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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와 바티칸(1)민중의 눈으로 본 서유럽 여행기
유재무 기자  |  ds2sg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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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5.24  20:3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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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눈으로 본 서유럽 여행기(1)

<글 싣는 순서>

1. 로마와 바티칸
2. 까달루니아(가우디와 축구도시)
3. 프랑스 파리 개혁교회 
4. 스위스 개혁교회와 WCC 
5. 체코 형제교회와 얀 후스 

로마라는 이름이 한국인에게 새롭게 등장한 것은 ‘로마인 이야기’ 라는 제목의 5권 짜리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일본인 시오노 나나미의 덕이다. 그녀는 고교시절 '일리아스' 에 감명을 받아 가큐슈인대학 철학과를 졸업후 1964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기관에 등록하지 않은 체 자비와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 그녀는 1970년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로 알려진 체사레 보르자를 다룬 책으로 마이니치 출판문화상을 받았다. 이탈리아와 유럽,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등을 여행하며 직접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모든 저작을 집필한 것이다.

그중에 로마인 시리즈는 1992년부터 출간되어 2006년 15권으로 완결되었으며 이 작품으로 1993년 신초학예상(新潮學芸賞)을 수상했다. 1937년생으로 가쿠인대학(學習院)을 졸업했는 데 학생 운동 후 1960년 이후는 거리를 둔다. 시오노 나나미는 이탈리아로 건너 가서 공식적인 교육기관을 다니지 않고 독학으로 공부했고 이탈리아와 유럽, 북아프리카, 소아시아 등을 여행하며 직접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자신의 모든 저작을 펴냈다.

서유럽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에쿠니 가오리"  의 소설 “냉정과 열정‘(冷靜と情熱のあいだ) 사이라는 책의 배경이 된 이태리 베네치아에 유학 중인 젊은이들의  이야기에 두오모성당이 나오는 데 이것이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일본에는 이태리 관광이 크게 붐이 일게 된다.  지금도 그렇고 유럽은 EU통합으로 국경없이 교류했지만 아시아는 일본이 가장 먼저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얼마 전 ‘꽃보다 할배’라는 TV 연예 프로그램으로 배우들이 발칸를 방문한 이후 최근에는 ‘비긴 어게인’(포루투칼) 이 방영되어 서유럽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대한항공이 비교적 저렴한 가격으로 취항하고 있어 방문이 어렵지 않다. 현재는 우리나라 여행객들이 크게 늘고 있으며 중국인과 인도인들이 줄을 잇고 있다.

로마는 이탈리아라는 나라의 수도 이상의 의미를 갖는 도시이다. 우선은 로마 시내에 위치한 기독교 구교의 본산인 바티칸이라는 나라가 8억 종교인들의 정신적 본산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규모로는 세계 245개국 중가장 작은 인구 450명의 시국에 불과한데 전원이 신부와 수녀이기도 하다. 그리고 로마 이외에 나폴리나 배네치아, 톨레도, 세고비야, 시실리 등은 그 자체만으로도 많은 역사와 문화를 갖고 있는 도시들이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라는 말은 한 때 로마가 지배한 나라들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도시 국가가 그렇게 많은 나라들을 지배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정비된 법과 잘 훈련된 용맹한 군인들 그리고 직제와 체제와 더불어 도로 때문이라고 말한다. 상수로를 의미하는 수도교와 소위 Via라고 하는 로마가 만든 도로는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튼튼하게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명의 꽃 이면에는 수 많은 민중과 노예들의 노동이 기초 되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현재도 로마에는 성악이나 음악과 관련된 공부를 하는 한국인들이 상당하다고 한다. 대표적인 로마한인교회는 우리교단 목회자가 시무는 하지만 교파는 자유교단으로 미주한인장로교에 소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워낙 구교의 분위기가 강한 곳이지만 복음주의권의 개신교회도 상당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수 많은 해외 한인공동체들의 정착에 교두보 역할을 한 것이 한인교회들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로마는 현재 중국인들이 떼미나르역 주변의 건물들 1층에 무역과 판매를 겸하는 대규모 상가를 조성하고 있다.

로마가 조직한 군대의 전차와 기병이 빠르게 이동할 수 있도록  잘 정돈된  도로가 주전 3세기에 이미 8만 5천Km나 되었다고 한다. 이는 지구를 두 바퀴 돌고도 남는 길이로 주요한 나라들로의 진입과 문물의 유입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 길은 지면을 1-2m 파고 그 위에 모래와 자갈을 깔고 롤러로 다진 후 다시 작은 크기의 타일 돌을 깐 것으로 전 유럽의 도시가 이런 방식으로 되어, 현대의 아스팔트나 시멘트도로와는 다른 천연의 도로로 수천 년이 지난 오늘에도 그대로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d4wQlzfLFw8(토목공사)

거기다가 세계적인 명품의 대명사들인 구치와 페라가모, 아르마니, 프라다 그리고 영화 '로마의 휴일'에 등장하여 유명해진 베스파 오토바이가 유명하다. 특히 람보르기니라는 스포츠카는 완전 수동 제작으로 가장 고가의 자동차인데 모두 이탈리아에서 생산되고 있다. 그외에도 스페인, 나보나, 판테온 광장은 전형적인 광장문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이 점은 바르셀로나도 그렇고 모든 유럽의 도시가 큰 광장을 중심으로 조성되어 그 나라의 상징적인 역사와 인물들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체코의 바츨라프).

   
 
서양의 역사는 로마 문자도 그렇고 철학이나 문학, 예술과 법은 로마를 빼고는 논할 수 없을 것이다. 인류사를 통털어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고 그 유산과 자취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서구는 로마의 영향을 받지 않은 지역과 나라가 없다. 과거의 화려함에 비하여 지금은 관광국으로 전락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가톨릭 교회의 본산으로 연 천만 명 이상의 순례객이 다녀간다.

로마는 관문인 피우미치노 공항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 유명한 떼미나르(종착역이라는 터미날의 원형) 역에서 서유럽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각국으로 연결되는 유로 철도와 지하철, 대중교통의 중심인데  이 역은 다른 도시들과 연계하는 식이 아니라 끝까지 도착하여 로마 시내를 관통하지 않고 다시 나가는 구조다.  플랫홈은 너무 많고 복잡하여 당석에서 표를 구하여 타기란 쉽지 않다.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하는 데 영어로도 잘 설명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1시간 정도의 거리인 나폴리를 다녀오는 게 쉽지 않았다. 다른 도시에 비하여 지하철이 2개 밖에 없고 깊이 놓인 것은 도시 전체가 문화재를 보호하기 위하여 금한 것으로 보인다. 

로마의 조형물 중 가장 압권인 것은 역시 콜로세움인 것 같다. 서기 72년 베시파시아누스 황제가 시작하였고 그가 서거한 뒤 주후 80년에 완공되어 8년 만에 아들 타투스가 연 4만 명을 동원하여 완공한 원형 경기장이다. 원래는 인공 연못 자리에 흙을 채웠고 기초를 다지고 구들을 놓는 식으로 바닥을 덮고 그 위에 나무와 모래 흙을 깔았다고 한다. 1층의 수 많은 방에는 검투사들과 맹수들을 대기시키는 공간으로 연결되어 그 많은 관객의 출입이 뒤엉기지 않고 15분내로 출입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고대 로마의 뛰어난 건축 기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곳이다. 포로나 선발된 글레이에디터(검투사)들과 맹수들의 피비린 내 나는 사투를 즐기고 환호를 했다는 것을 보면 인간의 야만과 광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 된다. 건축 양식은 도리아식과 이오니와 코린트식 등 각기 다른 양식의 복합 양식으로 가장 위쪽인 4층은 햇빛을 가리도록 그늘막까지 설계 되었다고 한다. 지진으로 일부가 무너지자 시민들이 건축 자재로 가져다가 사용했다고 한다.

   
 
로마 바티칸 성당의 천지창조 천정 벽화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설계하여 그린 그림으로 유명하다. 이것을 보면 “민중의 힘은 위대하고 역시 예술은 길다” 라는 것을 느낀다. 인간이 이런 조형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 놀랍다. 아마도 지금도 그렇지만 이런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는 수 많은 노예와 엄청난 자금이 들어 갈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 성당의 완공을 위하여 교황청은 종교개혁의 포문을 여는 면죄부를 무리하게 판매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성당 안은 그야말로 휘황찬란하다. 이런 엄청난 성전 문화는 성경과 예수의 정신이 약해지면서 반대로 교권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구 교회는 교회 본연의 권위가 떨어지자 이런 외형적인 위용과 전례 등으로 민중들의 정신과 삶을 지배한 것이다. 어디에도 피에타 상 외에는 예수님의 모습이 쉽게 보이지 않는다. 큰 성당의 둘레에는 부유한 자들이 기증한 작은 성당들이 둘러있고 성인과 성상으로 가득 차 있다. 바티칸 정문에는 검을 든 바울 상이 오른 쪽에 천국의 열쇠를 든 베드로 상이 문지기로 서 있다. 그렇게 거대한 베드로 성당은 종교 권세가들의 연명과 위선자의 순례를 위한 상품이 된 것이다.

그러나 천주교가 종교개혁 이후 트렌트회의나 이후 특히 1, 2차 바티칸 공의회가 결정한 것들을 보면서 급격하게는 아니지만 진보하고 변화하였기 때문에 생존했다고 보인다. 특히 이전에 라틴어로만 집례되던 미사에서 각국의 언어를 사용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가톨릭의 기반은 크게 넓어진 것으로 보인다. 1891년의 레룸노바룸(Rerum Novarum)이라는 노동칙서도, 당시 공산주의 혁명으로 많은 나라들이 공산화되는 과정에서 노동의 의미와 청년들에 선교를 위하여 조셉 카르딘이라는 신부가 JOC(카토릭 노동청년회)를 만든 것도 모두 그런 일환이다.

베드로 성당은 원래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26년 베드로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에 성당을 세운 것에서 시작된다. 이후 1506년 율리우스 2세 때 120년간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등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의 손을 거치면서 여러 번 설계가 변경된 끝에 1626년 현재의 베드로 대성당이 완성된다. 내부는 십자가 모양이며 광장과 합쳐지면 열쇠 모양이 된다.

천국문의 열쇠를 상징하며 이는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교권의 상징으로 성당 곳곳에서도 그것을 볼 수 있다. 길이 211m 천장 높이 45.4m로 6만 명을 수용한다. 입구 오른쪽 구석에 미켈란젤로가 24세 때에 만든 Pieta가 있다. 중앙에 가장 크고 화려한 제대는 높이가 29m인데 교황만이 사용한다. 그 아래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 과연 인간이 만든 것인가 할만큼 웅대하고 장엄한 건물 중 하나이다.

이 성당의 첫 설계자는 1655년 베르니니였다. 그리고 광장을 둘러싼 284개의 회랑은 도리아식 원주와 88개의 각주 위에 142인의 성상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서 있다. 그리고 광장 중심에 37년 이집트에서 가져와 세운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네로의 경기장으로 쓰였고 여기서 베드로가 순교했다고 전한다. 이 광장은 약 30만 명을 수용하는 데 매 주일 12시경에 교황의 모습을 볼 수 있고 교황의 집무실이 있으며 성탄절 미사나 교황이 집전하는 미사가 이곳에서 열리기도 한다.

   
 
로마 교황청(바티칸)

세계 가톨릭교회의 총 본산인 바티칸(Vatican) 혹은 로마교황청(Curia; The Holy See)은 로마 시내에서 테베레 강 서쪽으로 약 20㎞가량 떨어진 로마시내에 독립된 작은 도시국가이다. 우리의 경복궁 넓이만한 사방 700m가 채 되지 않는 약 15만 평(0.44㎢) 정도 있다. 바티칸이란 지명은 ‘미래를 점치는 사람’이라는 라틴어 ‘바테스(Vates)’에서 유래되었다. 바티칸은 AD 1세기 칼리굴라 황제가 이곳에 로마인들이 즐기는 격투기 원형 경기장을 지었는데, 네로는 이 경기장에서 수 많은 기독교인을 죽였다. 67년 예수의 12제자 중 한 사람인 베드로를 비롯한 초기 기독교도들도 이곳에서 순교했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후 324년 이곳 베드로의 무덤으로 알려진 장소에 베드로 성당(Basilca di San Pietro)을 지었다.

이후 1천년 이상 가톨릭교회의 중심이었던 베드로 대성당은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건축가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에게 더욱 크고 화려하게 증축하게 했는데, 십자형 평면에 거대한 돔을 얹은 성당과 원형 광장에서 성당으로 이어지는 대각선 통로를 마치 열쇠 모양(Ω)으로 설계했다. 하지만 증축과 장식비가 부족하여 교황청이 면죄부 판매를 시작하자 뜻있는 신학자들은 베드로 성당의 엄청난 크기와 화려한 바로크 풍, 그리고 사치스러운 장식들을 비판하기 시작하였고, 보헤미아 출신으로서 카를대학의 총장을 역임한 얀 후스(Jan Hus; 1369~1415)가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다가 1415년 화형 당했으며, 그 100년 뒤인 1521년 독일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종교개혁을 주장하게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바티칸은 19세기 이탈리아가 통일 국가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한때 교황령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였지만 1929년 2월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교황청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교황 피우스 11세(1922~1939)와 교황청의 주권을 인정하는 라테란 조약(Lateran Concordato)을 체결함으로써 마침내 바티칸은 독립국가가 되었다. 오늘날 바티칸 시국(市國)은 성 베드로 대성당, 성 시스티나 성당과 궁전을 포함한 13개 건물 그리고 로마 동남쪽 약 120km 지점에 있는 교황의 여름 관저인 카스텔 간돌포(Castel Gandolfo)가 영토의 전부이고, 주민은 약 1천여 명에 불과하지만, 가톨릭교회의 성지이자 총 본산이라는 의미와 함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의 훌륭한 예술작품들을 전시하고 있는 세계 3대 박물관 중 하나이다.

로마 시내에서 지하철 A선을 타고 오타비아노(Ottaviano)역에서 내리면 바티칸인데, 베드로 광장 앞의 도로 위에 그어진 흰색 선이 이탈리아와 바티칸을 구분 짓는 국경선이다. 바티칸은 크게 성 베드로 성당과 시스티나 예배당으로 나뉘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사실상 한 건물과 마찬가지다. 베드로 성당과 시스티나 성당은 입장료가 무료이지만 바티칸 박물관은 어른 1인당 16유로, 대학생은 8유로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입장료 수입은 바티칸 교황청의 주 수입원이 되고 있지만 매월 마지막 주 일요일은 무료 입장할 수 있다.  현재는  스위스 출신 근위병들이 바티칸을 지키고 있고, 국방은 이탈리아에 위임되어 있다.

   
                                        * 미켈란젤로가 24살 때 조각한 피에타(Pieta)
베드로 광장(Piazza San Pietro)은 약 30만 명이 집합할 수 있는데 반달형 회랑은 대리석으로 만든 도리아 식 둥근 기둥 284개가 4줄로 서 있고, 그 석주 위에 140명의 성인과 순교자의 동상이 한 줄로 세워져 있다. 광장 한 가운데에는 A.D 1세기 칼리굴라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온 높이 25.5m, 무게 320톤에 이르는 오벨리스크가 있는데, 오벨리스크는 광장의 반달형 회랑과 함께 ‘잠긴 문을 여는 열쇠’의 형상으로서 베드로 성당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을 상징하며, 삼중관 아래 엇갈리게 배치한 열쇠 문양은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의 열쇠’를 뜻하며, 이후 교황을 상징하는 문양(文樣)이 되었다. 베드로 광장은 매주 일요일 교황의 집무실 창문이 열리면서 교황이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강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베드로 광장 정면에서 바라보면 광장 한 가운데에 오벨리스크, 그 양쪽에 2개의 거대한 분수대가 있고 그 뒤로 보이는 건물이 성 베드로 성당이다. 가로 137m, 세로 210m 크기인 베드로 성당은 1600년대의 마테르노를 거쳐 1626년 준공될 때까지 무려 100년 이상 걸리면서 당초 르네상스식에서 바로크 양식이 절충되었는데 1780년에는 천장을 금박으로 현관은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해서 종교성과 함께 역사성․ 예술성을 갖췄다. 오늘날 로마 시내의 모든 건물은 베드로 성당보다 더 높게 짓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다.

베드로 성당에는 예수가 지신 십자가의 파편, 땀을 닦았던 수건, 예수의 옆구리를 찔렀던 창의 파편 등 ‘3가지 보물’과 성당의 오른쪽 본당 첫째 기도실에 미켈란젤로가 24살 때 조각한 피에타(Pieta)가 있다. 피에타는 예수가 처형된 다음 십자가에서 내려진 직후 마리아의 팔에 안긴 모습의 조각상으로 미켈란젤로는 마리아의 슬픈 눈빛과 마리아의 품에 가로 안긴 채 죽어간 예수의 모습을 홍수에 빠져죽은 어린이를 안고 있는 이집트 어머니의 모습에서 착상했다고 하였으며 미켈란젤로의 서명이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그 밖에 성당 내부의 벽과 벽 사이에는 총 39인의 성인과 수도회의 창설자들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한편, 1471년 교황 율리우스의 삼촌 식스투스 4세(Sixtus Ⅳ)가 자신의 치세를 과시하기 위하여 지은 시스티나 성당(Cappella Sistina)은 사실 상 교황 개인의 예배당으로 구약성서에 기록된 솔로몬 성전의 크기인 가로 20m, 세로 40m의 장방형의 건물이다. 이 시스티나 성당에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등의 프레스코 그림이 있다.

천지창조는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6세의 명으로 글자를 모르는 문맹자들에게 기독교 교리를 알기 쉽게 가르쳐 주기 위하여 1508년부터 1512년까지 4년 6개월 동안 성당의 천정에 그린 그림이다. 미켈란젤로는 일반인은 물론 교황의 출입까지 막은 채 그림에 몰두하였는데, 물감이 온 몸에 범벅되어 피부병이 생기고, 오랫동안 고개를 뒤로 젖히고 천장화 작업한 탓에 목 디스크로 목이 굳어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교황 바오로 3세(Paulus III, 1468~1549)는 이미 60대인 미켈란젤로에게 다시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하였고, 미켈란젤로는 단테의 신곡(神曲)에 나오는 ‘최후의 심판’을 배경 삼아 7년 동안 14m에 성당의 제단 뒤 전체의 벽에 천국에 대한 인간의 갈망과 지옥의 공포를 그렸다.

그림은 모두 네 부분으로서 1부에는 천사들, 2부는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 12사도와 순교한 성인들로 이루어진 천국, 3부는 천사들의 나팔소리로 죽은 자들을 깨워서 심판받게 하여 천국과 지옥으로 가는 장면, 4부는 지옥의 모습인데 4부 그림 중 12제자가 순교할 때 처벌 받았던 칼이나 창 같은 도구를 들고 있는 그림 중 피부를 벗겨서 죽은 성 바돌로메가 들고 있는 피부 가죽에 미켈란젤로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자신을 괴롭힌 추기경 다 체세나(Biagio da Cesena)에 대한 복수심으로 추기경을 당나귀 귀에 뱀이 몸을 휘감고 성기를 깨물고 있는 지옥의 신 미노스로 그렸는데, 교황은 추기경의 얼굴을 지옥의 신으로 그린 것에 분노하면서 그림 어딘가에 미켈란젤로의 얼굴도 그려 넣도록 명령하자 그는 성 바돌로메의 찢겨진 피부에 자신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고 한다. 이것이 미켈란젤로의 첫 자화상이라고 한다. 참고로 미켈란젤로가 그린 그림은 모두 나체였지만 그 후 교황은 나체 그림들에 모두 옷을 입히도록 명령해서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BC 509년 공화정이 되었다. BC 375~275년 영토 확장을 통해 로마는 대제국이 되었다. 카이사르의 독재정치로 공화제가 무너진 뒤 BC 27년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원수정시대를 열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후 전제군주정이 들어섰다.   1420년 교황 마르티누스 5세 때부터 르네상스 중심 도시가 되었으며 교황의 절대권력이 1870년까지 계속되었다. 교황령 대부분은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었으나 로마만 제외되었다가 1870년 10월 국민투표에 의해 로마는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로마는 1920~30년대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현대적인 수도로 탈바꿈했다.

로마는 BC 375~275년 괄목할 만한 영토 확장을 이룩했고, 이는 오랜 세월 로마에 경제적인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BC 250년경 로마 시의 인구는 거의 10만에 육박해 있었으며 정복지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전리품은 신전·도로 건설과 수로 개량 등 각종 공공사업에 필요한 재원 마련에 큰 도움이 되었다.  로마인들은 BC 3세기 초에 이미 2개의 수로를 통해 깨끗한 물을 시내로 끌어다 쓰고 있었다. 주요 거리들이 포장되고 하수도 복개공사가 이루어졌으며, 포룸에는 몇 개의 커다란 바실리카와 새로운 상가가 들어섰다. BC 142년 테베레 강에 최초의 석조 다리가 놓였으며 BC 144년에는 수도교(水道橋)가 최초로 건설되어 로마 시 동쪽 산기슭 고지대에도 거주지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로마라는 도시는 노예 노동에 기초한 도시다. 더 이상 영토 확장과 노예 공급이 끊기자 급격히 쇠퇴하게 된 것이다. 그레디에이터라는 검투사나 노예들의 반란 등으로 제국의 영화는 끝장 나게 되고 이교로 치부하던 기독교를 승인하기에 이른다.  거기다가 로마 상류층의 사치와 타락도 로마 멸망에 한 몫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각지에서 들어온 공물과 전리품을 재원으로 해서 건설된 공공건물과 극장들로 로마를 아름다운 도시로 만들었지만 모두가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어주지는 못했다. 게다가 로마로 몰려드는 수 많은 이주민, 특히 동쪽 그리스로부터 몰려온 이주민들로 인해 심각한 인구문제가 한층 더 악화되었다.

   
 
도시의 멸망

1527년 신성 로마 황제 카를 5세가 이끄는 군대가 로마를 침략하면서, 르네상스 중심지로서의 명성은 끝이 났다. 8일 동안 수 많은 교회·궁전·가옥 등이 약탈·파괴되었으나 반(反)종교개혁을 부르짖는 교황청의 억압적인 통치 아래 로마는 다시 소생했다. 새로운 건설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교황 식스투스 5세(1585~90 재위)와 건축가 도메니코 폰타나에 의한 방대한 도시계획 사업으로 정점을 이루었다.

1600년에 이르러 로마는 다시 번창한 대도시가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황청 업무와 기타 관련 서비스업에 종사할 기회를 찾아 몰려들면서 인구는 10만 명을 넘어섰다. 17, 18세기에 들어 로마의 명문가들은 화려한 대저택을 짓고 예술을 후원하는 한편 고위 성직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애썼다. 최고의 성직자인 교황을 배출한 가문은 부와 명예를 한 손에 넣을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부정과 뇌물수수가 공공연히 이루어지면서 유럽과 교황령들에서조차 교황과 로마의 권위는 그 영향력을 잃어갔다.

1798년 나폴레옹 군대가 처음으로 로마를 점령하고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러나 로마와 교황령은 1809년 프랑스 제국에 합병되었다. 1814년에는 교황이 로마에 복귀했고, 이후 오랫동안 억압과 반동의 시대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레오 12세와 그레고리우스 16세는 교육제도를 개선하고 새로운 공중목욕탕과 건물들을 세웠다. 재임 초기에 개방된 자세를 보였던 교황 피우스 9세(1846~78 재위)는 1848년 입헌제를 허용했으나, 1848~49년에 있었던 혁명 이후에 강경 보수주의자로 돌변해 프랑스의 지원을 등에 업고 교황의 세속권력을 지키고 로마의 현대화를 막기 위해 전전긍긍했다.

교황령의 대부분은 1861년 성립된 이탈리아 왕국에 합병되었으나 로마만 제외 되었다. 가리발디 장군이 1862년과 1867년에 시도했던 로마 점령은 실패로 끝났고, 이탈리아군은 피우스 교황을 지원하던 프랑스 수비대가 철수해 버린 뒤 1870년 9월 20일 로마에 입성했다. 그해 10월의 국민 투표에 의해 로마는 통일 이탈리아의 수도가 되었다. 교황은 정부의 화해 제의를 거절한 채 스스로를 바티칸에 갇힌 죄수라고 칭하면서 버텼다. 이러한 상황은 오랫동안 지속되다가 1929년 피우스 11세와 무솔리니 사이에 라테라노 조약이 체결되어 바티칸 시에 대한 교황의 주권이 인정되면서 해결된 것이다.

로마의 인구는 1870년 이후 급증해서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50만 명을 넘었고, 1930년에는 100만 명이 넘었다. 거주 지역은 사상 처음으로 옛 성벽에 둘러싸인 고대 로마시 너머까지 확대되었다. 1920, 1930년대에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정권 하에서 넓은 새 도로와 웅대한 건물들이 들어선 현대적인 수도로 탈바꿈했다. 무솔리니는 고고학적 발굴을 장려해 수많은 옛 로마의 유적들을 발견·보존하는 데 기여했다. 20세기를 통하여 로마는 거대한 행정·관광 중심지가 되었으나 다른 대도시들과 비교해볼 때 여전히 산업과 상업은 미약한 편이다.

무솔리니와 파시즘

초등 교사 출신 이탈리아의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1883~1945)는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함께 20세기 초 유럽을 비정상적인 광기(狂氣)로 몰아넣었던 독재자였다. 그는 스위스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면서 사회주의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논리적인 이론으로 대중을 설득하기보다는 과격하고 감정적인 연설과 글, 격정적인 몸짓으로 사람들을 사로잡은 선동가로 이탈리아 사회당 기관지인 '아반티(전진)'의 편집장이 된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무솔리니는 이탈리아의 참전(전쟁 참여)에 반대하는 논조로 글을 쓴다.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이 자본주의 국가들 간 영토 야욕 때문에 시작된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영국·프랑스 등 연합국 편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기로 하자, 갑자기 입장을 바꿔 참전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결국 그는 사회당에서 제명 당하고 편집장도 그만 두게 된다. 이에 무솔리니는 '포폴로 디탈리아(이탈리아 인민)'란 신문사를 세우고 우파적 주장을 펼치는 글들을 게재하기 시작한다. 원래 이탈리아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할 의사가 없었다. 하지만 전쟁이 가열되자 동맹국(독일·오스트리아 등) 측과 연합국(영국·프랑스 등) 측은 이탈리아 같은 중립국들을 경쟁적으로 포섭하기 시작한 것이다. 19세기 말에야 겨우 통일 국가를 이뤄낸 이탈리아는 연합국에 가담하지도 못한다. 유럽의 다른 나라들과 달리 해외에 거의 식민지를 갖지 못했던 이탈리아는 그 대가로 일정한 영토 보상을 받기로 한다.

전쟁은 연합국 승리로 끝이 났지만 이탈리아는 전쟁에 기여한 점이 미미하다는 이유로 당초 약속 받았던 영토 중 일부만 보상받는 등 상대적으로 푸대접을 받았다. 그렇게 되자 이탈리아 국민들 사이에선 국제사회에 대한 불만과 과격한 민족주의 열기가 높아지고 있었다.  결국 1919년 이탈리아 총선에서 전쟁 후 혼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자유주의 정당들이 패배하고, 사회주의 정당이 가장 많은 의석을 차지하게 되고 점점 커져가는 사회주의 세력과 정치·경제적 불안 속에서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앞세운 파시스트들이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1919년 무솔리니는 정권을 잡기 위해 이탈리아 내 극우 세력들을 모두 모아 '파시 디 콤바티멘토(전투단)'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이탈리아어로 '묶음'을 뜻하는 이 '파시(fasci)'에서 바로 '파시즘'이라는 단어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들은 검은 셔츠를 입고 손을 위로 올리는 로마제국식 경례를 하는 등 열렬한 민족주의로 무장하고 독일처럼 청년 계층까지 흡수하며 광범위한 대중 정당으로 개편에 성공한 국가 파시스트당은 신문사를 습격하는 등 폭동을 일삼으며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반 파시스트 정치인들을 공격하였다.

이 과정에서 무솔리니의 선전·선동 연설이 큰 힘을 발휘한 것이다. 결국 1921년 총선에서는 사회주의 정당이 138석, 파시스트당이 35석을 얻었다. 당시 사회주의 정당이 사회당, 공산당, 통일사회당으로 분열돼 있었기에 주도권은 파시스트당에 넘어가게 된다. 파시스트당 지도자로서 정치적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무솔리니는 1922년 10월 28일 '검은 셔츠단'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켰고 당시 국왕이었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가 무솔리니에게 총리직을 제안하면서 무솔리니의 쿠데타는 이틀 만에 성공을 거두어 마침내 10월 30일, 세계 최초의 파시즘 국가인 '무솔리니 내각'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후 무솔리니는 언론을 탄압하고, 노동조합을 해체하며, 파시스트당 외 모든 정당을 폐지하는 등 강력한 독재 체제를 구축한다. 또 고대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1935), 파시즘 세력을 확대하겠다며 스페인 내전(1936~1939)도 관여한다. 또 독일과 일본에 이어 1937년에는 국제연맹까지 탈퇴하며 국제 질서에서 노골적으로 벗어나게 된다.

전체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고 폭력을 정당화한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놀랍게도 민주주의적인 선거를 통해 이뤄진 것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따라서 현재 우리나라의 보수 정당들을 지지하는 국민들 정서의 일단을 엿볼 수가 있다. 언제나 과거로부터 교훈을 배우며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계할 필요가 있는 대목이다.

* 스페인 내전
1936년 2월 스페인에 사회주의·무정부주의자들이 힘을 합친 ‘인민 전선 정부’가 세워지자, 군부가 이에 반대하며 반란을 일으킨다. 독일·이탈리아는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반정부군을 지원했고, 소련은 인민 전선 정부군을 지지한다. 내전은 점차 정부 측에 불리하게 돌아갔고 1939년 3월 수도 마드리드가 함락되면서 반정부군이 승리를 거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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