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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종전선언, 비핵화 그리고 항구적 평화체제'한반도의 봄'과 2020년의 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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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10  22:4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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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종전선언, 비핵화 그리고 항구적 평화체제

유영식(경남대학교 정치학 박사, 북한전공)

   

최근 한반도 상황을 한마디로 이야기한다면 불확실한 한반도의 봄이다. 평창올림픽 이후 한반도에 봄이 왔다고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 ‘봄’은 평창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다. 2017년 7월 문재인 대통령은 독일 베를린 쾨르버(Körber) 재단 초청 연설에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베를린 구상인 ‘한반도 평화구상 5대 대북원칙’을 발표했다. 베를린 구상에 대한 북한의 반응은 예상대로 비판적이었다. 7월 15일 󰡔로동신문󰡕은 ‘조선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진로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아야 한다’는 개인필명 논평을 통해 베를린 구상에 대해 조목조목 비판했다. 그러나 이 논평이 개인필명 형식인 것으로 보아 북한이 수위를 조절한 차원으로 해석되었다. 오히려 “6·15공동선언과 10·4선언에 대한 존중, 이행을 다짐하는 등 선임자들과는 다른 일련의 입장들이 담겨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라며 베를린 구상에 대해 일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흥미로운 것은 4월 27일 발표된 판문점 선언의 세부적인 내용이 상당부분 베를린 구상에 포함되어 있던 내용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판문점 선언을 김정은이 불러준 대로 받아 적은 남북정상회담 발표문이라는 일부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한반도의 봄은 김정은 위원장의 2018년 신년사에서도 대충 암시되었다. 김정은은 국가 핵무력 완성 이후 갖게 된 불가역적인 전쟁억제력과 전략국가의 지위를 토대로 경제성과를 올리고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남북 간 군사적 긴장해소 및 평화적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북한 정권 창건 70주년과 남한의 평창올림픽이라는 남북한 ‘대사(大事)’를 명분 삼아 국면을 전환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밝혔고, 미국에 대해서도 비난을 적절한 수준으로 자제함으로써 미국과의 대화 의지를 암묵적으로 보여주었다. 이런 대화국면 선언으로 평창올림픽, 남북한 예술공연단의 상호방문 공연이 성사되었다. 이런 일련의 작은 변화들은 남북관계 개선에 있어서, 1969년 서독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가 추진했던 ‘작은 발걸음’ 정책과 같은 접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주었다.

‘판문점 선언’ 자세히 들여다보기

판문점 선언이 발표되자, 일각에서는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한마디로 북한의 행태는 극적 효과를 노리는 꼼수이거나 고도로 연출된 위장평화쇼에 불과하다는 평가였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시각에서 보면, 2012년 이후 잔인한 숙청을 강행했던 김정은의 갑작스러운 평화 이미지 변신을 믿을 수 있는 건지, 2018년 신년사에서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항상 놓여있다는 것은 위협이 아닌 현실임을 똑바로 알아야 한다”고 한 발언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그리고 과거 북핵 협상과정에서 보여준 북한의 반복된 변덕스러운 패턴이 일소될 수 있을지 등등 여러 의구심과 불신을 거두기는 사실 어렵다. 그리고 북한의 평화 이벤트는 ‘국가안보’라는 국가주의를 삶의 신조와 자부심으로 삼고 근면하게 살아온 이들에게는 평생의 가치가 한순간에 조롱당하는 느낌이어서 모욕감과 적개심을 갖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눈앞의 현상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김정은과 북한지도부가 상당히 준비를 많이 했고, 이제는 ‘판을 되돌릴 수 없는’ 게임에 뛰어든 것은 분명하다.

판문점 선언은 3조 13개항으로, 남북관계 발전과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구축, 그리고 평화체제 구축이 핵심내용이다. 판문점 선언이 발표되고 이미 많은 전문가들이 분석한대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합의문의 순서를 놓고 볼 때, 남북관계가 북핵문제와 북미관계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출발점이자 중심임을 분명히 명시한 점이다. 남과 북은 한반도 문제의 직접 당사자이며, 주변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좌고우면해서는 안 된다는 공통된 인식하에 남북관계 발전이 국제정세의 종속변수가 아니라 한반도 주변 국제질서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그리고 이어서 2조에서 군사적 긴장완화와 신뢰구축에 합의함으로써 남북관계와 평화체제를 연결하는 가장 확실한 고리를 확보했다. 사실 군사적 긴장과 충돌은 남북관계에 있어서 가장 휘발성이 높은 사안이다. 1971년부터 2017년까지 남북한 합의서는 총 239건이 체결되었지만 대부분 이행되지 못하고 사문화된 원인 중 하나가 남북한 군사적 긴장과 물리적 충돌 때문이었다. 3조에서는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이라는 목표에 합의했다. 1953년부터 유지되고 있는 정전상태를 종식시키고 확고한 평화체제를 수립하기 위해 어떠한 무력도 사용하지 않는다는 합의를 이루었고, 완전한 비핵화를 통해 ‘핵 없는 한반도’라는 공동의 목표와 의지를 국제사회에 생중계함으로써 구체적 합의 이행에 대한 자체의 규제력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합의 이행의 불가역성을 제도화하도록 했다. 이는 판문점 선언이 말잔치에서 끝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와 속도전식 이행에 대한 약속을 명확히 한 것이다.

김정은은 왜 이 시점에서 등장했는가?

판문점 선언이 발표되자, 세간의 관심은 그럼 왜 이 시점에서 김정은이 평화의 이미지를 과시하며 국제사회에 등장했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3가지 정도의 분석이 가능하다.

첫째, 역시 경제문제이다. 2017년 10월 7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2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은은 경제-핵 병진노선의 지속 추진과 자력갱생을 통해 미국 등 국제사회의 대북제제 강화 국면을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천명했다. 하지만 2016년 3월 유엔 대북제재 2270호로 북한의 합법적인 수출에 대해서 제재가 진행 중이었고, 2017년 9월 제6차 핵실험에 대응한 대북제재 2375호부터는 종전 북한 전체 수출의 90% 가까이를 차지하는 품목들에 대해서까지 수출을 금지하는 조치가 강행되면서 2018년 2월 북한경제의 생명줄인 대중국 수출마저 전년 대비 95% 감소되고, 수입은 1/3 급감하는 등 경제위기가 심화되었다. 특히 민간 경제에 대한 국가 통제가 현저히 약화되고, 시장화 조치로 인한 부의 양극화 현상이 심각해지면서 경제문제가 체제안정에 불안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는 상황이다. 급기야 2018년 4월 20일, 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 전원회의에서 ‘경제건설 총력집중’이라는 새 전략노선을 제시하고, 북한 정권수립 70주년(9·9절)을 ‘대경사’로 맞이하기 위해서는 경제부문을 획기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해제가 절실한 상황이다.

둘째, 핵무력 완성에 대한 자신감을 고려해 볼 수 있다. 2017년 9월 제6차 핵실험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있어 기술적으로는 마지막 핵실험일 가능성이 높다. 이어 11월 화성 15형(액체연료, 대륙간탄도미사일, 미 본토 전역) 시험발사가 성공하면서 북한은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포했다. 이제 북한 핵의 몸값(ransom)이 미국과 빅딜(Big Deal)이 가능한 수준에 도달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신중하게 살펴할 것이 하나 있다. 2017년 말, 전문가들은 북한이 2018년 신년사를 통해 핵무력 완성에 따른 후속 계획을 선포하고 대화 제의 등 평화공세를 통한 국면 전환을 목표로 적극적인 대외 행보를 보일 것으로 예상했었다. 2018년 북한은 핵무력 완성 선포를 내세워 공세적 핵외교를 통해 경제발전과 대북제재 및 국제적 고립 탈피의 방향으로 출구를 모색하고, ‘책임있는 핵보유국’이자 ‘주체의 핵강국’이라는 지위에 맞는 대외관계 발전을 강조하며 국제사회의 압박에 대항할 것으로 예측했었다. 선제 핵불사용 원칙 재천명과 국제사회의 비확산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면서 세계 비핵화 실현을 위한 핵군축 참여를 선언할 것이라고 분석했었다. 즉 2017년 말 예상했던 2018년 북한정치의 경로는 핵무력 완성(핵보유국) → 2018년 평화 제스처 → 대외관계 발전과 경제문제 해결이었다. 그런데 결정적으로 북한이 판문점 선언에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목표에 합의하면서 그동안의 분석에 혼선을 주었다. 김정은의 ‘한반도 비핵화’ 언급이 분석에 혼선을 준 이유는 정치 공학적으로 북한은 비핵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중론이었기 때문이다. 북한은 1993년부터 2017년까지 국가 핵무력 완성을 위해 총력을 집중해왔다. 국제사회의 제재로 인해 엄청난 손실도 감수해야 했다. 핵개발에 직접 투자된 15조원 이상의 예산이 전부가 아니다. 북한으로서는 외교적 고립과 국제적인 이미지 추락, 불량국가라는 딱지를 떼지 못했다. 그리고 과거 핵협상 패턴을 보면, 북한이 협상 테이블에 앉기 전에 비핵화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 또한 핵과 관련한 북한의 인식은 “핵은 우리 공화국의 존엄과 힘의 절대적 상징이고 민족부흥의 억만년 담보”, “조선의 핵은 순간도 포기할 수 없고 억만금과도 바꿀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생명이며 최고이익”, “핵은 조선의 자주”이다. 특히 2013년부터 북한이 강조한 ‘김정은식 자주 캠페인’은 핵무력으로 완성된다. 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경제적 약소국과 최고의 군사경제적 강대국 정상이 협상테이블에 마주 않을 수 있는 권력(power)도 바로 핵이다. 그런데 북한이 이 핵을 포기한다고 하니 액면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셋째, 지연전략, 즉 일종의 시간벌기이다. 김정은은 트럼프 행정부의 전쟁 위험이 용납 불가한 수준으로 고조되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변덕스러운 위협들, 군사력 과시, 매파(강경파) 기용 등으로 특징된 트럼프 행정부의 남은 2년 임기를 일단 피하고 보자는 의도이다. 이 경우라면, 북한은 핵 프로그램에 대한 적당하고 일시적인 양보를 내놓고, 이후 협상을 복잡한 기술적 논의에 빠뜨려 다시 이전상태를 돌아가고자 할 것이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서의 북한의 선제적 조치들–핵실험과 ICBM 발사중단, 핵실험장 폐기 선언–을 시간벌기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면 북한의 진정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종전선언, 비핵화, 한반도 평화체제

김정은이 왜 이 시점에서 등장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지만, 판문점 선언을 통해 한반도의 종전선언과 완전한 비핵화, 그리고 평화체제에 대해 합의를 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흥미로운 것은 종전선언을 한반도 평화공존의 실질적인 출발점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번 선언에서는 종전선언 시기를 구체화하여 협상의 동력을 확보하고, 종전선언의 출구를 평화협정으로 명문화했다. 그리고 10·4정상회담의 연속선상에서 평화협정의 당사자를 3자(남·북·미) 또는 4자(남·북·미·중)로 구체화하여 그동안 계속해서 논란이 되고 있던 정전협정의 ‘당사자 문제’는 일단 종결된 것으로 보인다. 남한은 3자든지 혹은 4자든지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당사자로 확정된 셈이다. 사실 이것만해도 적지 않은 수확이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1954년 4월 제네바 정치회담 이후 현재까지 진행된 평화체제 논의과정을 살펴보면 몇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1973년부터 평화협정에 대한 북한의 입장은 ‘남북평화협정’에서 ‘북미평화협정’으로 옮겨갔다. 평화협정의 주요쟁점은 당사자 문제와 주한미군 주둔 문제였다. 북핵 위기 이후 평화협정을 통한 평화체제 구축에 있어서 ‘핵’이 핵심적인 이슈로 부각되었다. 비핵화와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하여 관련국가들 간의 해법에는 선명한 차이를 보였다. 북한은 핵군축-평화체제 입장이다. 남한과 미국·일본은 선(先) 비핵화 후(後) 평화체제 방식을 선호한다. 중국은 비핵화-평화체제 병행(雙軌竝行), 쌍중단(雙中斷, 북한 핵·미사일 도발과 한미연합군사훈련 동시 중단)을 주장하고 있다. 지금까지는 이런 서로의 입장만 고집하며 찔끔찔끔 대화(?)를 계속해 왔다. 특히 북한은 그동안 비핵화와 평화체제 협상은 미국과의 문제로 한정했다. 그래서 항상 북미대화를 통해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자고 미국에 제안했었다. 기본입장은 이미 핵을 보유한 국가로서 비핵화가 아닌 핵군축과 평화체제를 함께 협상하자는 입장이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중국의 제안도 북한에게는 나쁘지 않는 방식이지만, 완강히 거부해왔다. 북한은 비핵화가 협상의 의제가 되는 것 자체를 거부했다. 그런데 이번에 북한은 비핵화의 의지를 밝히고 비핵화의 조건으로 5개안을 제시했다. ①남한에서의 미국 핵 전력자산 철수, ②한미 전략자산 훈련 중지, ③재래식·핵무기 공격 포기, ④평화협정 체결, ⑤북미관계정상화(북미수교)이다. 여기에 주한미군 철수는 포함되지 않았다. 그리고 북한은 남북을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 확인하는 합의에도 동의했다. 1954년 이후 지금까지 진행된 평화체제 논의과정으로 보자면 분명 큰 진전을 이룬 것이다.

한반도 종전선언과 평화체제 구축 협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역시 북한의 비핵화이다. 미국은 되돌릴 수 없는 비핵화의 조건으로 CVID를 고집하고 있다.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PVID를 비핵화의 기준으로 들고 나왔다가 다시 CVID로 되돌아가 결국 북미정상회담은 ‘CVID의 정치학’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형국이다. 어려운 것은 미국이 고집하고 있는 일괄타결방식과 북한이 제시하고 있는 단계적·동시적 조치가 어떤 절충점을 찾는가 하는 것이다. 2003년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들이 CVID를 주창할 때부터 북한의 기본적인 입장은 아주 간단명료하다. 북한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로 일축했다. 북한의 인식은 CVID는 사실상 패전국에게나 적용되는 모욕으로 인식하고 있다. ‘백두산 대국’이라는 국가정체성과 체면을 중시하는 북한으로서는 CVID는 수용하기 어려운 협상조건일 수밖에 없다.

CVID에서 ‘완전한’은 사실상 대상과 범주로서 모든 핵무기 프로그램을, ‘검증가능한’은 검증방법으로서 투명한 신고 및 엄밀한 사찰·검증의 보장을, 그리고 ‘되돌릴 수 없는’은 비핵화의 정도로서 재가동이나 복원이 불가능한 비핵화로 해석된다. 일반적으로 CVID의 절차는 핵개발 동결, 신고 및 검증, 폐기 순으로 진행된다. 북핵 협상 25년을 되돌아보면 동결조치(선언)는 여러 번 있었다. 문제는 신고 및 검증 단계에서 모든 합의이행이 중단되었다. 2008년 6월에는 북핵 위기의 상징물로 꼽혔던 영변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하고 6자회담 참가국 언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전 세계에 텔레비전으로 중계되기도 했다. 그러나 더 이상의 진척은 없었고, 북한은 계속해서 핵고도화라는 자신들의 시간표에 따라 움직였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협상과정만 두고 본다면 CVID는 정치적으로 험난한 여정이 될 것이다. 이번에도 신고 및 검증 단계에서 비핵화 과정이 중단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그러나 동시에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이 개입될 여지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언론에 보도 되는대로, 이번 북핵 비핵화 검증 작업은 핵 폐기 역사에서 가장 광범위한 사찰 활동이 될 것이다. 그런 만큼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와 시설, 물질을 모두 공개하고 검증에 전폭적으로 협조하지 않으면 CVID는 사실상 어렵다. 북한으로서는 피동적일 수밖에 없다. 실시간 숨바꼭질 게임이 예상된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만약 북한이 핵물질과 핵탄두를 은닉했더라도 그것을 사용할 동기를 주지 않는 정치적 신뢰의 형성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체제안전에 대한 신뢰를 주는 것이 사실상 최종적인 비핵화의 수단이라는 의미로 들린다. 평화체제는 바로 비핵화의 불완전성과 불확실성을 메우는 정치적 결속이 된다는 논리이다. ‘완전한’ 비핵화는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볼 때, ‘최대한의’ 비핵화로 수준을 조정하고 평화체제 구축을 통해 북한의 핵위협을 통제하자는 생각이다. 물론 일부 전문가들의 주장이다.

한반도의 봄은 어디로? 북미정상회담 시나리오

남북정상회담에서 남북정상은 한반도 종전선언과 비핵화,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축의 ‘키플레이어’를 트럼프 대통령으로 정했다. “노벨 평화상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타고, 우리는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은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이 현실이다.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은 남북한만의 문제는 아니다. 성공여부는 동아시아의 안보레짐과 불가분리의 역학구도에 달려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남·북·미는 판세 장악력을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해, 그리고 중·일·러는 게임에서 소외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형국이다. 특히 중국과 일본은 각각 중국배제(China-passing), 일본배제(Japan-passing)를 우려하여 적극적인 대응하고 있다. 남북 정상의 판문점 선언에서 한반도의 평화체제 구축과 관련해 중국이 배제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지자 시진핑은 다롄에서 김정은과 재회동을 갖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지속해서 유지하기 위한 명분을 확보하고자 했다. 일본은 한·중·일 정상회담에서 한반도평화체제에 어떤 형식으로든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6자회담 관련국가들 중 유일하게 러시아만 한반도평화협정 체결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한 바 있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건 북미정상회담에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렇다면 북미정상회담은 어떤 경로를 따라 갈 것인가? 3가지의 경로가 예상된다. 이건 누구나 다 예측할 수 있는 상식적 수준의 시나리오이다.

첫째, 일괄타협(grand bargain)이다. 6월 개최 예정인 북미정상회담에서 양국이 ‘체제보장 vs 비핵화(CVID)’ 혹은 그 이상의 어떤 거래(?)에 합의를 도출하는 시나리오이다. 재차 방북한 폼페이오를 만난 김정은이 북미정상회담과 관련해 ‘만족한 합의’를 했다고 북한 매체들이 연이어 보도하고, 2015년 이후 북한에 억류되어 있던 한국계 미국인들을 송환하도록 한 조치들은 비핵화와 관련하여 대타협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여기에 더해 북미 정상들의 리더십의 특성(실용주의적이면서 대담한 직관을 중시하는)이 변수로 작용한다면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결정이 내려질 수도 있다. 이 경우는 양국 정상이 ‘정치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최대한의 타협이 선행되고, 이후 디테일한 협의가 순조롭게 진행되는 상황이 전개된다. 북미 상호간에 기만(cheating)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지는 구조 하에서, 그동안 북미관계정상화에 있어 장애로 작동하던 요인들이 일소되면서 평화체제 구축 로드맵에 대한 포괄적 합의가 진행될 것이다. 단기간 평화체제 구축이 급격히 진행되면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급진전으로 동북아의 거대한 체스판이 움직이는 상황이 전개되겠지만, 판이 크게 움직일수록 남북한의 평화의 봄이 확실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게 된다. 이렇게 된다면, 북미정상회담은 ‘창조적 블랙홀’로서 기능하게 된다.

둘째, 점진적 비핵화 타협이다. 이 시나리오는 북미 정상이 정치적으로 합의한 이후 북한의 체제보장의 범위와 내용, 비핵화의 검증방법, 이에 따른 보상(북핵 몸값 지불)과의 선후관계를 둘러싼 갈등이 증폭되는 상황이다. 이 시나리오는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s)”라는 원리가 실제로 작용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북미는 미래핵의 모라토리엄과 현재 핵 프로그램에 대한 동결과 사찰, 검증에는 합의에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의 핵, 즉 이미 만들어놓은 최소 15개 최대 60개의 핵을 어떻게 폐기하느냐하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만약 미국이 핵무기 외에 대량살상 생화학무기 폐기와 3,000명으로 추정되는 핵개발 기술자에 대한 신원파악, 모든 핵 프로그램 개발자료 공개를 요구하고, 북한이 비핵화 조건으로 이미 제시한 5개안 이상의 것을 미국에게 요구한다면 비핵화 과정이 지난(持難)해질 가능성이 아주 높다. 북한의 입장에서 경제제재를 완전히 철회시키고 2020년 현재 진행 중인 국가경제발전 5개년 전략의 가시적 결과를 위해(조선로동당 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전원회의에서 강조된 바), 미국의 입장에서는 2020년 대선 국면을 겨냥한 국내정치적 필요에 의해 북미 간 큰 틀의 합의는 준수되지만, 검증과 사찰에 있어서 디테일의 문제로 CVID는 단기간 난망하다는 판단이 충분히 가능하다. 뿐만 아니라, 완전한 비핵화에 북미정상이 합의하고 실제 검증과정이 정상적으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북미수교 논의가 급물살을 탈 경우 자연스럽게 주한미군의 역할에 대한 논의가 부각되고 이 과정에서 중국의 의구심이 발동된다면 한반도 평화체제는 차질을 초래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 경우 한반도의 봄은 방향을 잃게 된다.

셋째, 비핵화 합의 실패와 대결구도로의 회귀이다. 이 시나리오는 북미 정상 간 타협은 이루어지나 향후 디테일한 협상과정에서 갈등 요인이 증폭되면서 2017년과 같은 적대적 대결 관계로 회귀하는 경우이다. 북한이나 미국 모두 비핵화 이행 과정에서 상대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면서 북한지도부가 합의를 깨고 대미 핵무력 증강에 대한 전략적 필요성을 재고하는 경우 북핵 위기가 재연되는 상황을 가정할 수 있다. 북핵 협상 25년을 돌아보면, 한반도 주변 6자가 합의에 도달한 다음 항상 판을 깨는 것은 북한이었다.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북한이 판을 깨도록 추동하는 매개역할은 미국이 맡아했다. 만약 그런 패턴이 반복된다면 대결구도로 갈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의 봄은 다시 멀어져 간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런 경로는 아닐 것 같다. 판을 깨기에는 북미 모두 너무 멀리 왔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봄과 2020년의 정치학

현재 한반도 정세는 2020년의 정치 경로를 노정하고 있다. 2017년 베를린 구상, 2018년 김정은의 신년사, 평창올림픽, 그리고 남북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만 보면 미국은 보이지 않는다. 세계정상들이 모인 평창올림픽 때도 마이크 펜스는 문재인 대통령이 연설하는 환영 연회장에 10분 늦게 도착하고, 5분 만에 돌발 퇴장했다. 북한 최고위급과의 접촉이 불편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미국은 대북 외교채널을 준비하고 있었다. 공식적인 뉴욕채널이 아니라 CIA채널이었다. CIA채널은 기본적으로 비밀스럽다. 간명하게 말하면 뒷거래를 많이 한다. 트럼프가 항상 자랑하는 ‘거래의 기술’(트럼프는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도 결국은 비밀스러운 거래이다. 일차적으로 그 거래의 종점은 2020년이다. 계속적으로 정치적 성과를 만들어가면서 2020년 재선을 꿈꾸고 있다. 김정은 역시 2020년은 국내정치적으로 중요한 해이다. 김정은은 2018년 4월 조선로동당 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3차전원회의에서, 경제건설을 새로운 전략적 노선으로 제시했다. 핵무력은 2017년 이미 완성되었으니, 이제는 오직 경제개발에 집중하고 총력을 기울이겠다는 선언이었다. 2020년은 국가경제개발 5개년이 마무리되는 시간이다. 김정은으로서는 북한주민들과 권력엘리트들을 설득할만한 가시적 결과가 절실하다. 우리로서는 어떤 것이든 좋다. 한반도의 판이 크게 흔들려도 나쁘지 않다. 판이 크게 요동치면서 한반도의 봄이 자리매김할 공간은 더 넓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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