖에서 예를 들면 칼 맑스 같은 사람들에 의하여 눌린 자들의 아우성이 폭발된 것입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출현은 이에 대한 교회의 긍정적 반응이었습니다. 세계교회협의회를 탄생시키기 위하여 뛰던 사람들 중의 하나였던 본회퍼가 드디어 1943년 눌린 자들의 편에 서서 교회와 세상의 경계선을 무너뜨렸는데 그가 군정보부에 들어가서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한 것이 그 구체적 증거입니다. 그는 그것을 “보다 좋은 세속화”라고 그의 <윤리학>에서 이론적으로 정의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교회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안에서 이 세상과 화목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장소”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지배 문화 핵심에서 밀려나 변두리에서 빛을 못보고 사는 사람들에게 빛을 비치는 일에 있어서 교회 안과 교회 밖의 구별은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본회퍼가 목사의 신분, 교인의 신분을 떠나서 군인 혹은 군속으로 입대하여 일을 꾸민 점이 음미해 볼만 합니다. 중국 삼자애국운동의 지도자들이 300만 중국 기독인들의 범위를 넘어서 10억의 전 중국 인민의 삶을 염두에 두면서 교회와 신학 활동을 한 것도 똑같은 근거에서 였습니다. 그 유명한 중국교회의 대표자인 팅 주교의 설교에서 그것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양의 우리에 들지 않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던 예수님의 기도문(요10:16)을 인용하면서 중국의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교회의 외면화 아닌 "신앙의 외면화"
우리 한국의 교회가 “보다 좋은 세속화” 신학을 보다 구체화 할 때가 왔습니다. 북과의 통일 그리고 오늘의 남한 교회의 갱신을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교회와 세상과의 연대 즉 눌리고 소외된 세상과의 연대가 시급합니다. 이제까지의 한국교회의 교회성장론은 크리스텐돔(Christendom)의 구조를 모방해가는 한 노력으로 보여질 때가 많았습니다. 밖으로 보이는 지배 문화에 교회를 일치시키려는 노력들을 보았습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을 대 교회 목회자들이 축복 하면서 자신의 교회를 확대해 갔던 것입니다. 기득권 세력과 자신을 일치시키려는 교인들의 노력을 신앙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교회는 기득권에 눌려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사회의 썩음을 방지하는 데서 그 진면목을 발휘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초대교회의 신앙이었습니다.

신앙의 외면화는 신자의 깊이에 자리잡은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믿음을 밖으로 보이도록 내어놓자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밖으로 나타나지 않는 신앙은 가짜라고 못박고 싶습니다. 빛으로나 소금으로 나타나지 않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 .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선언 그대로입니다. 호이켄다이크(Hoekendijk)의 “사회적 사건(social happenings)"으로서의 신앙이 우리의 현실 속에서 긴급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부패되고 비뚤어지고 잘못된 사회를 치유시키는 사건으로서의 신앙이어야 합니다. 더 이상 기독교신앙을 교회의 울타리 안에 가둬서는 안 됩니다. 신앙을 한 개인의 영혼의 사유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구체적으로 밖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어두움 속에서 밝은 빛을 찾는 사람들에게 신앙은 빛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희랍어로 진리를 <알레테이아>라고 하는데 뜻은 "나타남“인데, 신앙이 참이 되려면 사회적으로 들어 나야 합니다. 우리 나라 초대 교회의 신앙은 이웃 속에 구체적으로 나타났었습니다. 아비죤 선교사의 백정 고친 이야기; 서울의 백정 박씨 집에 친히 찾아 가서 병 고쳐주고 호족에 백정들의 이름을 올리도록 고종에게 호소한 일, 호열자 희생자들을 돌본 교인들의 이야기; 버려진 환자들을 살리고 시체들을 장사지내 준 일 등은 위에서 희년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이후 3.1운동에 기독교인들이 참여하여 싸운 이야기는 민중의 희년을 위해서 한국의 교회가 구체적으로 실천한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교회는 그 본래의 시작에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교회가 시작된 자리는 어두웠던 곳입니다.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빛을 주기 위하여 출발했었습니다. 사회 속에 썩음이 있고 어두움이 존재하는 한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있습니다.

신명나는 삶을 회복해야 합니다. 분단의 장벽을 빨리 헐어내야 합니다. 전쟁의 모리배들을 이 땅에서 떠나 보내야 합니다. 우리들이 신앙이 사회성을 갖게 합시다.  


오산 다솜교회(오영미 목사) 카페 - http://cafe.daum.net/osandas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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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희
(121.XXX.XXX.44)
홍목사님 아멘 아멘 아멘 샬롬
(2017-02-10 0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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