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얀마 알아가기 - 예장뉴스
예장뉴스
CultureTravle
1. 미얀마 알아가기CCA-AMC 선교대회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7.10.05  11:24:23
트위터 페이스북

1. 미얀마 알아가기

글 싣는 순서

1. 미얀마 알아가기

"아웅산 테러 사건” 등으로 알려진 미얀마의 옛 이름은 버어마다. 아웅산은 혁명가이자 군인으로, 영국의 식민지로부터 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근대 버어마의 아버지라 불리는 인물이다. 1915년 2월 버어마 중부의 마그웨(Magwe)에서 태어난 아웅산은 1933년 랑군대학교 (Rangoon University)에서 공부했다. 대학시절 랑군대학 학생회장을 거쳐 1938년 버어마 전국 대학생회(All-Burma Students Union)회장이 된다. 이후 학생운동을 넘어 정치인이 된 후 영국식민통치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민족운동가로 1939년 버어마 공산당(Communist Party of Burma) 창립를 주도하며 초대 사무총장을 지낸다. 

   
 

 1940년 인도 방문 중 영국이 아웅산에 대한 수배령을 내림에 따라 중국을 거쳐 일본으로가 동료 버어마인들과 함께 군사훈련 받고 무장 독립운동을 일본의 도움을 받아 태국에서 버어마 독립군(Burmese Independence Army)를 창설한다. 1942년 일본군이 영국에 이어 버어마를 점령하자 아웅산이 이끌던 버어마 방위군(Burmese Defence Army/버어마 독립군의 후신)이 그 지역의 지방행정을 관할하기도 했다.

아웅산은 그 시절 부인인 친치(Khin Kyi)를 만나 결혼해 훗날 아웅산 수치 등 세명의 자녀를 두게 된다. 1943년 일본은 자신들이 점령한 버어마의 독립을 선언하고 아웅산은 국방장관의 자리에 올랐지만 그는 일본의 약속에 회의적이었다. 1945년 육군 소장이었던 그는 자신을 따르는 세력을 규합해 전쟁에서 몰락 중인 일본군을 떠나 연합군 세력에 합류한다.

패망한 일본을 대신해 다시 식민세력으로서 버어마에 돌아온 영국을 맞아 당시 사실상 국가의 총리 역할을 하고 있던 아웅산은 버어마의 독립을 두고 영국과 협상을 벌이기 시작한다. 1947년 1월 런던에서 클레멘트 애틀리(Clement Attlee) 총리와의 협상을 통해 향후 1년 안에 버어마의 독립을 선언하는 협정서를 발표했으며 그해 4월 치러진 제헌의회 선거에서 아웅산이 이끄는 반파시스트 인민자유연맹(Anti-Fascist People’s Freedom League)은 총 210석 가운데 176석을 얻는다.

이러한 압도적인 승리에 따라 영국으로부터 권력을 이양받는 준비를 하기 위해 내각회의를 진행하던 어느날 (1947년 7월 19일) 버어마의 전 총리였던 우쏘(U Saw)의 사주를 받은 무장 민병대들의 습격으로 아웅산이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피살당했다. 버어마가 영국으로부터 독립(1948년 1월 4일)하기 6개월 전이었다. 당시 아웅산의 죽음에 영국정부가 관여했다는 의문이 꾸준히 제기되어 왔으나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지정학적 위치
미얀마는 방글라데시, 인도, 중국, 태국, 라오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나라로, 한반도의 3배에 이르는 면적을 지닌다. 인구는 대략 5,000만 명으로, 까친, 몬, 샨족 등의 7개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정구역은 이들 각각의 종족주와 바고, 양곤, 만달레이 등 7개의 행정주로 나눠져 있다. 인구의 75퍼센트가 상좌부 불교를 믿고 있으며, 이외에 이슬람, 기독교, 힌두교 등의 종교가 존재한다.

버마와 미얀마
오늘날 미얀마(Myanmar)로 칭하는 이 나라의 국명(Union of Myanmar)는 1989년부터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미얀마라는 명칭은 1989년 이전에도 이곳 사람들에 의해서 이미 자신들의 정체성의 상징으로 널리 쓰여 왔다. 그러나 미얀마 군사정부의 국명 변경의 의도는 과거에 ‘버마’ 라는 명칭은 버마족과 그들의 국가만을 지칭하는 것이었으므로, 버마족 이외에 모든 소수민족을 포함하고 모든 종족들의 나라라는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서 미얀말 개칭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군사정부의 이러한 주장의 진의(眞意)에 의구심을 가지고, 그 취지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들은 아직도 버마(Burma)라는 명칭을 고집하고 있다.

종족과 인구
2004년 추계로 미얀마의 인구는 약 4,800만 명으로 남한 인구와 비슷한 숫자이다. 인구 중 주종족인 버마족이 68%, 샨족9%, 꺼인족7%, 라카인족 4%, 몽족2%, 그 외 까친, 친, 까야 등의 소수 종족이 5%를 차지하고 있다. 버마족들을 중심으로 약 90%의 미얀마인 들이 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이 밖에도 북부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5% 이상의 기독교들이 분포되어 있는데, 영국 식민통치의 영향이다. 인도 접경 지역에 분포된 소수 민족들 중에는 이슬람교도 4%도 많이 있다. 기타 힌두교와 토속 신앙을 신봉하는 사람들도 있다.

언어는 미얀마어가 공용어로 전체 인구의 90% 정도가 미얀마어를 이해하고 있다. 미얀마는 의무교육제(4년제)를 채택한 지가 오래지 않기 때문에 소수종족이 다수를 점하고 있는 지역에서는 미얀마어가 부분적으로 소통되지 않는다. 이들 소수종족이 구사하는 다양한 고유 언어가 있고, 그 종류가 141종에 달한다는 조사통계가 있다. 미얀마어 이외에 영국 식민통치의 영향으로 영어가 폭 넓게 통용되며, 대도시를 중심으로 인도어(Hindi)와 꾸앙동(廣東)어가 부분적으로 소통된다.

까렌(Karen)족으로 오랫동안 널리 알려진 온 꺼잉(Kayin)족은 300만 정도의 인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주로 서부 고원지대의 샨족의 거주 지역 남부에 분포되어 있다. 이들은 오랫동안 태국과 미얀마의 국경지대에서 밀수품에 대한 통행세를 받아왔으나, 현재는 정부군에 의해 태국으로 내몰려 있는 상태이다. 정치적 활동에 간여하지 않는 대부분의 꺼인족들은 화전방식으로 농사를 짓거나, 코끼리를 이용한 벌목, 광산에서 주석 등의 광물을 케서 활동하고 있다. 이 밖에도 많은 소수종족들이 거주하고 있다. 정부가 공식적으로 확인한 종족 수는 135종족으로 발표된 적이 있다. 아직도 외국인으로 등록되어 있는 중국인과 인도인들이 있는데, 이들은 지난 1993년 군사정부에 의해서 각각 5만8천명과 3만4천명으로 조사되었다.

국토와 지형
미얀마는 북서쪽으로 방글라데시와 인도, 북동쪽으로 중국, 동쪽으로는 라오스, 남동쪽으로 태국의 5개 국가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총 국토면적은 약68만km2로 대륙부 동남아 국가들 중 가장 크며 한반도 전체의 3배 정도이다. 미얀마의 지형은 그 성격에 따라 동부 고원지대, 중부 평야 지대, 서부 산악지대, 그리고 벵갈(Bengal) 만 연안의 라카인(Rakhine)연안 지역으로 구분한다.

동부 고원지대는 까친(Kachin) 주의 고봉(高峰)카까보야지(Hkakaboyazi)산(58881m)으로부터 중국과 라오스· 태국과 말레이 반도에 이르는 약2,000km에 달하는 지역이다. 서부의 산악지역과는 달리 국경무역이 가능한 언덕과 짧은 강으로 구성되어 있다. 라카인 연안지역은 라카인 산맥과 벵갈 만 사이의 해안선 지역이다. 이곳도 미얀마 중부지대처럼 평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형태는 북부가 넓고 평평하며 아래로 내려올수록 협소해진다. 그러나 형태는 북부가 넓고 평평하며 아래로 내려올수록 협소해진다. 이 평야지대는 중부 평야지대 못지않게 강우량이 많고 비옥하여 벼를 많이 생산하고 있다. 라카인 산맥을 경계로 미얀마 중앙부와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은 18세기까지도 미얀마 고대왕국들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

기후
미얀마는 국토가 남북으로 2,040km에 달하며 북으로 중국대륙 운남성(雲南省)의 남서부와 연결되어 있고,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태국 및 인도와 긴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 나라는 전체적으로 열대와 아열대에 속하여 고온다습(高溫多濕)한 열대몬순 기후대이다. 건기와 우기는 대체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우기는 벵갈(Bengal) 만(灣)에서 남서 계절풍(Monsoon)이 불어오기 시작하는 5월 하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약 5개월간이다. 이 기간 중에 가장 낮은 기간은 11월부터 2월까지 4개월간이고, 이 기간 중 평균 최저 기온은 17도이다. 가장 기온이 낮은 달은 1월로 평균기온이 18도 -23도이다. 강수량이 가장 많은 달은 7월(평균 강수량 582미리)이고, 이에 상반되는 달은 1월(평균 강수량 3미리)이다.

양곤은 미얀마의 수도이며 미얀마로 들어오는 첫 관문이다. 일년 내내 무성한 열대나무, 그늘이 우거진 공원 아름다운 호수가 있는 양곤은 한 때 동방의 정원 도시로 알려졌다. 1277년 버모로부터 70마일 떨어진 곳에서 샨족 족장이 스스로 중국에 복속하자, 미얀마는 이 지역에 군대를 출동시켰다. 이렇게 되자 그 족장은 중국에 급히 지원을 요청하였다. 쿠빌라이는 지원군을 파견하였고, 이렇게 하여 소위 미얀마인들이 일컫는 응아 사웅잔 전투가 발발하였다. 미얀마는 아난다삐시와 얀다삐시 장군이 이끄는 60000명의 군과 2000마리의 코끼리 부대로 몽고의 12000명으로 구성된 부대와 전쟁을 벌였다.

영국은 미얀마를 식민지화 하자 미얀마를 인도의 한 주(州)로 편입시켰다. 미얀마의 반란에 대비하여 3만 평의 정규군과 또 다른 3만 명의 군경을 미얀마 전역에 배치했다. 그리고 영국은 분할통치정책(divide & rule)을 펴 중심부와 산간지역을 구분해서 각각을 직접관리 하였다. 이렇게 하여 다수족이자 주 족인 버마족을 견제하고자 했다. 또한 영국은 친, 까친, 꺼인족 등이 소수종족들에게는 군 입대의 기회를 제공한 반면 주 족인 버마족은 군 입대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버마족의 세력화를 최대한 억제하고자 했다.

특히 분할통치정책은 유럽인 기독교 선교사들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사실 이들은 1826년 이래 미얀마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펴고 있었지만 불교신앙이 뿌리 박혀 있는 지역과 불교의 영향력이 미치는 지역에서는 기독교 개종이 힘들었던 터였다. 따라서 이 정책으로 불교권 지역의 간섭을 최소화할 수 있었고 그 틈을 타 선교사들은 애니미즘 등의 토속종교를 믿는 문맹 산악지대로 들어가 선교 활동을 폈고 큰 효과를 거두었는 산족인 카렌족이 주로 개종 되었다.

온 누는 미얀마를 영국연방에서 분리함과 동시에 1947년 10월 17일, 약 9개월 전 아웅 산이 합의했던 영국과의 협정서를 바탕으로 만든 정식 독립문서에 영국 수상 크레멘트 에틀리(Clement Attlee)와 함께 서명을 하였다. 아울러 미얀마와 영국 간의 상호방위조약 및 미얀마가 영국으로부터 안고 있는 부채 4천만 불도 영국이 탕감해 주었다, 12월 이 독립문서는 영국 의회의 인준을 받아 그 다음 해인 1948년 1월 4일 동틀 녘, 미얀마는 독립된 주권 공화국이 되었음을 만방에 선언했다. 독립 후 신정권 하에서 미얀마는 커다란 정치적 혼란을 겪게 되었다.

경제와 정치
1988년에 민주화를 바라는 대규모 시위가 전개됨으로써 네원은 정치무대에서 퇴장하였지만 그를 따르는 소장파 군부 세력에 의해 시위는 진압되었고, 이들에 의해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SLORC)이라는 과도 정권이 탄생하였다. 이후 대학의 잦은 휴교로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고 있으며, 각종 계약과 약속의 불이행으로 국제적 신용도도 하락했을 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투자자금 회수로 문을 닫고 철수하는 외국회사들이 속출하고 있으며 부동산도 가격이 형성되지 않을 정도로 폭락했다.

게다가 1988년 7월 NLD 당원들과의 자유로운 접촉을 요구하며 침묵시위를 벌이던 아웅산수치가 강제로 자택으로 호송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대해 미국, UN, 영국, 호주, 일본, 한국 등의 나라들이 인권침해라는 논평을 발표하여 미얀마 군사정부를 비난하며 아웅산수치와의 공개적 대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미얀마 정부는 헌법초안의 완성 후 의회를 소집할 것이라고 하면서 수지와의 대화 및 의회소집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한바 있다.

미얀마의 현대 정치는 네원(Ne Win)에 의해 주창되고 26년 동안이나 실시된 ‘버마식사회주의(Bermese Way to Socialism)"와 이를 전복시키고자 발생한 1988년의 대규모 민주화요구 시위와 그 와중에 어머니 간병을 목적으로 고국에 돌아온 아웅산수치(Aung San Suu Kyi)가 무고한 국민들이 군인들의 총과 칼 앞에서 무참히 쓰러져 가는 것을 목격한 후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해 정치에 참여한 것과 민주화 요구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현재까지 집권하고 있는 신(新)군부로 요약된다.

1988년 민주화 요구 시위가 발발한 지 20여 년이 가까이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얀마는 군부통치하에 놓여있으며 민주화의 미동조차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미얀마의 민주화를 바라는 국제사회의 압박이 더욱 거세지고 있는 국제적 맥락에서 군부는 또 다시 미얀마인을 위한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생산하고 있다. 아시아 민주주의의 상징으로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아웅산 수치(67) 여사가 역사적인 버마(미얀마) 의회 입성에 성공한 것은 이미 1990년 선거에서 수치의 민족민주동맹(NLD)에 압승을 선사했으면서도 군부의 권력 이양 거부로 독재 치하에서 신음했던 버마 국민들이 22년 만에 희망의 불씨를 지펴 올렸다.

개혁의 선봉, 역사학자 탄민우
아시아 최초의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미얀마의 지식인 우 탄트(U Thant)의 손자라는 말이 가장 먼저 따라붙는 인물이다. 1966년 미국 뉴욕에서 태어났으며 할아버지인 우 탄트가 사무총장 임기를 마치고 뉴욕에서 사망했던 1974년에 여덟 살의 나이였다. 어린 탄민우는 할아버지의 시신을 따라 버마에 건너가 대학생들의 추모행렬과 그 열기가 반정부 경향으로 흐를까 두려워 했던 군부의 진압과정 등을 지켜보고 훗날 이를 글로 남기기도 했다.

미국 하버드대에서 학사를 마치고 1996년 영국 캠브리지대에서 미얀마 역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 대 이후 할아버지가 일했던 유엔에서 평화유지 관련 업무를 수행했다. 1994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유엔 보안군의 대변인으로, 1996년에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유엔 특별 대표부 자문으로 활약하기도 했다. 2000년부터 2006년까지 뉴욕에 위치한 유엔 본부에서 정치 분야 업무를 주로 담당했다. 현재는 양곤 헤리티지 트러스트 (Yangon Heritage Trust) 회장이며 미얀마 국가경제사회자문위원회 (National Economic and Social Advisory Council)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탄민우는 학자로서 미얀마 역사와 관련된 몇 권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미얀마 근대사에 대한 지식과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을 적절히 섞어 "The River of Lost Footsteps"를 발간한 바 있으며 최근에는 미얀마와 주변국을 여행한 후 기행문 형식의 "Where China Meets India: Burma and the New Crossroads of Asia"를 내놓는 등 활발한 집필 활동 중이다. 특히 2011년 8월에 발간한 "Where China Meets India"는 미얀마 군부의 개혁 개방 조치 직후라는 시점과 맞물려 언론과 대중들로부터 큰 관심을 끌기도 했다. 이 책에서 탄민우는 미얀마가 중국과 인도를 연결할 가교이자 근방 1,000킬로미터 안에 6억 명의 인구가 거주하는 지역적 허브로서의 미얀마를 강조하기도 했다.

탄민우는 군부가 강경하던 시절 군 수뇌부와의 대화를 주장하며 서구의 봉쇄정책은 고립을 가속화시킬 뿐이라고 주장한 탓에 미얀마 민주세력들로부터 곱지않은 시선을 받아왔다. 또한 일부 사람들은 그가 평생을 미얀마 바깥에서 공부하며 활동해 온 탓에 미얀마 현실과의 접촉면적이 적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단지 그의 할아버지와의 관계나 그가 거친 엘리트 교육 코스 덕분에 미얀마를 대표해서 설명할 수 있는 인물로 부각되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에 대해 탄민우는 2000년대 중반 유엔을 그만 둔 이후 미얀마를 정기적으로 방문하며 이곳 젊은이들과 접촉하고 현실을 파악하는데 주력해 왔다고 주장한다.

또한 민주주의가 제한적이나마 시작된 고국에서 자신의 인기를 등에 업고 정치인으로 나서지는 않겠지만 오랜 군부통치로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한 이들을 위해 역사 및 국제관계 등 자신이 기여할 수 있는 분야를 골라 글을 쓰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SNS 매체를 이용하는데 탁월함을 보이는 탄민우는 미얀마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각종 정보들을 트위터(@thantmyintu)와 페이스북에 남겨 왔다. 또한 최근에는 방콕과 양곤을 오가며 타임지, 파이낸셜 타임즈, 가디안 등 세계 유수 매체에 미얀마의 변화를 분석하고 앞으로 닥칠 새로운 변화를 예측하는 역할을 수행 중이다.

아웅 산 수 치 (Aung San Suu Kyi)
"겁준다고 겁먹지 말되, 겁 없이 살지 말라. 칭찬한다고 자존하지 말되, 자존 없이 살지 말라"

 

   
 


그녀는 1945년 6월 19일 아웅 산과 그의 아내 킨 치 사이에서 세 번째 아이이자 고명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아버지 아웅 산의 이름과 할머니 수 그리고 어머니 치의 이름을 골고루 딴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버마의 독립을 획득한 치 산은 채 정부가 구성되기 전에 정적에 의해 암살당하고 만다. 32년이라는 짧은 인생 동안 오로지 버마를 위해 살았던 아웅 산은 그 투명한 삶과 업적으로 인해 버마의 국민 영웅이 되었다. 아웅 산의 유족들은 영웅의 유족으로 추앙 받았고 영웅의 유족답게 살아야만 했다. 1962년 네 윈에 의한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기 전까지 아웅 산의 미망인 킨 치는 중앙 정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아웅 산 수 치는 1960년 인도 대사로 부임하게 된 어머니를 따라 인도로 건너갔다. 이때 시작한 외국 생활은 그녀가 1988년 어머니의 병간호를 위해 버마로 돌아오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1962년 아버지의 동료였던 네 윈이 일으킨 군사 쿠데타로 조국은 버마식 군부사회주의 독재정권으로 바뀌었고 아웅 산 수 치는 망명 아닌 망명상태로 외국을 떠돌았다. 그녀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정치와 경제, 철학을 공부하고 뉴욕에 있는 유엔에서 일했다.

아웅 산 수 치는 국적을 미국으로 바꾼 오빠 아웅 산 우처럼 떠나 온 조국 버마와는 상관없는 인생을 살아갈 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녀는 버마인이 아닌 ‘영국인’ 아시아 연구자 마이클 에어리스와 결혼하면서 조국 버마에 대한 아웅 산의 딸로서의 부채의식을 완전히 벗어버린 듯 했다. 그녀는 남편을 따라 부탄과 영국에서 살았다. 아버지 아웅 산에 대한 책을 쓰려고 자료 조사차 일본 교토에 머문 1년 외에 그녀는 영국인 남자와 결혼한 아시아계 주부로 두 아들을 키우며 평범하고 행복한 일상을 가꾸어 나갔다.

아웅산수지는 미얀마의 민주화 운동가, 정치인이다. 2016년 기준 미얀마의 국가자문역 겸 외교부 장관이자 소속 정당인 민족민주연맹(National League for Democracy, NLD)의 의장 겸 사무총장이다. 그녀는 버마독립운동 지도자이자 국부인 보조 아웅산의 딸로 15세 때 영국으로 건너가 유학했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으며 이때 대학에서 남편인 마이클 에어리스를 만났다.

1985년부터 1986년까지 일본 교토대학의 동남아시아 연구소에서 객원연구원으로서 자신의 아버지인 아웅산 장군과 관련 역사에 대해서 연구를 하였다. 그 후로 27년 만인 2013년에야 교토대학으로 돌아와 특별 강연을 하게 된다. 수 지 여사는 결혼 후엔 아들 둘을 낳고 교수 일을 하는 남편을 열심히 내조하며 영국 옥스포드에서 철저히 가정주부로 살았었다. 옥스퍼드 대 출신으로 세계 어디에서도 무시당할 학벌이 아니었음에도 정말 아무 일도 안했던 완전 전업주부였기에 그러한 생활에 질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을 쯤엔 대학원 진학이나 취업 등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988년에 어머니 병간호를 위해 버마로 귀국한 후 군사 통치에 반대하는 집회(통칭 8888 항쟁)에 참여하면서 영국의 가정주부에서 갑자기 버마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본래 수지 여사에겐 오빠(동시에 아웅산 장군의 아들)도 있었지만 그녀의 오빠는 민주화 운동을 주도할 만한 정치적 역량은 없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어쨌든 8888항쟁 중에 갑자기 나타나 뛰어난 연설로 대중을 감동시킨 수지 여사가 갑자기 버마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로 급부상하게 된 것이다. 한국으로 치자면 안중근 의사, 홍범도 장군, 백범 김구 주석의 자녀가 전두환 군부 정권에 맞서는 민주화 운동의 지도자격 인물로 나선 것과 비슷한 셈이다.

영국에서 돌아온 수지 여사는 버마를 일당 통치하던 사회주의계획 당에 다원적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고 버마 민중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야당 세력을 망라한 민주주의민족동맹(NLD, National League for Democracy)을 창설하고 그 의장이 되었다. 수지 여사가 주도한 민주화 운동은 네윈 장군을 권좌에서 물러나도록 만들었으나 결국 군사정부에 의한 대량학살의 비극으로 끝났으며 수지 여사는 1989년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1990년 5월 미얀마의 군사정부는 서방의 압력에 의해 총선을 실시하였다. 총선 당시 수지 여사는 피선거권을 박탈당한 상태였으나 여사의 인기에 힘입어 총선 결과는 수지 여사가 이끄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이 82%의 지지를 얻어 압승했다. 그러나 군사정부는 선거 결과를 무효화하고 오히려 지도부 등 당원 수백 명이 투옥시켰고 2010년에 이르기까지 정권 이양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탄압을 가해왔다.

1991년 수지 여사는 민주화 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평화상 수상식이 열렸을 때 그녀는 미얀마의 군부독재 세력에 의해 여전히 연금 상태에 있어 두 아들과 남편이 그녀의 전면 사진을 들고 대신 참석했다. 이후 1995년 국제사회의 압력으로 수지 여사는 가택연금에서 6년만에 풀려났지만 1999년 남편이 영국에서 암으로 사망할 때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을 우려해 출국을 포기했었다. 그리고 2000년 9월 2차 연금 조치로 양곤 밖으로의 여행을 금지 당했다.

2000년 9월부터 유엔특사 라잘리 이스마일의 중재 아래 수지 여사는 군사정부와 정국 타개를 위한 비밀 협상을 벌여왔다. 그 결과 2002년 5월 미얀마 군사정부를 이끄는 국가평화발전협의회(SPDC)는 수지 여사를 가택연금에서 해제했다. 하지만 2003년 5월 미얀마 군정은 수지 여사가 이끄는 NLD 지지자와 친 군정 지지자들 사이에 유혈 충돌이 발생해 수지 여사를 다시 구금했다.

2010년 11월 13일, 국제 사회의 압력을 받은 미얀마 군정은 수지 여사의 가택 연금을 해제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는 야당의 손발을 묶어 야당이 보이콧을 선언한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을 거뒀기 때문이다. 여당은 25%의 자동의석을 더하여 75%의 의석을 차지했다. 여당이 사회주의 경제를 풀고 경제개발 정책 시늉을 한 것도 있다.

2012년 4월 1일에 치러진 미얀마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 8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야말로 몰표 또한 NLD는 45개 선거구 중 43곳에서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 # 다만 아직까지는 친군부계 통합단결발전 당(USDP)이나 정부군 소속 땃마도(Tatmadaw)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지라 어떠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

2012년 6월 16일, 노벨평화상 수상 21년 만에 노르웨이에서 수상 연설을 했다. 또한 2012년에 첫 해외 순방을 했다. 2013년 1월 28일부터 2월 1일까지 대한민국을 방문했다. 관련 기사. 2013 평창 동계 스페셜올림픽 세계대회 개막식에서 연설한 후 광주광역시를 방문해 지난 2004년에 5.18 재단에서 수상자로 결정했으나 그동안 받지 못했던 광주인권상을 받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또한 강운태 광주광역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고 5.18 국립묘지에 참배해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추념식수를 했다. 이 외에 전남대학교와 서울대학교에서 강연도 가졌다.

본래 미얀마에는 주류인 버마족을 제외하고 샨족, 카렌족, 중국계와 인도계, 그리고 몬족 등이 같이 살고 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과연 주류인 버마족의 이름만을 내세운 국명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2016년 3월 15일 수지여사가 이끄는 민족민주동맹NLD의 대통령 후보로 나온 틴초 대통령이 드디어 당선되었다. 그러자 수지 여사는 외무부 장관과 대통령 대변인을 겸직하게 된다. 맡은 직책이 막중하고 틴쩌가 이전까지는 주목받지 못했던 인물이며, 수지의 측근인 것을 보면 수지가 사실상 대통령의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보인다.

수지는 중국 외교부장(외무장관) 왕이와 제일 먼저 회담해 미얀마에 급격한 외교 노선의 변화가 없을 것임을 보였다. 그 외에 수지는 수감된 학생운동가들의 석방을 추진하고 차별이 우려되었던 소수민족에 자리를 나눠주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근에는 로힝야족 탄압 방관으로 비판받고 있으며, 이에 따라 노벨평화상 수상 취소 여론까지 생겼다.

독재와 억압에 저항했던 민주투사나 저항운동가들이 막상 독재를 무너뜨리고 기성정치인이 된 후에 타락하거나 무능한 모습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군부가 물러선 후 정권을 잡은 아웅산수지의 경우에도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투쟁시에는 비타협과 굽히지 않는 고집이 미덕으로 작용하지만 민주주의 정치는 타협의 산물이기 때문에 운동가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능력과 품성이 요구되는데, 많은 독립투사나 민주화 영웅들이 이 괴리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단적인 예로 아프리카의 악명높은 독재자들 상당수가 2차대전이나 내전시기에 저항세력을 이끌었던 인물들이었으며 레흐 바웬사, 넬슨 만델라 등의 저항운동가들도 정치에 나선 후 독재자가 된 것은 아니지만 과거의 명성을 상당히 많이 깎아먹었다. 아웅산수지의 경우도 현실정치에 참여한 2년 동안 미얀마 시민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정치가는 아무리 처신을 잘해도 100%의 지지를 얻을 수 없는 직업이기 때문에 정치인이 된 아웅산수지에게 불만을 갖는 국민들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저항운동가 시절의 개혁성향이 사라지고 기성 정치판에 물든 노회한 정치꾼이 되어 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하지만 미얀마는 이제 막 민주화가 되었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대한 경험 자체가 부족하고 한편으로 급격한 과거청산은 또 다른 피를 부를 수 있기 때문에 지나치게 급진적인 정책을 기대하는 것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하려는 아기(미얀마)에게 전력질주를 기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가인 김영삼과 김대중도 3김 시절에 진정한 민주주의보다를 추구하기 보다는 당 총재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권위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집권 후에도 군사독재 시절의 유산을 급격하게 청산하기 보다는 점진적인 개선을 추구했듯이, 현재 미얀마 정치의 혼란상은 민주주의로 이행되는 과도기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일 뿐이며 아웅산 수치 역시 민주주의적 정치에 대한 동경만 있었을 뿐 직접적으로 경험해 본 적은 없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혼란은 불가피하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상황이며 얼마나 빨리 혼란을 추스르는지가 관건인 셈이다. 또한 군부가 권력을 내려놓긴 했으나 여전히 미얀마 내에서 막강한 위상을 갖고 있는 집단이며 군사독재 20여년간 미얀마의 엘리트들이 출세를 위해 대거 군부에 가담하거나 그들과 손을 잡고 있기 때문에 이들과 급격하게 단절을 선언할 경우 나라를 이끌어갈 인재가 태부족해지게 되고 이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킬 우려도 있다.

미얀마의 시험대 로힝아족 문제
인구 대다수가 불교 신자인 버마는 군사 독재 시절부터 불교를 믿지 않는 소수민족들, 특히 로힝야 족의 시민권을 무효로 하고, 방글라데시에서 온 불법 거주자로 규정해 국제적 감시망과 국제법의 빈 틈에서 소수민족들을 학살해 왔다.[17]이 과정에서 수 만 명의 소수 민족들이 끔찍한 인권 탄압 - 살해, 강간, 폭행 -을 당하고 있고, 많은 소수 민족들이 탄압을 피해 방글라데시로 피난을 가는 상황이다. UN은 "심각한 인권 침해"에 대해 전부터 우려를 표해 왔으며, 국제인권감시기구는 로힝야 족에 대한 탄압을 제노사이드로 보고 있다. 미얀마 정부는 전부터 학살 자체를 부인해 왔으며, 현장에 대한 언론과 국제 기구의 접근을 제한하고 정보를 차단해 왔다. http://v.media.daum.net/v/20171004163107620

자꾸 여기서 영국 식민지 시절 이주노동자로 버마에 온 로힝야족의 기원까지 들먹이며, 테러리스트를 진압할뿐이라고 주장하며 미얀마 정부 측의 주장을 그대로 옮기면서 이슬람공포증 사상을 보이는 위키러도 있는데, 로힝야족으로 구성된 반군 혹은 테러리스트가 존재해도[19], 현재 미얀마군은 이런 테러리스트들 뿐만 아니라 명백히 무고한 양민을 박해하고 있다. 직접 미얀마군에 적대행위를 하지 않는 비무장 양민을 군인들이 공격하는 것은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일이다. 이미 유엔에서 양민학살을 확인해고 미얀마 정부를 규탄하고 있지만 수치는 "가짜뉴스"라고 주장한다.

동남아시아 지역은 열대우림 지역이라 교통이 편리하지 못해 현재까지도 수많은 소수민족들이 존재한다. 부족적 전통이 강해서 소수민족의 분리독립 문제가 심각하여 미얀마 내에서만 해도 소수민족들은 독자적 반군 활동을 하며 수십년간 미얀마 정부와 투쟁해왔다. 이들의 10년이 넘친 오랜 분쟁끝에 반군의 지역주도권을 어느 정도 인정한채로 이들을 미얀마군으로 끌어들여 평화협정을 맺은게 현재 미얀마의 정치적 상황이다.

현재의 상황이 풀기 어려운 큰 문제중에 하나가 바로 로힝야 문제가 불거진 라카인 주가 버마족의 거주 지역 아니라는게 문제다. 라카인 주는 원래 아라칸 주라 불렸는데 이 아라칸족의 거주구였다. 라카인 주는 버마족의 언어로 개칭한 것이다. 또한 산악부족으로 친족이 존재하고 테트족과 카미족이 하천변에 존재한다. 아라칸족과 카미족이 리카인주의 역사적으로 지배적인 원주민들이다. 반면 로힝야는 1850년대 이후 식민지배와 함께 들어왔고 최근들어 버마족의 이주도 늘고 있어서 토착 소수민족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로힝야족의 문제가 있었던 것도 하루이틀 일도 아니지만 버마족의 거주지역이 아니라서 과거 미얀마 중앙정부는 로힝야족 문제에 대해 거의 방관자적 입장을 취해왔다. 그러나 로힝야족이 이슬람 극단주의 사상에 경도된 테러조직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악화되었다. 노골적으로 IS에 충성맹세를 하기도 하면서 미얀마 정부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고 라카인 주에서 승려 참수 후 로힝야족 시장에 1주일 넘게 걸어둔 사건으로[20] 전국적 조직을 가진 미얀마 불교종단의 어그로를 끌었고 비로소 전국적 문제가 되었다. 단순히 승려참살 수준이 아니라 이들이 집단적으로 불교도 마을 습격 후 방화 후 살해도 빈발하면서 타지역 불교도들의 불만도 크게 상승했다. 결국 미얀마 정부가 이에 대응조치를 하지 않을 방법이 없게 된 것이다.

버마족이 주도하는 미얀마 중앙정부가 로힝야 족에 대한 포용정책을 펼치기 어려운 것은 아라칸족과 카미족 등의 라카인 주의 토착 소수민족 입장에서는 "버마족 이 개자식들! 로힝야족을 이용하여 원주민인 우리 부족을 몰살한 후에 버마족을 이주시키려 하는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고 실제로 그런 주장을 통해 반군활동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다른 민족을 앞세워서 또 다른 소수민족을 탄압하는 미얀마 정부의 이이제이는 실제로 네윈 군사독재정부 시대에 흔히 시행된 방법이었다. 따라서 라카인 주의 로힝야족을 버마중앙정부가 보호한다면 최소한 카미족은 평화협정을 파기하고 다시금 무장투쟁에 나설 것이다. 이 경우 또 다시 전국적 내전이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카친족 카렌족 샨족 반군을 진압하는데 20년이 넘게 걸렸는데 카친족 반군이 봉기한 주 원인 중 하나가 카렌족 반군의 봉기로 인한 버마족 군 역량 저하였다. 소수민족의 봉기는 이렇게 연쇄반응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미얀마 정부는 더 경계하는 것이다.

현재 로힝야족에 대해 가장 강경한 입장을 가지고 있는건 라카인 주의 소수민족들과 민주화 이후에도 아직까지 영향력이 남아있는 미얀마 군부이다. 미얀마의 민주화는 국회의석의 25%를 군부가 지정하는 식의 불안정한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민주 정부는 버마족의 표도 우세했지만 소수민족들의 몰표에 힘입어 이루어진 면이 크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 정부가 온정적으로 대처한다면 기껏 이룩해놓은 민주주의 정부의 지지율이 바닥을 뚫고 내려가고 군부가 재집권할지도 모른다. 로힝야족에 대한 온정적인 발언 한마디면 누구라도 소수민족들의 공적이 됨과 동시에 매국노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라 미얀마 정치인 누구도 로힝야에 대해 온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발언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소수민족들끼리 서로 연대하여 버마족을 경계하는 상황에서 오직 로힝야만이 이런 취급을 받는 이유는 로힝야족이 미얀마인들에게 식민지시절 영국인들과 함께온 불법침입자들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로힝야족은 자신들이 6세기부터 그 지역에 존재해왔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로힝야에 온정적인 학자들조차 근거를 찾기 어렵다. 이들은 인종도 다르며 언어도 벵골어의 사투리에 가까워서 미얀마인과 의사소통이 불가능하지만 방글라데시의 주 민족인 벵골인과는 말이 통하는 수준이다.

라카인 주의 소수민족뿐만 아니라 미얀마의 모든 민족들에게 로힝야가 미움을 받는 이유는 이들 벵골인이 미얀마 전역에 산재해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영국 식민당국이 미얀마인들의 농경지를 빼앗고 그 자리에 농장을 세우고 이주시킨 벵골인들의 후손이라서 미얀마인들은 이들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미워했다. 이들은 영국인들보다도 미움받았는데, 영국인이 땅을 빼앗고 농장을 만들기는 했으나 그걸 경작할 영국인을 파견하지는 않았고 벵골인들에게 고정된 세금을 납부하면 농경지의 소유권을 넘겨주겠다며 벵골인들을 끌어모은 후 이주시켰기 때문에 농장에는 벵골인 밖에 안보였기 때문이다.

현재는 라카인 주에만 로힝야족이 존재하지만 식민지 시대 당시에는 미얀마 전토에 이런 뱅갈인들의 농장이 널려있었고 따라서 미얀마 일대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들에게 자기땅을 빼앗은 원수로 받아들여졌다. 시작부터 이들은 농민에게 농경지를 빼앗는 "불구대천의 원수"의 조건을 가지고 시작했고 끊임없이 문화/종교적 갈등을 일으키던 찰나에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영국인이 일본과 항전하라고 로힝야인들을 무장시키자 이들이 일본인과 싸우기는 커녕 불교사원을 부수고 불교도를 미얀마 전토에서 25,000 명을 학살해 모든 소수민족에게 원한을 남겼다. 미얀마 독립 이후에 이 벵골인들을 전부 추방시키려고 방글라데시 국경지대로 강제 이주시켰고 그게 현재 라카인 주에 집중되어 살고 있는 로힝야족의 시작이 되었다.

미얀마 전토에 있던 벵골인들을 모으니 벵골인들은 미얀마인에 비하면 2% 미만의 비중을 차지했던 것에 반해서 라카인에 한해서는 30% 이상을 차지했고, 현재는 전체 인구의 약 40% 넘게 차지하여 절반을 살짝 넘기는 아라칸족의 뒤를 바짝 쫓고 있는 모양새다. 이에 라카인 주에 살고 있었던 원주민인 아라칸족과 카미족이 로힝야에 매우 강경한 입장을 보이며 우리에게 짐더미를 떠넘겼다고 버마족 및 다른 소수민족들을 원망하고 있고 버마족과 다른 소수민족들은 이런 원망에 일정부분 책임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런 측면 때문에 소수민족들끼리 연대하여 버마족을 경계하는 미얀마의 정치상황에도 불구하고 로힝야족은 모든 소수민족 + 버마족의 혐오와 경멸을 사고 있다.

물론 영국 식민지 시절에 건너왔다해도 백년이 훨씬 넘은 일이고 현재의 로힝야족은 기원인 벵골에 아무런 근거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서 이들을 강제추방하는 정책이 매우 폭압적인 정책인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이들 로힝야 구원군이라는 테러조직이 라카인 주에서 벌이고 있는 활동은 지역에 근거를 두는 일반적인 반군활동이라기보다는 적대 부족을 습격하는 전멸전을 포함한 타 민족과 불교도에 대한 조직적인 학살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들은 IS에 공개적으로 충생맹세를 한바 있으며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으므로 이들을 근거지에 둔 채로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전세계의 지하디스트들이 몰려들어 앞으로도 미얀마인들이 수십년간 수많은 습격과 테러를 당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미얀마인들에게 그걸 감수하라고 강요하기는 어렵다는 문제가 있다.

현재까지는 로힝야족에 대해 이루어지고 있는 부락 강제철거 및 강제추방정책은 조직적 학살과 거리가 멀어보인다. 현재 100여개의 부락이 전소되었고 30만 명 이상의 난민이 생겼으며 미얀마 군대 추산 사망자도 400명이고 UN쪽 추산은 천명 안팎이다. 사망자수가 적은 것으로 보아 캄보디아나 르완다, 코소보에서처럼 특정지역에 가두어놓고 집단살해하는 것보다는 강제추방이 목표라 볼 수 있긴 하지만 난민의 생존 대책 없는 강제추방 정책과 공권력이 사람을 재판없이 사살하는게 반인권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이 이유없이 소수민족을 핍박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만큼 절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아일랜드의 록 밴드 U2가 2000년에 발표한 곡 《Walk On》은 아웅산 수 지 여사에게 헌정된 곡이다. 2011년 프랑스의 뤽 배송 감독이 수 지 여사의 전기 영화인 'The Lady'를 제작했다. 수 지 여사 역할은 말레이 출신 헐리우드배우 양자경이 맡았는데 실제 수 지 여사와 상당히 비슷해 보인다는 의견이 많다. 실제로 양자경은 수 지 여사를 연기하기 위해 5kg을 감량하는 등 상당히 노력했다고. 영화 후반부쯤 가면 남편과 여사의 장거리 연애가 부각되는 느낌도 있지만 전체적으론 미얀마 군부정부의 패악이 잘 드러나 있다.

그녀는 1995년 존 부어맨 감독의 영화 <비욘드 랭군>에서도 초반 단역으로 등장한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아웅산 수 지 여사가 처음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1988년 8월을 배경으로 한 영화인데, 총을 겨누는 계엄군 병사들을 향해 걸어가면서 군중들에게 연설하는 장면이 인상적. 한스 짐머가 작곡한 배경 음악까지 더해져 관객들에게 큰 감동을 전해준다.

다만 2013년 3월에는 띄어쓰기 없이 '아웅산수찌'로 표기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기사가 있는데 정확히 본인이 원하는 한글 표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한국어 단어에서 '수치'가 의미하는 바를 듣고 불쾌해 했으며, 본인 이름의 원래 발음에 일치하지도 않는다는 이유로 '수치'라고 표기하지 말아달라고 요구한 일화가 있다고 한다. 버마식 이름은 성씨라는 게 따로 없으며 개인별로 이름만 있을 뿐이고 그마저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보통 인생의 전환점이라 생각하는 때 바꾼다고 한다. 아웅 산 수 치의 경우엔 아버지의 이름인 '아웅 산'에 수 치를 붙여 이름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아웅 산'을 성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그냥 전체가 이름인 것이다.

영국 유학 등으로 인해 성씨가 필요해서 아버지 이름에 자기 이름을 붙여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어린 시절 거의 영국에서 자랐고 영국인과 결혼하여 그 사이에서 자식까지 둘이나 두어 거의 영국 사람이나 다름없다는 점이 약점으로 공격 받고 있다. 때문에 미얀마 군부가 자꾸 영국인이 아니냐며 공격하는 것에 대해 수 지 여사는 "나는 한 번도 영국 국적을 얻은 적이 없는 완전한 버마인"이라고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

남편인 마이클 에어리스는 티베트 불교의 권위자로 원래부터 동남아 문화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른 나이에 옥스퍼드 대학에서 교수로 발탁되기도 했다. 수 지 여사가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후부터는 수 지 여사 쪽이 훨씬 더 유명하지만 사실 그 이전엔 남편인 마이클 에어리스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나름 일가를 이뤘었다. 심지어 달라이 라마도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고 할 정도로 티베트 불교에선 나름 정통했다. 그의 무덤은 영국에 있지만 특이하게도 동남아 불탑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관련기사]

유재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많이 본 기사
1
"한국교회 진단과 대안" 정성진 목사 초청 강연회
2
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 교수 시국성명서 발표
3
이찬수 목사, 정말 아픈가?
4
102회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대한 긴급 제안서
5
명성교회 후임 청빙위원회 발표
6
김동호 목사 이미 은퇴한 목사아닌 가?
7
장신대 김철홍 교수 글에 대한 학생들 입장
8
개혁하는 교회 탐방(거룩한 빛 광성교회)
9
본 교단 채영남 총회장 행보 언론들 주목
10
쓰레기 시멘트 '맞짱' 뜨던 목사, 이렇게 산다
신문사소개후원하기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성동구 성수동 성덕정 17길 10 A동 202호   |  전화 : 02-469-4402  |  행정 : ds2sgt@daum.net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서울 아02054  |  발행인 · 편집인 : 유재무 |  대표 : 이명남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 진
Copyright © 2011 예장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pck-goo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