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달루니아(가우디와 축구)(2) - 예장뉴스
예장뉴스
생각 나누기지금 찾아갑니다.
까달루니아(가우디와 축구)(2)민중의 눈으로 본 서유럽 여행기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8.05.26  13:00:09
트위터 페이스북

까달루니아(가우디와 축구)(2)

<글 싣는 순서>

1. 로마와 바티칸
2. 까달루니아(가우디와 축구)
3. 프랑스 파리 개혁교회 
4. 스위스 개혁교회와 WCC 
5. 체코 형제교회와 얀 후스  

이탈리아 출신의 항해사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1484년 포르투갈의 주앙 2세에게 대서양 항해 탐험을 제안하고 지원을 요청한다. 하지만 당시 희망봉 루트를 준비 중이던 주앙 2세는 콜럼버스의 지원 요청을 허락하지 않았고, 콜럼버스는 자신의 후원자를 찾기 위해 에스파냐(스페인)로 향했다. 때 마침 에스파냐의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2세는 정치, 지리, 종교적 통일을 이룩하고 국가의 비상을 꾀하기 위해 해외 진출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콜럼부스는 1)기사와 제독 작위, 2)발견한 땅을 다스리는 부왕의 지위, 3)얻은 총 수익의 10분의 1일 등의 파격적인 요청을 하여 포르투갈에서와 마찬가지로 에스파냐(스페인)에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하지만 포르투갈 교회에 대한 경쟁의식으로 더 넓은 선교지를 개척해야 할 필요를 느꼈던 당시 스페인 교회의 성직자들은 콜럼버스를 대신해 이사벨 여왕을 설득했고, 결국 여왕은 콜럼버스를 등용하게 된다.

이사벨 여왕은 콜럼버스를 해군 제독에 임명하였고, 선박 2척을 지원하는 한편 항해에 참석하는 죄수들은 그 죄를 면죄한다는 조건을 걸어 승무원 모집에도 협력해 준다. 콜럼버스는 대서양을 서쪽으로 항해하여 현재의 바하마제도에 도착한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이 발견한 땅을 인도라고 믿어, 그 지역 원주민들을 '인디언'이라로 부르는 해프닝이 발생하기도 했다.

그로 인하여 아메리카 대륙이 비로소 유럽인들의 활동 무대가 되었고, 현재의 미국이 탄생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토대가 생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평가 된다. 하지만 그의 신대륙 발견 이후 일부 유럽인들의 침략적인 행위로 원주민들이 노예로 잡혀가는 등의 부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이것은 당대 유럽인이 가지고 있던 중요한 사명인 기독교 전파 혹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순수한 탐험만이 아니라 각종 향신료의 수입을 위해 얻을 수 있는 금과 보물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렇게 스페인은 한 때 세계를 지배한 해상국가로 오늘날 남미에 가톨릭를 전파한 국가가 된다. 모든 문명이 가장 먼저 지나간 스페인은 수혜자가 되어 문명과 예술의 꽃을 피웠는 데 바르셀로나는 이베리코산 돼지고기를 염장(살코기를 소금으로 절여 숙성시킨 후 햄으로 사용하는 음식)한 하몽이 유명하다. 도토리를 먹인 돼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식품이다. 또 순례자들의 오랜 명소인 산티아고도 프랑스에서 시작하여 스페인의 콤포스태라에서 마무리를 한다.

   

* 돼지고기를 염장 숙성시킨 하몽이라는 음식

바르셀로나가 세계적인 도시가 된 것은 아무래도 1992년 세계 올림픽 때문이다. 이때 마라토너 황영조 선수가 몬주익 언덕에서 금메달을 차지한다.  바르셀로나 시내에는 한인들이 약 500여 명이 살고 있는 데 유럽에서 이주한 교민들로 유학생들은 별로 없어 보인다. 한인교회는 10여 개로 그중 고신측 교회들이 주류인데 유럽지역의 선교사들에 의하여 세워진 것이다. 한국인 음식점도 성업 중이다. 특이한 점은 로마나 바르셀로나는 한인식당이라는 간판을 확실히 걸고 있는 데 비해 스위스나 체코에서는 코리아와 제팬 그리고 중국음식점을 혼용해서 운영하는 곳이 많았다.

바르셀로나는 정열적인 스페인의 제 2대 도시이지만 15세기 이전의 자치독립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지난 2017년 10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기도 했다. 까탈루니아 지역은 스페인 국내 총 생산의 19%를 차지하는 부유한 주이며 문화, 언어, 역사가 남다르다는 자긍심이 강하다. 지금도 까달루니아 광장에는 분리독립을 원하는 이들의 농성 텐트를 설치하고 있는데 세월호 리본과 비슷한 문장을 달고 있다. 시내 건물과 개인주택, 아파트에도 자유, 독립이라는 글귀와 까탈루니아 문장을 단 곳이 많다. 까탈루니아가 처음 독립을 시도한 것은 무려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인은 아라곤 왕국(현재 까탈루니아)의 페르난도 왕자와 카스티야(현재 스페인)의 이사벨 여왕의 결혼 동맹으로 현재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러나 아라곤이 카스티야에 사실상 합병되었고, 1714년 왕권 다툼 때 자치권을 완전히 빼앗기고 말았다. 그 후 1938~1975년에는 스페인의 독재정권인 프랑코가 까탈루니아를 수탈하고 고유 언어의 사용을 금지했지만, 이러한 탄압은 오히려 독립 의지를 불타게 했으며 탈루니아는 지금의 경제적인 문제까지 더해져 독립주의 성향이 훨씬 더 강해졌다.

탈루니아는 스페인의 17개 자치 중 하나로 스페인 북동부에 위치해 있다. 주 도는 바르셀로나다. 스페인 영토의 6%, 수출의 25.6%, 인구의 16%(약 750만명), 국내총생산(GDP)의 19%, 외국인 투자의 20.7%를 차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스페인 경제에서 가장 큰 비중이 높은 지역이다. 언어는 스페인어(카스티아어)와 매우 다른 탈루니아어를 사용해 언어와 문화 정체성이 스페인과 다르다. 관광업과 제조업 등이 주요 산업이다. 세계적인 명문 축구팀인 FC바르셀로나는 탈루니아의 자존심이자 자랑이다.

20세기 프랑코 독재 정부 하에서 ‘자치권’ 다시 박탈

1936년 발발한 스페인 내전에서 탈루니아는 공화파 쪽에 서서 프랑코가 이끄는 쿠데타 세력에 맞서 싸웠다. 1939년 프랑코의 승리로 끝났는데 프랑코 정부는 하나로 통일된 스페인을 위해 모든 지역 민족주의나 지역적 정체성을 근절하기 위한 강경책으로 일관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탈루니아인이 처형됐고, 감옥에 갇히거나 추방되었고 탈루니아의 자치권은 박탈되었다.

탈루니아어, 탈루니아 국기, 민속춤 등 탈루니아의 정체성을 이루는 요소들은 전면 금지되었다. 독재정권 아래서 탈루니아의 민족주의는 수면 아래로 잠복했다가 독재 말기에 억압이 느슨해지면서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때의 민족주의 운동은 문화적, 진보적 성격을 띠었다. 1975년 프랑코가 사망한 후 스페인은 민주화 과정을 거쳤다. 이 시기 민족주의 운동은 프랑코 독재의 유산인 중앙집권과 고유한 정체성과 자치권을 보장받고자하는 전통적인 자치지역들 사이에 갈등과 타협의 형태로 나타났다.

예술과 축구의 도시

스페인의 북동부로 프랑스 국경에서 남쪽으로 150㎞ 떨어져 있는 항구도시로 지중해에 면안 주요항구로 상업과 독특한 특성, 문화사업, 아름다운 경치로 유명하다. 이 지역은 베소스 강과 요브레가트 강 사이에 있는 비옥한 평야지대로 산으로 둘러싸여 기후가 온화하고 쾌적하다. 제조업·조선업·관광업을 중심으로 경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자동차·중장비기계·화학제품·섬유 공업은 탈루니아 지방 산업활동의 중추로 스페인 경제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다. 국제적인 금융 중심지로 이곳에 있는 증권거래소에서 거래가 활발히 이루어진다. 100개가 넘는 정기선이 바르셀로나와 세계의 주요항구를 연결하고 있다.

가로수가 늘어선 넓은 도로들로 이루어진 람블라스 거리가 옛 시가지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람블라스 거리의 북쪽은 상업지역인 탈루니아 광장까지 뻗어 있고, 남쪽으로는 파세오마리티모와 해안에 이른다. 북쪽에는 신시가지인 엔산체('확장'이라는 뜻)가 있고, 공업지역은 주거지역과 상업지역 너머에 펼쳐져 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된 구역은 작은 몬테타베르 언덕 위에 서 있는데, 로마 시대의 성벽 일부가 아직도 남아 있다.

1289년에 시작해 15세기 말에 완공된 고딕 양식의 바르셀로나 대성당에는 6세기에 지은 바실리카가 있으며 이밖에도 산타마리아델마르 교회를 비롯한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들을 볼 수 있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기리는 60m 높이의 기념탑과 1882년에 착공한 파밀리아(성가족교회) 등은 기념비적인 건물이다. 아직 완공되지는 않았지만 투각 세공으로 장식한 높은 첨탑이 돋보이는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교회는 탈루니아의 건축가인 안토니오 가우디가 설계한 건물 가운데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지금도 이 대한 건축물은 명소가 되어 많은 이들이 방문을 하고 있다. 조상이 남긴 위대한 업적을 후손들이 먹고사는 것으로 보인다. 그 외 스페인산의 자라(ZARA) 상표의 저가 의류브랜드와 세계적인 신발업체 캠버 등이 유명하다.

탈루니아어는 오랜 문학적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이 지역의 정치·사회·문화의 역사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바르셀로나대학교(1450)와 바르셀로나 자치대학교(1968)가 있다. 탈루니아에는 해마다 2천만 명에 가까운 관광객이 방문한다. 관광은 지역 총 생산의 12%이상을 차지하는 주요 산업으로, 탈루니아 지역 관광업 종사자는 약 40만 명에 이른다. 바르셀로나에는 특히 탈루니아 지역 출신 예술가들의 박물관들이 자리잡고 있다.

   
                                      * 피카소의 젊은 시절 활동지
피카소 미술관에서는 피카소의 유년기, 청년기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전시하고 있으며, 가우디 박물관에서는 안토니 가우디의 건축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호안 미로 미술관은 몬주익 공원에 있는데 호안 미로가 자신의 재산을 들여 설립했다. 바르셀로나의 재래시장 보케리아 시장은 바르셀로나 최대의 시장 거리이다. 탈루니아 지역 동쪽에 있는 바르셀로나 해변과 살바도르 달리가 여생을 보냈다는 브라바 해안 지역이 유명하다.

안토니오 가우디

아마도 가우디의 명성을 국제적으로 널리 알린 건축물은 바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즉 성가족 성당일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대표적인 이미지에는 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모습이 포함되기 마련인데, 그 규모가 워낙 크고 계획도 현대 건축물답지 않게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1-2년이면 건물을 ‘뚝딱’ 짓고 삼십 년 된 아파트는 당연히 헐어 버려야 마땅한 퇴물 취급을 하는 우리의 풍토와는 너무 다르다. 그래서 더욱 인상적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유럽의 성당 중에는 짓는 데만 몇 백 년이 걸린 곳이 허다한데, 역사 속의 사건이 아니고 현재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더욱 우리에게 강렬하게 다가오는지도 모른다.

1883년, 한 독실한 가톨릭 단체가 자신의 죄를 참회하는 신자들의 모금으로 가우디에게 성당 건축을 맡겼다. 한 해 전에 다른 건축가가 처음 설계를 시작했던 것을 이어받았는데, 이 작업은 가우디가 1926년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고 그 이후에는 다른 건축가들이 넘겨받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가우디는 처음에는 의뢰 받은 다른 일과 함께 진행해 오다가 1914년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만 매달렸으며, 심지어 성당 옆에 숙소를 만들고 그곳에서 일하며 살기까지 했다. 가우디는 본인이 살아 있을 때 성당 건축이 마무리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기도 했다. “내가 성당을 완성하지 못하는 것은 아쉽지 않다. 난 늙을 테지만 내 뒤를 다른 사람들이 이어갈 것이다. 작품의 정신은 항상 지켜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작품과 함께 살아가는 세대의 것이다.”

   
 
1926년, 그는 전차에 치여 심각한 부상을 입고 병원으로 옮겨졌고, 3일 후에 사망했다. 그가 눈을 감은 병원은 루이스 도메넥 이 몬타네르라는 또 다른 모데르니스모 건축가가 설계한 산타 크레우 이 산트 파우 병원(Hospital de la Santa Creu i Sant Pau)이었다. 이곳은 가우디가 그토록 열과 성을 다하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한 눈에 보이는 곳에 있다. 그의 유해는 성당 안에 묻혔으며 병원에서 성당까지 이어지는 길에는 그의 이름이 붙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에 도착하면 누구나 높이 솟은 탑에 눈길을 빼앗기게 된다. 직육면체도 원통형도 아니고, 꼭짓점이 뾰족하지도 않은, 타원형을 아주 길게 늘여 놓은 것 같은 탑이다. 예수의 열두 사도들에게 봉헌되는 열두 개, 복음서 저자들을 위한 네 개, 성모 마리아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하나씩 해서 모두 열여덟 개의 탑이 지어질 예정이라고 한다.

건물의 동쪽, 그러니까 연못이 있는 공원 쪽에 가까운 곳이 가장 먼저 지어 올리기 시작한 ‘예수 탄생’ 파사드다. 성당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가브리엘 대천사가 마리아를 찾아오는 수태고지 장면, 예수 탄생 장면, 동방박사와 목동이 경배하러 오는 장면 등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이 파사드 위의 탑 네 개 중 우리가 보기에 가장 왼쪽에 있는 탑이 성 베르나베(사도행전의 바나바)에게 봉헌된 탑인데, 가우디가 살아 있을 때 유일하게 완성된 탑이라고 하며 높이는 100미터에 이른다.

시간이 흐르면서 공사에 사용된 기술도 현대의 기술로 바뀌었다. 시멘트도 활용하지만 가우디 특유의 모자이크(트렌카디스(trencadÍs) 기법이라고 한다. 색유리나 도자기 등을 깨뜨린 후 붙이는 방식으로, 곡면에 모자이크를 제작하기가 좋다. 제작 방식은 계속 이어진다. 2010년에는 성당의 내부가 완성되어 교황 베네딕토 16세(Benedictus XVI)가 집전하는 봉헌 미사가 거행되었다. 성당 내부의 기둥은 마치 키가 큰 야자수가 줄지어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가우디가 별세한 지 백 년 되는 해인 2026년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한다. 1990년대에 이곳을 처음 보았을 때는 과연 그때가 오기는 하는 것일까 싶었는데 십 년 조금 넘게 기다리면 완성된 성당을 볼 수 있다니 묘한 기분이 든다.

FC 바르셀로나

1899년 11월 29일에 창립된 축구 글럽으로 같은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와 쌍벽을 이룬다. 레알이 왕립축구로 국가와 부유한 이들을 대변하는 클럽이라면 바르셀로나는 이에 대항하는 세계 최초이자 세계 최대 규모로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되는 축구 클럽이다. 1899년 10월 22일, 호안 감퍼는 로스 데포르테스 신문에 축구 클럽을 만들고 싶다는 광고로 시작을 하는 데 레알이나 다른 클럽들이 영국 선수들로 구성된 클럽과는 대별되는 자국 선수 중심의 클럽으로 출발한다.

   
                                              * 1899년에 창립된 축구 글럽
알려진 바로는 클럽의 색인 '블라우그라나'는 호안 감퍼가 FC 바젤의 엠블럼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감퍼가 뛰었던 다른 스위스 팀들과 잉글랜드 크로스비에 있는 머천트 테일러 학교도 자신들에게서 이 색깔이 유래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그 유래가 분명한 것은 아니다. FC 바르셀로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탈루니아 축구 챔피언십과 코파 델 레이에서 선전하며 스페인에서 가장 수준 높은 클럽의 반열에 올라섰다. 1902년에 바르셀로나는 코파 마캬야에서 첫 번째 트로피를 우승해서 들었다.

FC 바르셀로나에 적대적이었던 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 스페인 내전 직후 스페인에서는 탈루니아어와 탈루니아국기 사용이 금지되었고 스페인어가 아닌 이름을 가진 축구 클럽에 제재가 가해졌다. 이로써 FC 바르셀로나는 강제적으로 클럽 데 풋볼 바르셀로나(Club de Fútbol Barcelona, 줄여서 CF 바르셀로나)로 클럽 이름을 바꾸고 클럽 로고에서 탈루니아 국기 디자인을 삭제해야 했다. 요한 클로이프는 선수와 감독으로 호나우드는 잠시 머물렀지만 세계적인 축구신동 리오넬 메시는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선수이다.

[관련기사]

유재무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많이 본 기사
1
"한국교회 진단과 대안" 정성진 목사 초청 강연회
2
총회 산하 7개 신학대학교 교수 시국성명서 발표
3
이찬수 목사, 정말 아픈가?
4
102회 동성애 관련 총회 결정에 대한 긴급 제안서
5
“인성검사 통과 안 되면 목사 안수 못받는다”
6
김동호 목사 이미 은퇴한 목사아닌 가?
7
원주제일교회 성도들 주일 날 상경 시위
8
장신대 김철홍 교수 글에 대한 학생들 입장
9
명성교회 후임 청빙위원회 발표
10
개혁하는 교회 탐방(거룩한 빛 광성교회)
신문사소개후원하기기사제보광고문의불편신고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정책이메일무단수집거부
서울 성동구 성수동 성덕정 17길 10 A동 202호   |  전화 : 02-469-4402  |  행정 : ds2sgt@daum.net
정기간행물ㆍ등록번호 : 서울 아02054  |  발행인 · 편집인 : 유재무 |  대표 : 이명남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 진
Copyright © 2011 예장뉴스.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pck-good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