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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공공성에 비추어 본 교회세습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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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2.12  11:4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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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회의 공공성에 비추어 본 교회세습의 문제

이형기(Ph.D). 장신대명예교수 
   
 

* 편집자주/  우리교단 현존하는 최고의 교회사학자이고 인격적으로 존경받는 교수님이 최근 명성교회의 세습에 대한 논란에 대하여 교회사적으로 숙고한 글이다. 비판은 법리적 정서적인 면보다 역사적이고 이론적인 비판을 할 수 있어야 유익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한 찬반의 의견을 환영한다).

본 논고의 목적은 고대, 중세, 종교개혁 시기의 공교회 개념을 소개하며, 이를 ‘하나님 나라 복음 이야기의 공공성에 근거한 교회의 공공성’에 비추어 비판한 다음에 ‘교회세습’의 문제성을 지적하는 데에 있다.

1. 고대교회의 공교회 개념
고전적으로, 서방교회가 공적으로 그리고 보편적으로 고백하는 ‘사도신경’은 ‘거룩하고 공적이며 보편적인 교회’(the Catholic Church)를 믿는다고 하였고, 동방교회와 에큐메니칼 교회들이 고백하는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는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믿는다고 고백한다. 결국, 이 두 신조는 ‘교회’를, ‘공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로 믿고 고백하는데, 이는 고대의 서방교회(주로 로마가톨릭교회)와 동방교회(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디옥, 예루살렘의 교회들) 모두에 있어서 그렇다.

그런데 이와 같은 네 가지 교회의 본질적인 속성들(ecclesiam unam, sanctam, catholicam, apostolicam)은 현대로 말하면, 로마가톨릭교회, 동방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오순절 등 다양한 교파들을 포함하고 있다 하겠다. 마치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성령의 전’이 하나의 교회(ecclesia)이면서, 동시에 로마교회들, 갈라디아 교회들, 고린도 교회들, 에베소 교회들과 같은 사회문화적으로 조건 지워 진 지역별 교회들(ecclesiae)의 다양성을 포함하는 바, 신약성경은 ‘하나의 교회’이든 ‘다양한 교회들’이든 동일하게 ‘엑크레시아’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래서 1950년 토론토 WCC 중앙위원회는 ’교회, 교회들, 그리고 세계교회협의회: 세계교회협의회의 교회론적 의미'(the Church, the churches, and WCC: an Ecclesiological Significance of the WCC)라고 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으니, 이는 ‘신앙과 직제’의 모토인 교회들의 ‘다양성 속에서 일치’를 의미한다. 즉, 본 성명은 '교회와 교회들‘(the Church와 the churches)을 이분화시키지 않았다. 우리가 ‘공적이고 보편적인 교회’(the catholic Church)를 믿는다고 고백할 때, 교파들의 다양성을 열어 놓는 ‘공적이고 보편적인 교회’의 통일성을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물론, 신약성경의 ‘하나의 교회’(그리스도의 몸, 성령의 전, 하나님의 백성 = imago trinitatis)는 모든 교파가 이상(理想)으로 하고 있는 교회일 것이다.

따라서 ‘명성교회’는 장로교 총회 산하 하나의 거룩한 공교회로서 다른 다양한 공교회들과 대화하고 연대하면서, ‘하나의 교회’(the Church)에 동참하고 있다. 따라서 한 지역의 개별 교회인 명성교회는 ‘공교회’로서 실존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앞에 열거한 모든 공교회가 교회세습을 ‘교회법’으로 허용하지 않고 있는 한 그리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역시 그것을 금하고 있는 한, 우리는 명성교회의 세습과 같은 교회세습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 그것은 교회의 공공성과 보편성 그리고 신약성서의 교회론에 위배되는 것이다.
 

2. 중세교회의 공교회 개념
대체로 교회 사가들은 교황 그레고리 1세(590)를 중세 교회사의 시작으로 본다. 700년경엔 로마교황의 권위가 확립되고, 800년 경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왕관을 받은 신성로마제국의 샬르마뉴 시대에는 서방교회의 교황의 권세도 크게 상승세를 탔다. 교황 레오 9세(1049-1054)를 거쳐 그레고리 7세(1198-1216)와 이노센트 3세에 이르면 서방교회의 교황주의는 절정에 도달한다. ‘교황은 태양이요 황제는 달이다’라는 이노센트 3세의 선언에서 우리는 마태 16장18절에 근거한, 수제자 베드로의 수위권의 승계자인 교황의 교권이 로마제국의 황제의 세속권력 위에 군림하였음을 본다.

물론, 중세 교회 역시 앞에서 제시한 고대교회의 네 가지 교회표지들을 물려받았다. 왜냐하면 서방교회 역시 사도신경과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381)가 고백하는 ‘공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를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하나의 거룩하며 공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를 교황주의로 경도되게 해석하였다고 하는 점이다. 즉, 중세로마가톨릭교회(서방교회)는 자신들의 교회만이 ‘하나의 교회’(the Church)이고, 이 교회의 수장은 교황이라 하였으니, 그들에겐 다양성을 허용하지 않는 획일주의적인 하나의 ‘공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만이 존재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공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는 로마가톨릭교회이고 그 수장은 교황이어야 하기 때문에, 로마가톨릭교회는 군주제 교회정치이다. 그러나 독신주의를 추구하는 교황제도이기에 교황의 세습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하나의 거룩하고 공적이며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라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1054년에 동방정통교회와 분리하였고, 후쓰와 위클맆, 루터와 칼뱅 등 ‘사도적 복음’과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노력들을 질식시키고 말았다. 즉, 사도성의 의미를 다분히 ‘교황체제’에 집중하여 해석하는, 중세 로마가톨릭교회는 ‘교회의 네 가지 지표들’ 가운데 ‘사도적 교회’(ecclesiam apostolicam)의 의미를 종교개혁과 현대 성서학자들의 많은 연구에 빚져야 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서 와서 로마가톨릭교회는 제2 바티칸 공의회(1962-1965)의 ‘에큐메니칼 교령’(a decree on ecumenism)에 따라, 동방정교회, 성공회, 루터교, 장로교 등과 더불어, ‘사도적 복음’과 ‘삼위일체 하나님’을 공유하면서, 에큐메니칼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이 ‘신앙과 직제’의 정식 구성원들로는 참여하고 있으나, WCC의 정식회원이 아닌 이유는, 아직도 오직 자신들만이 ‘하나의 공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라고 하는 생각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3. 종교개혁의 공교회개념
16세기 종교개혁 역시 교회의 ‘네 가지 표지들’을 인정하며 전수하였으나, 루터와 칼뱅 등 종교개혁 주류는 ‘사도적 교회를 믿는다’에서 교회의 사도성을 ‘복음과 성경’에 입각하여 새롭게 해석하였다. 종교개혁은 복음 설교와 세례·성만찬이라고 하는 ‘두 가지 표지’(標識)를, 보편교회든 지역 교회든 참 교회의 징표들로 보았다. 비록 루터는 복음에 대한 신앙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교회 공동체’(eine Gemeinde = congregatio fidelium = 복음을 믿는 사람들의 회집체)를 강조하였고, 칼뱅은 여기에 더하여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과 성화(복음에 대한 응답)도 언급하였지만, 이들은 모두 이와 같이 객관적인 ‘두 가지 표지’를 보고, 참 교회 여부를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칼뱅은 이 두 가지 표지를 지닌 교회들은 나라와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언제 어느 곳에 있든지 “보편적 교회”라고 하였다.(Inst. Ⅳ.ⅰ.9). 이런 이유로, 루터와 칼뱅의 교회론에 있어서 ‘보편교회’와 ‘개별 지역교회’사이에는 그 어떤 종속적인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 가지 표지’가 참 교회를 판단하는 객관적 표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명성교회’라고 하는 ‘개별 지역교회’와 ‘보편교회’ 사이에는 그 어떤 종속관계도 없기에 개별 교회인 명성교회는 단순히 총회산하의 하위 단위가 아니다. ‘두 가지 표지’를 지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각 교파는 전통을 따라 교회법(헌법)으로 정한 ‘직제’를 가지고 있고, 직제의 선출방법에 대한 전통을 지니고 있기에 명성교회 역시 노회와 총회의 법을 따라야 한다.

4. 고대, 중세, 그리고 종교개혁교회의 교회론에 대한 비판
위에서 고대교회(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 381)의 네 가지 표지와 중세교회의 네 가지 표지, 그리고 종교개혁 교회의 두 가지 표지를 소개하였는데, 우리는 ‘복음’에 집중하고 있는 종교개혁 교회의 ‘두 가지 표지’를 가지고 네 가지 표지(ecclesiam unam, sanctam, catholicam, apostolicam)를 보완해야 한다. 즉, 우리는 ‘하나의 교회’를 믿는다고 할 때, ‘두 가지 표지’를 지닌 모든 개별 지역교회들의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고, ‘거룩한 교회’를 믿는다고 할 때, 은혜의 복음을 신앙으로 받는다고 하는 종교개혁의 ‘이신칭의’를 힘주어 말해야 하며, ‘공적이고 보편적인 교회’를 믿는다고 할 때, 우리는 ‘두 가지 표지’를 지닌, 시공을 초월한 모든 교회(다양성)를 생각해야 하고, ‘사도적 교회’를 믿는다고 할 때에, 우리는 사도성의 표준을 은혜의 복음과 성경으로 보아야 한다.

몰트만은 고대교회의 네 가지 표지를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그는 ‘자유 안에 있는 일치’(unity in freedom)를 주장하면서 획일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일치가 아니라 다양성을 열어놓는 일치를 주장하고, ‘보편성과 우선배려’(catholicity and preferential option for ...)에서는 복음서의 예수님처럼 공적이고 보편적인 교회가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과 소외되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우선 배려해야 한다고 본다. ‘가난한 자들과 연대하는 거룩성’(holiness in poverty)에서는 교회가 가난한 자들과 연대하고 스스로 가난해져야 한다고 하였고, ‘고난 가운에 있는 사도성’(apostolicity in suffering)에서는 하나님 나라의 구현을 위한 고난을 주장하고 있다 하겠다.
몰트만은 종교개혁의 ‘두 표지론’을 그의 종말론적 비전에 비추어서 비평적으로 수용한다. 그는 성령께서 ‘교회의 사도적 선포(복음 설교, 세례와 성만찬 = ‘두 가지 표지’)와 사역(ministry) 및 카리스마적 공동체의 카리스마타에 근거하는 사역직(구원의 수단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매개하신다며, 성령론 안에 포함되는 메시아적 교회론을 주장하였으니, 이 때에 성령과 그가 사용하시는 ‘구원의 수단들’은 하나님 나라를 매개하는 성례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 맥락에서 몰트만은 사도적 복음 선포를 잇는 교회의 복음 선포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보편적인 인류에 대한 보편적인 화해와 칭의를 선포내용으로 한다. 이를 믿음으로 받아, 희망과 사랑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 다름 아닌 기독교인들이요 교회로 보았다. 이처럼 몰트만은 종교개혁의 복음이해를 메시아 시대의 메시아적 교회의 메시아적 사명 안에 재 정위(reorientation)시켰다. 대체로 몰트만은 메시아 시대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의 전망 안에서 루터적인 복음을 다시 이해하였고, 칼뱅의 기독론적이고 삼위일체적인 복음이해를 좀 더 보편주의적으로 계승 발전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칼뱅의 성령론과 ‘구원의 수단들’의 관계를 인정하면서, 성령을 ‘하나님 나라의 성례’라 하여 복음 선포와 사역들 역시 그와 같은 종말론적 성령이해의 틀 안에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몰트만은 화해와 칭의가 ‘그리스도의 역사’(성육신, 선교, 수난, 십자가, 부활과 승귀)를 다 표현할 수 없다고 보면서(CPS, 30-31), (1) 고린도 전서 15장을 이 화해와 칭의의 텔로스로 본다(CPS, 31). 그리고 이 텔로스는 하나님의 주권의 승리를 가리키고, 하나님의 만유에 대한 주권과 동시에 하나님의 만유 안의 내주에 상응한다고 한다. 따라서 몰트만은 종교개혁의 칭의론과 칼 바르트의 화해론을 그의 메시아적이고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부터 보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CPS, 32-33). 이에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전통적인 교회들(고대, 중세, 종교개혁)은 교회에 대한 신앙을 하나님 나라에 대한 희망에서 보는 신학에 있어서 인색하였으니, 우리 한국교회와 명성교회 역시 그렇다고 보인다.

5. 창세기로부터 계시록으로 이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 이야기’의 공공성에 근거한 교회의 공공성

ㄱ. 공적 진리로서 ‘하나의 하나님 나라 복음 이야기’ : 한스 프라이, 린드벡, 크리스 라이트, 보캠과 하트, N.T. 라이트, 그리고 레슬리 뉴비긴은 신약성경 안에서 그리고 창세기에서 계시록에 이르는 ‘거대담론’ 안에 하나님 나라를 향한 하나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 나라의 복음 이야기의 공공성이라고 본다. 비록 그와 같은 ‘거대담론’(unity)을 표현하고 있는 성경의 각 책들과 텍스들이 각각의 시대의 사회문화적인 조건에 따른 다양성과 미시담론들(diversity)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그와 같은 거대담론의 통일성과 보편성의 의향이 보인다고 한다. 레슬리 뉴비긴은 그 진리는 “보편적인 의향”(universal intent)이요 "모든 사람들을 위한 진리“요, “공적인 진리”라고 보았다.

특히, 예수님의 명령이 우리게 말씀하는 것처럼 그것은 인종과 종교와 문화의 종류를 막론하고 모든 열방들에게 알려져야 한다. 그것은 공적인 진리이다. 즉, 다른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성령의 증언이 있음으로써 그들 역시 스스로 그것이 진리임을 알게 될 것이다.(228) (2)

ㄴ. ‘생명공동체’로서 교회의 자리와 역할 : ‘하나의 거룩하고 공적이고 보편적인 사도적 교회’란 ‘하나님 나라의 복음 이야기’의 공공성을 성령의 사역으로 수용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교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미’ 이루어진 샬롬의 ‘생명공동체’(하나님 나라)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샬롬의 ‘생명공동체’(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성령의 역사로 사도적 직무(the apostolate)를 수행해야 한다. 이로써 교회는 하나님 나라를 역사와 창조세계 속에 앞당겨 실현하는 것이다. 사도적 직무란 메시야에 의해서 위임되었고, 메시아 왕국을 지향하는 것으로서 설교, 세례와 성만찬, 코이노니아, 교육, 사회봉사, 복음전도, 하나님의 선교, 정의와 평화와 창조세계의 보전, 그리고 교회의 일치 추구를 말한다. 교회의 사도적 직무란 이처럼 샬롬의 ‘생명공동체’를 추구하는 모든 활동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즉 세상 속으로 파송 받아 사도적 직무를 수행하는 교회는 ‘하나의 보편적 교회’(una, catholica)이다. 교회의 진정한 ‘보편성’(catholicity)이란 교회 밖 보편적인 세계의 온전한 회복과 우주적 차원의 회복(엡 1 1:10; 골 1:15-20)이 없이는 값싼 ‘보편성’이다.

하나님 나라에서 기원하였고, 하나님 나라를 지향하는 교회는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하고, 세례를 통하여 믿는 사람을 하나님 나라에 편입시키며, 성만찬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앞당겨 축하해야 한다. 그리고 코이노니아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미리 맛보아야 하며, 기독교 교육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교육해야 하고, 사회봉사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증거 해야 하며, 복음전도와 하나님의 선교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널리 증거하고 구현시켜야 한다. 이는 각 교파의 ‘직제’ 역시 하나님 나라를 섬기는 도구임을 암시한다. 하지만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와 같은 사도적 직무를 에큐메니칼하게 수행함으로써 에큐메니칼 운동을 통한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해서 힘써야 할 것이다. 이는 샬롬의 생명공동체를 지향하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trinitatis)에 동참하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미리 맛봄이요, 징표요, 그것을 구현하는 도구이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유사성과 반영과 비유요, 하나님 나라의 전조와 여명이요, 하나님 나라의 선취(先取)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메시아적 공동체로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교회가 역사의 지평 속에서 감당해야 할 정의, 평화, 창조세계의 보전을 위한 모든 활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동참함이다. 그러나 역사와 우주만물의 과정에 참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역사와 우주만물을 통해서도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파편적으로 미리 보여주신다. 교회만이 하나님 나라의 미리 맛봄이요, 그것의 징표요, 그것을 구현하는 도구가 아니라, 보편사와 우주만물 역시 그렇다는 말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 속에 있는 역사와 우주만물의 과정 역시 종말론적으로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한 파편적인 상응(correspondences)이요, 부분적인 유사성(likeness)이요, 희망의 유추(analogia spei)이다. 보편사 속에 있는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공동체, 모든 인간다움과 아름다운 덕목들, 인간의 아름다운 꿈의 실현들, 그리고 아름답고 조화로운 우주만물이 바로 하나님 나라와 새 하늘과 새 땅의 ‘파편적인 표지판들’(fragmentary sign-posts)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와 세계는 이와 같은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표지판들을 세워 나가는 일에 동참하고 있고, 동참해야 한다. 교회는 성경의 예언자들과 사도들이 이미 세운 하나님 나라에 대한 표지판들을 따라서 역사의 지평 속에 이와 같은 표지판들을 세워 나가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는 표지판들이 이 세상 속에 세워지고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사유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교회 세습은 하나님 나라 복음 이야기의 사사화(私事化)의 전형이다. “의의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벧후 3:13), 예수님께서 미리 보여주신 작은 자들에 대한 따듯한 사랑(compassion), 예언자들이 선포한 공의와 정의의 나라, 레위기 25장 희년의 이상(理想)과 누가복음 4장의 은혜의 해의 이상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사유화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 모든 앞 당겨진 하나님 나라의 모습은 공적인 일(public affairs)에 해당한다. 사랑과 공의와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샬롬의 ‘생명공동체’ 형성은 전적으로 공적인 일이다.

ㄷ. 몰트만에 있어서 교회 밖에서 발견되는 하나님 나라의 징표들: 몰트만은 교회 밖의 하나님 나라를 주장한다. 그는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보편사와 창조세계 전체 속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하나님 나라의 미리 맛봄과 그 징표와 그것을 일구는 도구가 있는 것으로 본다. 몰트만은 교회의 역사참여(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고 있는 메시아의 역사 참여에 동참하는)와는 별도로 하나님과 그의 메시아는 일반 역사 속에서 그의 ‘폭발적’이고 자유케 하시고 해방시키시는 역사를 창조해 나가신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것을 ‘죽음의 악순환’으로부터의 ‘해방을 향한 길들’이라고 한다. 하나가 다른 하나와 연쇄적으로 고리를 물고 있는 ①삶의 경제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빈곤의 악순환’, ②정치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힘의 악순환’, ③‘인종적, 문화적 소외의 악순환’, ④과학과 기술, 그리고 산업화에 따른 ‘자연파괴와 오염’, ⑤‘무감각성과 무의미성 그리고 하나님께 버림받음의 악순환’으로부터 해방되는 돌출들이 역사 속에서 일어난다고 하였다. (3)

몰트만은 이와 같은 ‘해방을 향한 길들’의 다섯 차원 모두에서 해방이 일어나야만, 삶 전체를 억압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것으로 본다. 이는 역사의 지평 속에서 분별되고 발견되는 하나님 나라의 파편들이요, 징표들이요, 표지판들이요, 미리 맛 봄들이요, 그것을 일구는 도구인 것이다. 파렌홀츠는 바로 이 시기의 몰트만(󰡔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을 저술한 시기) 신학이 위에서 지적한, 보편사 속에서 발견되는 “메시아적인 파편들(messianic fragments)” (4) 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하지만 몰트만은 1980년대부터 ‘역사’뿐만 아니라 ‘창조세계’(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그와 같은 메시아적 파편들을 창조세계의 생태학적 회복과 기후변화의 극복 등에서도 발견한다.

ㄹ. 명성교회와 관련하여 : 위에서 제시한 사도적 직무수행을 위한 성령의 은사들에 따른 ‘직무와 다양한 직제’(혹은 사역과 사역직)는 하나님 나라 구현을 위한 사도직(the apostolate)이다. ‘직제’란 하나님 나라 실현을 위하여 꼭 필요한 성령의 다양한 카리스마타에 근거한 다양한 직분들이다. 대체로 ‘직제’가 ‘성사’ 혹은 ‘성례에 의하여 축성되어야 한다고 보는 로마가톨릭교회와 달리 개신교는 이 ‘직제’를 교회의 본질을 위해서 있어야 하는 것(bene esse)으로 여긴다. 그것이 교회의 본질 자체는 아닐지라도 그것을 위해서 꼭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 헌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그와 같은 ‘직제’ 역시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추구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명성교회의 세습은 하나님 나라의 사사화의 전형임은 물론, ‘하나님 나라 복음 이야기의 공공성’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비록 그 안건이 개별 지역교회 안에서 합법적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서울동남노회에서 변칙적으로 통과된 안건으로서 총회의 헌법에 위배되는 한, 우리는 명성교회의 교회세습을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

끝으로 우리가 ‘ㄷ. 몰트만에 있어서 교회 밖에서 발견되는 하나님 나라의 징표들’에서 지적한 대로, 정의 평화 생명과 같은 교회 밖에서 발견되는 하나님 나라의 파편들, 선취들, 혹은 표지판들에 비추어 볼 때에도, 그리고 현재 한국사회와 인류사회의 보편적 가치인 정의에 비추어 보아도 교회세습은 결코 용납될 수 없다.

각주

1)CPS = The Church in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2)"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1989)로부터의 발췌문. 보라: Lesslie Newbigin: Missionary Theologian: A Reader, Compiled and Introduced by Paul Weston(Grand Rapids: William B. Eerdmans, 2006)
3)Jürgen Moltmann, The Crucified God, p. 330-331. 참고: Ibid, pp. 332-335.
4)Geiko Mueller-Fahrenholz, The Kingdom and the Power(London: SCM Press, 2000) pp. 121 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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