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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 3 사건 추모 70년 만에 서울서 열려광화문 광장, 4월 3일 정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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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29  22:4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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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 3 사건 추모 70년 만에 서울서 열려 

제주 4.3사건이 70주년을 맞이하여 올해에는 아픔과 회한의 섬 제주를 벗어나 4월 4일(수) 처음으로 서울에서 추모행사를 하게 되었다. 장소는 촛불민심으로 정권을 교체한 발원지인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다. 이 귀한 행사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정의평화위원회(위원장: 남재영 목사)와 인권센터(소장: 박승열 목사)가 주관한다.  그동안 한국사회의 정의와 평화을 위하여 헌신한 NCCK 사역의 연장선상이다. 아픔 속에서도 숨죽이며 살아온 지난 70년의 응어리가 풀어지는 화해와 상생의 첫 걸음을 기독교회가 수도 한복판에서 열게 된 것이다. 이 추모행사에는 제주지역의 목회자와 신도들 그리고 재경 제주 출신의 목사들과 신도들도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

4.3 사건 관련자료(퍼옴) 

‘4·3’ 이라는 숫자는 남로당 제주도당이 무장봉기를 일으킨 1948년 4월 3일을 가리킨다. 그래서 4.3은 남로당이 느닷없이 무장봉기를 일으켜 시작된 것으로 아는 사람이 많다. 지금도 일부 우익 단체들은 남로당이 이념적인 이유로 폭동을 일으켜서 정당하게 진압한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일부 억울한 희생이 있었을 뿐이라고 왜곡한다. 그러나 정부가 펴낸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서도 밝혀졌듯이 4·3의 시작은 1947년 3월 1일이었다. ‘4·3’ 은 그날부터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될 때까지의 과정 전체를 아우르는 기호일 뿐이다.

4·3의 시작, 1947년 3·1 대회 

1947년 3일 1일, 제주시에서 3만여 명이 제 28주년 3·1절 기념 대회를 열었다.  읍면 지역까지 포함하면 당시 제주 인구의 1/5에 가까운 5만 명이 모였으니 최근의 촛불집회보다도 훨씬 큰 규모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모인 데는 이유가 있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 일본은 제주도를 본토 사수를 위한 결전지로 섬 곳곳을 요새로 만들었다. 해안선과 오름 곳곳에 진지 동굴을 만들고 들판을 닦아 비행장을 조성했다. 다행히 일본의 항복으로 참화는 피했지만 노무 동원과 강제 공출로 해방 후에도 궁핍은 이어졌다. 그럼에도 도민들은 해방 조국에 대한 희망으로 활기를 되찾으면서 인민위원회(해방 후 사회 질서를 잡기위한 주민 자치위원회)를 중심으로 야학과 학교를 세우고 치안을 유지하면서 공동체를 지켜 나갔다. 그런데 1946년 대흉년에 미 군정의 미곡 수집령으로 불만이 쌓여 있는데 친일 경찰까지 재등용하여 불신이 커졌다. 3·1대회는 이에 대한 항의였고,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고 싶은 열망의 표현이었다.

평화적 저항, 3·10 총파업 
 

그런데 3·1 시위 도중 경찰의 말발굽에 아이가 치여 넘어졌다. 이에 항의하는 군중을 향해 육지에서 온 응원경찰이 총을 발사하여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 당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미군정 경찰은 비무장 시위대에 총을 쏜 잘못을 인정하기는 커녕 시위자 일제 검거에 나섰다. 이에 도민들은 3월 10일 학교, 관공서, 상점 등 4만 명 넘게 참여한 민관 총파업으로 항의했다. 그런데 미군정 경무부장 조병옥은 경찰의 발포를 정당방위라고 주장하면서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하여 더 강하게 탄압했다. 제주도지사도 극우 성향의 육지인으로 교체됐고, 육지에서 들어온 서북청년회가 공갈과 폭력을 일삼았다. 1년 사이에 2,500여 명이 검거되고 3명의 청년이 경찰의 고문으로 죽어갔다. 이처럼 3·1사건에서 발포와 희생, 그에 이어진 탄압이 이듬해 4월 3일의 봉기로 이어진 것이다.  

분단을 반대하며   

당시 봉기세력과 제주도민들은 탄압을 중단하라는 요구와 함께 “단독선거, 단독정부 수립 결사반대”를 외쳤다. 이 무렵 미군정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고자 5·10총선거를 추진하고 있었다. 김구와 김규식 등 민족지도자들도 단독 선거에 반대했다. 그런데 재등용된 친일경찰과 서북청년회 등 우익 단체들이 나서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고 전국은 혼란에 빠졌다. 제주도에서는 선거를 피해 도민들이 대거 입산해 버리면서 전국에서 유일하게 3개의 선거구 중 2개 선거구에서 선거가 무산된다. 분단에 반대하는 민심의 표현이었지만,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강경진압에 나섰다. 상상을 초월한 강경진압의 원인이 학살 무장봉기라고 하지만 제주도 전역에서 300여 명이 일제 99식 총 30여 정과 죽창 등을 든 게 전부였다.

국방경비대(당시 국군)와 무장대 사이의 협상으로 평화적으로 해결될 기회도 있었다. 그런데 미군정은 회담을 성사시켰던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하면서 강경 진압으로 치달았다. 특히 1948년 10월 송요찬 9연대장이 해안에서 5km 이상 지역 통행금지와 무조건 발포 명령을 내리고, 11월 이승만의 계엄령을 선포하면서 이른바 ‘초토화 작전’이 본격화된다. 그로부터 이듬해 봄까지 끔찍한 대량학살이 무차별로 자행되었다. 중산간 마을은 불타 없어지고 많은 이들이 죽거나 산으로 피신해야 했다. 해안으로 소개된 주민들도 가족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도피자 가족’이라고 죽였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예비검속’이라는 명목으로 또 잡아들여 죽였다. 3만여 명이 희생되었고, 공식 확인된 희생자 15,000명 중에는 어린이와 노인도 12%에 이른다.  

통곡의 세월을 넘어   

이후 반세기 동안 4·3은 금기의 역사였다. 희생자들은 ‘빨갱이’ 누명을 쓰고 유족들은 숨죽여 울어야 했다. 연좌제로 인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살던 마을이 불타 사라지고 공동체는 무너졌다. 민주화의 열기로 조금씩 드러난 4·3의 진실은 참혹함 그 자체였다. 50주년을 맞아 분출된 4·3의 진실 찾기는 지난 2000년 특별법이 제정되고 2003년 정부의 공식 보고서가 채택되면서 한 매듭을 짓게 되었다. 그에 따라 2008년 평화공원이 세워지고, 2014년에 국가 추념일로도 지정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4·3은 편히 잠들지 못한다. 피해 배상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여전히 가해자들은 ‘국가 유공자’ 대우를 받고 있다. 제대로 된 이름조차 없이 ‘4·3사건’으로 남아 걸핏하면 이념의 잣대로 난도질 당하기도 한다. 이제 70년, 아픈 역사를 정의롭게 청산하고, 불의에 항거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계승하여 통곡의 섬 제주를 진정한 인권·평화·통일의 성지로 만들어 갈 때이다.

[출처] 4370신문 1월호 - 제주4·3을 아십니까? (작성자 제주 4.3 범국민위원회)


광화문 4.3추모 집회의 
시간 계획

12:00 추모기도회 (NCCK 주관) 북측광장 세종대왕상 뒷쪽 
12:40 점심식사 (NCCK 제공)
13:30 역사박물관 방문 (주진오 관장과의 대화)
14:00 사삼 이야기마당 (4.3사건과 개신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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