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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화해의 첫 걸음기독교회 화해자 될 수 있나?
편집위원  |  oikos78@ms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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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4.01  00:4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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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 사건 화해의 첫 걸음     

제주도는 한반도 남단 남해상에 있는 특별자치도로 가장 큰 섬이다. 인근에 비양도, 우도, 상추자도, 하추자도, 마라도 등 8개의 유인도와 54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옛날에는 육지와 고립된 섬이었으나 국민소득의 증대와 더불어 육지와의 교통이 편리해짐에 따라 오늘날에는 전국 제일의 관광지역으로 발전했다.

제주해협을 사이에 두고 목포와 약 140km 떨어져 있는 제주도는 윤곽이 대략 동서방향으로 가로놓인 고구마처럼 생겼는데, 남북간의 거리가 약 31km, 동서간의 거리가 약 73km이다. 면적은 남한 면적의 1.8%를 차지하고 인구는 남한 인구의 1.2% 정도를 차지한다.

행정구역은 제주시와 서귀포시 2개시, 한림읍·애월읍·구좌읍·조천읍·대정읍·남원읍·성산읍 등 7개읍, 한경면·추자면·우도면·안덕면·표선면 등 5개면, 62개동(법정동 기준, 행정동 기준 31개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청소재지는 제주시 문연로 6이다. 면적 1848.43㎢, 해안선 길이 419.95km다.

우리나라의 가장 큰 섬으로 육지와 단절로 인하여 정보와 발전이 더디었다. 그러나 항로가 개통하고 해로도 시간이 단축되면서 더 이상 섬이 아닌 생활권이 되었고 소득의 증대와 선진화로 연간 관광객의 숫자가 증가하고 제주 국제공항이 포화상태로 제 2의 공항을 세울 정도로 발전하고 있다.

섬이었고 태풍과 바람을 피하여 해안에서 산림지역에  살면서 어업과 산간농업, 림업에 의존하던 주민들은 자연히 무속적이고 미개한 생활을 했었다. 그러한 섬에 최초로 선교사로 간 사람은 우리교단의 이기풍 목사였다. 이 목사는 1908년 제주도에 도착하여 힘든 전도활동을 하다가 21년이 지난 1930년 제주성안교회에서 제주노회를 구성하게 된다(1대 노회장으로 최흥종 목사)

   

 
* 제주노회 홈페이지에서

현재 제주도 인구는 70만을 향해 육박하고 있다. 이에 따라 기독교회의 성장추세다. 그중에 우리교단 교회들의 약진은 틀림없다.  제주도의 개신교회의 연합체인 제주기독교교단협의회(회장: 심관식 목사)에는 17개 교단 약 450개이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교단도 제주노회에 소속한 교회가 약 127개로 가장 중심적이고 고른 지역과 중심적인 교회들로 구성되어 있다.

제주교회연합회 4.3 70주년 합동예배

최근 제주도가 우리사회와 교계에 화제가 된 것은 4.3 사건의 70년을 맞이하면서다.  이와 관련하여 NCCK을 중심으로 한 화해와 치유 행사와  제주지역 교회연합회가 공식적으로 기독교선교 110년과 제주 4.3 사건이 일어난지 70년을 맞아 지난 3월 30일(금) 7시 30분에 4.3 합동예배를 제주 성안교회에서 드려졌기 때문이다.

   
* 사진출처: 제주의 소리

교회와 교단 차원의 4.3을 기억하는 기도모임이나 연구활동은 있었지만 제주지역 교계 전체가 모인 예배는 첫 사례로 기록되고 있다. 심관식 목사는 이미 지난 가을 제주노회에서 4.3 연합예배에 대한 제안을 해보지만 회원들 간에 합의가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이에 굽하지 핞고 자신이 회장으로 있는 연합기관을 통하여 이를 실현하는 데  거론된 지 1년도 안되어 큰 결실을 맺은 것이다.

4.3 에 대한 역사와 피해자의 한은 국가적으로나 지역적으로 워낙 민감한 사안이라 비공식적으로나 육지에서는 모르나 현지에서는 오랫동안 공개적이지 못했고 공개적으로는 거론되지 못했다. 그러나 민주정부의 등장과 가해자들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부분들이 있어 본격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4·3 70주년 연합 예배에는 제주 전역에서 600여 명이 참석했고 이외에도 4·3평화재단 양조훈 이사장, 원희룡 제주도지사, 이석문 제주교육감, 위성곤 국회의원(더불어민주당) 등도 함께 자리했다. 예배 사회자는 박명일 목사(제주국제순복음교회)가 맡았다.

   
* 사진 출처: 제주의 소리, 법환교회 심관식 목사

설교는 제주교단협의회 회장인 신관식 법환교회 목사(장신대 78기)가 했는 데 "오늘의 예배는 제주의 교회가 바벨론 포로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셨던 그 70년을 기억하며 이 땅 제주를 오랜 고통 속에서 회복시켜주시기를 원하는 자리" 라고 시작했다.

이어 "이 땅 제주는 망망대해의 섬이었다. 외적이 들어오면 마지막 전쟁터가 돼 살육을 당해야 했고, 4.3사건 하나만으로도 도민의 10분의 1인 3만여명이 죽어가야 했던 죽음의 땅"이라며 "우리는 70년 전 이 땅에 피의 학살이 발생했지만, 그 아픔을 알려고 하지도 않았고, 그 아픔과 함께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날 예배에서 사실 설교의 내용은 큰 의미가 없다. 개신교회가 제주의 아픔과 역사에 대하여 화해를 위한 첫 걸음으로 추모예배를 드렸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보겠다. 그리고 그 화해와 치유는 피해자만이 아니라 가해자들까지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날 드려진 공동기도문에서 이 예배를 준비한 목회자들과 제주 4.3 이 역사속에서 올바르게 평가받고 역사에 기록되고 상흔이 치유되기를 바라는 지도자들이 염원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 공동 기도문 "

하나님, 이 땅 제주를 불쌍히 여겨주옵소서, 죽음의 광기가 이 땅을 휘몰아치고 순박한 섬 곳곳에서 통곡의 소리 가득한 지 70년이 지났건만 아직도 상처 입은 마음들은 미움과 증오로 갈가리 찢겨져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 바벨론 포로를 70년 만에 돌려보내시듯이 이 땅 백성들의 오랜 아픔을 치유의 손길로 보듬어주셔서 깨어진 마음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평화에 이르게 하소서.

하나님, 부모세대와 우리세대의 모든 죄를 용서하야 주옵소서. 편을 가르고 등을 돌리며 편견과 아집에 사로 잡혀 갈등과 분쟁을 일삼아온 우리의 죄악을 용서하소서. 정죄하고 판단하며 스스로 심판자의 자리에 서서 죄악에 동참한 우리 안의 무서운 폭력성을 회개하오니 사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제주의 눈물을 닦아주시고 상처를 싸매어 주시옵소서. 이 땅에 뿌려진 고통의 피를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주옵소서. 잠들지 못하는 분노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안아주소서. 부르짖는 아벨의 핏소리를 하나님의 공의로 위로하여 주옵소서. 이제는 제주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 평화를 알게 하옵소서.

제주와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18년 3월 30일  

   
 

이외에도 제주도에서는 4.3 70주년을 맞아 많은 행사들이 예고 되어 있다. 음악회와 학술발표회 등이다. 그중에서 4.3 에 대하여 30년전 석사학위 논문으로 시작하여 연구한  연세대학교 박명림 교수 초청하여 추모와 특별 강연과 많은 행사가 열렸다. http://m.jejusori.net/?mod=news&act=articleView&idxno=202354 

   
 

제주 4.3과 기독교

제주의 교회들이 모여 이런 예배를 드리는 배경에는 쉽지 않은 과정과 오랜시간이 걸렸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 4.3으로 표현되는 제주에서의 양민학살에 앞장선 군인이나 경찰의 고위간부등이 교회의 대표적인 인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해방정국에서 남한으로 이주한 북한의 서북계 출신 청년들이 남한의 좌우대립의 한 축을 감당했기 때문이다. 이들 중 서울 영락교회에 대거 출석하면서 한경직 목사와도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719303.html (서북청년단과 영락교회에 관한 자료 기사)

그리고 제주영락교회가 세워지고 제도주에도 서북청년단이 민간인임에도 경찰의 보호와 지원 아래 준 경찰권을 행사하며 국가 공무원이나 지식인들에 대항 무차별 폭력과 학살을 감행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일에 일정한 책임이 있는 해당 교회나 기독교가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과거에 대하여 사과하고 진실을 보이는 데 인색했기 때문이다. 물론 직접적인 가해자들은 거의 모두 세상을 떠났다.

   
* 서북청년회 회원증

그리고 그 가해자들의 후손들은 자신들의 윗대가 무엇을 했는지를 모두 알지 못했다. 그러나 피해자는 다르다. 당시 어렸지만 학살의 공포에 떨며 숨죽이며 살아온 나날들을 잊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모든 화해는 피해자를 중심으로 해서 복기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그만하라고 할 때 까지 진실을 규명하고 그리고 용서와 화해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진실규명 없는 화해와 용서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독인으로 처음 4.3 문제를 제기한 사람들 

우리정부가 제주의 4.3의 희생자 추념일로 지정한 2014년 3월에 제주의 한 기독교 신문에는 "4‧3을 추념일로 지정하면 남로당 무장대의 폭동을 인정해 주는 결과가 된다" 며 추념일 지정에 반대하는 내용이 실린다.  당시 이런 기고문을 쓴 사람은 우리교단 당시 제주노회장이었다고 한다. 이에 젊은 시절부터 4.3에 대한 연구와 활동등을 해온 송창권 장로(성지교회)와 오승학 집사(성안교회)는 진실을 알려야 겠다는 의미로 평신도 모임을 시작한다.

   
* 제주를 시찰한 정일권 경비대 총참모장(오른쪽), 김영철 해안경비대 참모장(중앙)이 9연대 송요찬 연대장과
    함께 삼성혈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1948.10.1/  [출처]
(사진으로 보는 4.3 그리고 제주 옛모습)

이들은 여전히 진실이 규명되지 않은 4.3 사건의 상흔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대변하기 위하여 “치유와 평화를 기원하는 그리스도인모임” 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목회자들이 침묵하고 눈치를 볼때 평신도들이 일어선 것이다.  오승학 집사는 1990년대 후반에 “4‧3은 말한다” (전예원)라는 책자를 통하여 제주 4. 3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외조부가 일제강점기 제주도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안덕면에서 납세 거부 운동을 하다가 일경에게 고초를 당하고 해방 후 제주로와 인민위원회 활동을 한 이유로 1947년 이후 큰 고초를 당한다. 

그후 제주 출신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 이라는 책을 통하여 제주 4.3에 대한 인식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현장 답사를 다니며 4‧3이 국가 공권력에 의해 양민들이 수난 당한 역사일 수도, 남한 단독정부, 단독선거와 미군정을 반대하는 운동이라는 것을 알았다.

   
 

제주지역에서 연합회 차원에서 추모예배를 드리게 된 것은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있다고 보겠다. 그러나 오랫동안 반공이데올로기와 보수정당들의 집권과정에서 여전히 해결되지 아니한 한국의 불행한 현대사가 여전히 대립하고 있는 것이 문제다. 따라서 피해자들의 진실이 알려지고 역사가 올바르게 기록되는 것은 중요하지만 역사를 바르게 보고 이해하지 못하는 무지와 오해로 인하여 왜곡된 정보와 인식에 기초한 이들에 대한 비난은 자제되야 할 것이다.

   
* 심문을 받기 위해 대기중인 수용자들(1948.11) <미국립문서기록관리청 소장>

그리고 피해자라고 하여 역사의 심판자처럼 행동해도 안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주 4.3 평화제단 이사장 양조훈 선생은 당시 가해자인 서북청년단에 대하여 너무 나쁜 감정을 갖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조심스러운 부탁이 새롭다.  제주의 화해와 치유는 한쪽 선언만으로는 안되는 데 그러려면 아픈에 대한 회한과 상처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피해자와 가해자들이 온전히 역사속에서 불행했던 과거를 받아드리는 것이 필요하다.

◇                     ◇                     ◇


참고자료 : “제주4·3항쟁 70주년” 4·3 三大暴漢 ➀

서북청년단 제주지부장 김재능의 만행

제주4·3의 학살을 겪으면서 섬사람들은 서북청년단 김재능 단장과 계엄군 제9연대 정보과장 탁성록(卓聖祿) 대위, 그리고 제주비상계엄령사령부 정보과장 신인철(申仁徹) 대위를 삼대폭한(三大暴漢)이라고 불렀다. 그 가운데 김재능이 가장 포악하였다.

사람들은 서북청년단을 줄여 '서청'이라 불렀다. ‘서청’은 오늘날까지도 나이 든 제주 사람들에게는 악몽의 이름이다. 제주4·3이 터지기 직전까지 제주에 들어온 서청단원은 5백 명에서 7백 명 정도였다. 이후 제주4·3이 발발하자 조병옥 경무부장의 요청으로 5백 명, 여순항쟁 직후 1천 명 이상의 서청단원들이 추가로 들어왔다. 제주도는 그야말로 '서청판'이 되고 말았다. 좌익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 그들은 ‘제주도 사람 90%가 빨갱이’라며 섬나라를 피로 물들이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김일성 정권이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친일파를 처단하자 이를 피하여 빈털터리로 남쪽으로 넘어온 자들이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는 그들의 이러한 처지를 십분 활용했다. 사설단체인 이들에게 경찰권을 쥐어 줬지만 봉급은 없었다. 알아서 현지에서 조달하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승만 사진과 태극기를 강매하거나 각종 이권에 폭력적으로 개입해 생계문제를 해결했다. 이 과정에서 그들에게 밉보인 사람은 4·3 와중에 큰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들이 찍으면 누구라도 빨갱이가 되었다. 청년들을 잡아들여 매질을 하다 보면 이들을 빼내려는 가족들로부터 부수입도 챙길 수 있었다.

‘서청’ 사무실 자리는 제주시 구도심에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 건물은 일제 때 함석그릇을 팔던 일본인 상점이었다. 해방 후 이 건물은 적산가옥 규정에 따라 재산관리처에서 관리하고 있었다. 1층은 일본 상점 점원이던 강성옥이 불하를 받았다. 건물 2층은 비어 있었는데 나중에 ‘서청’이 이를 빼앗았다. 그런데 그 수법이 악랄하기 이룰 데 없었다. 1층 주인인 강성옥이 제사를 지낼 때, '서청" 패거리들은 2층 바닥에 구멍을 뚫어 제삿상 위에 오줌을 갈겼다. 이를 항의하던 강성옥은 피떡이 되도록 얻어맞았다. 결국 그는 건물에서 쫓겨나야 했다. ‘서청’의 횡포는 힘없는 일반 도민에게 국한된 게 아니었다. 북제주 군수 김영진은 서청 단장 김재능에게 맞아 팔이 부러질 정도였다.

특히 물자 보급을 맡은 관리들은 '서청'의 주 타깃이 되었다. 제주도 행정의 2인자였던 총무국장 김두현도 이들에게 타살되었다. '서청'은 구호 대상자가 아니면서도 억지를 쓰며 총무국장에게 구호물품 지급을 요구했다. 그러나 총무국장 김두현은 구호 대상자에게 줄 것도 부족하다며 이를 거절했다. ‘서청’은 이에 불만을 품고 1948년 11월 9일 김두현 국장을 서청 사무실로 연행하여 고문하고 살해했다. ‘서청’ 제주단장 김재능은 자기 사무실에서 심한 매질로 김두현 국장이 실신하자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사무실 밖으로 내다버려 숨지게 만들었다. 제주도 행정의 2인자까지도 보급품 지급에 협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서청’은 자신들의 죄상을 덮기 위해 김두현 국장을 빨갱이로 몰았다. 김재능은 미군 방첩대(CIC)에 김두현 국장은 공산주의자라고 보고했다. 미군정과 군, 경찰 등 수사기관 어디에서도 이 무도한 살인범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살인 범죄자들을 군에 입대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유야무야 해버렸다. 방첩대 정기보고서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11월 9일 서북청년단원이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을 폭행 치사했다. 서북청년단은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그를 단지 취조할 의도였으며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진술했다. (방첩대 정기보고 제263호, A-1)' -주한미육군사령부(Headquarters of United States Army Forces in Korea, HQ USAFIK) 일일정보보고(G-2 Periodic Report) 1948년 11월 12일~1948년 11월 13일 (No. 987, 1948. 11. 13 보고)

김재능은 이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그들은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이 귀하게 키운 돼지와 닭을 잡아먹는 일은 다반사였고, 금품갈취와 고문은 물론 살인과 부녀자 능욕을 일삼았다. 제주 4·3연구소 오금숙 연구원이 ‘제주 4·3을 통해 바라본 여성들의 잔혹한 피해사례들’을 발표하기 위해 채록한 최길두(崔吉斗, 96년 채록 당시 80세) 씨의 증언이 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양아무개가 있다. 그도 결국 죽을 건데 서청단장 김재능이 그의 누나를 빼앗는 조건으로 목숨을 건졌다. 그게 결정적으로 그를 살린 요인이다. 그보다 못한 사람도 다 죽였으니까. 또 나중에 영화감독이 된 서청 출신 김묵(金黙)도 성산포에서 맘에 드는 여자를 빼앗아 살았다’

김재능은 당시 제주지역의 유일한 언론기관이었던 제주신보사를 강제로 접수하기도 했다. 당시 제주신보 편집국장 김용수는 이렇게 증언했다. ‘제주신보가 서청의 감정을 살 특별한 이유는 없었습니다. 서청은 자신들의 권능확대를 위해 신문사를 빼앗은 것뿐입니다. 다만 ‘봉개리 작전’ 때 불만을 표시한 적은 있습니다. 1949년 초 2연대 2대대(대대장 이석봉 대위)의 주도 아래 경찰, 서청, 대청이 총동원된 작전입니다. 무고한 주민들이 많이 죽었습니다만 신문에는 그런 이야기를 일체 쓰지 못했고 군에서 발표하는 대로 ‘정당한 군의 작전’으로 다뤄야했습니다. 그런데 서청은 이 작전에서 자신들의 역할을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다며 불만을 표시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난 후 하루는 서청대원들이 신문사에 들어와 김석호 사장을 구타했습니다. 그날 밤 나는 집에서 잠을 자던 중 새벽 2시께 들이닥친 서청원들에게 끌려갔습니다. 김재능 단장이 대기하고 있더군요. 당시 30대 중반인 김재능은 키가 6척이나 되는 장신으로 콧수염을 길렀고 일본놈들이 신던 긴 가죽장화를 신고 다녔습니다. 그는 워낙 악명이 높아 큰 키에 휘적휘적 걸어 다니는 모습만 봐도 등골이 오싹할 지경이었지요.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무조건 구타했습니다. 그냥 구타가 아니고 치명상을 입을 정도로 무지막지하게 때렸습니다. 내가 초주검이 되자 김재능은 ‘데려가 처리해!’라고 하더군요. 서청은 날 태우더니 총살터를 향해 달렸습니다. 그런데 가족들이 나를 찾기 위해 여기 저기 수소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함병선(咸炳善) 2연대장이 나를 살려주었습니다. 2연대에서는 내게 군복을 입히고 편집국장 대신에 선무공작을 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처럼 테러와 협박으로 제주신보를 강제로 접수한 김재능은 서청 특별중대원인 김묵(金黙)을 편집국장에 앉히고 자신은 사장 자리에 올라 더욱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평양교육대학교를 졸업한 김묵은 상경하여 1960년대 반공영화와 전쟁영화를 찍는 영화감독으로 변신했다. 김재능은 제주를 떠난 후 보복이 두려워 숨어 지내다가 1960년대에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을 뿐 그의 마지막에 대한 자세한 것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는 제주에서 자행한 범죄행위로 1954년 6월에 경찰에 검거된 적이 있다. 그가 얼마나 포악했는지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서청의 보복이 두려워 피해신고를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다. 1954년 6월 8일 자 영주시보의 기사가 그때의 상황을 전하고 있다.

‘전 제주신보 사장 및 서북청년단 본도 위원장이었던 김재능(金在能)씨는 경찰에 피검되어 현재 국 수사과에서 구속 문초 중에 있다. 그런데 씨(氏)의 표면적인 죄명은 사기공갈, 상해, 사문서위조 등 단순한 혐의 밑에서 입건 수사되어 왔던 것이나 본도 각면(各面) 각리(各里)를 막론하고 30만 도민 거의 전부가 김 씨에게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은 부인못할 사실이다. 그 이유는 제주도민인 한 설명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김씨계통(金氏系統)에 의하여 애매하게 살해되고 상해되며 재산을 강탈되었던 수십 명 내지 수백 명의 가족들은 지금도 얼른 김 씨에 대하여 보복적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왜냐! 공포는 남아 있다! 본도 유지 수명이 배후조종 호(乎) 당시 행정의 수반자라고 할 만한 지위에 있었고 직접 피해된 한 유지는 만약 경찰이 철저적인 수사를 가하여 법의 삼엄성을 보인다면 대다수의 제주도민은 이에 호응하여 김씨 수사에 대한 재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그는 또한 제주도민들이 김씨 수사에 자진적으로 재료를 제공하지 않은 이유에 언급하여 그것은 시간의 경과에도 다소의 원인은 있겠지만 그러나 그보다도 김씨가 쉬이 석방되어 나오지나 않을까 하는 위구를 느끼고 있기 까닭이며 그 배후를 조종하던 숨은 세력이 아직도 도량하고 있다는 데 유인(由因)한다고 말했다. 동씨(同氏)는 본도 유지 몇 사람이 김씨 배후에 숨어 4․3사건 당시 도민을 살육의 함정에 빠뜨린 것이 아닐까 하는 중대한 의옥(疑獄)을 표명하였다. 그리고 김씨 자신이 제주도 유지 몇 사람한테 조종당했다고 말한 적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하였다.’

작년 2월 ‘반헌법행위자열전 편찬위원회’가 발표한 국가공권력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됐던 과거사에 대한 반헌법행위자 405명의 명단에 제주 4·3항쟁 당시 국가폭력 가해자 8명이 포함됐다. 우리사회의 민주화를 위해서는 과거사 청산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제주 4·3사건 당시 반헌법행위자는 조병옥 미군정 경무부장, 홍순봉 제주경찰청장, 송요찬 9연대장, 함병선 2연대장, 문봉제 서북청년단 중앙위원장, 김재능 서북청년단 제주지부장, 이승만 대한민국 대통령, 채병덕 국방부참모총장, 탁성록 정부참모 등 모두 9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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