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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덕석의 "상지골이야기"서덕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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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4.06  15:2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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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골이야기"

1. 상지골 이야기를 시작하며

   
 / 서덕석목사(성남 열린교회 목사, 시인)

10년 전, 장애청소년 직업재활원을 세울 부지를 찾아 경기도 전역을 헤매다가 이곳 상지골로 정하고 땅을 구입할 때였다. 계약하고 보니 지목이 농지라서 성남에 그대로 살면서 등기이전과 건축을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농지법에 의해 300평 이상 농지는 농민만 구입할 수 있게 되어 있고 농민자격을 얻으려면 농사를 지어야만 했던 것이다. 남들은 어떻게 하는지 살필 겨를도 없고 재주껏 피하는 요령도 몰랐던 터여서 (알아도 고지식해서 그대로 못 따라 한다) 도궁초등학교 옆 농가의 빈방을 세내어 주민등록을 옮겨다 놓고 기약없는 시골생활을 시했다.

소를 키우던 마굿간을 개조한 흙벽에 슬레이트 지붕의 단칸방으로 천정이 낮아 머리가 닿고 연탄보일러에 화장실은 안채 마당을 가로질러 저쪽 구석에 따로 떨어진 ‘푸세식’ 뒷간이었다. 한 겨울에는 연탄불이 죽을 까 봐 꼼짝없이 이곳으로 퇴근하고, 봄부터 여름, 가을 동안은 농사를 짓기 위해 부지런히 오가야 했다. 주로 농사철에는 농사 경험이 있는 내가 농작물 관리를 맡고, 겨울에는 아내가 외풍과 연탄가스, 쥐들과 싸우면서 이곳에서 살았다. 교회와 선교사역은 성남에 있어서 두 집 살림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3년 정도 주말부부로 살다보니 불편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두 곳에 집을 유지하려니 주거비용과 교통비, 생활비가 장난이 아니었다. 할 수 없이 아예 이곳으로 거주지를 옮기기로 하고 살림을 할만한 집을 구하는데 마침 재활원 부지 맞은 편에 새로 지은 집에 방 한칸이 세로 나와 이사를 하게 되었다. 이때가 97년 겨울이었다.

재활원이 위치한 곳의 정식 지명은 광주시(당시는 광주군) 도척면으로서 이 골짜기를 동네 사람들은 상지골(桑之谷)이라 불렀다. 옛날부터 누에를 많이 길러 뽕나무를 가꾸었던 모양인데 지금도 곳곳에 야생화된 뽕나무가 아주 흔하다. 전형적인 야산에 둘러싸여 동서방향으로 깊고 좁은 골짜기를 이루고 있으며 ‘태화산’에서 갈라져 나온 제법 울창한 원시림을 품은 높이 400M쯤 되는 안산(內山, 임의로 붙인 이름)이 서쪽에 버티고 있고 앞(남쪽) 뒤(북)로 낮으막한 야산이 자리잡아 물길과 바람길을 동남쪽 궁뜰(옛 궁터가 있던 곳)로 내려보내는 지세이다. 농촌이지만 곡식을 심어 가꾸는 곳보다는 수십년 간 농사를 짓지 않고 방치된 논밭이 더 많아 무성한 잡목과 덤불이 우거져 산자락처럼 보인다. 길과 개울을 중심으로 그려본 지도에는 집과 공장들이 제법 있지만 한눈에 들어오는 집은 열린학교 건너편에 있는 서너집 뿐이고 멀리 있는 집과 공장들은 숲과 나무에 가려 보일락 말락한다.

이 상지골에 살면서 재활원 부지를 일구어 수년에 걸쳐 건축을 하며 농사를 짓고 시골생활을 꾸려 온 이야기를 한 보따리씩 풀어 놓으려 한다. 그동안 단편적으로 열린공동체 소식지에 ‘요골 이야기’(조해정전도사)와 ‘건축보고’(서목사)가 실리곤 했다. 하지만 이곳에 방문하신 분들이 이구동성으로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풍광, 무공해 농산물과 자연 환경에 감탄하며 “서목사님과 조원장님은 참 좋은 곳에 산다” 고 부러워하곤 하여 시골생활이 낭만적이기만 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무조건 불편하기만 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걷어내고 나름대로 시골에서 살아가는 재미와 지혜, 여러 가지 애환들을 함께 나누고 싶었다.

지도를 보면 상지골 얼개가 한 눈에 들어온다. 굵은 선의 ‘ㅈ’자형 길은 아스팔트로 포장한 4m 도로이고 도로를 끼고 비슷한 폭의 개울이 안산 쪽에서 흘러내려 와 열린학교 앞을 지나 왼편(동남향)으로 빠진다. 산비탈에는 묘지가 여기 저기 자리잡고 있으며 산은 뚝 떨어진 형태가 아니라 개울부분만 피해서 어깨동무하듯 붙어 있다. 요골 입구의 ‘옛집’이 작년까지 5년간 살던 농가주택이며 두 집 살림을 한곳으로 통합하여 이사했던 집이 지금은 주인이 바뀌어 ‘펜션’이 되었다. 이 동네 열린학교 2층의 사택에 우리가 살고 있다.

2. 상지골의 주민되기

농촌생활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농촌에 집을 짓고 살거나 방을 구해 거주한다는 것만은 아니다. 도시적 삶을 그대로 농촌에 옮겨 놓는 것으로 성공적인 농촌생활이 되지 않는다. 거주장소보다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그 지역 농촌사회에 동화되어 ‘시골사람’이 되는 것이다.

처음 우리 부부가 도궁초등학교 옆 마굿간 방에 세 들어 살기 시작할 때 부부 중 한 사람은 꼬박꼬박 자고 가고, 여름에는 도시락 싸들고 상지골의 재활원 부지로 출근하듯 밭일을 하러 다녀도 동네 사람들은 우리를 마을 구성원으로 받아주지 않았다. 즉 땅을 사려고 임시로 거처를 옮겨 와 사는 시늉을 하는 성남사람쯤으로 치부하였던 것이다. 주민등록만 달랑 옮겨 놓고 얼굴도 안 내미는(위장전입) 사람들에 비하면 훨씬 나은 축에 들긴 했지만 우리가 이 동네 사람이 아닌 것만은 사실이었던 것이다.

시골 사람들이 보기에 자신들과는 사는 방식도 다르고 생각도 다른 외지인이나 도시사람들에게 쉽게 마음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하겠다. 그 만큼 농촌 사회는 아직도 배타적이고 전통과 공동체에 대한 애착이 상당히 남아 있다. 믿을 수 없는 외지인에게 함부로 모든 걸 드러내면 우리 마을의 유구한 전통이 단절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성공적으로 농촌에 정착하려면 그 마을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아야 한다. 유일한 길은 바로 ‘시골사람’이 되는 것이다. 삶의 근거가 이곳에 있는 것을 사는 내용으로 증명해 보여야 ‘시골사람’으로 인정받게 되는데 도시에서만 살던 사람에게는 상당히 어려운 요구이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이곳 광주보다 더 깊은 지리산 부근의 산골짝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기 때문에 농촌 취락 공동체의 문화에 익숙한 편이었다.

우선, 시골사람의 삶의 방식을 이해하고 그것의 좋은 점을 수용할 줄 알아야 ‘시골사람’이 된다. 요즘의 시골은 근대화 이전에 시골과는 많이 다르지만, 아직도 취락공동체 의식이 남아 있어서 이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상을 당한 집은 차일을 치고 조등을 내거는데 조전을 못 받았다고 상갓집 앞을 그냥 지나가면 십중팔구는 욕을 먹는다. 시골은 애경사가 있으면 동네 사람들이 모두 팔을 걷고 나서서 거드는데 젊은 세대(30대 이하)는 그냥 못 본 척 하는 경우가 많지만 40대 이상과 세대주는 두레회원이 되어 조의금은 물론 음식장만, 꽃상여 꾸미기, 산소를 준비하는 치성과 상여메기 등 여러 과정을 서로 분담하여 맡는다. 외지에서 이사온 우리도 웬만한 상가에는 문상을 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결혼이나 회갑같은 경사에는 초청이 없으면 안가도 되지만 상가에는 알아서 찾아가는 게 시골사람의 기본인 것 같았다.

이웃 도웅리에는 정월 대보름 <달불놀이>가 아직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데 우리가 이사온 첫 해 구경 갔더니 악기는 있는데 풍물을 제대로 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사물놀이를 전수받은 아내가 쇠(꽹과리)를 잡고 나는 징을 들어 풍물을 잠깐 쳐 주었더니 귀가 있는 노인들이 내년에도 와서 쳐 달라고 부탁을 하였다. 이때부터 정월대보름만 되면 구경도 할 겸 풍물도 잡아 줄 겸 발걸음을 해 오고 있다. 덕분에 도웅리 사람들도 “ 이웃 상지골 목사부부가 풍물도 잘 치고 눈도 맞출 줄 아는 사람이더라 ”고 기억해 준다.

다음으로, 매사에 이익만 취하고 편리한 것만 밝히면 ‘시골사람 되기’에 실패하기 쉽다. 도시로 출퇴근 하다보면 물건을 살 때도 싸고 편리한 시내의 대형 할인점을 주로 이용하게 마련인데 좀 비싸더라도 시골의 마을수퍼를 가끔 들르는 것이 좋다. 익숙해지면 동네 사람처럼 외상장부를 만들어 놓고 가끔 외상으로 구매해 주는 것도 재미있다. 시골에서는 현금이 귀해서 명절이나 특별한 농산물을 팔 시기가 되어야 돈이 풀리기 때문에 수퍼도 외상거래를 해 준다. 외상이 있으면 고마와서라도 더 자주 단골로 가게 되고 주인과 쉽게 친해질 수 있다. 물건이 좀 오래됐다고 지나치게 타박하거나 외상값을 까맣게 잊지는 말아야 한다. 주인입장에서는 분명히 도시로 출근하는 사람인데 자기 가게를 자주 이용해 주면 고맙게 여기고 동네 사람에게도 좋게 소문을 내어 준다.

셋째로, 푸근한 시골인심을 빨리 배우고 익히는 것이 시골사람이 되는 지름길이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시골도 돈을 최고로 여기는 풍조는 도시와 똑 같지만 모든 가치를 돈으로 재단하거나 대신하지는 않는다. 강아지를 낳은 집에서는 강아지를 돈 받고 팔면 수치로 여겨 그저 나누어 주기를 즐겨하기 때문에 한 마리 팔라고 하면 “ 난 개장수 아녀! ” 하고 섭섭해 한다. 뿐 만 아니라 농사의 기본이 되는 농작물 씨앗을 서로 나누어 심는 아름다운 전통도 이어오고 있다. 심어보고 좋은 자질을 가진 종자나 토종 씨앗은 애써 이웃과 나누어서 심는다.

우리가 맞은 편 허씨네서 올해 얻어 심은 씨앗이 강낭콩, 작두콩, 넝쿨콩, 지팡이콩, 옥수수, 파, 갓, 봉선화, 단호박이고 어린 모종으로 받은 더덕을 합치면 열 가지나 된다. 우리도 받은 씨앗을 재활원 주말농사를 하는 이들에게 다시 나누어 주고 한다. 씨앗뿐 만 아니라 계란과 먼저 수확한 옥수수, 자두 등도 고맙게 받아먹고 우리도 가끔 빵도 드리고 이번 추석에는 송편과 식용유도 드렸다. 이렇게 서로 인정을 나누며 살아가는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농촌 생활의 큰 행복이 아닐 수 없다.

3. 기도로 짓는 농사

부지를 구입해 놓고 처음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일이 기도였다. 그도 그럴것이 매매 계약을 체결하긴 했지만 지급한 돈보다 은행융자 등 부채가 더 많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던 일이 부지에 둘러 앉아 기도하는 것과 여기저기 나무를 심고 밭을 일구어 농작물을 가꾸는 일이었다. 부지는 지목이 밭이지만 농사를 짓지 않은지 10여년이 넘은 상태였다.남쪽으로 급경사를 이룬 구릉인데 칡넝쿨과 산딸기, 쑥대가 우거지고 여기저기 바위가 박혀 있어 개간을 다시 해야만 했다. 마침 토박이 주민 중 포크레인을 가진 안씨에게 부탁하여 아래 위 2단으로 된 계단식 밭으로 만들고 소똥을 대 여섯 트레일러 구입 해 뿌렸다.

워낙 돌이 많은 지역인데다 포크레인이 땅을 파 뒤집어 놓는 바람에 돌과 흙이 반반이어서 경운기나 트랙터로 갈어 엎을 수 조차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삽과 곡괭이, 호미로 흙을 뒤집으면서 돌을 하나하나 캐내는 원시적인 방법을 썼다. 교회에서 봄에는 들 예배, 여름 수련회, 가을 야유회 등의 명목으로 자주 가서 예배를 em린 후 오후 내내 돌을 고르고 이랑을 만들며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심었다. 이때 너무 심한 노역에 시달려 건축이 끝난 지금도 들 예배를 가지고 하면 열린교우들은 지레 겁(?)부터 먹는다.

열린교우들 뿐 만 아니라 자원봉사자들도 개간작업에 한몫했다. 특히 호서대 <작은나눔회>는 매년 새내기가 들어오면 연례행사로 훈련삼아 '농활’을 했다. 난생 처음 삽을 잡아 보는 친구, 흙과 친하지 못해 지렁이와 벌레만 봐도 비명을 지르는 여학생을 붙들고 삽질을 하는 요령에서부터 옥수수와 잡초인 바랭이를 구분하는 방법들을 일일이 가르치면서 밭을 일구었다.

농민도 아닌 도시민이 농사짓는다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물며 경운기나 가축도 없이 삽, 괭이, 호미 몇 자루로 아마추어들이 700평(밭둑과 짜투리 땅을 제외하면 실제 경작면적은 600여평)을 개간하여 밭농사를 짓게 되기까지 흘린 땀방울이 얼마랴? 하지만 도시민들이 으레 하듯 금쪽같은 농지를 명목상으로만 ‘농사짓기 위해’ 구입해 놓고(농지 매매계약서에는 농업경영 계획이 첨부되어야 매매 허가가 떨어짐) 그냥 방치하면서 땅값이 오르기만 기다리는 몰염치를 우리는 저지를 수 없었기에 힘들고 손해가 되더라도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먼저 정착한 이웃들은 미련하게 고생하지 말고 호박 몇 포기, 고추 몇 포기, 고구마, 콩 몇 줄만 심어 농시 짓는 시늉이나 하라고 점잖게 충고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아이들에게 직업으로서의 농업을 가르칠 입장이니까 마냥 시늉만 할 수 없었다. 첫 해와 둘째 해는 돌을 골라내고 거름을 넣느라고 훌쩍 지나가고 셋째 해 봄에 헌 비닐하우스 자재를 얻게 되어 비닐하우스를 한동 짓고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했다. 처음 가축분뇨를 사용해 본 바 썩지 않은 가축분은 오히려 벌레와 병만 불러와 역효과가 나서 안면이 있는 종로5가 한약방에서 한약찌꺼기를 모아와 썩혀서 사용해 보니 그야말로 흙에 보약이 되었다.

처음 농사를 지으려면 아무래도 시행착오가 있을 수 밖에 없다. 그 땅에 맞지 않는 작물을 심기도 하고, 나쁜 모종이나 씨앗을 잘못 구입해 농사를 망치기도 하며, 파종시기를 놓치거나 잡초를 제때 못 뽑아주어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가 하면, 다 키워 놓고도 가을에 거두는 시기와 갈무리를 잘못해 실패하기도 한다. 농업전문대에서 공부했고 한 때 집안일을 도와 농사를 지어 본 경험이 있는 나 였지만 전업 농민이 아닌 한 시행착오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더욱이 완전 유기농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지어야 했으니 말해서 무엇하랴. 첫해에는 잡초에 눌리고, 둘째 해는 벌레와 새에게 먹히며, 셋째 해에 겨우 요령을 터득하고 넷째 해가 되어서야 사람이 좀 먹을 것을 거둘 수 있었다.

농촌에서는 손바닥만 한 텃밭이든 제법되는 밭뙈기든 농사를 지어야 농촌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이다. 더욱이 농지를 사 놓고 내버려두면 농민들은 그 옆을 지나갈 때 마다 욕을 한다. “순 날도둑 X들, 금쪽같은 땅을 사서 버려 놓고 있네, 천벌이나 받아라 ” 반대로 농사에 서툴면서도 땀 흘리며 농사짓는 내가 기특한 지 “ 아이고, 목사님이 농사꾼 다 됐시유, 그 땅 참 복도 많소. 목사님이 기도하면서 가꾸니께 ” 하고 칭찬한다. 그렇다, 농군도 아닌 내가 10여년을 흙과 씨름하면서 농사지어 돈 벌려는 것도 아니요, 심심풀이도 아닌 기도이다.

다 갚지 못한 부지대금을 하루빨리 주님께서 청산케 해 주셔서 건축을 시작하게 되기를, 잡초로 가득한 이 땅에 멋진 건물이 들어서서 장애청소년의 직업재활의 꿈이 영그는 공간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호미질을 하고 돌을 고르는 것이다. 이미 기도는 거의 다 이루어져 간다.

그동안 건축 때문에 주변을 정리하지 못해 3년간 농사를 쉬다가 올해부터 다시 씨앗을 뿌리고 모종을 했더니 주님께서 튼실하게 자라도록 복을 주시어 배추, 무, 호박, 고추, 고구마가 잘 되었다. 지난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성남과 분당지역 후원교회 중 작은교회들에 배추와 무우, 호박을 추수감사절 강단장식으로 쓰시도록 전해 드리면서 “이 농작물을 복주시듯 동역교회들에게 복을 주시어 크게 쓰임받는 교회되게 하소서” 라고 기도하였다.

4. 신(神)의 정원에서 겨울나기

또 다시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 왔다. 11월 말까지 늦서리를 고스란히 맞던 상수리, 졸참, 신갈 등 참나무류의 무거운 갈색잎들이 늦가을 비가 흩뿌리고 자나간 뒤 우수수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나면, 상지골 골짜기에는 벌거벗은 나무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잎을 달고 있을 때는 푸짐해 보이고 넉넉해 보였던 숲이 가렸던 옷을 벗은 몸뚱이가 되어 계면쩍은 듯 어깨를 움츠리고 섰다.

상지골은 산들로 둘러싸인 골짜기라 평지에 비해 기온이 4~5도 낮은 편이어서 겨울이 빨리 오고 늦게 물러간다. 해가 짧고 안산에서 불어 내려오는 하늬바람이 지나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하여 김장도 도시지역보다 1주일은 일찍 담가 땅이 얼어붙기 전에 김장독을 파묻어야 한다. 10여년을 이곳에서 농사지었지만 거둔 것을 나누어주기 바빠 김장을 해 볼 겨를이 없다가 이번에는 배추며 무우 농사가 잘 되어 동역교회에 드리고도 남아 김장을 했다. 양이라야 배추 열두어 포기에 동치미를 작은 독으로 두개 묻고 남은 무우를 밭구석을 깊이 파 갈무리해 놓고 겨울에 하나씩 꺼내먹기 좋게 PVC 파이프로 숨구멍을 박았다.

상지골의 겨우살이 준비는 김장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겨우내 추운 집을 덮힐 땔나무를 해 놓아야 한다. 이역만리에서 배로 실어 나른 석유며 도시가스가 집집마다 첨단 보일러를 가동시키지만, 아직도 유용하고 경제적인 연료는 땔나무를 능가할 것이 없다. 추운 겨울에 정전이라도 되면 즉각 비상복구반이 투입되는 도시와 달리 시골은 하염없이 전기가 다시 들어오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데, 기름이 떨어지거나 정전에 대한 대비책으로 뿐 만 아니라 건강을 위해서도 나무를 때는 구들방이나 벽난로를 갖추고 있는 집이 더러 있다.

우리집도 7년전 IMF가 시작 되던 무렵 쇠로 만든 화목난로를 거실에 놓고 겨울을 지낸 적이 있다. 겨울이면 감기를 달고 살았던 내가 희한하게도 나무를 때면서부터 웬만하면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나무가 탈 때 나오는 연기와 적외선 열기가 호흡기는 물론 온 몸에 유익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에는 건축 공사장의 폐목을 사서 때었는데 못이나 쇠로 된 부자재가 붙어 있어 자르기가 힘들뿐만 아니라 발열량도 자연목만큼 못해 아예 집 주변 야산에서 나무를 구해다 때고 있다.

재활원을 설계할 때 2층 사택에 벽난로용 연통구멍을 뚫고 내벽은 내화벽돌로 쌓아 두었다가 작년 이맘때 이사를 하면서 2주일에 걸쳐 벽난로를 하나 만들었다. 벽난로는 고도의 전문적인 기술과 경험이 있어야 지을 수 있는 설비인데 벽난로에 대한 전문서적을 2년간 탐독하면서 난로에 쓸 돌들과 좋은 황토 흙을 미리 준비해 왔다. 주위에 손수 만든 벽난로들을 잘 관찰하고 주인의 경험을 새겨 듣고 조심스럽게 작품을 제작하듯 만들었는데 예상외로 제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역풍방지기를 달지 못해 강한 바람이 불 때 연기가 약간 실내로 역류하는 것 외엔 별 문제가 없이 우리집 거실을 훈훈하게 데워준다.

사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나무를 때는 구들장이나 벽난로는 연료를 가장 가까운데서 구한다는 점에서 생태적인 삶의 가장 중요한 큰 부분이다. 아무리 절약한다 해도 우리 땅에서는 한 방울도 나지않아 몇 개월씩 걸리는 운반과정과 정유시설, 엄청난 파이프 라인을 필요로 하는 현대적 에너지가 바로 뒷산에서 잘라다 때는 나무에 견줄 수 없다. 도시에 사는 지인들은 “나무를 할 만큼 서 목사님은 한가하니까 ...."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무 한 짐을 해 오는데 짧으면 30분 길어야 한 시간 정도 걸릴 뿐이다.(낫질과 톱 사용에 익숙할 경우) 죽은 나무 한짐으로 3일정도 하루 6시간씩 벽난로를 피울 수 있으므로 12월~3월까지 4개월간 대략 40짐 정도면 충분하다.

이것을 주 단위로 1짐씩 해 놓으면 되니까 1주일에 한 두시간 투자하면 시골 벽난로나 온돌방 아궁이용 나무를 마련할 수 있다. 도시인들이 TV나 컴퓨터 게임기 앞에서 보내는 시간의 극히 일부만 있으면 충분히 겨우내 아궁이와 벽난로에 땔 나무를 구할 수 있다. 이 시간에도 우리집 벽난로는 상큼한 나무타는 냄새를 거실에 흩뿌리며 한참 열기를 내 품고 있다. 난로 입구에 놓아둔 고구마가 알맞게 구워지면 울타리 옆에 묻어 둔 동치미를 떠 와 그것으로 점심요기를 할 참이다. 서재의 큰 창으로 따스한 겨울 햇살이 비스듬히 하나님의 정원인 상지골 골짜기를 비껴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평화롭고 아늑하다.

5. 나무와 숲이 주는 선물

겨울인데도 아직 가을날씨 같은 포근함이 계속되던 12월 어느 날이었다. 아침을 먹고 있는데 포크레인이 집을 흔드는 굉음을 울리면서 재활원 옆 묵정밭을 지나 뒤 김씨네 선산으로 올라가더니 묘지 옆에 서 있던 나무들을 무지막지한 쇠손으로 짓이기기 시작하길래 놀라서 밥 먹던 것을 멈추고 나가 뭘 하는지 물어 보았다.

서울 사는 사촌형이 죽어 묘지를 만든 단다. 시골에서 숲과 나무가 수난 당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집을 지을 때와 길을 낼 때, 그리고 묘지를 만들 때다. 어느 경우든 사람 탓이다. 집이나 길이야 살아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니 덜 억울하지만 죽은 사람의 썩어가는 고깃덩어리를 위해 멀쩡하게 살아있는 나무들이 무자비하게 죽어나가는것을 보면 가슴이 아리다.

옛 사람들은 길을 낼 때도 되도록 나무를 해치지 않는 쪽으로 꾸불꾸불하게 오솔길을 내고, 집터도 땅을 크게건드리지 않고 살짝 앉히듯이 지어 불필요한 훼손이 없었다. 묘지도 ‘누울자리 서너 뼘’이라고 하듯 최소한의 산자락만 차지하도록 했다. 하지만 요즈음에는 인력으로 일하지 않고 괴물같은 장비들을 동원해서 널찍하고 시원하게 파헤쳐 놓는 식으로 일을 하기 때문에 일단 포크레인과 덤프트럭이 들어 갈 길이 집터나 묘지면적 보다 넓게 차지한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손실을 입는 것이 나무다. 짧게는 20~30년 자란 젊은 나무든백년넘게 자란 노거목이든 순식간에 찍어 넘겨져 나둥거려진다. ‘그깟 나무가 대수냐? 사람부터 살고 봐야지’ 하는 사람들이 나무가 없어진 세상을 상상이나 해 보았을까? 나무가 없으면 우리 인간들은 단 한 순간도 생명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광합성 작용으로 탄소를 흡수하고 산소를 내어 놓아 인간이 숨쉴 수 있게 하는 것은 기본이다.

우리가 태우는 석유,가스,석탄 같은 화석연료가 배출하는 이산화탄소의 약 1/3을 나무와 풀이 흡수하여 안정된 형태로 고정시킨다고 한다. 차 1대가 1년동안 약 20,000k 달릴때 배출하는 탄소가 약 1t이나 되는데 이만한 양의 탄소를 흡수하려면 3000평 숲이필요하다. 한 가정 당 차가 1대씩 있고 보일러도 1대씩 가동하며 숨쉴 때 마다 얼마간의 이산화탄소를 입에서뿜어 내는데 1가정 당 필요한 나무숲은 30,000평이 넘어야 할 것이다.

게다가 나무는 열매와 새싹은 음식이 되고 잎과 줄기 뿌리의 일부 성분은 약이 되며, 뭇 생물들이 깃들어살 공간을 만들고, 유기물을 분해해서 흙을 기름지게 하여 생산성을 높이며, 빗물을 저장했다가 이용 가능한 형태로 내 놓고, 산사태와 홍수, 돌풍을 막고 기온을 조절하며 적당한 습도를 유지하게 한다. 집을 짓거나가구를 만드는데 나무가 없어서는 안 될 재료요, 나무를 재료로 하여 만든 종이는 인류문명의 기초이다. 당장 이용가치를 따져서 별 쓸모가 없으니 베어버려도 좋을 나무는 어디에도 없다. 가시적이고 물질적인효용가치가 없어 보이는 나무도 모여 숲이 되면 달라진다. 숲은 다양한 생명을 품어주는 어머니 같은 존재이다.

그저 바라보기만 해도 사람에게 평화를 주고 예술혼을 풍성하게 해 준다. 인류문명은 강을 따라 발달된 숲에서시작되었고 숲이 파괴되어 사막화 되면서 문명의 찬란함도 끝났다. 영적 거성들은 숲에서 영감을 얻고 하나님을만났다. 이런 숲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천성산을 관통하는 고속철도 터널공사를 위한 환경 영향평가가 잘못되었다고 해서 ‘지율’스님이 목숨을 걸고 96일째 단식중이란다. 스님은 자신의 몸이 죽고 사는 문제를 보지 말고 천성산의 숲과 늪, 뭇 생명들의 죽음을 바라보라고 요구한다. 산 하나가 사라지면 숫자로 셈할 수 없는 하나님의 창조물과 인간의 생존공간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 후에는 사람도....상지골에서도 뒷산 김씨네 묘지를 만드느라고 뽑혀져 있는 벚나무, 층층나무, 작은 소나무들을 살려 보려고뿌리를 간수하여 마당에 옮겨 심고 얼지 않게 보온덮개를 둥치 주위에 둘러주고 겨울을 나고 있다. ‘나무들아꼭 살아남아 숲이 되려므나’ 하고 속으로 격려하면서 매서운 바람이 불어대면 나무들을 올려다 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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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연
(116.XXX.XXX.46)
부도덕적인 대형교회 목사들의 악행을 보면 내가봐도 치가 떤다~! 왜 저렇게 훌륭한일을 하시는 목사님들도 계시는데 보수개신교도들은 도대체 하는짓이 개판이니....!
(2014-06-09 23:05:23)
박혜연
(116.XXX.XXX.46)
나 오늘 야탑역 광장에서 저분뵈었는데 촛불집회때 진짜 저분이야말로 이시대의 최고 목회자시네?
(2014-04-22 22: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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