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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소망교회 이택환 목사 설교“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눅1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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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0.02  22: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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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

2016. 10/2, 성령강림주일 후 스무 번째 주일(그소망교회 이택환 목사)

눅 17:5-10) 5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6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7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누가복음 16장에 이어 17장에서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런데 두 장의 초점이 다릅니다. 16장은 바리새인과 부자들에 관한 내용입니다. - 바리새인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찾지만 실제로는 재물을 섬긴다는 것, 그들 스스로 의롭다 생각하고 사람들의 존경도 받지만, 정작 하나님께 미움 받는다는 것, 그리고 한 부자가 평생 좋은 집에서 호의호식하면서, 대문 앞 상처투성이 거지는 돌보지 않고 버려둠으로써, 부자가 죽어 음부에 떨어져 고통 받는 이야기 등 - 제자들이 깊이 공감하면서 한편으로는 고소하게 여길만한 내용들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지요. 권력과 부를 가진 사람들의 허위의식이 폭로되고, 그들의 삶이 역전되는 이야기를 들을 때, 어떤 통쾌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17장에서 이번엔 제자들을 타겟으로 말씀을 이어가십니다(제자들 긴장). 먼저 두 가지를 언급하셨는데, 하나는 작은 자를 실족케 하는 문제, 또 하나는 용서입니다.

먼저 작은 자에 대한 실족 문제입니다. 어쩌면 제자 중 누군가 작은 자 한 사람을 실족케 한 일이 실제 있었는지 모릅니다. 실족이란 올무에 걸려 넘어지는 것을 말하는데,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어떤 행위를 두고 언급하신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람을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을 수는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령 오늘날 미국에서 목사가 골프를 쳐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실족할 것입니다. 국내의 어떤 개신교단(기독교 대한복음교회 등)은 목사가 술 담배를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른 개신교단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실족할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별 문제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는 목회자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해서, 연약한 사람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전아무개 목사, 라이즈 업 무브먼트 이아무개 목사 성추행 사건 등입니다.

예수님은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서 바다에 던져지는 게 낫다고 하셨습니다. 연자맷돌이란 사람이 손으로 돌리는 작은 맷돌이 아니라, 나귀가 돌리는 큰 맷돌이지요. 그것을 목에 매서 바다에 던지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하라는 게 아니라, 사형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작은 자 한 사람이라도 실족시키지 않도록 제자들에게 경고하셨습니다. 물론 오늘날 법원이 이런 경우 사형을 선고하지 않겠지만, 그 정도로 무거운 죄라면 목사의 경우 직분 박탈이 기본입니다. 교단이 박탈하지 않아도 스스로 반납해야죠. 하지만 전 아무개 목사는 목사직을 반납하지 않았고, 교단 역시 그것을 박탈하지 않았습니다. 또 사람들은 그런 목사가 좋다고 천 명 이상 그 교회에 모여듭니다. 둘째는 용서입니다. 예수님은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해야하지만, 그가 죄를 회개하거든 용서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하루에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하더라도 그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근 우리 교단에서 몇몇 이단에 대해 사면을 시도했다가 취소한 일이 있습니다. 저는 그들이 자신의 이단적 행위에 대해 회개 한 것이 맞다면 사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충분히 회개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번 사면을 계기로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려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렇다면 취소하는 게 맞습니다. 섣불리 사면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도 무턱대고 함부로 용서할 건 아닙니다. 그러나 누군가 죄를 지은 사람이 돌아와 분명히 회개한다면,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따라 그를 용서해야 합니다. 문자적으로 일곱 번 만이 아니라, 그 이상이라도 말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많은 경우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해 잘 회개하지 않고, 또 회개한다 해도 잘 용서해 주지 않습니다. 최근 농민운동가 백남기씨가 사망했습니다. 물대포 과잉진압과 관련하여 응분의 책임이 있는 관계자 중, 그 누구도 사과하지 않았지요. 대통령은 말할 것도 없구요.

잘못한 게 없는데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과거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의 사죄(사과도 아닌) 사건과 비교합니다. 그런데 과연 당시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의 사죄를 받아들였을까요? 당시 범대위는 노무현 대통령의 사죄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불법에는 불법적 법집행으로 대응해도 어쩔 수 없다는 식의 노무현 대통령의 문제인식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이 오늘의 발표로 이 상황이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대단히 잘못 판단하고 있음을 밝힐 뿐이다” 사죄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지요. 비단 이 일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이후 노무현 대통령은 그를 반대했던 사람들 뿐 아니라, 한 때 그를 지지했던 사람들에게도 거의 지지받지 못하는 무기력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죄해 봐야 약점만 잡힐 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이후의 영악한 권세자들이 잘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회개할 생각도 없겠지만, 회개해도 그 일에 대해 흔쾌히 용서 받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처럼 제자들에게 요구되는 작은 자 하나에 대한 실족 문제, 그리고 용서 문제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긴장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요청한 말씀, 그것이 5절입니다. 5절,

“5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이런 일은 현재 그들의 믿음 가지고는 안 되고 더 큰 믿음, 보다 특별한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래서 예수님이 그들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6절,

“6주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성경문자주의’는 ‘성경문제주의’입니다. 어떤 문자주의자들은 이 말씀을 정말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 있다면, “뽕나무야, 뿌리가 뽑혀라!” 명령하면 그렇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더 심한 문자주의자들은 그렇게 뿌리 뽑힌 뽕나무를 같은 방식으로 바다에 심을 수 있다고까지 생각합니다. 조금 개량된 문자주의자들은 그나마 뽕나무와 바다에 대한 문자적 해석은 벗어나지만, 본문이 여전히 “초자연적인 현상을 가능케 하는 믿음의 놀라운 능력”이라는 생각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믿음으로 치유, 이적, 축귀, 예언 등 다양한 초자연적 사역을 행합니다. 물론 그의 우월한 지위가 먹혀드는 작은 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실족 사역이 대부분입니다. 그러나 성경 해석의 기본은 문자 그대로 무조건 믿고 보자는 문자주의가 아닙니다. 우리가 초중고등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것과 똑 같은 방식으로, 성경의 문맥을 따라 그 문장을 이해하는 방식이어야 합니다.

5절에서 사도들은 현재 우리의 믿음으로는 주님이 요구하시는 일을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주께서 더 큰 믿음, 추가적인 믿음을 주셔야 한다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6절에서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란 아주 작은 믿음을 말합니다. 즉,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에게 그런 작은 믿음이 조금이나마 있다는 쪽이 아니라, 전혀 없다는 쪽입니다. 즉 본문은 제자들의 믿음 없음에 대한 책망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예수님은 종종 제자들에게 “이 믿음이 작은 자들아!” 책망하셨습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예수님은 즉시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으시며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 14:31), 또 예수님이 풍랑 가운데 뱃머리에서 주무시다가, 살려달라고 아우성치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책망하셨습니다(마 8:26).

제자들에게 작은 믿음이라도 있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그런 작은 믿음조차 없다는 것입니다. 영어로 말하면 a little(조금 있다)이 아니라, 그냥 little(없다, 거의 없다)입니다. 실제 관련 본문의 원어도 모두 믿음이 없다는 책망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추가적인 믿음, 더 큰 믿음을 달라고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추가적인 믿음이 아니라, 너희에게 아주 작은 믿음조차 없다!” 책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한국식으로 눈꼽만큼의) 믿음이 있었다면, 이런 저런 일을 할 수 있으리라!”에서도 역시 이런 저런 초자연적인 일을 실제로 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 정도로 너희의 믿음이 없다는 강조의 의미지요. 적절한 비유인지 모르지만, 가령 “내가 고등학교 때 과외 한 번이라도 받았다면 하바드 예일을 갔을 것이다”에서 내가 정말로 하바드 예일을 간다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고등학교 때 과외를 안 받았다는 걸 강조하는 말이지요.

즉 예수님 말씀은 당시 제자들에게 믿음이 없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제자들에게는 왜 믿음이 없었을까요? 아직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장차 세상을 구원하시겠다는 당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보내주신, 온 세상의 메시야이심을 몰랐습니다. 사실 그 약속이 이미 구약성경을 통해 계시되었기에, 누구보다 유대인들이 잘 알았어야 합니다. 그 중에서도 성경 전문가인 바리새인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이 특히 잘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에겐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었어요. 오히려 이방인들이 먼저 그리스도를 알아본 안타까움이 성경에 표출됩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열 명의 나병환자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그때 길을 가다가 예수님께 치유 받은 열 명의 나병환자가 있었는데, 자기가 나음 받은 사실을 알고 예수님께 돌아와, 발아래 엎드려 감사와 경배를 드린 사람은 유대인이 아닌, 사마리아인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그에게 하신 말씀이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아직 그런 믿음이 겨자씨 한 알만큼도 없었던 것이지요. 그 믿음은 현재의 믿음에 더 큰 믿음이 추가되어야 하는 어떤 양에 의해 좌우되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 믿음은 아무리 적은 양이라도, 그 유무에 따라 구원이 결정되는 질적인 믿음입니다. 그 믿음은 실족한 사람을 살리는 믿음이지, 양이 적기 때문에 형제를 실족케 하여 구원에서 멀어지게 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서 힘없는 작은 자들을 의도적으로 계속해서 실족케 하는 목회자, 사역자가 있다면 그는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아예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 그 믿음은 아무리 적은 양으로도 회개하고 돌아온 자를 용납하고 받아주는 믿음이지, 양이 적다고 해서 정죄하지 않습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렇게 용서 받았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겨자씨 한 알만큼이라도 참된 믿음이 있는 자일까요? 이적과 기사와 방언, 예언, 축귀의 온갖 능력을 행하는 자가 아닙니다. 작은 자 한 사람이라도 의도적으로 계속적으로 실족케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한 사람을 널리 용서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인격이 탁월해서가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그가 믿기 때문입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그가 믿기 때문입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의 그 약속을 따라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그가 구주로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부활의 능력을 그가 믿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모든 일을 충실하게 감당하면서도,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자랑하거나 떠벌이지 않고, 또 하나님께 어떤 특별한 보상을 요구하지 않으며, 다만 “저는 무익한 종입니다. 그저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고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그런 믿음이, 과연 겨자씨 한 알만큼이라도 있을까요? 만약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왜 믿음 없는 사람들의 삶과 별로 다르지 않을까요? 주님, 내 안에 믿음이 없나이다! 참 믿음을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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