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민족의 말씀 - 예장뉴스
예장뉴스
생각 나누기나는 설교다
새 민족의 말씀산 위 그리고 산 아래
예장뉴스  |  webmaster@pck-goodnews.com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5.02.20  09:16:52
트위터 페이스북

"산 위 그리고 산 아래"

왕하2:1-12; 고후4:3-6; 막9:2-9                                황남덕 목사(새민족교회)

   
 

오늘은 주현절 후 여섯 번째 주일로서 산상변모주일입니다. 올 해는 오늘이 주현절 후 마지막 주일인데 이제 오는 18일 수요일이 재의 수요일이며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사순절은 부활절까지 주일을 뺀 사십일을 말하는데 이 기간은 주님의 십자가와 고난을 생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시간입니다. 주현절을 보내면서 그 동안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와 가르침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요한이 잡히자마자 예수께서는 갈릴리에 가셔서 본격적으로 하나님나라 운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하여 첫 제자들을 어부 가운데서 부르셨습니다.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이렇게 각각의 형제를 부르시며 그들을 향해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말씀을 권위 있게 가르치셨고 그곳에서 악한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치어 한 사람을 온전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소문은 이 마을 저 마을로 퍼져나갔습니다.

회당에서 나오자 마자 예수는 열병으로 몸져 누운 베드로의 장모에게 갔습니다. 예수는 그녀를 아무 말없이, 아무 조건 없이 그저 조용히 손을 잡아주었고 일으켜 세웠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예수의 이 사랑의 손길로 몸과 영이 새롭게 되었고 예수와 그의 일행을 위해 시중을 듭니다. 이것은 예수를 인정하고 사위 베드로와 함께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에 참여함을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와 함께 새로운 식탁공동체를 이루며 하나님나라의 꿈을 함께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조금씩 조금씩 그의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주어진 고독한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그래서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외로운 길을 가고자, 예수께서는 아주 이른 새벽에 외 딴 곳에서 기도하며 이 길을 가기 위한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제자들에게 가까운 다른 고을로 가자, 거기서도 말씀을 선포해야겠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후, 다른 마을로 가서 나병환자를 깨끗하게 하였고, 중풍환자를 고치셨습니다. 야이로의 딸을 고치시고 혈루증 걸린 여인을 고치셨습니다.

광야에서 오 천명을 먹이시고,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 맺는 하나님 나라에 속한 인간들의 삶을 비유로 보여주셨습니다. 30배, 60배, 100배의 열매 맺는 이 비유는 파격적인 말씀입니다. 로마의 황제, 헤롯 왕, 정치권에 기생하는 당시 사제들은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혁명적인 선언입니다.

이런 하나님 나라를 말씀으로, 표징으로 보여주신 예수께서 어느 날 제자 셋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갑니다. 성서는 그 산이 어떤 산인지 산 이름을 표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왜 다른 사람들은 말고 이 세 사람 베드로,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갔는지도 이유를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이 세 사람은 이후 초대교회에서 아주 큰 역할을 하게 되지만 본문에는 뚜렷한 이유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산상변모 사건입니다. 이 산상변모 사건을 사순절을 앞둔 시점에서 교회가 성서일과로 뽑고 있는 것은 그만큼 의미가 있습니다. 이 사건의 의미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와 제자들의 목적에 대해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예수의 활동 첫 단계에서 많은 사람들은 그의 하는 일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기적을 체험했지만 예수의 하나님나라 가르침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고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8장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세상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이 말합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혹은 엘리야라고 합니다. 혹은 예언자중의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예수께서는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여기서 베드로의 그 유명한 신앙고백이 나옵니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입니다.” (막8:29)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마16:17),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눅9:20) 이 세 복음서는 공통적으로 베드로의 위대한 신앙고백을 보여주면서 뒤에 예수께서 당하실 죽음과 수난을 또 한결같이 예고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가 고난과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은 베드로나 다른 제자들에게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정말 그렇게 아무 힘없이 죽게 된다면 지금까지 잡고 있었던 지푸라기 같은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사흘 후에 살아날 것이라는 것도, 부활 희망도 이처럼 임박한 필연적인 죽음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죽음을 앞둔 예수께서는 선택된 제자들에게 어떤 확신을 주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2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산 위에 올라가십니다. 제자들 중에서도 핵심멤버라고 할 수 있는 이 3인방을 데리고 가셨는데, 바로 거기서, 그들 앞에서 주님의 옷은 세상의 어떤 빨래꾼이라도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게 빛났습니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서서 이야기를 하는데 이 광경을 제자들이 보게 됩니다. 왜 모세와 엘리야입니까? 모세는 이스라엘백성들이 존경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율법서를 모세오경이라고 할 정도로 그의 이름을 붙여서 율법서의 권위를 강조할 정도입니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사람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율법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엘리야는 누구입니까? 엘리야는 예언자의 계보에서 제일가는 사람입니다. 열왕기하2:1-12에 보면 엘리야는 이스라엘의 예언자 중에서 큰 어른, 큰 스승이었습니다. (불교에서 큰 스님이라고 하듯이…) 그는 큰 예언자입니다. 엘리야 밑에 그의 제자 엘리사가 있었고, 다음에 예언자 수련생들이 나오는데 이렇게 큰 예언자,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고 죽음을 맞이하지 않고 대신에 불수레를 타고 회오리 바람속에 휩싸여 하늘로 올라갔던 사람입니다.

이렇게 율법을 대표하는 모세와 예언을 대표하는 엘리야가 복음을 대표하는, 아니 복음을 몸으로 사는 예수와 함께 한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의 완성으로서, 복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데 마태복음 기자는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17:2)

이 광경을 베드로와 함께 간 제자들이 목격하는데, 베드로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랍비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초막 셋을 지을 텐데, 하나는 랍비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겠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겠습니다” 합니다. 신비한 광경을 목격한 베드로는 여기에 있는 것이, 이 산 위에서 있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산 아래 동네에 내려가서 여기저기 다니며 고생하지 말자고 합니다. 하나님나라를 위해 부름받았다고 하지만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이건 어쩌면 생고생이었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로 가서 병도 고치고 기적도 보고 하지만, 고생은 고생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 온 바리새파, 사두개인, 장로들은 항상 감시의 눈초리를 보냈고, 반면 병든 사람들이 자꾸 몰려드니 대중 선동도 하는 것도 아닌데 헤롯의 눈치도 보아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자기들하고는 비교도 되지 않은 막강한 힘을 가진 세례자 요한도 참수형을 당했는데 이런 저런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내심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산 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대대로 존경하는 모세와 엘리야가 지금 주님과 같이 만나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시간, 그리고 이 장소가 얼마나 좋은지 마냥 세상의 근심 걱정을 다 잊어버리고, 다 털어버리고 이곳에서 하늘의 영광만을 누리고 살고 싶었던 것 입니다. 이것은 베드로의 산 위에서의 경험, 초월 경험입니다. 신비의 경험입니다.

훗날 베드로와 그의 제자들은 이 신비체험을 기억하며 예수의 죽임이 끝이 아니라 그것은 부활의 영광으로 이어짐을 기억했을 것입니다. 혹 그들은 순교의 순간에 예수의 얼굴이 해와 같이 빛나고 그의 옷이 빛과 같이 희게 되었던 것을 본 그 기억, 산 위에서의 그 경험을 생각하며 신앙과 믿음을 더욱 굳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초월의 경험은 소중한 것입니다. 초월의 경험 없이는 실천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가능하다고 해도 힘이 없고 오래가지 못합니다. 실천적 신앙 위해, 신앙의 초월의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 경험 이후에 주님은 그의 제자들과 산에서 내려오십니다.

9절에 보면 그들이 산에서 내려 올 때에 라고 나옵니다. 물론 주님께서 얘들아 내려가자 했겠지요.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 주님은 자신의 고난과 죽임을 예고하십니다. 그리고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기 전까지 오늘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인자가 고난 받고 죽는다고 하는 이 말은, 방금 전 산 위에서의 영광의 주님의 모습하고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산 위에서의 영광의 주님은 이렇게 산에서 내려올 때 자신의 죽음을 예고한 고난의 주님이었습니다. 영광과 고난, 고난과 영광의 합일입니다. 그 합일의 접촉점, 혹은 그 합일의 과정은 사랑이었습니다. 한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랑이었습니다. 그것은 산 아래로 내려오신 주님의 모습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한 일이 무엇입니까?

14절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그것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친 일입니다. (새번역) 공동번역에 보면 악령에 들린 아이라고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귀신들린 아이, 악령에 들린 아이를 산에서 내려오자마자 고치신 것입니다.
여러분 18절과 20절은 자세히 다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무슨 병이 떠오르지 않으십니까? 간질병입니다. 그 당시, 의학이 발달되지 않은 시대의 사람들은 병의 근원을 귀신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귀신들렸다고 하지만 실은 간질병에 걸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간질병 아이를 못 고치고 쩔쩔매는 제자들을 대신하여 그 아이를 고쳐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산 위의 그 황홀경에 머무르시지 않으시고 산 아래 동네로 내려와서 이 간질병에 걸린 아이를 고쳐주셨는데 이것이 주님이 가셔야 할 길이었습니다. 영광의 주님은 바로 한 아이를 온전케 만드시는 사랑의 주님이요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의 길을 가신 고난의 주님입니다. 오늘, 예수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예수의 권능과 기적, 그리고 승리와 영광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을 온전케하고 구원하시고자 스스로 고난의 길을 가신 그 주님을 동시에 믿어야 합니다.

주님은 수난을 통하여 영광을 거두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을 온전히 드러내셨습니다. 수난 없이는 영광도 없고,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습니다. 복음서 기자가 분명히 증언하는 예수는 수난과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현존과 영광을 온전히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높은 곳에 올라가셨던 주님은 낮은 곳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영광의 높은 산에서 험한 골짜기를 지나 사람들에게로 내려오신 분입니다. 그가 내려온 곳은 간질병 걸린 한 아이가 기다리는 곳이요, 눈 먼 바디매오가 기다리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산 아래로 내려오신 이유는 병들고 천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고, 온 세상의 주님이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 애통하는 사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을 만나려고 내려 오신 것입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의 벗이 되려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또한 바로 나를 찾아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기다린 것은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멸시와 천대, 모욕이었습니다. 그것이 골고다입니다. 결국 주님은 골고다 언덕 위의 십자가가 있는 곳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 주님이 골고다의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선포한 말씀은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이 옳다고, 그의 말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7절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고 했습니다. 모세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고 엘리야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세의 말을 들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야의 말을 들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 예수의 말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앞으로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받을 예수, 십자가위에서 엘리엘리 라막 사막다니, 하며 외칠 십자가의 예수의 말을 들으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름도 사라지고, 모세와 엘리야도 다 사라졌습니다. 이제 오직 예수만이 남았습니다. 오직 우리가 순종하고 따라 할 분, 예수 그리스도만이 남은 것입니다. 예수의 산상변모사건은 이렇게 우리가 끝까지 따라가야 할 주님을 다시 보게 합니다. 산 위의 영광의 주님, 그리고 산 아래의 고난의 주님, 그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산 위에서의 그 신비의 체험은 가난한 자와의 연대감, 일치를 향할 때 진정한 신비의 경험이 될 수 있는 것이고 동시에 역사 속에서 가난한 자와 함께 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은 산 위에서의 신비체험(신앙의 깊은 확신)으로 인해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 일을 하는 실천적 힘의 근원이 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재의 수요일을 맞이하면서 사순절이 시작됩니다. 산 아래로 내려 오신 주님을 생각하며 고난과 영광, 죽임과 생명, 십자가와 부활를 생각하시면서 보내시기 바랍니다.

   
 

[관련기사]

예장뉴스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많이 본 기사
1
“인성검사 통과 안 되면 목사 안수 못받는다”
2
김동호 목사 이미 은퇴한 목사아닌 가?
3
이찬수 목사, 정말 아픈가?
4
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 교수 시국성명서 발표
5
대림절(Advent) 교회력의 의미
6
102회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대한 긴급 제안서
7
장신대 김철홍 교수 글에 대한 학생들 입장
8
이정훈 교수는 누구인가?
9
장로교회의 당회원, 당회장의 역할(1)
10
개혁하는 교회 탐방(거룩한 빛 광성교회)
신문사소개후원하기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명칭 : 예장뉴스 (pckgoodnews.com)   |  등록번호 : 서울,아02054   |  등록일자 : 2012년 4월 3일   |   제호 : 예장뉴스   |  대표 : 이상진
발행인겸 편집인 : 유재무   |  발행소(주소) : 서울 성동구 성덕정 17길-10, A동 202호   |   사무소 : 서울 종로구 대학로 3길 29, 100주년 610호
발행일자 : 2012년 6월 25일   |  행정메일: ds2sgt@daum.net   |  전화번호 : 02)469-4402   |  청소년보호책임자 : 박재왕
Copyright © 2011 예장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pck-goo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