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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CK 역사상 첫 정교회 대주교가 회장으로 선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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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1.29  11: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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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CCK 역사상 첫 정교회 대주교가 회장으로 선임

   
* 사진출처:국민일보 / NCCK신임회장 조성암 정교회 대주교와 임원들

지난 28일 한국정교회 성 니콜라스 대성당에서 열린 NCCK 제65회 정기총회에서는 한국정교회(러시아) 대주교인 조성함(55세, 본명 : 암브로시오스 아리스토텔리스 조그라포스)가 외국인으로는 첫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NCCK는 전례대로 회원 교단이 돌아가면서 회장을 맡아왔다. 이번 총회에서 처리한 주요 안건으로는 현행 총무의 정년인 만 65세를 70세로 연장했다. 이 안건은 이미 2015년 총회(서울 복음교회)에서도 논의된 바 있으나 이번에 헌장 개정을 통하여 결정 되었다.

이 문제는 현재 연임을 한 김영주 총무가 임기 중 정년을 맞아서 출마할 수 없다는 주장과 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2년전 63회 총회 시 큰 혼란이 빚어진 바 있는 데 이번에 확고하게 임기 중 정년을 맞는 사람은 출마조차 할 수 없게 되었고 현 김영주 총무는 구법의 적용을 받아 정년이 되는 내년에 임기를 마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총회는 부회장단에 회원 교단, 여성, 연합기관, 청년 등 4개 분야의 대표 각 1인을 선임하는 안과 회원 교단에서 NCCK에 총대와 실행위원 등을 추천할 경우 여성 30%, 청년 20%를 포함시켜야 하는 개혁적인 안도 통과 되었다. 한편 12월 8일로 예정된 NCCK 주관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리는 박근혜정부의 국정농단에 대한 항의와 박근혜 대통령의 책임과 결단을 촉구하는 시국기도회에 전 회원교단의 참여를 독려하기로 하였다.

한편 이번에 회장이 된 정교회의 한국 대주교는 그리이스 출생으로 아테네신학교를 나왔다. 1998년 12월 23일 한국으로 파송돼 한국정교회에서 사목을 시작했으며, 서울 아현동의 성 니콜라스 주교좌 대성당 주임사제를 역임했다. 그는 1991년에서 1993년까지 미국 대교구의 장학생으로 보스톤에 있는 홀리 크로스 정교회 신학대학에서 교부학으로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에서 1996년까지 장학생으로서 프린스턴 신학원 (PTS)을 수료했고(교회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두 번째 석사학위(예술사)를 받았다.

동방 정교회의 역사와 한국선교 약사

동정 정교회가 한국에서 선교를 시작한 것은 오래지만 중간에 공백이 있었고 선교를 재개한 이래 공식적으로 한국교회 연합사업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실 동방 정교회는 좀 낯선데 서방(로마 가톨릭)교회의 상대적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다. 동방 정교회가 로마 가톨릭과 갈라진 것은 로마 동·서방의 언어·문화·정치적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교리나 조직은 "신약성서" 외에 7차례 걸쳐 열린 에큐메니컬 공의회의 법령과 '사도 규준', '교부들의 규준'을 따른다. 주교는 신앙의 보호자이며, 공동체의 성사를 집행하는 중심이다. 정교회는 사도권 계승 즉 주교의 사역은 예수 제자들의 사역과 직접적인 연계성을 가지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교리를 유지하고 있다. 세계 정교회는 중앙집중화된 기구라기 보다는 민족 교회들의 친목 단체로 발전해왔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1054)은 AD 1세기에 시작되어 중세기 내내 계속 되었다. 4~11세기 동방 그리스도교의 중심이던 콘스탄티노플은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의 수도이기도 했으며, 로마는 야만족의 침입 이후 동로마의 정치적 라이벌인 서방의 신성 로마 제국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이 두 지역에서 교회의 권위에 대해 서로 다른 개념이 동시에 발전했고, 여기서 신학적 차이가 생겨나게 되었다.

로마 교회가 베드로 사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개념에 입각한 로마 주교 우위론은, 로마·안티오크·콘스탄티노플 등 지역 교회의 중요성이 그 교회들의 수적·정치적 의의에 따라서만 결정될 수 있다는 동방교회의 관념과 양립될 수 없었다. 동방교회의 경우 교리에 관한 분쟁을 조정하는 최고의 권위 기관은 에큐메니칼 공의회였다. 1054년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이 분열되었을 때, 동방 정교회 교인들은 중동 지역, 발칸 반도, 러시아에 퍼져 있었으며, 그 중심은 '새로운 로마' 즉 콘스탄티노플이었다. 오늘날까지도 동방 정교회 교인들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 살고 있다.

가장 많은 신도는 러시아 정교회이지만 지중해 연한의 시리아와 키프로스 인근에서 꽃을 피운 교단이다. 한국에는 구한 말 러시아 공사가 개설되면서 들어왔으며 당시 서울 정동 인근에 본부 건물이 있었으나 6.25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그 재산은 몰수 되었다. 그리고 1980년대 동서냉전이 끝나고 러시아와 수교가 시작되자 다시 선교가 재개되었다. 

한국·러시아정교회는 쌍크트 뻬쩨르부르그에 있던 러시아정교회 시노드가 한국에 관한 정교회 선교 계획을 니콜라이 Ⅱ세 황제로부터 1897년에 인준을 받아 시작되었다.   그리고 제1차 선교사로 내정된 사람은 수사 사제 암브로시 신부, 수사 부제 니콜라이 신부 그리고 독서직 크라신 등 세 사람이었다. 선교단은 1897년 안에 서울에 도착할 예정이었으나 당시 구한 말 열강들의 세력 다툼이 치열했기 때문에 러시아인의 입국은 쉽지 않았다. 

선교단은 노보 키예프라는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 군부대 안에서 임시로 머물고 있었으며 부대 안 장병들을 대상으로 사목 활동을 하다가 수사 부제 니콜라이 신부만 끈기 있게 기다려 한국 정부(대한제국)의 입국 허가를 받고 멀고도 험한 한국 선교의 길에 들어선 것이 1897년의 일이었다. 

흐리산프 신부는 한국 러시아정교회 성당 신축지로 주한 러시아 공사관 근처의 땅을 물색하다가 당시 러시아 마티니나(N. G. Matyunina)공사의 중재로 땅(현재 경향신문사 자리, 서울 정동 22번지)을 매입했다. 추가로 구입한 땅은 대한제국의 고종 황제가 하사하였다 하여 러시아의 니콜라이 Ⅱ세 황제는 고종 황제에게 전문을 보내(1898. 1. 23.) 감사의 표시를 하였다.

그러나 열강들의 세력다툼 속에서 한·러 관계가 다소 소원해지자 러시아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이 어렵게 되면서 니콜라이 Ⅱ세 황제는 공짜 땅을 거부했고 땅의 대금을 모두 환불했다($12,000 - 멕시코 달러, 1898.4.11).  1902년 러시아정교회 새 성당이 정동에 들어서면서 아라사 성당이라 하여 많은 이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이듬 해(1903년)에는 러시아제 종(鍾) 5개가 수입되었는데 아라사 성당의 종소리는 마치 아름다운 연주를 하듯 울려 퍼졌다고 한다.

1904∼1905년 러·일전쟁으로 한국 러시아정교회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전쟁 발발 후 6일만에 주한 러시아인 선교사들은 모두 철수하였다. 1906년 러·일전쟁이 끝나면서 파벨 이바노프스키 신부를 책임자로 하여 한국 선교는 다시 시작되었다. 파벨 신부의 조력자 이반 강한탁은 러시아어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주로 하였다. 그리고 러·일전쟁 당시 전몰 장병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묘비 건립을 니콜라이 Ⅱ세 황제의 승인 하에 한국 러시아정교회가 추진하려 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한국 러시아정교회 관할 교구는 본래 쌍크트 뻬쩨르부르그에 있는 러시아 정교회 시노드였는데 1912년에 블라디보스톡 교구로 옮겼다. 한국인 사제의 필요성을 느낀 교구는 이반 강한탁을 부제로 서품했고 같은 해에 사제로 승품했다. 이반 강한탁 신부는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러시아정교회의 사제가 된 것이다.  1917년, 불행하게도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정교회는 박해의 광풍을 맞게 되었다. 제일 먼저 키예프의 수좌대주교 블라디미르가 살해되면서 러시아 땅에서 박해의 피는 마를 새가 없었다. 

1918년 한국 최초의 선교단장 암브로시 신부는 뻬쩨르부르그에서 순교하였고 니콜라이 Ⅱ세 황제는 예카테린부르그에서 시해되었으며 그 가족과 친척은 모두 살해되었다. 같은 해 러시아 국적의 한국인 사제 이반 강한탁 신부는 한국을 떠나 블라디보스톡으로 귀환하여, 러시아 국적의 한국인 루가 김희춘 부제 신부 홀로 한국 러시아정교회에 남았다. 김희춘 신부는 몇 명의 러시아인 사제들이 전출, 전입되는 과정에서 묵묵히 성직을 수행하는 중에 1922년 2월 26일 한국 러시아정교회는 슬프게도 일본 정교회에 속하게 되었다.

한국 러시아정교회는 후원금이 끊어지면서 동시에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교회의 명맥만 이어가고 있었다. 1924년 루가 김희춘 신부는 사제로 승품되어 교회를 지켰다. 후일 정교회 원로였던(1980년대) 고 김 파벨 옹의 증언에 의하면 루가 김희춘 신부는 순교자적 자세로 교회를 지켰다고 전해진다. 그렇지만 결국은 영양실조로 쓰러져 돌아가셨다고 한다.  1945년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여 한국과의 관계를 정리하게 됨으로써 한국 러시아정교회는 교구 소속이 없어지는 고아와 같은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당시 유일했던 사제 알렉세이 김의한 신부는 재정적 사회적 어려움 속에서도 성무를 집행했고 흩어진 양의 무리들을 찾아 정교회 신앙을 독려한 참 목자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1950년 6월 25일, 강제로 납북된 이후 지금까지 아무 소식이 없다고 한다. 1956년까지 성직자 없이 유지되던 한국 러시아정교회의 신도 공동체는 그리스 정교회 관할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한국 땅에서의 러시아정교회 선교 사업은 사실상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 후 한국 러시아정교회, 성 니콜라스 정교회 성당(서울 정동 22번지. 현 경향신문사 자리)에 관한 재산권 시비가 있었고 한국의 그리스정교회 공동체(한국정교회라 호칭)는 정동에 있던 한국·러시아정교회 성 니콜라스 성당을 매각하고 마포구 아현동 424-1번지에 비잔틴 양식의 성당을 세워서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한국·러시아정교회의 선교가 새로운 막을 올리게 되었다. 1994년 봄, 부활절에 러시아정교회 시노드(해외, 총수 미트로뽈릿 비탈리)는 유스틴 강태용에게 한국 러시아정교회 책임 신부로 <우카즈>를 수여하였고 한국 러시아정교회를 주관하도록 하였다. 

오늘날 한국 정교회는 서울에 성 니콜라스  대성당과 대교구청 사무실이 있고 인천, 부산, 전주, 양구, 춘천, 울산에 지역 성당을 두고 있으며 가평에 여자 수도원, 양구에 남자 수도원이 있다.

   
* 정교회 성직자들의 복장

세계정교회 현황

가톨릭·프로테스탄트(개신교)와 함께 그리스도교 3대 종파로 알려진 동방 정교회는 1000년 만에 세계주교대의원회의(시노드)를 열어 대통합을 위해 머리를 맞댄 바 있다.  그러나 시노드 회의에 최대 신도 수를 자랑하는 러시아정교회가 불참을 선언하면서 역사적 의미가 반감한 적이 있다.  

전 세계 동방 정교회는 2016년 6월 19일 그리스 크레타섬에서 세계주교대의원회의의 막을 올린 바 있다. 거기서 동방 정교회 시노드를 개최하는 것은 1054년 서방 가톨릭교회과 동방 정교회로 갈라진 교회 대분열 이후 약 1000년만이라고 한다.  

역사적인 이번 시노드는 동방 정교회 14개 분파 수장이 지난 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회동해 동방 정교회의 역할과 내부 통합, 다른 종교와의 관계 등 교회 현안을 논의하는 시노드를 열기로 합의한 데 따른 것이며, 1주일간 열렸다. 

여기에 카타르 성직자 임명을 둘러싸고 이스라엘과 이견을 보이고 있는 안티옥(현 터키 안타키아) 총대주교도 불참하며, 세르비아도 옵서버 자격으로만 참석한다. 동방 정교회 내 최고 영적 지도자로 인식되는 콘스탄티노플(그리스정교회 총본산, 현 터키 이스탄불) 바르톨로뮤 1세 총대주교와 러시아정교회를 이끄는 키릴 총대주교 간의 기 싸움도 시노드 불참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고 있다. 

동방 정교회는 로마가톨릭과 결별한 뒤 동유럽과 러시아 등지를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현재 그리스정교회와 러시아정교회 등 14개의 지역별 종파로 갈라서 있다. 전 세계 동방정교회 신도 2억 5000만 명 가운데 러시아정교회 신도 수는 절반이 넘는 1억 3000만명을 차지해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고 전해진다.

정교회 신앙의 핵심 주제인 "예수기도"

사도 바울의 편지에서  "쉬지 말고 기도하라."(데살로니카 전서 5:17), "항상 기도하십시오"(로마 12:12), "우리는 늘 하느님께 감사합니다."(데살로니카 전서 2:13), "나는 밤, 낮 기도할 때마나 그대를 기억합니다."(디모테오 후서 1:3) 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기도는 인생의 한 부분이 아니라 기도는 전체 생명이라는 주장이다.

이처럼 기도는 인생에 있어서 숨 쉬는 것처럼 필수적인 것인데 어떻게 항상 쉬지 않고 매 순간 기도할 수 있겠는가? 바쁜 일상은 우리에게 많은 시간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어떻게 기도하는 시간을 내기가 힘든 데  이러한 논의는 잘못된 이분법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즉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가 다른 어떤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처럼 하느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들의 가족이나 친구와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하나님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기도는 우리의 삶 전체가 하느님의 현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데 우리의 모든 생활, 모든 행동과 몸짓, 미소 조차도 찬송가나 찬양 또는 봉헌과 기도가 되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다음 말씀의 의미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하십시오."(고린도 전서 10:31)  깊은 영적 생활에 들어가고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항상 쉬지 않고 기도하기 위해서 정교회의 전통은 심장의 기도라고도 불리는 '예수기도'를 전해준다. 

이렇게 '예수기도'는 우리의 내적 생활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함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가장 잘 쓰이는 '예수기도'의 형식은 다음과 같다.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아들이시어,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Lord Jesus Christ, Son of God, have mercy on me, a sinner)." 이 기도는 단순 명료함 안에 성경에 근원을 두고 성령에 의해 인도된 새 생활을 의미합니다. 예수기도는 성령의 기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령의 도움 없이는 아무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고린도 전서 12:3)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주님, 그리스도 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2008년 한국 대교구가 다시 허가되고 대주교가 주재하게 되었는데 조 신부는 현재 한국외대 그리스어학과 교수로도 재직 중이다. 정교회는 그리스, 러시아, 이집트 정교회로 구분되어 서로 다른 이콘과 예전을 갖고 있으며 화려한 성직자들의 복장이 특이하다. 조 주교는 정교회 이력 중 1988년에서 1989년까지 이집트의 시나이 산에 있는 성 카테리나 수도원에서 도서관과 이콘 갤러리 업무를 담당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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