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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소망교회 이택환 목사 설교“예레미야 소명설화”(렘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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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8.24  12: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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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소망교회 이택환 목사

성령강림주일 후 열다섯 번째 주일

렘 1:4-10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5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시기로 6내가 이르되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니 7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8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시고 9여호와께서 그의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보라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 10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오늘 말씀은 예레미야 선자자의 소명설화입니다. 여기서 설화란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내러티브)를 말합니다. 예언자/선지자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역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개인적으로 부르심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는가를 기록한 것이 예언자 소명설화지요. 예레미야 1장 외에 널리 알려진 것으로는 이사야 6장, 에스겔 1-3장, 호세아 1장, 아모스 7장 등이 있습니다. 예언자들은 부르심 받기 전, 직업이 다양했습니다. 예레미야/에스겔은 제사장, 이사야는 귀족, 호세아는 일반시민, 아모스는 농부였습니다. 부르심 받은 사역과 사역지도 다양합니다. 부르심에 응하는 방식도 달라서 요나는 부르심 받자마자 도망을 갔고, 에스겔은 7일 동안 두려움 속에 떨었습니다. 반면 이사야는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적극적으로 응답했습니다. 예언자 소명설화는 무엇보다 예언자가 전하는 메시지에 신적 권위를 부여합니다.

소명(召命)이라는 말은 단지 구약 예언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 사역자들에게도 사용됩니다. 그래서 목사, 전도사, 선교사 같은 사람들은 종종 어떤 소명을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받았는지 등의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저도 일반 직장인으로 있을 때는 아무도 당신의 소명이 무엇이냐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가니까, 어떤 소명을 받았기에 직장을 그만 두고 신학교로 갔느냐를 묻더군요. 묻는 사람이 많다보니, 신학생 중에는 자신의 소명설화를 잘 정리해서 필요할 때 간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신이 언제 어디서 어떤 소명을 받았고, 그 소명을 환상 가운데 받았는지, 음성으로 들었는지, 아니면 성경 몇 장 몇 절 말씀으로 받았는지, 그래서 앞으로 신학교에서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해서 하나님 주신 소명을 잘 이루어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고 기도하고 있다는 모범 답안 같은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게는 잘 정리된 소명설화가 없습니다. 일단 저는 구약의 예언자가 아닙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이 예언자 개인에게 당신의 말씀을 직접 맡기셔서, 당신이 정해주신 장소에서 정해주신 사람들에게 그 말씀을 꺼내 전하도록 특별히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저는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저를 불러서 당신의 말씀을 맡기신 것이 아니라, 목회자/설교자라는 직능을 통해 말씀 사역을 하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설교 말씀을 준비할 때마다 단지 하나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꺼내서 전하는 게 아니라, 이 말씀이 맞는지 저 말씀이 맞는지 공부하고 연구하고, 아니다 싶으면 처음부터 새로 하는 등, 매번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단에 서면 할 말이 없죠. 없으면서 말하다보면 엉뚱한 말을 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제가 목회자로 부름 받은 것은 여러분이 교사나 의사, 회사원, 음악가 등으로 하나님 앞에 부르심 받은 것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소명은 우리가 받은 소명과 다릅니다. 그래서 그들이 소명으로 받은 사역은 성경에까지 기록되었지만, 우리가 소명으로 받은 사역은 성경에 기록되는 게 아니라, 기록된 성경의 지도를 받아 올바르고 적절하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예언자 소명설화는 그 자체로 권위가 있지만, 오늘날 사역자들의 소명설화는 그 자체로는 아무 권위가 없고, 성경말씀을 따라 합당하게 사용될 때 비로소, 그에 맞는 권위를 얻게 됩니다. 그 권위라는 것도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크리스천 교사가 학교에서 적절하게 임무를 수행할 때 나타나는 권위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단지 교사의 권위와 목사의 권위라는 직능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종종 일부 카리스마 사역자들의 권위가 거의 예언자의 권위처럼 높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은 예언자들의 소명설화 양식을 카리스마 사역자들이 자주 빌려 쓰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 4절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카리스마 사역자들이 종종 즐겨 사용하는 말 중에도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5절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말씀하셨다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이 직접 예레미야에게 나타나서 실제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인지, 환상으로 하신 것인지, 음성만 들려주신 것인지, 아니면 예레미야에게 그런 생각을 주신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예언자 소명설화는 이런 문학양식을 따라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카리스마 사역자들이 이와 동일한 양식을 설교나 간증, 또는 일상적인 대화 가운데 자주 사용합니다.

어떤 유명 설교자는 과거 집회에서 자주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습니다. 장차 네가 온 천하만국을 비행기 타고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할 것이다!”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기도 중에 음성을 들려주셨는지, 아니면 그런 생각을 주셨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그가 실제로 온 세상에 비행기 타고 다니면서 이런 말을 전하면, 은연중에 그에게 예언자의 권위가 덧입혀집니다. “아, 목사님은 뭔가 다르구나!” 오래전 의대생들과 해외 비전트립을 간 적이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왜 비전트립에 참가했는가 물었습니다. 한 학생이 “선교지에 계신 선교사님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잘 들으실 것 같아 지원했습니다.”고 했습니다. 만약 그 선교사님이 학생에게 “하나님께서 형제에 대해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장차 선교사가 될 것이다. 내가 너를 구별하여 세웠노라!” 라고 했다면 그가 선교사가 될 결심을 했을지 모릅니다.

예언자 소명설화는 특정 시대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가 앞으로 하나님의 어떤 사역을 감당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을 통해 현재와 미래에 어떤 일을 계획하고 계신지 보여주는 설계도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언자 소명설화를 통해 해당 예언서의 전체의 주제와 방향을 생각하고, 그것이 그 시대에 어떤 의미를 주었고. 또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살펴야 합니다. 단지 예언자 소명설화 양식을 가져와서 자신의 특정 목적을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사역자들도 그런 유혹이나 습관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성도들도 예언자 소명설화 양식을 예언서의 해당본문을 설명하는 문학양식으로 이해해야지, 본문과 무관하게 일상 속에서 남용하는 것은 성경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레미야는 주전 627년 유다 왕 요시아 13년, 20세 전후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았습니다.

요시아 시대는 유다 왕국 역사상 가장 혁신적이고 개혁적인 시대로 미래에 대한 소망이 넘쳤습니다. 예레미야는 요시아가 특별히 정의와 공의를 행한 왕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요시아 31년, 39세 젊은 나이에 그가 요절한 뒤, 유다는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예레미야가 주로 활동한 시대가 그 몰락의 시대였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청년들을 보면 마치 예레미야 시대의 청년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사회에 발을 내딛던 20대 후반 88년 전후 국내 경제성장률은 매년 10%에 달했습니다. 당장은 힘들어도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더 나은 미래가 있다는 희망이 가득했습니다. 당시 한국 교회도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급성장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지금 헬조선에는 미생들만이 가득합니다. 신대원생도 졸업하면 교회의 미생이 됩니다. 우리 교단에서 서둘러 목사 2중직을 허용한 것도, 많은 목사들의 생계유지가 어려운 현실을 반영한 결과입니다. 교회가 몰락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많은 고난을 겪은 선지자가 없습니다. 엘리야와 같은 기적 한 번 일으킨 적이 없고, 사람들이 때리면 맞고, 가두면 갇히고, 마침내 나라가 바벨론에게 망하자 애굽까지 끌려갑니다. 8절을 보면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 생각에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늘 승승장구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역자가 이처럼 늘 고난 가운데 살았다면, 우리는 그를 과연 하나님의 사역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혹은 그가 믿는 하나님이 과연 참되신 하나님이신가?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예레미야가 고난당하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물으셨을 때, “어떤 이는 예레미야라 하나이다”라는 대답이 나온 것도 이유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예정 속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소명설화에는 하나님의 예정이 들어있습니다. 5절

5내가 너를 모태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배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성별하였고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의 이성으로 명쾌하게 분석할 수 없습니다. 과학의 영역이 아니라 고백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 질문하기도 하고, 조직신학 책에서 하나님에 대해 설명한 신론 부분을 찾아 읽기도 합니다. 그래도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결코 온전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어느 날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을 수긍하게 되었다면, 그 때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이 벽에 부딪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외통수에 갇혔을 때입니다. 혹은 오직 정해진 길 외에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았을 때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일일 수도 있고(나는 이 일을 위해 예정되었다!),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나는 이 사랑을 위해 예정되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오래 전에, 이미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정은 운명과 다릅니다. 운명은 모든 게 미리 정해져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철학입니다. 또 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에 나는 방관자가 됩니다. 그러나 예정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계획 속으로 내가 들어가, 어떠한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내겠다는 결단을 촉구합니다. 예레미야가 자신의 소명을 그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준비된 하나님의 예정가운데 파악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그가 능동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동시에 그가 감내해야 할 고난이 그만큼 컸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는 당장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에 나이가 너무 어려 경험이 부족했고, 말도 잘 하지 못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이 문제가 될 수는 없습니다. 7절,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아이라 말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며 내가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너는 말할지니라

그 때부터 예레미야의 사역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입에 당신의 말씀을 넣어 주시고, 그 말씀을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에 전하게 하셨습니다. 10절에 그의 구체적인 소명이 나와 있습니다. 10절,

10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워 네가 그것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예레미야의 소명은 한 마디로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고, 건설하고 심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둘로 나누면 먼저 기존의 낡은 것을 무너뜨리고(즉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고), 그 후, 새로운 것을 세우라(즉 건설하고, 심는)는 것입니다. 새 것을 세우려면 먼저 낡은 것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런데 낡은 것에 워낙 익숙한 사람들이 완강하게 버티고 저항합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굳게 확신하고 있는 바를 깨부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심고 건설하려는 예레미야가 늘 미움 받고, 배척당하고, 옥에 갇히고, 뭇매를 맞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사역도 간단히 말하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사역이었습니다. 그러다 낡은 부대에 익숙한 수구 세력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결국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지난 시절 한국 교회는 복음사역을 통해 한국 사회의 낡은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질서를 세우는 일에 충실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교회는 어느 새 그 자체가 낡은 질서가 되고 말았습니다.

교회가 하나님 나라 복음에 충실할 때, 기존 세상의 낡은 질서를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새로운 질서를 건설하고 심게 됩니다. 그러나 교회가 하나님 나라 복음 아닌 다른 것에 충실할 때, 오히려 새로운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도로 세상의 낡은 질서를 재건하는 기득권 세력으로 전락합니다. 예레미야서는 2600년 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그런 역학관계 속에서 어떻게 완벽하게 잘못된 길을 걸어갔는가를 보여줍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한 예레미야의 수고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지 실패한 사역자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실패한 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똑같이 걸으셨고,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그 정점을 찍으셨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마침내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 승리를 힘입어 이 땅에서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고, 그 후에 건설하고 심는” 하나님 나라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교회의 소명이고 우리의 소명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이 세상에서 무엇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고, 또 과연 무엇을 새로 건설하고 심어야 할까요? 우리가 이를 잘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혹시라도 거꾸로 세워야 할 것을 무너뜨리고, 낡은 것을 다시 일으키는 그런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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