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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종교 비판 (하)통일시대의 기독교 자기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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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17  16:5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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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종교 비판 (하)

이 글은 서울대학교 교수들이 발행하는 계간지 <철학과 현실>에 기고된 글이다.  홍성현 목사님은 남북평화통일을 위한 기도와 연구에 일생을 바치신 분이시며,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생신을 위하여 현재 갈릴리신학대학원 서울 분원 원장으로 팔순의 연세에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계신다. 본 기사는, 분량 관계로 두 번에 나누어 싣는다. 약력은 첫 번째 기사의 맨 아래에 소개하였다.

"종교와 마르크스"

홍성현 목사(갈릴리신학대학원 원장)

   
2. 정치적인 종교 거부

(전편에 이어)........그의 글 <유대인 문제>의 글의 결론 부분을 보자:

모든 해방은 인간의 세계를 회복하는 것이고, 사람들 자신들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실제의 개적인사람이 자기 자신 속에로 추상적인 시민을 다시 불러들이고, 그의 일상적인 삶속에 자신의 개인을 집어넣고, 그래서 그의 개인적 관계가 한 종(種)의 존재가 될 때에만 또한 그가 자기 자신의 힘을 사회적 힘으로서 인정하고 조직할 수 있어서 사회적 힘이 정치적 힘으로서 자신으로부터 더 이상 분리되지 않을 때에만 인간해방은 완성된다.28)

사람이 유대교도로 남아있는 한 자신의 힘을 사회적인 힘으로 만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인은 결코 인간적 해방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이다. 부르조아들인 유대교인들과 같은 종교인들은 오직 자신들의 재산을 축적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고 그 결과는 시민들 즉 프로레타리아들을 억압하는 것이기에 종교는 거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기독교 역시 "유대교에서 나온 종교“라고 규정하고 기독교도 거부한다. 무엇보다도 종교가 비판받은 이유는 그것의 정치적 관계 안에서의 기능 때문이었다. 참다운 인간의 해방을 위해 종교가 정치를 도운 것이 아니라 반대로 정치를 종교적으로 역이용하여 종교인들의 배를 채웠으며 그 결과로 인간을 억압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1843년 말에 파리에서 쓴 논문인 <헤겔의 법철학비판>에서 정치와 종교가 서로 매우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종교의 지배가 지배의 종교'라고 생각한 마르크스에게는 종교비판이 모든 비판의 전제“다.29) 그는 그의 논문 서두에 그 말을 쓰고 있다. 그의 날카로운 종교비판은 ”사람이 종교를 만든 것이지, 종교가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다“라는 사실위에 근거한다. "다른 말로 하면 종교란 자기 자신을 아직도 발견 못했거나 아니면 자기 자신을 이미 잃어버린 사람의 자의식이며 자기감정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 세계 밖에 쪼그리고 앉아있는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사람들의 세계요, 국가의 세계요, 사회의 세계다. 이 국가와 이 사회가 종교를 만든다."30)

종교적 의식은 이 세계를 일그러뜨린다. "종교적 고뇌는 진짜 고통의 표현임과 동시에 진짜 고통에 반대하여 항의하는 것으로 된다." 종교는 뒤틀린 세상에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구체적 해결을 이 땅에서 약속하지 못하고 저 세상에서의 보상만을 약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억압당하는 피조물들의 탄식이요 마음 없는 세상의 마음인 것은 마치 그것이 정신없는 조건들의 정신인 것과 같다.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다.”31)

여기서 우리는 하이네(Heinrich Heine)의 이야기를 떠올려본다: "땅이 더 이상 그에게 아무것도 제공해 줄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을 위하여 하늘이 발명되었다‥‥ 이 발명에 대해 만세! 고통을 당하는 종족들에게 그들의 쓴잔에 달콤한 환각적 마취약을, 영적 아편을, 사랑과 소망과 믿음의 몇 방울을 주는 종교에게 만세.32) 종교는 결국 인간의 의식을 마비시켜서 진짜 고통을 잠시 잊게 해 줄 뿐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기능 역시 고통하는 인간의 괴로움을 정신적 아편주사로 일시적으로 잊게 해주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결국 종교란 실제적 행복을 주지 못하고 환상적인 거짓된 행복을 줄 뿐이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참된 행복을 주기 위해서는 환상적 행복으로서의 종교를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적인 꽃" 대신에 "생화"를 갖게 하려면 신비적인 종교를 벗겨 버릴 때, 그의 환상이 제거되고 그때에야 비로소 그는 그의 진짜 현실을 보고 제대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리를 넘어선 세계가 일단 사라져 버렸을 때 역사의 임무는 이 세계의 진리를 세우는 것이다. 일단 인간의 자기 소외의 거룩한 형태가 그 껍질을 벗어버리게 되면 역사를 섬기는 철학의 직접적인 과제는 자기소외를 거룩하지 않은 형태로서 드러내는 일이다.33)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은 구체적으로 인간의 고통을 제거시키자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천대받고 종살이하며, 버림받고 무시당하는 가난한 교인들이, 초월만을 외치는 외식적이고 가식적인 당시의 사제들에게 더 이상 초월의 이름으로 이용당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초월의 신앙이, 단 한번만 주어지는 이 세상의 삶을 보다 당당하고 밝게 살도록 돕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함을 마르크스는 강조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최고의 존재다"라고 선언한다.

마르크스는 기독인들의 급진적 변화를 요청했다. “급진적”(radical)이란 뿌리를 잡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경우, 뿌리는 인간 자신이다. 즉 급진적 변화 혹은 혁명은 인간의 해방이다. 마르크스가 강조한 것은 멸시받고 가난한 민중들의 자유와 해방이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민중들의 당당한 삶을 요청하였다. 교회의 높은 단에 앉아서 영광은 다 누리면서, 교인들이 내는 헌금을 가지고 교회와 사회의 정치나 하고 있는 성직자들 앞에서 민중들은 절대로 쩔쩔매지 말고, 스스로를 최고의 인간 존재로서 당당하게 살라고 마르크스는 외쳤다.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서 가난한 교인들의 헌금을 받아서 쌓아놓고는 호화판으로 살아가는 초월 중매자들인 소위 성직자들을 무섭게 비판하면서, 민중들은 초월에 매달리지 말고, 역사의 현실“영적 아편”을 더 이상 받아먹지 말라고 경고하면서, 역사의 현장에서 민중의 역사와 사회를 스스로 만들어가라고 마르크스는 외쳤다. 현재의 독일 신학자 몰트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교의 자유운동이 뒤틀린 것은 자기 머리를 높이 들고 우쭐되는 자유와 권리가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만 한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이것이 신교의 자유운동이 곧 계몽주의 휴머니즘에 의하여 떠맡겨지고 또 그 운동을 가능케 한 이유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자유의 영역이란 보편성에 의하여 특징지어지고, 그리고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진 모든 한계와 장벽을 허물어 버리기 때문이다“(34)

비록 중세기의 교회가 막고 있었던 자유의 벽이 루터에 의하여 일단은 터지긴 했으나 이 신교의 자유의 물결이 한 방향으로만 치닫게 되었을 때, 또 다른 자유운동에 의하여 다른 방향의 폭포가 터져 나가는 결과가 빚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분명해진 것은 종교개혁이 급진적이지 못했던 이유가 사람이라는 뿌리를 잡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민중의 자유가 그 뿌리에서부터 해결 받지 못했기 때문에 계몽주의 휴머니즘이 나오게 되고 그리고는 마르크스의 휴머니즘적 공산주의가 고개를 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민중의 해방을 위한 뿌리로부터의 해방은 물질적 기초를 요청한다. 그렇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을 수행하기 위해서 "철학은 프롤레타리아 안에서 그것의 물질적 무기를 찾아야 하고 또 프롤레타리아는 철학에서 정신적 무기를 찾아야 한다. 이 해방의 머리는 철학이고 그 가슴은 프롤레타리아다.(35)

실로 마르크스에 의해서 인간해방과 자유의 영역이 하층의 민중들에게까지 파급되어야함이 역설되었는데, 민중의 자유와 해방은 초현세적인 종교적 자유와 해방의 내용과는 다른 구체적인 땅위의 물질적 자유와 해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적 자유와 해방은 이미 땅위에서 많이 가진 자들에게나 필요한 것이고, 땅위에서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민중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난하고 눌림 받는 민중들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것은 물질적 기초이다. 저들의 물질적 기초가 빼앗기거나 주어지지 않은 이유 자체가 초월만을 강조하는 종교 때문이라는 것이다. 기독인들이 정부와 한 통속이 되어서 이 세상의 물질을 민중들과 공평하게 나누지를 않았고, 오히려 정치권력과 야합하여 물질을 탐하고 있었기에 민중들의 삶은 더욱 고갈이 되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종교 거부는 바로 이 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뿌리로부터의 민중해방을 위해서 종교가 먼저 제거되어야 한다는 그의 논리를 이 점에서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현대 철학자 마르쿠제도 민중들의 구체적인 역사적 해방을 위해서는 이 세상을 초월한 거짓되고 환상적인 행복을 거부해야 하고. 사변적인 개념, 초월적인 종교를 거부해야한다고 주장한다.36)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기초위에 세워진 행복이다. 여기에서 경제적 종교비판이 자연스럽게 뒤따른다.

3. 경제적인 종교 거부

왕좌와 제단, 돈과 성직과의 밀접한 연결은 기독교의 실책으로 언제나 비난을 받아왔다. 특히 마르크스 당대의 정치권력과 교회가 서로 손을 꽉 잡고 있었고, 따라서 성직자들과 재산이 한 묶음 속에서 딩굴고 있었다는 비난을 받아왔었다. 말로는 초월적인 설교를 하면서도 실제로는 땅위의 재물에 온통 정신을 쏟고 있었던 위선자들이었다. 당대의 교회는 교회의 사회원칙들을 제정하기도 했고,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사회주의를 제창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대의 기독교의 사회원칙은 “고대의 노예제도를 정당화했고 중세기의 농노제도를 찬양했다. 그리고 필요할 때는 프롤레타리아가 억압당하는 것을 보고 동정의 얼굴을 하면서도 그 억압을 옹호하고 변명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다"37)고 마르크스는 비난했다. 당대의 교회 지도자들은 당대의 지배하고 억압하는 계급의 필요성을 설교했다고 마르크스는 꼬집는다. 부르조아들에게나 안성맞춤인 성서해석, 설교, 교회정치 등등 때문에 프로레타리아들은 전혀 그 속에 같이 어울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신학자 디르크스(W. Dirks)의 다음의 글은 이상의 사실을 분명하게 알려준다.

당대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옛 농경적, 소시민적, 부르조아적 기독교 형태에서 벗어나 전혀 다른 형태 속으로 프롤레타리아가 처해졌기 때문에 농경적, 소시민적 기독교 형태는 더 이상 프로레타리아들에게 효력이 없게 됐을 때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의 매개를 통하여 프로레타아에게 새롭게 해석됬어야 했다.38)

당대의 교회의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목사들의 설교가 고통을 당하는 민중들의 현실적인 억압과 아픔으로 부터의 해방에는 전혀 언급 없이, 오히려 그 고통을 잘 참아내면 천국에서의 보상으로 갚아진다는 전혀 엉뚱한 설교를 함에서 일시적인 아편주사였다고 비판받았다. 억압자들과 지배자들 때문에 당하는 민중들의 고통을 오히려 인간의 원죄로 설교하면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잘 견디라고 설교한다는 것이다.39) 사람들의 고통을 직접적으로 유발시킨 권력자들이나 가진 자들의 횡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었다는 것이다.
반대로 마르크스는 "기독교의 사회원리들은 비굴한 것이고, 프로레타리아는 혁명적이다."40) 라고 외쳤다. 민중들의 해방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저런 잘못된 교회는 거부되어야한다고 말했다. 레딩(M. Reding)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교회에 대한 마르크스의 싸움은 동시에 노동자들의 해방을 위한 싸움이다.“41)

마르크스에 의하면 종교가 사람을 소외시킨다. 소외의 표식은 사람이 사람위에 지배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의 <파리유고>중 세 번째 원고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한 존재는 자기 발로 스스로 설 때 자신을 독립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자기존재를 자기 마음대로 소유할 때에만 자기 발로 설 수 있다."42) 마르크스에 의하면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이유가 자기가 자기 자신을 세우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밖의 다른 근거를 가지려는 데서 창조와 구속의 종교를 믿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된 사람이 종교에 귀의한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 삶의 생산과 재생산이 일치할 때 비로소 인간의 삶의 소외가 제거된다. 모든 세계역사가 인간의 노력과 노동을 통해서 창조된 것이고 또한 인간을 위한 자연의 발전이 이룩해준 것이다. 이런 인간은 자신의 자기창조와 자기 자신의 형성과정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연이라고 말한 것은 인간 이외의 어떤 대자나 타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곧 자연이고 자연이 곧 인간이란 전제위에서 언급하고 있다. 즉 인간 자신에게 주어진 본래성을 자연이라고 보고 있기 때문에 "인간을 위한 자연의 발전"이란 말과 "인간 노동을 통한 자기 창조"란 결국 같은 내용인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완성된 자연주의로서의 공산주의는 인본주의(humanism)이다. 이것은 마치 완성된 휴머니즘으로서의 공산주의가 자연주의인 것과 같다. 공산주의는 사람과 자연 사이의 적대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적대감을 완전하게 해결해준다. 실로 그것은 존재와 본질, 객관화와 자기주관, 자유와 필연, 개인과 종(種) 간의 충돌을 참되게 해결해준다.43)

마르크스에게 있어서 자연주의와 휴머니즘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종교는 자연주의와 정반대가 된다. 따라서 휴머니즘과 반대된다. 종교는 자기 외면화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자기소외 현상이 여기서 생긴다. 마르크스의 초기작품에서 가장 중심 되는 주제는 소외의 개념인데 종교가 소외를 조장한다고 그는 보았다. 실존과 본질을 갈라놓은 종교로 인해 자아도 세계도 모두가 소외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가 집중적으로 논한 소외는 노동과의 관계에서의 소외다. 이제 노동에 있어서의 소외현상을 논하면서 그것이 종교비판과 어떻게 연결되고 있는가를 살펴 볼 차례이다. 노동이 생산해내는 대상 즉 생산품은 노동 자체에 대해서는 소외된 물건으로 대립되어있다. 왜냐하면 노동을 하는 노동자에게 그가 만든 생산품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남의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노동자가 더 많은 생산품을 생산할수록, 그리고 그의 생산품이 그 힘과 범위에 있어서 증가하면 할수록, 노동자는 더 가난하게 된다. 정치경제학의 관점에서 객관화되고 또한 소외, 즉 외면화로서 나타난다.“44)고 썼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자본주의자들의 재산의 사유화에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노동의 실현은 그 노동자의 손해로서 결과되어서 노동자는 결국 다른 사람들에게 종속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말을 그대로 옮기면 "노동자와 노동과의 관계는 자본주와 노동과의 관계, 즉 "노동의 주인"의 노동과의 관계를 만든다. 사유재산은 따라서 외면화된 노동 즉 자연과 자기 자신에 대한 노동자의 외적 관계의 생산이요, 결과요, 필연적인 결론이다.“45) 마르크스의 초기작품들 속에서 발견되는 소외개념의 분석을 마르쿠제의 다음의 말로 결론지으려 한다: "마르크스의 초기의 글들은 자본주의 사회가 그것을 통해 인간들 상호간의 모든 인격적 관계들을 사물과의 객관적 관계의 형태로 만든 바의 사물화(객체화)의 과정에 대한 첫 번째의 공개적 연구이다."46)

그러면 이상에서 고찰한 노동에 있어서의 소외가 마르크스의 종교비판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살필 차례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양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종교와 소외는 서로가 서로에게 상호 의존하고 있다.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마르크스는 모든 사회적인 삶은 "근본적으로 실천적이다"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종교적인 감정도 그 자체가 사회의 생산물의 하나인데, 그것은 실천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비적인 것이다. 모든 신비적인 것들은 이론을 잘못 유도하여 신비주의로 인도하는데 종교가 바로 그 신비의 하나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를 칭찬하면서 그가 종교적인 자기소외를 올바로 보고, 그 문제에서 출발한 것은 옳았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포이에르바하가 추상적인 종교를 거부한 것 까지는 잘 했으나, 내재적이고 감각적인 인간의 본질을 사회적이고 실천적인 면으로까지 끌어 올려서 파악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종교가 제대로 비판받으려면 종교의 신비성과 초월성이 인간의 객관적인 사회성과 실천성에서 어떻게 유리되는가를 분석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종교론>에서 종교의 소외현상을 한마디로 소외된 의식의 산물이라고 혹평한다. 그에 의하면 개념이나 관념들이나 의식의 산물은 처음부터 인간의 물질적인 활동과 물질적인 교환과 직접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종교, 도덕, 법, 그리고 형이상학 등등 모두가 인간에 의하여 산출된 관념들이다. 인간의 관념들은 그것들의 물질적 조건에서부터 직접적으로 유출되어 나타난다. 이처럼 인간의 의식은 삶의 과정의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반영이다. 구체적인 삶을 떠나서는 인간의 관념이나 의식은 산출될 수 없다. 그러므로 "만일 관념의 전체성에 있어서 사람들과 또 그들의 관계들이 사진기 광막에 비쳐지는 것처럼 거꾸로 나타난다면 이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역사적인 삶의 과정 때문이다."47)라고 마르크스 말한다.

마찬가지로 독일 관념주의 철학도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온 것이기에 마르크스는 거부한다. 철학이 제대로의 철학이 되려면 "땅에서부터 하늘로" 가야하는데, 독일 관념론은 거꾸로 되었다고 그는 주장한다. 종교 역시 관념의 하나로서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온 것이기에 도치된 의식이라고 마르크스는 비판한다. 의식이나 관념이 그 전제조건으로 되어 있는 물질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움직여 나가는 것처럼 종교 역시 자체의 독립성이 없기 때문에 유동한다. 종교는 역사도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또한 발전도 없다고 마르크스는 비판한다. 왜냐하면 "삶을 결정하는 것이 의식이 아니고 의식을 결정하는 것이 삶"48)이기 때문이다. 종교가 의식의 산물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을 이해하는 사람은 위의 인용구의 의식 대신에 종교를 대치시켜 문장을 재구성해 보면 어째서 종교가 역사도 발전도 지니지 못하는가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의식은 출발부터 사회의 산물이다. 따라서 인간들의 의식으로서의 종교 역시 항상 변화되는 인간 사회의 관계들을 반영한다. 오늘날의 의식은 부르조아적 자본주의 시대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종교는 물질적 산물의 한 반영이다. 마르크스는 이상의 논리위에 기초하여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의 종교가 노동의 소외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적 종교에는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 아래에서의 노동의 소외가 깃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노동의 분리는 "물질적인 노동과 정신적인 노동이 분리되자마자 즉시 실제의 분리로 된다는 것이다."49) 왜냐하면 이 순간부터 의식은 실재하는 실천에 대한 의식 외에 다른 어떤 것을 상상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순간부터 의식은 이 세상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빼내서 "순수한 이론을 형성시키는 일에, 즉 신학, 철학, 도덕 등"50)에로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가 실제로 존재하는 생산적 힘과 충돌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노동자들을 이 세계로부터 떼어놓고는 그들을 신학, 순수이론, 도덕 등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소외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종교가 노동자들을 이 세상에서 떼어놓는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노동자의 삶이 그가 일하고 있는 이 세계와 사회에 의하여 조건 지어지고 있으며 구체적으로 그가 관심하고 있는 물질적 조건에 의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그런 구체적 현실에서 관심을 돌리게 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마르크스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노동자에게서 땅에 속한 관심을 제거시킴으로서 그로 하여금 물질을 많이 벌어들이지 못하게 한다거나, 노동을 열심으로 안하게 한다는 그런 뜻에서가 아니다. 마르크스의 관심은 노동자들이 종교 때문에 초월적 질서와 가치에 탐닉한 나머지 구체적인 지상에서의 착취를 못 보게 되고 또 설령 보았더라도 그것을 적당히 보아 넘기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으니, 종교는 결국 노동의 소외를 일으키는 것임을 지적하려는데 있었다. 종교가 소외의 본질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기독교와 자본주의와의 특별한 관계를 더 깊이 다룸에서 확인된다. 마르크스의 다음의 글을 보자:

종교적인 세계는 진짜 세계의 반영일 뿐이다. 생산의 일반적인 사회관계가 생산자들이 그들의 정신노동을 같은 인간의 노동으로서 간주하는 거기에 존재하는 바, 생산품의 생산자들의 사회에 있어서는 기독교가 그것의 부르조아적 발전에 있어서 종교가 사회에 갖는 형태와 상응하는 형태를 갖고 있다. 즉 프로테스탄티즘이니, 유신론이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51)

기독교가 이미 자본주의 정신을 닮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사유재산 영역을 갈라놓고 자기가 생산한 만큼, 가지고 있는 만큼의 상품에 견주어서 사람들의 가치를 저울질하는 것처럼 기독교는 자체의 사유영역을 프로테스탄티즘이니 유신론이니 하는 정신적 선을 그어놓고 향유한다는 것이다.

펫차가 정확하게 관찰한 것처럼 "마르크스는 보다 훨씬 전에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정신 사이의 어떤 관계를 알고 있었다."52) 물론 마르크스는 그 영역의 관계를 그토록 정확하게는 기술하지는 않았으나 유비를 통해서 설명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자본주의가 돈의 기능을 매개로 하여 발전된 것처럼, 기독교도 그 모델을 따라서 그리스도를 매개로하여 조직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양자의 일치는 종교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에서 나타난다고 하였다. 종교는 이데을로기적인 특징을 갖는 다음의 두 가지 의미에서 소외된 관계를 신비화한다는 것이다. 첫째는 역사적으로 생성되는 관계들을 절대적인 관계들로 추상화하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개인과 사회의 소외를 신비화 하는 것이다. 종교는 바로 이와 같은 신비화의 기능을 통하여 현존의 현상을 그대로 옹호하고 있다는 것이고 그리고 오늘의 처참한 현상까지도 절대적인 관계로 추상화하여서 옹호한다는 것이다.

부르조아적 기독교는 자본주의적 사회 안에서 경제적, 역사적 실천(Praxis)에 적응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자연숭배 종교가 초기 역사의 단계에서 그 당대의 경제적, 역사적 실천에 맞추어 존재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이상에서 밝힌바와 같이 마르크스는 기독교 일반에 관해서 비판한 것이 아니다. 기독교와 자본주의가 상호 의존하여 민중들을 소외시키고 그 결과로 지배자들의 욕심을 연장시켜 주는데 대해서 비판하였다. 이론에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실천에서 기독교를 문제 삼았다. 그의 종교 비판은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근거하고 있다.

마르크스가 이해하고 있는 당대의 종교나 기독교는 전역사(Vorgeschichte)의 현상에 불과하다. 물질적이고 경제적인 조건 속에서 사회를 이루고 역사를 만들어가는 대중들에게 기독교는 적극적인 의미를 주지 못함을 그는 보았다. 오히려 기독교는 신비화의 기능을 통하여 노동을 소외시킴으로서 노동자들의 이익보다는 자본주들의 이익에 봉사한다고 그는 보았다. 따라서 소외가 없는 사회의 질서가 올 때는 프로레타리아들은 더 이상 기독교와의 관계를 맺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종교 거부는 그가 누누히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결코 이론에서가 아니고 현실에서이다. 마르크스가 종교에서 신을 빼버린 것이 아니고, 종교자체가 이미 참 신을 제거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진 자를 위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프로레타리아들은 자본주의에 고착하는 기독교를 거부하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종교에서 신을 빼버린 것이 아니다. 기독인들이 이미 신을 제거하고 신의 자리에 앉아서 약한 사람들을 지배하고 착취하였기에 마르크스가 그 가짜 초월을 강력하게 비판한 것이다. 그의 무신론적 공산주의 사상의 출발점은 노동에서 소외당하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자는 데에 있었다. 모든 노동자들이 신분에 관계없이 차별 없는 대우를 받으면서 당당하게 살도록 하자는 이른바 사회주의를 제창한 분이 칼 마르크스다 .

당시의 기독교가 갈릴리의 예수처럼 소외된 지역과 가난한 민중들을 돌보면서 예배하고 선교하였다면 마르크스는 그런 교회를 절대로 비판하지 않았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갈릴리 예수의 마음을 깊이 헤아린 분으로 평가를 받아야 할 분이다. 그의 무신론적 공산주의 사상의 출발점은 소외받고 무시당하는 사람들의 해방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갈릴리 예수가 목적했던 것이기도 하다.

끝내는 말

기독교를 비판한 마르크스의 사상의 뿌리에는 "사람"에 대한 존엄성이 있다. 철학, 정치, 경제가 사람을 위해 필요하듯이, 종교 역시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여야 한다. 남한의 기독교는 더 이상 특권층의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용되어서는 아니 되고, 사회적인 약자들인 노동자들이나 가난한 자들을 깊이 관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남반도의 기독교가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교회로 거듭나면 주체사상을 지닌 북의 동포들과의 만남이 쉽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더 이상 남한의 기독교가 마르크스가 알던 그런 기독교가 아님을 북의 동포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그때 북 반도를 예수의 복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남북의 평화통일이 이룩될 것이다.

(끝)

=====

[각주]

28) Ibid,P. 479
29) Karl Marx, “0n ReIigion, P. 41.
30) Ibid., P. 41
31) Ibid., p. 42.
32) Heinrich Heine, Saemtliche Werke,Vol. 8, P. 478.
33) Karl Marx, “0n ReIigion, P. 42
34) Juergen Moltmann, "The Revolution of Freedom: The Christian and Marxist Struggle", in Openings for Marxist Christian Dialogue, T. W. Ogletree(ed.)(NY: Abingdon Press,1969),p. 60
35) Karl Marx, Fruehe Schriften, p. 506
36) H. Marcuse, Vernunft und Revolution, (Neuvied, 1964), p. 229.
37) K. Marx, op. cit., p. 83.
38) W. Dirks, "Marxismus in Christliche Sicht," Frankfurter Hefte(Feb., 1947), p. 141.
39) K. Marx, On Religion, p. 84.
40) K. Marx, On Religion, p. 84
41) Marcel Reding, Der Politische Atheismus(Graz:Styria,1957) p. 351
42) Karl Marx, Fruehe Schriften, p. 605
43) 위의 책, pp. 593 -594
44) 위의 책, P. 561
45) 같은 책, p. 564
46) Marcuse, op. cit., p. 246
47) Marx, On Religion, p.71
48) Karl Marx, On Religion, p. 75
49) K. Marx, Die Frueheschriften, (Stuttgart, Koner, 1971), P. 358.
50) Ibid.. p. 74
51) Ibid., p. 75
52) I.Fetscher, Karl Marx and der Marxismus. p.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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