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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기독교 청년들 한국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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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12.14  23:4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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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기독교(CCT) 청년들 한국 방문

이번에 공식적으로는 처음으로 태국 그리스도의교회(CCT) 산하 청년들 15명이 12월 9일(금)-18일까지 한국을 방문하게 된다. 방문 목적은  “한국교회와 사회를 돌아보고 이해를 높이고 상호 교류하고, 한국교회의 사회참여 역사를 살피고 사회선교 기관과 NGO활동” 등을 보는 일이다.

그 동안 태국교회는 우리교단과의 동역관계로 지난 101회 총회 시에는 총회장과 부총회장, 총무, 회계가 방문을 했었다(이들의 임기는 4년이며 상근이다). 이번 방문의 인솔자는 CCT 본부 청년국장이며 연합회 임원과 각 노회를 대표하는 태국의 차세대 지도자들이다. 

우리총회를 공식 방문하게 되는 이 방문단은 태국기독교협의회(CCT) 에 소속되어 태국 치앙마이(메솟의 미얀마 난민, 라오스, 캄보디아)를 중심으로 하여 4개국을 섬기는 허춘중 선교사와 강미옥 선교사가 인솔을 하고 있다. 방문단은 신길동교회(용덕순 목사)에서의 도착예배를 시작으로 한국의 문화와 역사, 한국기독교, 우리교단의 교회와 사역지들을 돌아보게 된다. 

12일(월)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를 방문하여 총무인 김영주 목사로부터 한국기독교의 역사와 에큐메니칼운동 가맹교단들과의 사업과 활동에 대하여 듣고 배웠다. 또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회장과 청년운동과 에큐메니칼에 대하여 대화를 나눴다.

   
* NCCK 방문, 총무 김영주 목사 

오후에는 전국여전도회 회관 부레싱룸에서 PCK-youth와의 만남이 있었다. 이 날 PCK를 대표하여 김소형 상임총무는 우리교단의 청년조직과 활동, 역사와 비전을 나누었다.

   
* PCK-youth(장청) 상임총무 김소영 양의 발제

이날 특별강사로 초대된 정병준 교수(서울장신대)는 자신의 청년운동 경험과 아시아와 세계기독교 연합활동(CWM)의 경험으로 에큐메니칼운동에 대하여 영어로 강의했다. 이후 송년을 겸한 저녁식사로 장청들과 친교를 나눴다.

   
* 강의후 정병준 교수와 참가자 일동

14일(수) 오전에는 정신대 정기 수요시위(일본대사관 앞)에 참여하여 일제의 강점으로 인한 전쟁 위안부의 역사 현장를 배우는 시간이었다. 그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를 방문하여 이사장 박상증 목사로부터 한국의  민주화운동의 역사와 성과, 미래에 대하여 들었다.  박상증 목사는 성결교회 소속으로 70년대는 WCC 에서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 데스크를 맡았고 80년대는 CCA(싱가폴)의 총무로 사역하신 분이다.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방문, 이사장 박상증 목사

오후에는 우리교단 부총회장 최기학 목사의 초청으로 상계동의 상현교회를 방문했다. 담임목사인 최기학 목사로부터 교회 전반과 목회 여정에 대하여 강의를 듣고 저녁식사 후 수요예배를 참여하였다.  이날 설교는 허춘중 선교사가 하였다.

   
 

태국청년들은 전통복장과 무용으로 특송하여 상현교회 교인들과 친교를 하였다. 예배 후 상현교회 청년들과 인사와 선물을 주고 받았으며 자신들을 초대해 주고 대접해 주신 상현교회에 감사하고 청년들을 태국교회로 초청한다는 말도 하였다.

   
* 상현교회 방문, 최기학 목사(총회 부총회장)
   
 

최기학 목사는 상계동에 상현교회를 개척하여 자수성가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총회의 각 분야에서 경험을 쌓고 지난 2014년 세월호 사건이 나던 해  김동엽 목사 총회장 시절 총회 서기로 봉사한 바 있다. 전북이 고향이지만 일찍 상경하여 서울장신대를 졸업하고 연합회, 집회 등 외부 활동을 많이 하지 않는 전형적인 목회자다. 

   
* 101총회 신 임원들이 총회장 이성희 목사를 모시고 찍은 사진

101회기 총회 부총회장에 당선되어 상현교회와 소속한 용천노회로서도 큰 자산인데 교권정치에 크게 물들지 않은 호남의 신주류로 분류된다.  호남은 한국사에서 역사적으로 희생자이지만 정치적으로는 어느 정도 보상을 받았다고는 하나 아직도 지역적 정서적 차별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제 동정론과 반사이익을 갖고 지역주의에 기대어 과잉 대표하는 식의 거래 정치는 정치나 교회나 종식돼야 한다.  이제는  실력으로 보여주고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트랜드를 갖춰야 한다.  과거의 억압과 소외를 분노와 절망이 아닌 희망과 통합으로 바라보는 열린시대의 적합한 인물이라는 평이다. 

15일(목)에는 경기도 화성의 다문화센터(외국인)를 방문하여 아시아에서 이주한 여성들과 노동자들의 실태에 대해서도 배운다.

   
 

16일(금)은 국회도 방문하여 김한정 의원(남양주시)실의 인도로 작금의 한국정치와 국회의 기능과 역할에 대하여 듣는다. 오후에는 영등포산업선교회(YDP-URM)를 방문하여 7-80년대 대표적인 노동운동의 메카를 현장 방문하고 총무인 진방주 목사와 실무자와 노동자들과 대화한다.

17일(토)에는 자유시간을 가진 후 18일(주일) 주안장로교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고 오후에 귀국한다.

태국의 역사

   
 

타이는 불교의 나라이자 사원의 나라이다. 주민의 95% 이상이 불교 신자이며, 대부분이 소승 불교 신자이다. 타이의 승려들은 한국과는 달리 육식과 음주를 허용하지만 정오 이후의 식사는 금지하며, 여성은 승려와 접촉할 수 없다.

또한 타이에는 아름다운 왕궁과 많은 불교 사원들이 있다. 타이는 왕실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대단한 나라이다. 조상에 대한 존경은 타이의 정신적 관습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축구가 무어이 타이를 대신하여 인기를 얻고 있으며 이제는 타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다.

타이는 전통적인 관광유적과 현대 첨단문명이 잘 맞물려 현대적인 발전을 추구하면서도 푸른하늘 아래 황금빛으로 빛나는 수많은 사원, 과거의 영광을 증언하는 관광유적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동남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이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가 되었다. 유일하게 독립을 유지한 국가는 태국(당시 국호는 '시암')뿐이었다.

이는 영국, 프랑스 두 강대국이 태국을 둘러싸고 충돌을 피하기 위해 태국을 완충 지대로 두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탁월한 외교와 국왕을 정점으로 한 정부 주도의 근대화 노력도 중요한 요인이었다. 태국의 라마 4세는 국제 사정에 능통하였고, 정부의 요직에 개명 인사를 등용하였으며, 서구의 과학 기술에도 관심을 보여 일찍이 도입한 인쇄 기술로 정부 관보를 창간하고 서양 의학을 보급하고 근대 천문학을 도입하는 등 계몽 군주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 뒤를 이은 라마 5세는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고 근대적 관료 기구와 징세 시스템 구축, 노예제의 점진적 폐지, 공교육 제도 도입 등을 통해 근대화의 기반을 쌓았다.

태국 민족의 기원

서기 700년경 중국남부에서 동남아 지역으로 이주한 Tai족으로 보고 있다. 태국은 당시 동남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한 크메르의 지배하에 각각의 도시국가를 유지하던 중 수코타이가 1238년에 최초로 독립했다.  수코타이가 가장 번창한 때는 람캄행 대왕의 재위시절인데 람캄행 대왕은 태국 문자를 만들고 영토를 확장해 우리나라의 세종대왕에 비유되고 있다. 수코타이의 동쪽에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건설한 란나왕국과 수코타이 남부 아유타야 지역에 건설한 아유타야 왕국 등이 존재해 태국은 삼국으로 분열돼 있다가 란나와 수코타이가 각각 멸망하면서 아유타야가 태국의 정통을 이어받았다.

아유타야 왕국은 1351년 건립해 417년 간 존재했는데 16세기 당시 유럽인들에게는 시암왕국으로 불렸다. 아유타야는 매우 번성해 네덜란드, 프랑스, 중국, 일본 등 외국과의 무역거래가 활발했으며 1700년대는 인구 1백만의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를 형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767년 버마의 침략으로 아유타야가 멸망한 이후 딱신 장군이 태국인을 단결시켜 버마를 몰아내고 톤부리를 기반으로 왕국을 건설하고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딱신은 여러 요인으로 인해 정신이상자가 돼 휘하 장수인 차크리가 왕국을 물려받아 1782년 차크리 왕조의 라마1세에 등극했다. 또한 같은 해 라마1세는 수도를 톤부리에서 방콕으로 이전했다.

태국은 1826년 영국과 친선통상조약을 체결하고 1833년에는 미국과 수교를 맺는 등 서양제국과의 적극적인 외교를 통해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독립국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태국의 근대화와 발전에 크게 기여한 국왕은 라마 4세 몽쿳왕과 그의 아들 라마5세 출라롱콘 대왕이다.

영화 ‘왕과 나’는 영국인 가정교사 애나가 몽쿳왕 재위 당시 어린 출라롱콘 왕자의 가정교사로 태국왕실과 인연을 맺은 실화를 다루고 있다. 1932년 젊은 군인들과 공무원들이 주축이 돼 성공한 혁명으로 태국의 절대왕조 시대는 막을 내리고 그 이후 태국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했다. 1946년 라마8세가 총기사고로 사망한 후 그의 동생 푸미폰 아둔야뎃이 라마9세로 등극해 현재까지 왕위를 유지하고 있다. 푸미폰 국왕은 현존하는 세계 최장수 집권왕으로 2016년 6월 9일 즉위 70주년을 맞이한 올해 향년 88세로 6월 13일 사망했다.

태국의 기독교

기독교의 80%를 차지하는 4,100여 개 교회들이 소속되어 있는 태국그리스도의교회(CCT), 태국복음주의협의회(EFT), 태국개신교회조직화위원회(TPCCC)가 있다. 태국의 기독교 인구는 아직까지 1%에 불과하다. 언뜻 이 계획이 실현 불가능하게 비쳐질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2010년 태국복음주의협의회에서 이뤄진 발표에 따르면 2009년 태국의 기독교 인구 증가율은 4.56%로, 전체 인구 증가율 0.63%의 7배에 달할 정도다. 한 교회 단체는 1970년대 2만 명 회원 수에서 현재 16만 명으로 성장한 경우도 보고됐다.

‘내셔널 플랜’은 구체적으로 2010년까지 태국의 총 926개 지구마다 교회를 개척하고, 7,415개의 부지구에 가정교회와 같은 기독교 단체를 시작하며, 전체 8만여 마을에 복음을 소개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2020년까지는 이 8만여 마을 각각에 교회를 심고 기독교 단체를 시작하는 것이 목표다. 이렇게 함으로써 태국 전역의 사람들이 복음을 들을 수 있는 확률이 100배 이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 태국 교회의 설명이다.

한국인 선교

우리교단의 사최찬영 선교사가 초대 선교사로 가서 당시 성경출판에 전념을 하였다. 당시 그에게 감동을 받은 이들중 태국교회의 지도자들로 성장했다. 그후 조준형선교사가 오랫동안 선교사로 자리를 잡고 이후 많은 교단 선교사들이 파송되었다. 다른 국가와 달리 모두 태국교회와 협력하여 사역지를 배정받거나 독립하는 형태다. 태국에서의 나홀로 선교는 불가능하다. 선교사 비자추천을 CCT가 하기 때문이다. 이런 교단간의 협력선교야 말로 가장 건강하고 모범적인 선교라고 볼수 있다.

   
      * 올해 9월 101회 총회를 방문한 CCT총회장, 부총회장, 회계



이같은 계획은 빠른 교회의 성장 외에도, 국가 복음화에 대한 태국 교회들의 강한 열망과 이같은 열망이 중심이 되어 이뤄지고 있는 연합적 사역이 있기에 추진이 가능하다. 2002년 동남아시아선교회의, 2004년 로잔대회를 통해서 이미 연합의 기틀을 다져왔던 태국 교회는 2005년 동남아를 강타했던 쓰나미를 계기로 재해로 피해를 입은 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기 위해 교단을 뛰어넘어 교회란 이름으로 하나되는 경험을 해 왔다.

우리교단과의 관계

태국에 기독교가 처음들어간 것은 1880년대로 우리나라보다 오래된다. 그러나 강한불교 국가로 전도에 문은 열리지 않았다. 선교사들은 소수민족과 산족을 상대로한 선교와 학교와 병원등 사회교육, 복지시설를 통한 전도를 하게 된다. 태국은 남중국과 베트남,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특히 미얀마의 정치적 종교적 난민들이 메솟이라는 지대에 30년동안 거주하도록 허락하고 있다. 

이곳을 중심으로 국경지대에는 약 100만명의  난민들이 임시 거주하고 있는 데 이들이 바로 미얀마의 소수민족인 기독교도들이다. 메솟의 메타오병원(난민크리릭 원장 신시아여사는 일가 김용기 상 수장차 지낸해 한국을 방문한바 있다) 

테국의 기독교는 1934년 미국장로교회에 의하여 태국의 기독교회는 단일한 교단아래로 통합을 한다. 현재 19개의 노회가 있는데 부족과 소수민족들 단위의 노회도 있다. 기독교의 중심은 수도인 방콕이 아니라 치앙마이다. 거기에는 한국의 연세대와 같은 기독교대학의 명문인 파압대학도 있고 교회의 중심적인 지도자들도 많이 배출되었고 교세도 강한다. 

한인 선교사들이 많이 활동하는 데 불교국가이기는 하지만 기독교역사가 오래되여 국가적으로 비자를 주기 때문이다. 우리교단 선교사는 약 20가정이 현지교회나 목회자들과 사역을 하고 있으며 치앙마이의 파압대학안에 아시아교회협의회(CCA) 본부가 홍콩에서 2000년 이사를 왔는데 우리교단의 문정은 목사가 국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태국인의 심성은 “예의와 관용“ 이라고 한다. 어떤 부탁이라도 면전에서는 거절(NO)을 하지 못하는 민족이라고 한다. 그리고 Sanuk(Amusement) "재미" 라는 특이한 습성이 있다고 한다. 직장도 생활도 재미나 흥미가 없다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기다. 태국의 춤에서 그것을  본다. 온몸을 움직이기 보다 천천히 움직이며 특히 손을 많이 움직인다. 더운 나라에서 몸 전체를 움직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할 것이다. 그래서 손을 통한 댄스가 발달되어 있다.

오늘날 태국이라는 나라  

태국이 인근국가에 둘러쌓여 항공권이 발달되기 이전에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도시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른 나라의 국경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외부로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한번도 다른 나라에게 식민지를 허락하지 않은 유일한 나라이다.  따라서 국민적으로 자긍심이 높다고 한다.  

태국이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이르게 인구 100만의 도시를 달성한 국가였다. 그것은 강한 불교 덕분이었을 것이다. 거기에 태국인들의 정신적 신앙적 통합의 에너지가 있었다고 본다. 지금도 태국은 금제금용과 상업, 교차하는 도시다.  적절한 휴양지와 향락, 볼거리와 먹을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태국이 이렇게 아시아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아무래도  6.25와 월남전쟁의 배후도시였던 동경과 방콕으로 미군인과 군속들의 여가를 위하여 시작되였다고 본다. 태국은 국제기구와 세계은행들을 통하여 개발이라는 명목하에 마군의 안전한 휴가를 위하여 도시 인프라(도시화 전기 도로 경찰력)을 무상지원을 하다가 나중에는 차관을 주어 호텔과 유흥가가 들어서도록 했다. 그리고 지역의 지도층 자제들이나 학생들에게 선교사들은 통하여 영어를 가르쳤고 양복을 입히고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게 하며 사교땐스를 가르쳤다.

그 자녀들을 미국에 유학을 시켰다(한국도 비슷하다) 그들은 국내로 돌아와 미국의 충실한 정책과 시장의 신봉자들이 된다. 그들이 장악한 도시들은 미국의 전진기지로의 역할을 하도록 ( 법률과 도덕) 만들었다(태국 국왕의 신성화와 우상화는 불교적 정서에 융합하도록 하는 미국의 정책이였다. 왕의 인자한 모습을 담은 포스터를 미국에서 대량 인쇄하여 전국에 보급하고 동정을 알리기 위하여 메스컴이 보급된다.(이 점은 박정희 태통령의 사진을 전국에 달게 하여 국부인 것을 인식하게 된 것과 비슷)

미국의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전략은 인도차이나에 공산국가가 자리 잡지 못하는 한다는 이유었지만 미군은 오늘의 AMA의 전신으로 민간기를 사용하여 골든 트라이 앵글(태국 미얀마 라오스 국경)에서의 적당한 분쟁을 핑계로 양귀비의 재배와 유통의 전권을 미얀마 이탈군인 쿤사의 활동을 묵인하고 그 유통을 돕고 이윤을 나눴다.  

인도차이나의 추악한 전쟁의 이면에는 언제나 제국주의 프랑스, 영국, 그리고 미국인들이 있었다. 그리고 후발로 일본인과 한국인이 그 전철을 따른다. 2차 대전 패전으로 망가진 일본은 이 전쟁들의 특수를 누리며 경제적 도약을 하고 70년 만국 박람회를 통하여는 아시아와 세계무대에 등장한다.  그리고 미국이 먼져 하던 대로 하게 된다. 그것은 2차 대전 당시 태국(콰이강이 다리)을 기반으로 하여 미얀마와 인도로 가려던 군사적인 야욕을 경제력을 대치하여 시장화를 이룬다.

일본은 태국의 젊은 엘리트 장교들을 일본에 유학시켰고 일본 것에 맛을 드리게 하였다. 이들이 국가의 지도자가 될때 쯤 태국은 동남아의 일본시장 전진기지가 되였다. 방콕은 금융과 소비의 도시이며 일제 도요다와 닛산 자동자 조립공장, 치앙마이는 골프와 트레킹으로 구 왕국의 농촌과 풍요한 노동력은 해체되여 도시로 나와 남성은 도시 건설 노동자로 여성은 타이 맛사지사로 세계적인 상품이 된다.

지금도 태국은 일본차와 공산품의 천국이다. 그렇게 일본이 경제적인 풍요와 여가를 즐기기 위하여 미국이 개발한 방콬과 파야와 푸켓의 고객이 되였고 다음은 한국이다. 일본인은 한국에서는 기생관광에 현지처를 두고 즐겼다. 그리고 지금은 후진 개도국에서중진국이된 한국과 대만 부유한 중국인 까지 나서 인도차이나의 환락의 세계로 흡인 되였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의 기업이나 여행객들이 줄을 잇고 있다. 이제 배부른 한국이 그 전철을 따라가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속성상 그 이윤과 성장열매의 달콤함을 즐기려는 것을 법으로 규제하거나 개인적으로 이겨내기는 사실 쉽지않다.  개인의 신앙이나 양심에 호소해서도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왕조와 불교, 기독교가 절묘하게 공생하는 구조이다.  게이의 천국, 도시화와 낙후된 농촌의 간극화는 아시아의 대다수 국가의 문제다. 

현재 북부의 고도시 치앙마이는 태국의 구 왕조의 난나왕국의 수도였던 도시로 오래된 절과 나름대로의 전통문화가 있는 곳으로 태국 실크 의상과 목가구의 기술이 대단하고 선진국의 은퇴자들이 골프와 온천 휴양과 여유로움을 먹고사는 도시가 된 것 같다. 치앙마이는 최근 외국인이 거주하기 가장 편한 도시로 콘도와 안전, 의료와 낮은 물가, 교통의 편리와 다양한 레져등으로 한국인들의 단체관광과 겨울 체류가 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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