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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기독교에 대한 남한 기독교의 역사적 책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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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05  22:5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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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기독교에 대한 남한 기독교의 역사적 책임 
   
 
들어가는 말 

2001년 6월에 발표된 황석영의 소설 <손님>은 남북문제와 통일에 관심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 소설은 특히 기독교계에 많은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다. 이 소설은 한반도가 근대화되는 과정에 들어온 두 외부세력, 즉 ‘손님’들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과 그 결과로 발생한 엄청난 살육행위를 그리고 있다. 기독교인들에게 충격을 던지는 대목은 그 무서운 ‘손님’들 가운데 하나가 기독교라는 사실이다. 소설 속의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이름으로 또 다른 ‘손님’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하여 잔인하기 짝이 없는 온갖 비인륜적인 방법으로 대살육을 저지르고 있다. 이런 모습은 기독교는 평화와 사랑과 용서의 종교라는 우리의 평소 믿음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6․25 전쟁 때 인천 상륙작전을 전후하여 황해도 신천군에서 군민 1/4에 해당하는 3만5천여 명이 죽는 대살육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때 신천에서 큰 전투가 벌어졌다는 기록은 없다. 이와 아울러 특이한 점 가운데 하나는 희생된 3만5천여 희생자는 모두 민간인들이었다는 점이다. 그 동안 남북한은 신천군 대학살 사건과 관련하여 전혀 다른 두 가지 태도를 공식적으로 보여 왔다.

남한에서는 사건 자체를 가능하면 부각시키지 않고 함구해 왔다. 굳이 사연을 밝혀야 할 장소에는 양민 학살 사건을 인민군이 저지른 것으로 밝히고 있다. 인천 상륙작전 이후 북진하는 유엔군에 밀려 급히 퇴각하던 인민군이 기독교인을 포함한 반공․반동세력을 무차별 학살했다는 것이다. 한편 북한은 신천 양민학살 사건이 미군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해 왔다. 북한은 신천에 '미제 학살기념 박물관'을 만들어 놓고 미군의 야만성과 잔인성을 보여주는 교육의 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방공호에 수백 명의 부녀자․아이들을 집어넣고 휘발유로 불질러 죽인다든지, 부녀자를 강간한 후 살해했다든지, 또 총알이 아까워 칼이나 몽둥이로 죽였다는 등의 많은 증거들을 모아놓고 미국에 대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시설이다*  이곳은 북한 주민들뿐 아니라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들도 한 번씩 방문해야 하는 곳이다.

* 북한의 대표적인 반종교 이론서인 정하철의 “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는가”는 신천에서의 학살을 “종교의 이름을 걸고 ‘거룩한,’ ‘하느님의 군대’에 의하여 감행되었다”고 주장한다. 정하철, “우리는 왜 종교를 반대하는가, ”김흥수 편,『해방후 북한교회사』(다산글방, 1992), 352. 선천 박물관에 대한 방문 기록은 홍동근, 『미완의 귀환일기: '주체의 나라' 북한을 가다: 홍동근 북한방문기』 (한울, 1988)에 자세히 나와있다. 이것은 소설 <손님> 속의 내용과 거의 같다.

신천이 부모님의 교향, 즉 원적이기도 한 황석영은 1989년 방북시 신천박물관을 견학하면서 의문을 품게 되었다고 한다. 즉, 살육행위를 했다고 북한에서 주장하는 미군 지휘관 해리슨은 중위 계급의 장교로 중대장이었다. 기껏해야 100여 명의 병력을 데리고 짧은 기간에 3만5천 여명을 죽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 그는 미국에서 당시 상황을 직접 겪고 목격한 사람들을 만나서 숨겨진 진실을 알게된다. 소설에서 그려진 바와 같이 황석영이 알게된 진상에 의하면 살육행위는 미군을 포함한 군인들에 의해 저질러지지 않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기독교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민족간의 살육행위였다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가의 관심을 끄는 점은 <손님>이라는 소설 속에서 기독교인들이 사회주의 세력을 사탄의 무리로 보고 잔인한 대량 살육행위를 서슴없이 저질렀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그 원인과 결과이다. 1950년 신천에서 보인 기독교인들의 행동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지게 한다. 왜 신천이라는 지역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가? 기독교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이 신앙이라는 차원에서 모두 설명될 수 있는가? 신천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에게 보였던 기독교인들의 태도는 남한 기독교의 성격, 또 나아가 분단이라는 현재 우리 민족이 경험하고 있는 비극적 상황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그리고 이런 맥락에서 남한 기독교는 북한의 현재 기독교의 상황에 대하여 어떤 역사적, 도의적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을 징검다리로 삼아 이야기를 전개해나가겠다. 

해방직후 북한 기독교의 상황 

해방직후 북한 지역의 개신교 교세가 어떠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한 통계에 의하면 1938년 한국 기독교인의 수가 약 60여만 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약 75%가 북한 지역의 신자들이었다. 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1940년 북한 지역의 개신교인 수가 약 23만 명이었다. 1950년 판 『조선 중앙 연감』에 의하면 1949년 북한지역에 2,000여 교회에 개신교만 20만여 명의 교인(이 가운데 목사 410명)이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해방전후 한국 개신교의 중심은 장로교였다. 그런데 한국 개신교 최대 교파인 장로교의 중심은 북한지역이었다. 1940년도 통계는 장로교인의 약 65%가 북한지역에 살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북한지역은 특히 장로교 교세가 강하여 북한지역 전체 개신교인 가운데 83.8%가 장로교인이있다.

교인의 수보다 더 주목해야 할 대목은 북한지역의 교인들 대부분이 평안남북도, 황해도 등의 서북지역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앞에 인용한 1940년도 통계에 의하면 북한지역 개신교 인구의 약 90%, 교회 수의 약 82%, 그리고 교역자 수의 약 83%가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지역에 편중되어 있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 나라에 최초로 기독교가 전해진 곳이 만주로부터 장로교를 전해 받은 서북지역이었고, 1909년 해외 선교부들이 선교지를 분할할 때 가장 큰 선교부인 북장로교의 관할로 분류된 곳이 이 지역이었던 것과 관련 있다.

서북지역이 한국 장로교의 중심지, 나아가서 해방전 한국 개신교의 중심지로 된 데에는 이런 선교적인 요인 이외에 여러 가지 내부적인 요인들이 복잡하게 결합되어 있다. 이 지역은 조선왕조를 거치면서 중앙 정치에서 소외된 지역이었다. 중앙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이 지역 사람들은 일찍부터 상업 방면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래서 18세기부터 상업이 발달했고 개항기 무렵이 되면 이 지역은 한국내에서 상업의 중심지로 자리잡게 된다. 19세기 말 한 선교사의 여행기에 따르면 이 지역에서는 이미 ‘자립적 중산층‘(the independent middle class)이 사회를 주도하고 있었다. 양반에 의해 지배되는 성리학적 신분질서가 다른 곳에 비해 일찍 붕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상업적인 사람들이 늘 그렇듯이 이곳 사람들은 개방적․진취적이었고,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가 매우 높았다.

이런 서북지역 사람들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매우 매력적인 새로움이었다. 미국 선교사들이 전한 기독교 속에서 자신들의 욕망과 이상을 뒷받침해주고 실현하도록 도와주는 요인들을 발견했던 것이다. 물론 미국 선교사들이 전한 개신교의 종교적인 매력이 주원인이었겠지만, 미국적 개신교 속에 함유되어 있는 실용주의적, 자본주의적 가치관도 상업적이고 실용적인 서북인들의 생활감정과 일치하는 점이 많았을 것이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서북지역은 가장 적극적으로 기독교를 수용할 수 있었고 한국 기독교의 중심지역으로 발전해 갔다. ‘동양의 예루살렘’이라 불리던 평안북도의 선천, 평안남도의 평양, 그리고 황해도의 신천은 그 중에서도 기독교의 세력이 특히 강하였던 곳으로 유명했다.

교세가 탄탄했기 때문에 북한지역의 교회는 해방 후 일제에 의해 위축되고 왜곡되었던 기독교를 재건하기 위한 작업을 남쪽 교회보다 더 빠르게 시도할 수 있었다. 신사참배와 친일부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해방직후부터 초교파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청산의 문제는 해방후 북한 지역의 정치적 세력으로 등장한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대처방안이 더욱 시급해지면서 뒷전으로 밀려난다. 북한지역 개신교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장로교는 1945년 12월에 이미 ‘이북5도연합노회’를 구성하여 교단 재건에 나섰는데, 이것은 소련군정과 김일성이 정권을 잡아가는 상태에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취한 매우 정치적인 결정이었다. 연합노회는 북한 쪽 교회를 아우르는 조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남한 쪽의 정치세력에 자신을 일치시키고 있었다.

이제 막 일제의 암울한 경험을 벗어나려는 순간 들어온 또 다른 외세인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대단한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회주의 정권을 적으로 간주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정치세력화를 도모한다. 사회주의 정권에 대한 그런 적대적인 반응은 마르크스주의 일반, 그리고 북한지역의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대한 깊은 이해 속에서 이루어졌다기보다는 북한 정권이 교회에 가하는 정치적 압력, 그리고 공산주의는 무신론자라는 단편적인 거부감에서 비롯되었다. 신의주 지역의 목사인 윤하영과 한경직을 중심으로 1945년 9월 창당되었던 기독교 사회 민주당은 해방 후 한국 최초의 정당이었다. 평양에서는 1947년 11월 김화식 목사를 중심의 기독교 자유당을 결성하려다 창당 하루 전에 지도자들 체포되어 무산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독교 민족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처음부터 충돌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두 세력은 서로의 힘에 위협감을 느끼고 있었다. 국내 기반이 취약한 김일성의 입장에서 20여만의 기독교 세력은 가장 큰 견제세력이었고, 반대로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소련군정의 군사적, 정치적 지원을 받고 있는 김일성 정권은 실질적인 힘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와 사회주의 세력은 일종의 통일전선을 맺기도 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김일성의 권유로 조만식을 중심으로 1945년 11월에 결성된 조선민주당이었다. 조선민주당은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3개월만에 당원이 50만에 이르는데, 신탁통치 문제로 김일성과 조만식이 충돌하면서 1946년 2월 조만식이 축출 당하고 통일전선의 성격이 상실된다.

조만식과 김일성의 충돌은 기독교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사이의 간극과 갈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매우 의미 있는 사건이었다. 통일전선적 성격의 조선민주당은 그 조직과 운영 과정에서 기독교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사이에 여러 가지 갈등이 표출되고 있었다. 당의 주도세력이었던 기독교계의 대표 조만식이 축출된 것은 북한 내에서 사회주의 정권과 대립되는 요소는 정치적 실체로 존재할 수 없음을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기독교 민족주의자로서 교계내외로부터 광범위한 존경을 받던 조만식이 조선민주당으로부터 축출 당하자 당내의 기독교우익 인사들은 북한 내에서 더 이상 생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대거 월남한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충돌--원인과 결과 

기독교 세력을 중심으로 한 통일전선체로서 출발한 조선민주당으로부터 기독교 세력이 축출 당했다는 것은 기독교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가졌던 신탁통치에 관한 입장의 차이만으로는 해석되지 않는다. 조선민주당은 그 계급적 기반이 소기업가, 수공업자, 소상인, 중농 이상의 농민층 등 소부르주아였다. 이것은 조선민주당의 지역적 기반이 개신교 세력이 가장 강력했던 서북지역이었다는 점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6․25전쟁 기간 중 노획된 북한측 문서 가운데 하나인 “선천군내 주일학교 조사관계철”은 조선민주당의 계급적 성격, 나아가 북한지역 개신교인들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잘 알려준다. 이 자료에 의하면 1950년 1월 평북 선천지역의 기독교는 완전히 장로교에 의해 독점당하고 있었다. 교인들은 당원인 경우 민주당 소속이 많았다. 이것은 기독교민주당 지도부에서 기독교 우익세력이 축출 당한 이후의 자료여서 조만식 등 기독교 지도자들이 당을 이끌 때의 상태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또한 목사, 장로, 집사 등 교회의 주력들은 중농, 부농, 지주가 많았다. 결국 조선민주당 내에서 벌어졌던 기독교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의 갈등은 일차적으로 계급간의 갈등이었다. 서북지역 개신교 신자들은 주로 (소)부르주아 층이었고, 이들은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대변하던 기독교민주당 내의 사회주의 세력, 그리고 북한 정권과 첨예하게 대립되는 사회․경제적 이해관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해방후 북한에 사회주의 정권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충돌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인들의 부르주아적 성격이었다. 북한 사회주의 정권은 해방 후부터 1947년 초까지 반제국주의․반봉건의 인민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여 사회주의 국가의 초석을 놓는데, 이것은 매우 급격하게 추진된 혁명이었다. 예를 들어 봉건적 지주․소작제를 없애버린 토지개혁은 1946년 3월 5일부터 4월 1일까지 불과 23일만에 끝난다. 또한 공업분야에서의 사회주의적 개혁도 1946년 6월의 ‘노동법령,’ 8월의 ‘국유화법령’을 시작으로 급진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조치들은 소농민과 노동자 계층으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중소지주․중소상공인을 기반으로 했던 기독교계로서는 생존을 위협받는 상황이었다.

북한지역 교회 지도자들은 월남한 이후 그들이 북한에서 겪었던 이와 같은 계급적 갈등에 대해서는 강조해서 말한 바 없다. 그들은 북한 정권이 반종교적․반기독교적 정권이며 따라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쪽으로 왔다는 점만을 부각시키며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고취시키며 다녔다. 공산주의에 대한 대항으로 1945년 9월 기독교 사회민주당 결성을 주도했던 한경직 목사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방해에 부딪히자 10 월에 월남하고 말았다. 월남 후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반도덕적 야만주의 사상”으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 즉 “적그리스도”로 정죄했다. 또한 1947년에 평양에서 월남한 황은균 목사도 북한사회를 “저 무자비한 볼세비키! 무신론자요 유물주의자들의 종교박멸정책이 실시되는” 곳이라고 정의한 후 “조선도 내란의 불가피의 단계”에 이르렀다며 기독청년들이 십자군이 될 것을 호소했다.

토지개혁과 중요산업의 국유화는 결과적으로 기독교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켰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종교 말살을 목적으로 시행되었다기보다는 사회주의 혁명의 결과물 가운데 하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사회주의 혁명이 진행되는 가운데 새로운 경제체제 하에서 종교의 물질적 기반이 붕괴되어 기독교가 큰 어려움을 겪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당시 북한 지역의 기독교가 사회주의가 부정하는 경제체제를 기반으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셈이다. 기독교는 역사적으로 봉건적 토지관계 또는 자본주의적 경제체제 속에서 존재해 왔다. 따라서 사회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어디를 막론하고 기독교의 경제적 기반이 붕괴되는 현상이 일어난다. 이것은 각 종교가 사회주의적 경제체제에 미처 적응하기 이전에 발생하는 현상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기독교는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생존하는 법을 배우며 체제에 적응하게 된다.

사회주의화 시기에 북한지역 기독교가 취한 태도 가운데 주목해야 할 대목은 사회주의와의 대화나 타협의 여지는 처음부터 거의 남겨놓지 않은 채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이 극단적인 저항 일변도로 나갔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이 1946년 11월의 인민위원회 선거를 거부했던 사건은 한 극명한 예가 된다. 이 선거는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이 출범하는 마지막 단계로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북5도연합노회는 이 선거가 안식일인 일요일에 있다는 것을 위시하여, 교회당을 선거장소로 사용할 수 없으며 교역자가 정계에 종사하려면 교직을 떠나야 한다는 등의 이유를 걸고 선거 반대운동을 벌였다. 안식일성수, 정교분리 등의 신학적 이유를 들면서 북한 정권의 탄생에 참여할 수 없음을 강변했던 것이다.

사회주의 정권의 설립 자체에 대하여 이렇게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정권이 자리잡게 되자 기독교 지도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극히 좁아져 갔다. 교회와 정권 사이의 이런 갈등은 한편 교회가 가지고 있던 경제적 기반, 그리고 신학적 특성과도 관계 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 내 사회주의 세력이 교회에 보인 적대적인 태도와도 관계 있어 보인다. 그와 같은 적대적 태도는 북한에 사회주의 정권을 세우고자 했던 사람들의 사상적 한계나 열악한 혁명의 여건 속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의 사회주의 정권이 정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회주의 정권들보다 유난히 더 반기독교적이었다는 증거는 찾기 어렵다.

선택의 여지가 점점 좁아지는 가운데 북한 정권에 적대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이 선택한 것은 순교를 각오한 극단적인 투쟁 아니면 북한을 버리는 양극단의 행동이었다. 해방후 북한지역에서의 기독교도와 마르크스주의자 사이의 갈등과 충돌에서 특이한 점은 대부분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교회와 ‘양’들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사회주의화 된 다른 국가에서도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매우 특이한 현상이었다. 해방 후부터 전쟁직전까지 월남한 사람은 약 200만, 그리고 전쟁 중 북진했던 유엔군과 더불어 월남한 사람이 약 85만 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이 가운데 기독교인의 비율이 얼마인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북한지역에 있던 교역자의 대부분이 월남했으며, 교인들 가운데도 핵심적인 사람들도 이들을 따라 거의 월남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력 속에 있었던 서북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전쟁이전에 대거 월남했다. 이에 비하여 카나다와 일본 교회로부터 신학적 영향을 받은 함경도 지역의 교역자들은 전쟁 중이었던 1950년 12월의 흥남에서의 대피난 이전에 월남한 일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두 지역 기독교인들의 신학적, 지역적 차이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서북의 교회 지도자들은 대부분은 사회주의정권과의 공존을 포기한 채 일찌감치 교회와 교인들을 버리고 떠났으며, 함경도 지역 교역자들은 교회와 교인을 지키기 위해 북한 정권과 공존하기 위한 노력을 하다가 최후의 순간에 교인들과 함께 떠난 것으로 이해된다. 

북한교회에 대한 남한교회의 역사적 책임 

황석영의 <손님> 속의 기독교인들은 인천 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패주한 후 주위에 있는 사회주의(동조)자들을 ‘사탄의 무리’로 간주하고 대대적인 살육을 벌인다. 그러다가 중국이 전쟁에 개입하고 유엔군이 다시 남으로 밀리게 되자 유엔군과 더불어 남쪽으로 내려간다. 소설 속에는 다루어지지 않았지만, 남으로 내려온 이들 서북지역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서북인들과 함께 전후 남한 사회를 형성하는 친미반공세력을 주도한다. 사실 1950년대 남한 사회는 정치․사회․경제․문화․교육․군사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서북, 특히 평안도 출신 엘리트에 의해 장악 당한다. 교회도 예외는 아니어서 서북에서 월남한 교역자와 교인들이 전후의 교회 재건과 부흥을 주도한다.

해방직후부터 6․25 전쟁까지의 시기에 북한지역의 교역자와 교인들의 대다수가 남쪽으로 내려옴으로써 한국교회의 중심은 일거에 북한에서 남한으로 옮겨졌다. 문제는 교회를 버리고 떠난 이들의 선택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종교를 비과학적인 세계관으로 여기고 유산계급의 착취 수단으로 여기는 사회주의의 핍박 속에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극한의 상황이라고 해도 교회와 교인을 버리고 떠나버린 목회자들은 적어도 그 도의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월남한 교회지도자들이 유난히 극단적인 반공주의자가 되고, 북한 공산주의자들로터 받은 ‘수난’을 강조해온 것은 그런 죄의식을 벗어나고자 하는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교회와 함께 죽겠다며 끝까지 월남할 것을 거부한 조만식의 태도는 이런 점에서 월남을 선택한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태도와 극명하게 대조된다.

한 원로 신학자는 그 동안의 “무비판적인 수난사에 대해서” 재반성해야 한다고 이미 30여 년 전에 지적했다. 냉정하게 역사적으로 반성해 볼 때, 해방직후 북한 기독교인의 모습은 교회나 민족과 함께 수난을 받았다기보다는 수난을 피해서 도망 나온 모습이었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의 교회와는 달리 북한 교회가 해방직후 북한 정권과 공존할 수 없었던 것은 문제의 근원이 북한 정권에 있다기보다 오히려 한국 기독교 자체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즉, 한국의 기독교는 어떤 특정한 환경에서만 존재할 수 있고 그 환경이 변화하면 존재할 수 없을 정도로 생명력이 약한 것은 아닐까? 유물론이나 무신론은 반드시 공산주의 사회뿐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하에도 있는 것이다. 유물론의 가장 발전된 모습인 물신숭배가 만연한 남한 사회 속에서는 교회가 잘 적응하고 있지 않은가?

넓은 의미에서 현재 남한의 교회, 특히 장로교회는 해방 전 서북지역에서 온 교회 지도자들의 자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남한 교회는 아버지들이 버리고 온 북한 교회에 대하여 큰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그러나 이런 책임감이 반공 이데올로기를 기초로 한 북한교회 재건론으로 이어져서는 안된다. 그런 태도는 남한 교회로 하여금 월남한 교역자들이 반세기 전에 저질렀던 잘못을 반복하게 만들 것이다. 반공 이데올로기에 기초한 남한 교회의 정복주의적 북한 선교관을 보고 일본의 목사 사와 마사히코는 이렇게 말했다: 

남쪽과 완전히 그 체제가 다른 지역에 대한 선교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다만 자기의 세력 확대를 꿈꾸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북쪽의 체제에 대한 일체의 부정 혹은 무시, 그리고 거기서 싹트는 복음선교에 대한 성의는 마치 열광적인 공산주의자들이 취하는 상대편을 무시하고 세뇌 공작하려고 드는 그러한 태도와도 비슷하다.  

남한의 기독교인들이 명심해야 할 뼈아픈 충고다.

해방직후 교역자와 교인들의 대부분이 대거 남으로 떠나버린 후 북에 남아있던 교회와 교인들은 엄청난 고난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일이었다. 기독교는 어떤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체이다. 남게 된 교인들 가운데 많은 수가 신앙을 견지했다. 현재 공식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북한에는 30여 명의 목사가 이끄는 1만2천여 교인이 520여 ‘가정교회’와 2개의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있다. 남한에서 보면 매우 이질적으로 보이지만, 그런 모습은 사회주의적 환경에 적응하여 존재하는 교회가 보이는 일반적인 특징이다. 신앙은 고백적인 것이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 북한의 교회를 두고 그 고백의 진위를 판단하려는 태도는 영적인 교만과 완악함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

남한교회는 북한교회에 지고 있는 역사적 빚을 갚아야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지난 잘못에 대한 역사적 반성에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런 반성은 월남한 서북지역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우리에게 남겨준 극단적 반공주의와 친미주의를 극복하려는 노력으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그 바탕 위에서 북한과 북한교회의 특성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통일지향적인 자세가 나올 수 있다. 궁극적으로 남한교회는 북한교회에게 가르칠 것은 가르치고 그로부터 배울 것은 배워야 한다. 물신주의에 물들어 가는 남한의 교회가 북한교회로부터 배울 바를 찾는 것도 남한교회가 해야할 역사적 책임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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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 목사, 정말 아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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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목사 이미 은퇴한 목사아닌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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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 교수 시국성명서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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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Advent) 교회력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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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회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대한 긴급 제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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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신대 김철홍 교수 글에 대한 학생들 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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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하는 교회 탐방(거룩한 빛 광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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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교회의 당회원, 당회장의 역할(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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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교수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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